광화문글판 2023년 여름편 : 가을 들
20230909
광화문교차로 교보생명 빌딩의 광화문글판이 2023년 가을편으로 새로이 단장되었다. 이번 글판의 문안은 신달자(1943~) 시인의 '가을 들'에서 가져왔다.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
이번 문안은 가을걷이가 끝난 뒤 모든 것을 새롭게 키워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빈 들판처럼 끊임없이 비우고 채우는 삶을 살아가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가을 들판을 비우고 채움의 의미로서 바라보고 우리 삶을 끊임없이 새롭게 키워내자는 의미로 글판의 문구를 선정한 것이다. 나는 수확이 끝난 뒤의 가을 들판은 부모님의 마음 같다는 생각이 언제나 든다.
가을 들녘을 걸어가면 들녘은 풍요롭다. 풍요의 들녘에 마음은 풍성해지고 그 풍성함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부모의 마음이 된다. 정성과 사랑으로 키운 자식들이 제 스스로 더 큰 성취를 이루어 세상 벌판에 우뚝 서 있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감사와 자랑이다. 그렇지만 부모는 자식들을 둥지에서 떠나 보내야 한다. 추수한 뒤의 가을 들판은 텅 빈 허허벌판이 된다. 그 모습은 성장한 자식들이 모두 떠나간 뒤의 부모의 마음처럼 보인다. 바람 부는 가을 빈 들판을 걸어갈 때의 마음은 부모의 그 고적한 마음을 보는 것 같다. 그 빈 들판에서 바람으로 들려오는 소리, "너희 아비와 어미는 괜찮다. 이제는 너희들이 새 아이들을 더 잘 키우고 더 크게 성장시켜 풍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겪은 설움, 너희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했고, 너희의 장래가 더 아름다운 세상이기를 바라며 노력했다. 이제,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앞에 놓여 있다. 너희 자식들인 동시에 우리의 후손들이 더 나은 세상, 더 아름다운 세상에서 성장하고 평화의 세상을 개척해 나가도록 너희는 다시 힘써야 한다."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을 젓고 있다. 그 자리로 나 또한 갈 것이고 저 모습으로 내 아이들에게 소리할 것 같다.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하고 다시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극도로 예민해진 저 종이 한 장의 고요
바람도 다소곳하게 앞섶 여미며 난다
실상은 천 년 인내의 깊이로 너그러운 품 넓은 가슴
나는 것의 오만이 어쩌다 새똥을 지리고 가면
먹물인가 종이는 습자지처럼 쏘옥 빨아들인다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
다 받아 주는데도 단 한 발자국이 어려워
입 닫고 고요히 지나가려다 멈칫 서 떨고 있는 초승달.
-신달자(1943~)의 '가을 들' 전문
충무공 동상, 세종대왕 좌상, 광화문, 청와대, 북악산이 일렬로 보인다.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이런 넉넉한 종이가 있나 - 신달자(1943~) 시인의 '가을 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