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춘 의병장은 자(字)를 태영(泰英), 호(號)를 퇴사재(退思齋),
본관은 청안(淸安), 고려 검교태보시랑(檢校太保侍郞)
충원공(忠元公) 양길(陽吉)의 후손이다.
장기현(長鬐縣 ; 지금의 포항시 구룡포읍, 장기면, 대보면 동부,
동해면 상정리·중산리·공당리를 포함하는 지역)의 현감 ‘이 기’의 증손이며,
홍원현감 광보의 맏아들로
중종 35년(1540)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입실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응춘 의병장은 명종 21년(1566)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오위부장(五衛部將)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입실리(入室里)로 낙향하였다.
이후 공(公)은 지역의 지식인들과 교우하며 임진왜란 2년전인 선조(宣祖) 23년(1590)에는 불국사(佛國寺) 법영루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시회(詩會)를 갖는 등 유사시를 대비하였다. 선조 25년 4월 왜적이 침공했을 때는 아우 우춘(遇春), 봉춘(逢春)과 아들 승금(承金),
종질 삼한(三韓 ; 判官), 눌(訥 ; 領將)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니
뒤따르는 사람이 들끓었다. 동월 23일 개운포로 상륙하는 왜적을 이언춘, 윤홍명,
장희춘 등 의사와 합세하여 크게 격파하고, 이어 동해안의 ‘공암(孔岩)’으로 달려가
적을 격파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암(孔岩)’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의
법정동인 신명동을 말한다. 경주시 양남면과 경계하는 해변마을이다.
이응춘 공은 또 1592년 5월14일에는 영천 창암전투에 참전하여 적을 무찌르고,
5월 29일에는 의병을 이끌고 다시 ‘공암(孔岩)’으로 진을 옮겨 침투해 오는 왜적을
방어하였다. 동년 6월 9일에는 ‘문천회맹(汶川會盟)’에 가담하여 왜적의 소탕을
다짐한 후 동년 9월8일 경주성을 탈환하였고, 적의 재침을 막기 위해 개운포를 지키다가
9월 21일 선도산 전투에 참전하여 적을 무찔렀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천(汶川)은
지금의 경주시 탑동지역으로 신라 혁거세(赫居世)의 능으로 알려져 있는 오능(五陵) 지역을 말하기도 하고, 형산강의 지류인 ‘남천(南川)’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옛적에는 ‘남천(南川)’을 ‘문천(汶川)’이라고도 했는데, 그 까닭을 잠시 소개한다.
경주시내의 형산강 지류에서 가장 큰 가닥은 ‘서천(西川)내’ 줄기다. 서천의 한줄기는
토함산에서 흘러내려 ‘사등이내’를 이루고, ‘수남’, ‘원들’, ‘양지버들’, ‘갯들’을 지나
옛적 내동면(內東面)과 경주읍성의 남으로 흐른다 해서 ‘남천(南川)내’라 부른다.
‘남천내’를 ‘문천(汶川)’이라고 한 것은 이 개울에 ‘모래’가 유난히 많다는데서 연유한다.
‘모래’가 많아 당시의 경주사람들은 사투리로 ‘몰개’가 많다는 뜻으로 ‘남천’을 ‘몰개 내(沙川)’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한양 양반들이 경주에 와서 시를 지을 때 주민들에게 들은 ‘몰개’ 또는 '몰개이'의 운률이 ‘모기’ 즉 ‘모개이’라는 것 같이 들리자 이에 맞춰 한자로 ‘모기 문(蚊)’자를 써서
‘남천’, 즉 ‘몰개내’를 ‘문천(蚊川)’이라고 명명해 버렸다. ‘모래’가 ‘모기’로,
‘몰개내’가 ‘모기내’, 즉 ‘문천(蚊川)’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느 시기부터 이 ‘蚊川’을 물이 흐르는 시내라는 점을 감안하여 ‘汶川’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응춘을 비롯한 외동읍의 의사(義士)들이 모여 회맹(會盟)을 한 곳은
탑동(塔洞)의 '문천'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뒷 파일에서 소개하지만, 이응춘 공의 종질인 개곡리 출신 '이눌'공이 이응춘 공의 지휘하에 경주성 공략을 위해 진을 친곳 중 한 곳이
계림이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탑동의 '문천'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경주시 외곽을 감도는 문천(남천)
회맹(會盟)’이란 옛적 중국에서 여러 나라 사이 또는 제후간(諸侯間)에 맺는 동맹 또는
그때 행하는 의례(儀禮)를 말한다. 한 나라의 읍과 읍 사이 또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그 나라나 읍의 대표자들이 모여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약속을 정하고
맹세를 한 의례로, 특히 춘추전국시대 때 제후국 사이에서 성행하였다.
이때의 의례(儀禮)는 각 대표가 한 장소에 모여 소(이를 ‘희생(犧牲)의 소’라 한다)를
잡아 귀를 자르고 그 피를 서로 받아 마시며 약속을 하늘에 알려 맹세하고
그것을 서류로 만들어 ‘희생의 피’와 함께 땅에 묻는 것이다.
주(周)나라의 경우 왕도(王都)를 동천(東遷)한 후 기존지역의 세력이 약해지자 실력 있는 제후국이 회맹을 관리하는 맹주가 되었다.
춘추시대에는 회맹의 맹주가 되는 것이 패자(覇者)의 필수조건으로,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계구(癸丘)의 회(會)’에서,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천토(踐土)의 맹(盟)’에서 각각 맹주의 지위를 확보, 패자가 되었다.
이때의 ‘회(會)’와 ‘맹(盟)’이 합성되어 ‘회맹(會盟)’이라는 말이 탄생되었고,
이 말과 의식이 600여년이 지난 159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행해진 것이다.
전국시대 때 회맹은 강국으로 부상한 진(秦)나라에 대한 공수동맹(攻守同盟) 형태로 나타났다. 회맹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한 때는 진(秦)과 한(漢)의 통일국가가 성립되기까지라고 볼 수 있다. 1004년 송(宋)나라와 요(遼)나라 사이에 맺어진 ‘전연의 맹’ 등은 회맹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응춘 공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2월 태화강으로 침투하는 적을 이여랑, 최봉천, 윤홍명, 박인국 등 의병장과 합세하여 대첩을 거두는데 공헌하고, 곧 불국사로 진을
옮겨 울산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였다. 동년 10월 29일에는 태화강 사수를
다짐하는 구강동고록(鷗江同苦錄)에 서명하고, 선조 27년(1594년) 10월 9일
개운포(開雲浦)에서 적의 대병력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응춘(李應春)공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하자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하고,
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錄勳)하였다. 이응춘의 전공과 시호(諡號)와 관련된 내력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왕조실록의 관련기사를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