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실험
건축 유산 미스터리
피사의 사탑이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로 인식되는 까닭은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가 자신의 운동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사탑의 종탑에서 공 두 개를 떨어뜨렸다는 전설 때문이다. 갈릴레이가 물체의 낙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로 피사 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던 무렵이다.
갈릴레오가 설계한 군사 나침반실험적 검증에 의한 과학을 추구한 그는 근대적 의미의 물리학을 시작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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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이론,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 낙하에 대해 무거운 것은 빠르게, 가벼운 것은 느리게 낙하한다고 생각하였다. 쇠공이 솜덩이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지구의 인력과 공기의 저항력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만약 공기의 저항력이 없다면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동시에 떨어질 것이다.
공기가 없는 진공 중에서의 낙하에 대해서는 그의 생각이 옳았다. 이것은 ‘역학적 에너지 보존 법칙(위치 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합인 역학적 에너지 총량은 항상 일정하다)’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위치에서의 운동에너지는 0이고 위치 에너지는 mgh(m: 질량, g: 중력가속도, h: 높이)인데 가장 낮은 위치에서는 위치 에너지가 0이지만 운동에너지는 1/2mv2(v는 속도)이다. 역학적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므로 1/2mv2 = mgh에서 질량이 각 변에서 사라지므로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는 물체의 질량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무거운 물체나 가벼운 물체나 낙하 속도는 같기 때문에 두 물체를 떨어뜨리면 동시에 땅에 떨어진다.
그러나 당시에 진공을 만든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갈릴레이의 제자 토리첼리가 이른바 ‘토리첼리의 진공’을 만들었는데 이는 갈릴레이가 사망한 다음 해인 1643년의 일이다.
수은기압계의 옛 모습수은기압계는 토티첼리가 만든 진공의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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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갈릴레이는 공기 저항의 영향은 가벼운 물체에서 더욱 크게 나타나므로 무거운 물체끼리를 비교하면 그들은 거의 동시에 낙하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갈릴레이는 1590년 어느 날 약 55.8미터 높이인 피사의 사탑 7층 회랑에서 납으로 만든 직경 10센티미터 공과 떡갈나무로 만든 공을 동시에 가만히 놓았다. 납으로 만든 공의 무게가 2배이므로 과거의 이론에 의하면 납으로 만든 공이 2배 빨리 떨어져야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군중은 두 공이 공중에서 함께 나란히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똑같은 시각에 지면에 떨어지는 단 한 번의 소리를 들었다. 당시까지의 이론이 틀렸고 갈릴레이의 주장이 옳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갈릴레이의 낙하 실험갈릴레이는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는 공의 무게와 관계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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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이 유명한 실험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실험이 왜 일어나야 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중력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이든 힘이 없으면, 즉 끌든가 밀든가 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석은 쇠를 끌어들이지만 이 둘 사이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력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에 학자들은 두 물체 사이를 연결하지 않고도 영향이 미치는 또 다른 힘, 즉 중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중력에 관한 지식은 전쟁에서 대포가 쓰이게 되면서부터 대단히 중요하게 되었다. 포탄이 공중을 어떻게 날아가는가를 자세히 연구한 학자들은 포탄에 작용하는 힘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화약의 폭발로 생기는 힘으로 이 힘이 폭탄을 공중으로 높이 쏘아 올린다. 또 다른 힘은 포탄을 지구 쪽으로 당기는 힘으로 이 힘 때문에 포탄이 계속 날아가지 않고 지면에 떨어진다. 이 힘을 중력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갈릴레이가 중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피사의 사탑에서 공개적으로 실험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엄밀한 의미로 보면 피사의 사탑은 그가 말한 낙하 실험을 하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피사의 사탑은 55.8미터나 되며 그 당시에도 피사의 사탑은 연직선으로부터 4미터나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설은 사실이 아니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물체의 낙하 실험을 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갈릴레이 자신도 자신의 저서 『신과학 대화』에서 그런 실험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더구나 그 당시의 실험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기록도 전혀 없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학자인 갈릴레이가 공개적으로 실험했다면 그것은 당시에 매우 주목을 끄는 실험이 되었음이 틀림없고 누군가가 자신의 목격담을 적었을 텐데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은 갈릴레이 실험을 부정하는 주된 근거가 된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갈릴레이가 당시 파도바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피사의 사탑은 현재 중심축으로부터 약 5.5도 기울어져 있다. 최대 높이는 58.3미터이며 무게는 1만 4,453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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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두 개의 납공을 떨어트려서 실험한 인물은 갈릴레이가 아니라 네덜란드인인 사이먼 스테빈(Simon Stevin)이다. 그는 1587년 부루헤스에 있는 자기 집 2층 창문에서 무게가 다른 두 개의 납공을 떨어트리는 실험을 했다. 스테빈은 뛰어난 군사 기술자로서 네덜란드의 육군 경리감으로 복무하고 있었으므로 포탄의 낙하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유럽 수학계에 10진법을 도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갈릴레이가 낙하 실험을 했다는 이야기는 갈릴레이의 제자인 비비아니가 쓴 갈릴레이 전기에서 처음 나온다. 비비아니는 갈릴레이가 1590년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 실험을 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비비아니가 스테빈의 실험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갈릴레이의 전기를 집필하면서 갈릴레이가 피사 사탑에서 낙하 실험을 했다고 고의적으로 가필한 것으로 믿는다. 존경하는 갈릴레이를 위해서 스테빈의 업적을 차용했다는 뜻이다. 물론 갈릴레이는 낙하 실험의 결과를 예견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무게 1파운드나 200파운드 대포의 탄환과 소총의 탄환을 200큐빗(1큐빗은 영국 단위를 사용할 경우 대체로 18인치)의 높이에서 동시에 떨어트리면 포탄이 총탄보다 한 뼘도 먼저 지면에 닿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런데 과학은 엄밀성을 요구한다. 갈릴레이의 실험은 1978년 아들러와 쿨터에 의해 재현되었는데 결론은 갈릴레이의 주장과 달랐다. 두 사람은 똑같은 크기의 나무 공과 쇠공으로 실험했는데 쇠공이 나무 공보다 더 빨리 땅에 닿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두 공 사이의 속도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속도와 무게의 비례 이론은 물론 갈릴레이가 주장하는 동시성도 정확하지 않았다. 공기저항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산타 크로체 교회에 있는 갈릴레이의 무덤ⓒ stanthejeep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