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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광성
한낱 날벌레라,
하루살이라 부르지만
누가 저처럼 빛을 향하여
온몸으로 온 생을 바쳐 투신해본 적이 있는가
사는 동안에는 그렇다 쳐도
죽어서마저 빛에 안기리라,
빛을 무덤 삼으리라
가로등 등피 안에 제 주검을 묻었다
자해라 할지 모르겠으나
열망의 과잉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향하여 죽겠다는 신념도 없이는
그저 가만히
저 날벌레의 상아탑을 올려나 볼 일이다
단 하루라 할지라도
굴광성의 저 한 생애가,
그리고 죽음이 갸륵도 하여
이 한밤 가로등은
금환일식처럼 무덤 둘레에
빛무리를 후광으로 둘러주었다
접목 椄木
늘그막의 두 내외가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어느 한 쪽은 뿌리를 잘라낸
다른 한 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 지도 몰라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또 어느 칼날에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 몰라
더듬더듬 허공에 길을 내고
그 불구의 생을 부축하다보니 예까지 왔을 게다
이제는 이녁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제 뿌리까지 환해지는,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이녁이 몸살을 앓는,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
돌담
오래된 이 마을 골목길 돌담
저도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믿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몇 구비는 비뚜름하다
그러나 무너지는 순간까지는
윗돌, 아랫돌 그리고
곁엣 돌 서로 단단히 얽혀서
담으로 서 있고 싶을 것이다
돌은 돌에 지나지 않으므로
손잡고 몸 포개어 돌은 비로소 돌담이다
무너지고 싶은 순간이 또한 없었으랴만
윗돌, 아랫돌 너를, 그리고 그를 보아서 이웃들을 보아서
앙다물고 한 세월 버텨왔을 것이다
그 사연이 이 마을 유래담 같아서
돌의 얼굴들이 돌이끼로 늘 푸르다
그래 술 취한 누군가가 오줌을 눌 때 가려주기도 하고
오래 기다림에 지친 사람에게 어깨를 빌려주기도 했을 것이어서
돌담의 표정은 뉘의 연애담처럼 곡진하다
무엇보다 돌담은 틈이 있어
그 틈으로 돌담을 돌담이게 한다
엉성하고 허술한 돌담은 그 틈에
애기똥풀을 기르기도 하고
담쟁이덩굴에게 곁을 내주고
생쥐 가족에게 집을 세 내주기도 한다
언젠가는 그 틈으로
남해의 큰 바람이 찾아왔다가
고요히 잦아들기도 하여
버티면서 그리고 조금씩 무너지면서
돌담은 또 어느 무용담처럼 야젓하기도 하는 것이다
쭈글쭈글
잊고 지내서
상자 속에서 쭈글쭈글 쪼글아들어
이제는 어쩌지도 못할 감자 몇 개
물 한 방울 흙 한 줌 없이
제 피와 살을 온통 짜내어
싹을 키웠나보다
저 싹, 싹아지
제 어미의 살 속에 빨대를 박고
세상을 향해 먼저 고개 내밀겠다고
저 아우성이라니
저 질긴 악연을 언제 어디서 본 적이 있다
홍삼엑기스 한 상자를 내밀자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디
얼마나 더 살겠다고,
죽을 때 숨만 질겨진다고
너나 갖다 먹어라 한사코 되돌려주는 그
쭈글쭈글 감자껍질 같던 손,
그런다고 되받아 돌아오는 차에 챙겨넣던
힘줄도 굵던 아들, 그 싹, 싸가지
바라보며 흐뭇한 듯
웃음 피워물던 그 쭈글쭈글
종료
꺼진 휴대전화는
종료를 눌러야 다시 켜집니다
아예 ON, OFF를 하나로 축약해 놓은
그 무엇의 은유인가요
끝내기 위해서도 종료를 눌러야 하지만
시작하기 위해서도 종료를 눌러야 합니다
무엇의 끝이 무엇의 시작임에야
실은 종료 한 마디 속에 다 있습니다
출구와 입구가 원래 하나였던 것
앞 쪽에서 열린 문이 뒤쪽에선 닫히기 마련입니다
무엇의 종료로 꽃이 집니다
무엇의 종료로 그 자리에 새 한 마리 날아와 앉습니다
꽃과 새 사이에
왔다 가는 그 모든 것에종료의 문이 하나 있겠거니 생각합니다
군불을 때면서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면서
쓰다가 버린 파지를 불쏘시개로 쓴다
쓰다가 고치고 쓰다가 고치다가
원본에서 멀어져버린
시 한 편을 위해
사생아처럼 버려진 종이들
누추하고 불구인 것들
그렇다고 완벽하지도 못한
시 한 편의 알리바이를 위해
소신해야 하는 내 시의 과거들
제 몸에 불 붙여
포개놓은 장작에 불길을 옮겨 일궈주는 밑불,
그래서 시 몇 편보다
저 수많은 파지가 더 시답다
진입해 보지도 못한 중심에서 밀려나
지금은 구겨진 파지처럼 주저앉아
하릴없이 군불이나 때지만
나 여기 있어 모두에게 얼마나 다행인가
파지들이 일구어내는 불빛에서 온기에서
내 생의 원본을 읽는다
공양
우리 집 복순이가 새끼를 낳았다
태를 뒤집어쓰고 탯줄을 늘어뜨린 채 태어난
새끼를 핥는다
핥아서는 태를 벗기고
탯줄을 씹어서 먹는다
먹는다 제 몸의 일부였던 것
내가 보기엔 한낱 오물에 불과한
피와 양수가 범벅인 그것을
흔적도 냄새도 남지 않게
먹어치운다 개는
새끼의 똥마저도 먹어치운다
천적에게 새끼의 흔적을 들키기 않게 하려는
모성본능 때문이라고 들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이 개보다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나는 어머니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데나 똥 싸고
시도 때도 없이 짖어쌓고
내가 심은 꽃을 마구 뭉개어서
무척이나 구박 당하던 복순이에게
오늘은 고깃국에 미역국에 거하게 공양 올렸다
꽃잎 발자국
무색 명주 같이
얇은
눈 위에
영혼이 나비 같은
어느 짐승의 발자국,
꽃잎 같다
햇볕 들자
그나마
눈 함께 흔적 없다
사라져 더욱 향그러운
꽃잎 발자국이
내 생의 규모를 묻는다
들키다
무심코 지나가다
주차된 승용차에 몸이 스치자
도난경보기가 운다
너무 과민하다 기계를 원망하기도 전에
가슴이 덜컹 얼굴에는 붉은 등이 켜진다
들킨 것 같다
장사를 한 것도 아니면서
늘 손해 보지 않으려 한 것도,
빈손으로 왔으면서도
이리 많은 것을 걸치고 있는 것도
많이 훔쳤다는 증거는 아닐까
밑지겠다는 다짐도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 보면
어쩌면 나는 필시 도둑놈인지도 몰라
나는 아니라는 듯 표정을 바로 하고
천천히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왔지만,
나를 쳐다본 많은 사람들도
그래 너는 차도둑은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무심한 척 하지만,
그대들도 나도 공범이라는 생각
현행범이라는 생각 지울 수 없다
다 안다는 듯
내 뒷모습에 대고 도난경보기는 울어쌓는다
겨울 궁남지
저 수 천 평 연밭에 연꽃은 자취도 없고
허리가 휘어지거나 무릎이 꺾인 꽃대궁
마른 꽃대궁이 마이크 같다
한 바탕 유세를 부린다
나도 한 때 꽃 피운 적 있노라고
홍련 백련 꽃이었던 적 있었노라고,
이제는 구멍 숭숭 벌집 모양
그야말로 벌집이 되어버린 자궁만이
자랑처럼 남아있다
그래, 자궁이지 궁이고 말고
구멍마다 칸칸이 연의 씨앗이 담겨 있어
씨앗 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다면 믿겠나
저 씨앗을 연밥이라 부르느니
모름지기 수 천 평 연밭을 일구고 먹여 살린
밥이라 하는 것이 저 궁에서 나왔느니
진흙땅 젖은 늪 저승이라도 두렵지 않던 홍련
백련 왼갖 잡련 들이
한 빛깔로 저무는 적멸보궁
무슨 고요가 이리도 소란스럽다
겨울 궁남지*엔
신경외과 대기실에 모인 어머니들처럼
다산多産의 무용담 왁자하다
유세 부릴 만하다
*궁남지 : 부여읍에 있는 연못으로 백제 무왕 때 축조된 것이라 함. 주위에 수 천 평의 연밭이 조성되었음
합일
그 희고 눈부신 소식을 그냥 받을 수 없어서
처음 오는 눈을 제 체온으로 녹여
몸을 씻고,
더운 몸을 식혀
눈의 몸에 온도를 맞춘 다음에야
바위는
온 몸으로 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개한테 배우다
동네 똥개 한 마리가
우리집 마당에 와 똥을 싸놓곤 한다
오늘 마침 그 놈의 미주알이 막 벌어지는 순간에 나에게 들켜서
나는 신발 한 짝을 냅다 던졌다
보기 좋게 신발은 개를 벗어나
송글송글 몽오리를 키워가던 매화나무에 맞았다
애꿎은 매화 몽오리만 몇 개 떨어졌다
옆엣놈이 공책에 커다랗게 물건 하나를 그려놓고
선생 자지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킥킥 웃었다가
폐타이어로 만든 쓰레빠*로
괜한 나만 뺨을 맞은 국민학교 적이 생각나
볼 붉은 매화가 얼마나 아팠을까 안쓰러웠다
나도 모름지기 국가에서 월급 받는 선생이 되었는데
오늘 개한테 배운 셈이다
신발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고,
매화가 욕을 할 줄 안다면
저 개 같은 선생 자지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꿈에 나비를 보다
꿈에 나비를 보았다
보통 나비보다 열 배는 더 크고 화려한 색채로 물들여진 나비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군가 오색 한지에 나비를 예찬하는 시를 적고 한지를 날개 모양으로 오려서 나비의 날개에 접착제로 붙여놓았다. 나비는 제가 가진 색깔보다 화려하고 제가 가진 날개보다 훨씬 큰 날개로 있는 힘을 다 하여 날고 있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엔 이미 기력을 다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꿈에 장주를 보았다
무심풍경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참, 새, 잎이네요
잎도 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안쓰러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앉으며
작은 발의 온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어느 먼 데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가 그러든지 말든지
참새는 참 열심히도 떠들어 댑니다
모른 체 하고 그 아래 고양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 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 갑니다
연말인데 벌써 몇 개월 전화 한 통 없는 친구에게
한 바탕 욕이나 해줄까 했다가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수작을 지켜보며
이 한나절에 낙관 꾹 눌러
표구나 해뒀으면 싶었습니다
처방전
필시 난치이거나
불치이거나 중병인 내 생을
어찌 할까 묻는데
겨울 바래봉은
해발 1200고지의 상고대를 펼쳐보인다
발가벗고도 모자라
허공의 습기를 다 끌어모아서
영하 수십 도의 밤 찬바람을 제 몸에 휘감아
나목들이 제 사지를 얼려 피운 꽃이라니
그리하여
오늘 아침 저 자해공갈단 같은
상고대 스승한테서 들은 법문은
엄살피우지 말라는 일갈이었다
전지剪枝
튼실한 가지 몇 기르겠노라고
매실나무 가지를 잘랐다
전지가위를 들었으나
신처럼은 전지全知하지 못하다
병든 가지, 부실한 가지
아니다 싶은 가지를 자르다 보면
잘려나간 가지에도 꽃눈이 맺혀있어
낙태의 기억처럼 아득한 울음소리도 듣는다
가지 없어진 허공에서는
환상통처럼 또 통증이 맺히고
없는 꽃이 피기도 했다
그 울음과 아픔을 먹고
남은 가지 암팡지게 자라서
잘려나간 것들의 몫을 다 할까
다음 세상을 애써 믿지 않고서는
가지 하나 자를 수 없겠더라
오늘 나는
전화번호 몇 개와 주소 몇 개
그에게로 가는 길 몇 가닥도 함께
모질게 전지하면서......
직립
취기가 덜 풀린 내 출근길
앞 차, 트럭에 실려
황소 한 마리
굽이굽이 여원재 넘고 있다
차가 커브를 돌 때마다
아차, 균형을 놓치고 무릎을 꿇는가 싶더니
애써 일어서 버팅긴다
차라리 평소 풀밭에서 그러하듯이
네 무릎 꺾고 앉으면 편할 텐데
한사코 일어서 버팅긴다
때론 긴장을 놓아버리려 술을 마시고
마신 김에 균형마저 놓아버리려
함부로 무릎을 꺾던 내 중년에게
보라는 듯 일어서
살아있음의 위의를 묻는다
저승이 가까워오면 사람이 그렇듯이
항문이 열려 된 똥 한 무더기 쏟고
그 큰 눈망울에 물기 흥그렁한 걸 보니
이 길 끝에 무릎을 놓는 그곳이
저승임을 아는 모양이다
다만 실려가긴 하지만
제 한 몸은 제가 끌고 가겠다는 듯
더운 김 푹푹 뿜는 동안은 고깃덩이는 아니지 않느냐고
소는 버틴다
곧은 뿔 앞세운 그 직립의 자세가 결연하다
슬픔에 대하여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 보았니?
깜깜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켤 때
엄마가 잠시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듯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
눈이 상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눈을 열어주는 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
그렇게는 또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이 슬픔은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인가
기도
그 깜깜한 먼 허공이 얼마나 무서웠길래
저 진창의 지상이 얼마나 두려웠길래
눈송이는 그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붙잡고 안도하고 싶었을까
그 위태로운 선택이
그를 눈꽃이라 부르게 했다
지상의 모든 꽃은 그래서
제 몸에서 가장 먼 곳에 저를 피운다
심지어는 없는 길을 내어 허공에
꽃을 피우는 덩굴도 있잖은가
하느님이 들여다보고 들어주시는 기도는
제 뿌리도 제 몸도 모르는
머언 세상에 피우는 꽃이라서,
그 극한에서도 머언 하늘에 피우는 꽃이라서,
저 눈송이처럼
그 끝에 매달리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서,
하 아름다워서,
당신이 애초에 만드신 그 모습이어서......
나를 더 위태롭게 하소서
배 과수원에서
아니, 저 발칙한
온 천지 배꽃
배꼽
다 드러내놓고
암술수술 무성한
그것도 다 드러내놓고
흘레붙는
그 고요로운 소리에 달빛이 달다
남자인 내가 다 회임하겠다
쳐다만 봐도 배 불러오겠다
쑥갓꽃
텃밭 한 구석에
어머니 쑥갓꽃 피웠다
“씨앗 받을라고 일부러 꽃 피게 냅뒀다.”
신 말고도 꽃 피우는 이가
세상에 또 이렇게 있다
여든여섯 노구가
지팡이 위에 쑥갓꽃으로 예쁘다
섬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이슬
거미줄에 매달린
수정 염주
누군가
밤하늘 흩어진 별들을 골라
꿰어놓느라
수고로웠겠다
금식의 이 아침이
거미는 섭섭하지는 않겠다
막막한 날엔
왜 모르랴
그대에게 가는 길
왜 없겠는가
그대의 높이에로 깊이에로 이르는 길
오늘 아침
나팔 덩굴이 감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길
아무도 눈치재지 못할 속도로
꽃은 기어올라
기어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비밀한 소리들을
그러나 분명 꽃의 빛깔과 꽃의 고요로 쏟아놓았는데
너와 내가 이윽고 서로에게 이르고자 하는 곳이
꽃 핀 그 환한 자리 아니겠나 싶으면
왜 길이 없으랴
왜 모르랴
잘 못 디딘 덩굴손이 휘청 허공에서 한번 흔들리는 순간
한눈팔고 있던 감나무 우듬지도
움칫 나팔덩굴을 받아낸다
길이 없다고 해도
길을 모른다 해도 자 봐라
그대가 있으니 됐다
길은 무슨 소용
알고 모르고가 무슨 소용
꽃피고 꽃 피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허공에 길을 내는
저기 저 나팔덩굴이나 오래 지켜볼 일이다
손톱을 자르며
톱을 활처럼 휘어 놓고
바이올린을 켜듯이 톱을 연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는 톱에 새겨진 나무의 울음을 불러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톱질을 하다보면 듣는다
나무가 운다
나무를 베어내고 나면
해를 두고 제 가던 길을 마저 가려고
잘리우고도 봄이면 다시
안간힘으로 밀어올리는 여린 싹
그 푸른 울음을 기억한다
톱인들 그 울음을 기억하지 않겠는가
나무를 자르다가 문득
놓치듯 톱을 놓고 보니
손톱
발톱
애초부터 내 사지가 톱이었음을
내 온몸이 톱이었음을 깨닫는다
얼마나 많은 것들의 길을 나는 잘라왔을까
할퀴고 베어버렸을까
며칠 새 길어난 손톱을 자른다
날 선 톱날들을 자르며
내가 할퀸, 자른, 걷어차버린 인연의
길 잃은 푸른 울음들을,
오래 울어야 할 까닭을 나는 지금 보고 있다
나비
온전히 펼쳤다가 접는데 한 생애가 다 걸린다는 책이라고 한다 그 한 페이지는 하늘의 넓이와 같고 그 내용은 신이 태초에 써놓은 말씀이라고 한다 벌레의 시간과 우화의 비밀이 다 그 안에 있으나 장주도 그것이 꿈엣 것인지 생시엣 것인지 알지 못하고 갔다 하니 내가 무엇을 더 보태어 말하랴 꽃과 더불어 놀고 꿀과 이슬을 먹고 산다 하는 전설도 있다 지금 내 앞에 페이지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저 책을 보고 천박하게도 내 곁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 한 여자의 생을 떠올리고 어깨를 들먹이며 잠시 흐느꼈으니 필시 저 책이 나를 들었다 놓은 것이다 책이 나를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 책이 얼마나 크고 두꺼운지 가히 짐작만 할 뿐이다
아주 오래 된 풍경
모르게 모르게 기어올라
감나무 밑동을 한번 휘감더니
이제 우듬지까지
덩굴이 올랐다
오늘 아침엔 몇 송이
두런두런 피어,
피었는데 저 꽃 핀 풍경에
가슴 한 켠이 겨자 먹은 듯 애릿하다
니가 그랬다
처음엔 덩굴손 한 줄기였을 뿐인데
나또한 거기에 내 굳은살 같은 데를
조금 내어주었을 뿐인데
무슨 액체가 서로를 적셔서
상처에 붙어버린 붕대만 같을까
가만 보니
감나무는 목 졸려 고사하며
웃고 있다
눈물마저 피마저 고름마저 빨아먹고
웃는 웃음이 꽃이라는 듯
생과 사가 한 가닥으로 일주문을 이루었다
이제 능소화를 지우려면
감나무를 뽑아야 한다
너를 지우려면
나를 통째로 뽑아야 하는
미술 시간은 끝났는데
다시 그리려 해도 어찌해볼 도리없는
부추 이야기
우리 집 맞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노 보살님 한 분 사시는데
텃밭에는 없는 채소가 없다
내 좋아하는 것을 어찌 아셨는지
벌써 몇 번째 햇부추를 솎아다 주시었다
부추, 정구지라고도 하고 솔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또 파옥초라고도 한다는데그러니까, 집을 부수는 풀이라는 뜻이렸다
- 그 옛날 아낙네 둘이서 밭을 매는데 한 아낙네가 남편이 밤을 무서워한다고 하니, 듣던 아낙네가 부추 몇 포기를 캐어 주면서 이것을 길러 남편에게 반찬으로 해주면 금슬이 달라질 거라고 했다나 아니나 다를까 그리 했더니 잠자리가 확 달라지더라는 것이었겠지 아낙네는 자기네 마당에 가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멀쩡한 집까지 부수고 그 터에 무장무장 가꾸었대서 그 이름이 바로 이 파옥초 아닌가
벌써 중복을 넘어서는데
누구는 홍삼을 먹네 장뇌삼을 먹네
무슨무슨 보약을 먹네
부실한 중년을 보수한다는데
오늘도 나는 부추무침에 그냥 그 밥이겠다
아내가 살짝 밉기도 하였지만
이 아침 텃밭 매시는 노 보살님이 그리 밉지는 않았다
아침
새벽비가 늙은 감나무 잎사귀 하나하나를
다 씻어놓으니
감나무는 잎사귀, 잎사귀 제 귀마다에
햇살에 말갛게 헹군 첫 꾀꼬리소리를
가득 -
한가득 쟁여 넣는지
잎사귀 그 둥근 귓바퀴에
무슨 보석 귀걸이인 듯 이슬방울이 찰랑찰랑하다
이제 늙은 감나무는 열예닐곱 청춘처럼
어디 뵈지도 않는 꾀꼬리소리와 머언 먼 태양에게도
푸른 손을 흔들어 뵈는데
저들의 수작에 어쩌자고 나는 끌어들여서
늙은 감나무 잎사귀를 다 채우고도 그대로 남은
저 햇빛 범벅 푸른 우주의 음률을 내 두 귀 가득 채우는가
내 뇌혈관 맑은 실핏줄까지가 아릿하고 또 말갛게 틔어오는데
그 바람에
여보, 뭐해 찌개가 졸아서 다 타잖아
어쩌고저쩌고
이른 아침 듣는 아내의 지청구도 꾀꼬리 소리만 같았다
거미
거미는 가끔 부유하는 먼지나 걸려드는
구석진 허공에 그물을 건다
미풍에도 쉬 찢어지는 그물을
깁고 손질하며
적빈을 맨몸으로 견딘다
탈피라고 하던가,
그나마 야윈 제 몸의 껍질을 벗어던지며
해탈을 기도하듯
그 바람 허공에 저를 묶어놓고
매달려 밤을 밝힌다
허공에 살면서 날개가 없는 까닭은
제 그물에 제가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날개를 가진 것들은 그 허망한 꿈 때문에
늘 그물에 걸리곤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보라는 듯
제가 잡은 것들의 날개를 땅에 되돌려준다
거미는
걸어놓고는 몇 번 쳐다보지 않은 우리 집 가훈 액자 위에
동심원의 그물로 집을 지어놓고
우주의 중심이 바로 여기라고 일러주듯
그 한 가운데에 마침표처럼 앉아있다
내가 가끔 이 놈의 집구석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구석도 구석진 자리에
매화는 똥이 아니다
오늘 처음 알았다
궁중 언어로 똥을 매화라 한다는 것을,
똥을 누고는 매화를 보았다고 한다는 것을
서민과 궁중 사람들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똥과 매화의 거리가 아득하여
도저히 그랬을 성 싶잖은데
동음이의어인지는 모르되 사전에 버젓이 나와 있다
얼마나 구렸으면 똥을 매화로 여기고 싶었을까
반어적 사고라고 생각하자 해도
궁중 사람들은 정말 똥을 누면
매화꽃이 피고 매화향이 그득했을까 싶기도 하다
똥을 매화라 불렀다면
그러면 매화를 똥이라 불렀을까
매화를 똥이라 부른다면
늘 똥 싸놓고 매화타령만 하는 그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성은이라고는 개떡도 받아본 적 없어도
마당가에 매화 한 그루 꽃 피우면 그 향기에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 운운
지존지 절갠지를 뼛속까지 새겨넣던
꼬장꼬장한 조선팔도 딸깍발이들이며
억조창생들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매화를 똥이라 부른다면
똥거름을 먹고도 청하늘빛 향기를 빚어내는 매화들은
억울하지 않겠는가
아참, 먼 궁중에서나 쓰던 말이라 했지
오늘 나에겐 똥은 똥이고 매화는 매화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오동나무 천년늙었으나, 노래 항상 숨어 있고
매화 늘 추위속에 서 있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신흠(申欽/1566~1628)
푸르른 욕
팔순의 울 어머이
터앝 고추모종에 물을 주심서나
하난님은 뭐 하신댜
호랭이가 칵 물어갈녀르 날씨
무신 가물이 이리 질댜
그 욕, 하도나 싱싱헤서 청량헌 시 한 편이 따로 없드랑개
날씨는 하난님 것이어서
하난님도 놀랐는지 아칙녘 지나서 뜬금없는 비 한 둘금 뿌려주등마
하난님도 무신 진지꼽쟁이 매이로 비를 뿌레도
포도시 삐액이 눈물맨큼만 주시네
참, 옘벵 오살헐.......
울 어머이 서늘헌 욕 덕택에
가매솥에 깜밥 눌데끼 몰라가던 밭두덕
어린 고추모종들이
섬닷헌 대로 알탕갈탕 일어서덜 않았것어
가물 끝 울 어머이 따다주신 그 풋고추에
내 빈혈의 쎄끝이 얼얼허등마
어디 가서 시 쓴다는 말 못 허것어
<한국시인협회편-방언시집>
<천관산에 있는 남근석-다른 자료실에서 퍼왔습니다.>
천관산 등행
만원 회비 내고
관광버스 타고 와서 천관산 등행이다
바다에 발목을 잠그고
머리는 북쪽으로 둘러
저를 밟고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내하며 용서하며
산은
그 무슨 기암괴석들을 제 근육에 얹고
인욕바라밀 인욕바라밀 묵상 중이다
천관산 억새밭을 지나며 김형이 농담했다
복형, 억새밭에서 해 봤어?
그래, 그래봤으면 원이 없것다
말을 받으며 억새밭을 걷는데 때 아니게
내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이 산에 아름답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외간여자랑 와봤으면도 싶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당신 생각밖에 없었노라고
산엣 일 잊고 아내를 끌어안겠지
그렇기도 하다는 듯
산은
그럴싸히 양근석 하나 세워 퍽큐를 해보인다
저 기암괴석 몇 개를
아직도 날뛰는 내 사념과 잡념의 관절 위에 얹어놓고 싶다
인욕바라밀 아, 인육바라밀
문 밖에서
흰두사람 죽으면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을 한다
밤새 타고 남은 재를 강물에 쓸어넣기 전
한 무리 불가촉천민들이 재를 뒤적인다
사리를 수습하는 줄 알았다
그게 그러니까
죽은 자의 시신에 박혔던 금이빨이나 금가락지를 찾는 거라고 했다
힌두의 삶을 묶고 있는 거대한 쇠사슬을 보았으나
죽은 자도 유족도 말 없고
저 불가촉천민들도 아무 말 없다
이렇게 관망하고 생각하는 나는 객일 뿐
그 날도 갠지스강은 말없이 흘렀고
사람들은 그 물에 목욕하고 마시고
소 떼들은 어제처럼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거리를 활보하였으며
소똥은 말라서 그들의 연료가 되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죽은 자의 재가 다시 산자의 밥이 되는
아니, 재와 밥과
똥과 기름의 경계가 없는 여기서
그들이 아니고 객으로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오히려 저들이 내 가슴에 둘러진 쇠사슬을 볼지도 모른다
갠스강 강물위에 떠서 연신 셔터를 눌러대면서
나만 어느 고리에서 이탈하여 홀로 문밖에 서 있는 듯싶어
문득 소름 돋도록 외로웠다
신생-여름
경배
누렇게 늙은 청둥호박을 땄다
줄기에서 떨어진 자리에
한동안 진물이 흐른다
다 늙도록 젖을 먹이다 떼어놓는
저도 결별이 아쉬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 시드는 호박 넌출은
호박의 탯줄인 셈인데
뉘 집 아들과 같은 호박을
안거나 머리에 이거나
두 팔로 안아 들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그것이다
거실 한 쪽에 놓고 겨울을 나자니
우수 지날 무렵 호박 밑둥에 물이 고였다
물러져 무너지기 시작한 아, 거기
새끼 붕어 같은 한 됫박 호박씨가
욜랑욜랑 양수를 헤엄치듯 박혀있다
그러니 이것들을
왔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지 아니할 수 있나
옛 호박 구덩이 자리에
군데군데 호박씨를 묻고 온 날
그런 나를 굽어다 보며 웃는 푸른 낮달에
합장하고서 하느님, 부를 뻔하였다
목련 후기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 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시작노트>
목련이 지는 모습은 어찌보면 지저분하다. 피어날 때의 아름다움과는 대조적이다. 생각해보면 희망사항일 뿐 지는 꽃이나 사람이나 마지막은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다. 적어도 외모는 그렇다. 그러나 그만큼 지독한 열정으로 타올랐다는 증거는 아닐까? 목련이 진다. 커다란 비늘이거나 상처에서 떨어진 피딱지 같다.
저 피딱지처럼 지는 꽃잎이 목련이 뿜어냈던 순백의 열정의 증거라면, 내게도 피딱지가 앉아서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증거할 그런 사랑으로 타올랐던 기억이 있었나. 있었다면 아, 아직은 더 붙안고 오래 앓고 싶다.
계간 <꿈> 여름
멸치똥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릴 적에 똥마저 버렸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박힌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에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들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향하여
그래도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등뼈 곧추세우며
누누천년 지켜온 배알이다
<문장07-5>
마늘촛불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가운데에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내 비유법이 좀 과하다 싶기도 하지만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삼겹살 함께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문장07-5>
빚
한 걸인이 다가와
내 발에 손을 얹었다가 다시 제 이마에 가져다가 댔지
경배의 뜻이라고 하네
실은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누더기 옷에 덕지덕지 땟물이 흐르는 불가촉천민이라네
그러나 그대여 알고 보면 이 나라에선 외국인인 나도
사성에 들지 못하는 똑 같은 불가촉천민이라네
그런데 경배라니
나는 외면했네
내 지폐는 너무 고액권이었고
몰려들기 시작한 그대들은 너무 많았으므로
외면한 내 눈엔 희고 눈부신 힌두사원이 눈에 들어왔고
그 풍경이 스치며 가슴에 깊은 칼금을 그었네
어떻게 왔는가는 말할 수 있지
비행기 타고 왔고 그 이전에 어머니 탯줄을 타고 왔지
하지만 왜 왔는가는 알 수 없었지
언젠가 다시 와야 한다면
그땐 한 마디 더듬거리며 말할 수 있겠네
나 그대를 외면하여 복 짓지 않았고
그대 나 같은 불가촉천민에게 경배로 복 지었으니
다시 어느 세상에서 만나거든
이제 내가 그대 발에 입 맞추겠노라고,
그대, 싯타르타일지도 모를
<재미시인협회>
여시아문
인도 뭄바이 새벽 세 시
가로수 잎사귀가 낯설고 신기로워
늘어진 가지를 붙잡고 가만 만져보는데
그가 말했다
인도에선 밤에 나무를 손대지 않는다고,
왜냐고 내가 묻자 영어에 서툰 나를 위하여
영국식 영어로 천천히 말했다
나무가 잠을 자잖아요.
<재미시인협회>
나마스테
나마스테라는 말이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경배합니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코끝이 찡하고 나를 울렸다 내 안의 신이 나를 깜짝 깨웠기 때문이다 3억3천만의 신이여 그 신들이 부르는 또 3억 3천만의 신이여, 그 신이 부르는 또 다른 3억 3천만의 신이여 모든 그대여 신이여나마스테!
<재미시인협회>
자벌레
오체투지, 일보일배다
걸음걸음이 절명의 순간일러니
세상에 경전 아닌 것은 없다
제가 걸어온 만큼만 제 일생이어서
몸으로 읽는 경전
한 자도 건너뛸 수 없다
<문학수첩07봄>
자벌레
숙제와 폐타이어
숙제장 노트를 엎어놓은 듯한 슬레이트 지붕위에
폐타이어 몇 개 놓여있다
그렇지 삶은 숙제이지
저 작은 지붕 아래도 풀어야 할 문제는 잔뜩 쌓여서
때로는 새벽까지 불이 밝았다
그래서 지아비가 다시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나가고
지어미는 그보다 먼저 까만 비닐봉지에
두부를 사들고 들어가 찌개를 끓였을 것이다
그래 잘 풀었다고 선생님이
착한 아이 숙제장에 그려준 동그라미처럼
하느님이 동그라미 대신 폐타이어를 올려놓았을지도 모르지
가끔은 냄비가 뒹굴고
흐느낌 소리가 마당귀를 적셨으나
요란하게 풀 문제도 있긴 하는 거라
숙제를 잘 풀긴 하였던지
이번 태풍에도
지붕 끄떡없다 폐타이어 몇 개
저 수레 같은 집 한 채 끌고
이 밤도 어느 하늘 향하여 가려는지
창에 다시 환하게 불이 켜지고
거기에 응답하는
누구의 미소인가 하늘엔 눈썹달
<문학수첩07봄>
가시나무엔 가시가 없다
참나과에 속하는 가시나무엔 가시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시나무라 불리게 했을까 청어처럼 몸속에 수많은 가시를 감추고라도 있을까 아주 먼먼 옛날 사람들이 가시나무라 이름붙일 적엔 가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무성하게 몸을 덮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은 가시를 없앴거나 몸속에 감춘 것이 분명한데 아마 이름 속에 남아있는 가시의 흔적을 지우느라 오랜 세월 밤낮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 벌서며 아무도 이 가시에 다치지 마라 상하지 마라 기도를 해서 가시 대신 땀방울 같은 커다란 눈물방울 같은 도토리가 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새가 되었든 다람쥐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후드득 제 열매를 뿌려주며 지옥을 천국으로 견디는 오오랜 가르침을 실행하느라 참나무과에 속하는 가시나무엔 가시가 없는지도 모른다
세속 사원
집 밖에서 집을 보네
밤이 새벽으로 건너가는 시간
금성이 춥게 빛날 때
울다 지쳐 잠든 아내 두고
집 밖에서 퀭한 눈으로 내 사는 아파트를 바라보네
저 칸칸이 토굴 같은 시커먼 아파트 덩어리
모래와 시멘트로 뭉쳐진 커다란 산
저 속에서
그만 살 것처럼 사랑하고
또 다 산 것처럼 싸우고
옷 벗고 뒹굴고 또 옷 입고 종주먹을 들이대고
나날을 최후처럼 살았네
불현듯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가운데
돈황의 막고굴이 떠올랐다네
커다란 산에 층층이 동굴을 뚫고 수도승들은
화엄세계를 새겨 넣으려
굴 밖에 거울을 세워두고 빛을 반사시켜 들여서
몇 십 년 몇 백 년 작업을 했다지
얼마나 죽고 싶었을까
그들에게 차라리
내가 버리고 싶은 이 사바가 극락쯤은 아니 될까
그래, 나의 이 고해가 극락이라니
목말라 물을 찾다 밤새 술만 들이켰던
그 곳이 우물터였다니
수많은 생불들이 불을 켜는 새벽
나 옷깃 여미고 저 사원으로 돌아가겠네
집중
매미 한 마리가
한낮을 온통 점령해버렸다
그 울음 한번 깊다
서늘하다
아파트 한 채가 거기에 잠겨 섬처럼 존다
지금 매미는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다
해야 하는 것도 그것밖에 없다
곡비처럼 운다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매미의 울음을 그리 깊게 하였겠구나
매미는 하마 그리운 것의 그 끝에 닿았겠다
폭포를 뚫는 소리꾼의 독공처럼
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도 좋겠다
저 울음 가락에 장단 넣으려는 듯
하늘엔
소리북 같은 낮달이 하나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내가 꽃피는 일이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꽃은 피어 무엇하리당신이 기쁨에 넘쳐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또한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당신의 가슴 한복판에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그저 수줍은 듯 잠시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그렇게 나는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넥타이를 매면서
넥타이를 목에 걸고 거울을 본다 살기 위해서는 기꺼이 끌려가겠다는 의지로 내가 나를 묶는다 한 그릇 밥을 위해 기꺼이 목을 꺾겠다는, 또한 누군가를 꼬여 넘기겠다는 의지 그래서 무엇을 그럴싸히 변명하겠다는 듯 넥타이는 달변의 긴 혓바닥을 닮았다 그것이 현란할수록 끌려가면서도 품위는 유지하겠다는 위장술, 혹은 저 밀림 속으로 누군가의 멱을 끌고 갔었던 따라서 진즉 교수대에 올랐어야 할 자가 제 목을 감추는 보호색일지도 모른다 잘 보라 또한 넥타이는 올가미를 닮았다 그것이 양말이 아니라서 목에 두르는 것은 아니리라 마지막이듯 넥타이를 조이며 묻는다 죽을 각오는 되어있는가
주택복권의 추억아는 사람은 안다돼지꿈을 꾸고복권 몇 장을 사가지고 있는 동안의턱없는 설레임을 ……군 입대할 적 어머니가병역수첩 맨 뒷장에꼭꼭 접어 넣어주던 부적처럼한 주 동안이 든든했다더러는 남의 돼지꿈까지 사다가복권을 샀다 당첨되지 않아도좋았다 퇴근길찬송가를 부르며 바구니를 내밀던맹인에겐 한 푼도 주지 못했지만복권을 갖고 있는 동안복지국가 건설에 한몫했다는 자부심 ……아는 사람은 안다거, 왜 표어도 있잖은가"내가 산 복권 한 장국민주택 벽돌 한 장"버스표 파는 가판대주택복권 진열칸 앞에서두근대며 번호 맞춰보던 추억을,술취한 퇴근길 가끔은내가 쌓는 남의 집들에 막혀내 전셋집 돌아가는 길이 막막해도돼지꿈 속에서 한 주 동안턱없이 행복했던 추억을모르는 사람은 모른다헌 신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네가 누구냐 물으면그대 발치수와 발가락모양을 말해주리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먼 길 함께했다는 흔적이라면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물꽃
물수제비 뜨는 돌이물을 스치며 피우는 꽃
무색무취순간의 꽃
이윽고 어느 지점에서그대 중심에 깊숙히 가라앉을 수 있다면
다가가는 모든 발걸음에그대를 꽃 피우는..,
외줄 위에서
허공이다밤에서 밤으로 이어진 외줄 위에 내가 있다
두 겹 세 겹 탈바가지를 둘러쓰고
새처럼 두 팔을 벌려보지만
함부로 비상을 꿈꾸지 않는다
이 외줄 위에선
비상은 추락과 다르지 않다
휘청이며 짚어가는 세상
늘 균형이 문제였다
사랑하기보다 돌아서기가 더 어려웠다
돌아선다는 것,
내가 네게서, 내가 내게서 돌아설 때
아니다, 돌아선 다음이 더 어려웠다
돌아선 다음은 뒤돌아보지 말기 그리움이 늘 나를 실족케 했거늘
그렇다고 너무 멀리 보아서도 안되리라
줄 밖은 허공이니 의지할 것도 줄밖엔 없다
외줄 위에선 희망도 때론 독이 된다
오늘도 나는
아슬한 대목마다 노랫가락을 뽑으며
부채를 펼쳐들지만 그것은 위장을 위한 소품이다
추락할 듯한 몸짓도 보이기에는 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외길에서는
무엇보다 해찰이 가장 무서워서
나는 나의 객관 혹은 관객이어야 한다
각씨붓꽃을 위한 연가
각씨가 따라나설까봐오늘 산행길은 험할 텐데...둘러대고는
서둘러 김밥 사들고 봄 산길 나섰습니다
허리 낭창한 젊은 여자와 이 산길 걸어도 좋겠다 생각하며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 오르는데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산비알에
저기 저기 각씨붓꽃 피어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허리가 어디 붙었나 가늠도 되지 않고
화장술도 서툴러서 촌스러운 때깔이며
장벽수정을 한대나 어쩐대나 암술 수술이 꽁꽁 감추어져
요염한 자태라곤 씻고 봐야 어디에도 없어서
벌 나비 하나 찾아주지 않는 꽃
세상에나, 우리 각씨 여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세상에 내가 최고로 잘 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 산길까지 남정네 감시하러
앵도라진 입술 쭈볏거리며 마른 풀섶에 숨어있습니다
각씨붓꽃 앞에 서니 내 속생각 들킬까봐
아무도 없는 숲길에마저 괜스레 조신합니다
두렵게도 이쁜 꽃입니다
새삼 스무살처럼 내가 깨끗합니다
대신 매를 맞고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았다-당신은 목에 너무 힘을 준다는 것 알아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마음이 한 움큼 뜯겨나가고뉘우치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뉘우치며 하루가 지나고
또 e-메일이 왔다
- 어젯밤 술에 취해 방배동에서 모 시인과 다퉜는데돌아와 그 시인에게 e-메일을 보낸다는 게
잘 못 배달된 것 같네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평소 내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죄송합니다
나도 답 메일을 이미 보낸 뒤였다
딸아이 피부약을 내 감기약인 줄 알고 먹고서감기가 나은 적도 있다
대신 매맞고 뉘우친 마음의 자리 푸른 매 자국이 싱싱하다
연잎의 마음
비가 쏟아지자 덕진연못의 수문엔 콸콸 붉덩물이 들고 있었다모든 연잎들이 일제히 일어나
제 몸을 큰 잔으로 만들어 빗물을 받았다
투명한 빗물을 정한수처럼 받들고 빗줄기의 매를 맞는 연잎에선
지장보살지장보살 곡진한 비나리가 들려왔다
그랬다 지금까지 나는
연꽃의 아름다움과 연향의 꽃다움만을 노래해왔다
내 이념의 사치와 과소비를 뉘우치며 오래 서있는 동안에
연잎들은 받아든 맑은 빗물을 붉덩물 연못에 합장배례하듯 연신 부어주었
다
연못이 흙탕물로 넘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흙탕물은 어두운 세상 쪽으로 연꽃 대궁 몇 개를 빚어 올리고 있었다
오늘 처음 연꽃이기보다는 연잎이기를 꿈꾸었다
이 역시 사치가 아니기를 나도 마주 합장하였다
생(生)
건전지는 극과 극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물려있다 애(愛)와 증(憎), 삶과 죽음의 자웅동체이다 어느 것 하나로는 심장은 뛰지 않는다 내 사랑도 죽이
고 싶을 만큼의 똑같은 전압이 아니었다면 너와 나와의 온몸에 저릿저릿 피
를 흐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몸에 꼭 맞는 관 속에 누워 죽어가면서 건전지가 극과 극에서 피워내는저 아름다운 불꽃
물음표(?)에 대하여
오늘 아침 찌갯감일본산 생명태 아가리 속에는
낚시바늘 하나 박혀있다
살기 위해 삼켰으나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었으리라
그래서 낚시바늘은 물음표를 닮았다
옷장 밖에선먹이를 찾아
낚시바늘을 삼키고 있는 몸을 상징하듯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몸이 빠져나간 옷들은
물음표 하나씩 달고 있다
살게 한 것도 물음표였으나죽게 한 것도 물음표라는 듯
물음표는 낚시바늘을 닮았다
길 혹은 질
길은 전라도 사투리로 질이다길은 질이다
질이어야 한다
신생의 자세로
다시 탯줄에 매달리기 위하여
자궁에 이르는
이 길은
질이어야 한다
쟁반탑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허물
나무 둥치를 붙잡고 있는 매미의 허물 속없는 매미가 나무 위에 우는 매미를 증명하듯
저 매미는 또 매미 다음에 올 그 무엇의 거푸집인 것이냐
매미의 저 울울(鬱鬱)한 노래가 또 무엇의 어머니라면
세상의 모든 죽음을 어머니라 불러야 옳다허공에 젖을 물리는 저 푸른 무덤들
별
저 등 하나 켜고그것을 지키기 위한 한 생애가
알탕갈탕 눈물겹다
무엇보다, 그리웁고 아름다운 그 무엇보다사람의 집에 뜨는 그 별이 가장 고와서
어스름녘 산 아래 돋는 별 보아라
말하자면 하늘의 별은사람들이 켜든 지상의 별에 대한
한 응답인 것이다
콩나물에 대한 예의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비누에 대한 비유
온전히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가령, 비누를
한사코 미끄러져 달아나는 비누를
붙잡아 처바르고 안고 애무해보지만
사랑한 것은 비누가 아니라 비누의 거품일 뿐
비누의 심장에 다가가 본 적 있는가
비누에게 무슨 심장이냐고?
그렇다면 비누가 그런 것처럼
제 살 한 점 선선히 내어준 일 있었는가
누구의 더러운 냄새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한번이라도 뜨거운 심장을 증명해 본 일 있었던가
고작해야
때얼룩 허물을 벗어 안겨주면서도
눈앞에 있을 때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간절히
비누에게 있는 비누의 이름을 불러준 적 있는가
닳아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불러보는 없는 이름
여보, 비누
없어 비누
폐차와 나팔꽃
폐차는부활 같은 건 꿈꾸지 않나 보다
쓸 만한 부품은 성한 놈들에게 내어주고
폐차장엔 끝끝내
끌고 온 길들을 놓아주어 버린
분해되는 낡은 차가
그래서 평화스럽다
영생을 믿지 않아 윤회가
시작된 것일까 벌써
나팔꽃 한 가닥이 기어올라
안테나에 꽃을 피웠다
비켜라 경적을 울려대며
회생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고
달릴 줄만 알았던
한참 광 나던 시절엔 어찌 알았으리
필요로 하는 것들에게
하나하나 내어주고
마지막 끝자리마저 나팔꽃에게 내어주고
제 몸이 비어갈수록 채워지는 햇살의 따스함
페차는 성자처럼
나팔꽃이 시들 때까지만
지상에 남아 있기를 기도할지도 모른다
폐차가 아름다운 어느 아침
섬진강길
어머니가 빚어 띄운 메주짝
잘 마른 고추 부대 싣고
가난한 큰누나
찾아가는 섬진강길
양지바른 모랫벌에
해묵은 가난 이야기랑 서러운
누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한 짐씩 풀어놓고 가다보면
강물도 목이 메는지
저기 저 압록이나 구례구
쉬었다가 흐르는 강물에선
메주 뜨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슬픔인 듯 설움인 듯
가슴엣 것들이 썩고 또 삭아서
가난해서 죄없던 시절은
드맑은 눈물로 괴는가
도른도른 강물은
어머니 띄운 장 빛깔로
굽이굽이 또
천리를 돌아가고 있었다
탱자
가시로 몸을 두른 채
귤이나 오렌지를 꿈꾼 적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밖을 향해 겨눈 칼만큼이나
늘 칼끝은 또 스스로를 향해 있어서
제 가시에 찔리고 할퀸 상처투성이다
탱자를 익혀온 것은자해 아니면 고행의 시간이어서
썩어문드러질 살보다는
사리 같은 씨알뿐
향기는 제 상처로 말 걸어온다
순천만 갈대숲
순천만에 와서
소나무나 참나무숲처럼 갈대들이,
그 연약한 갈대들이 당당히 숲이라 불리는 까닭을 알겠다
그 줄기가 튼튼해서가 아니었다
나이테가 굵어서가 아니었다
바람이 몰려올 적마다
각기 안테나를 길게 뽑아들고
바로 곁에 서 있는 그대를 천리처럼 안타까이 부르는 아득한 몸짓
칼바람에 앞엣 놈이 넘어지면
뒤엣 놈이 받아서 함께 쓰러지며
같은 동작으로 다시 일어서는 탄력의 떼춤을 보았다
그러나 갈대가 한사코 꺾어지지 않기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갈대는 갈 때를 안다
엄동의 긴 밤을 청둥오리떼 날아들자
스스로 제 몸 꺾어
털스웨터처럼 갈꽃자리 깔아주는 것 보았다
그 멀고 긴 쓰러짐의 힘이
이듬해 다시 숲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리라
혼자서 겨울 먼 길을 갈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순천만에 와서 비로소
나를 받쳐준, 혹은 함께 쓰러지던 무수한 허리들이 그리워
휴대폰 안테나를 길게 뽑는다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연어의 나이테
잘라놓은 연어의 살 속엔
나이테 무늬가 있다
연하디 연한 연어의 살결에
나무처럼 단단한 한 시절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솟구치던 나무를
눈바람이 주저앉히려 할 때마다
제 근육에 새겨넣은 굴렁쇠 같이 단단한 것이
나무의 나이테이듯이
한사코 아래로만 흐르려는 물길을 거슬러
폭포수를 뛰어넘는 연어를
사나운 물살이 저 바닥으로 내동댕이칠 때마다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솟구쳐
여린 살 속에 쓰라린 햇살이 짱짱한 나이테로 쌓였으리라
켜놓은 원목의 나이테가
제가 맞은 눈바람을 순한 향기로 뿜어내놓듯이
그래서
연어의 살결에선 강물냄새가 나는 것이다
죽은 어미연어의 나이테를 먹은 치어가
폭포수를 뛰어넘어
다시 그 강에 회귀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즐거운 나방이
바싹 마른 떡갈나무 잎사귀 뒤에고치집 하나 대롱대더니
나방이 한 마리
꿈틀 제 집을 부순다
어디에도 문은 없었으나 뚫으면 문이라는 듯제 집 벽을 부순다
개벽해버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파천황(破天荒)을 수행해보인다
꿈틀 꿈틀생은 다만 꿈의 틀이어서
틀도 꿈도 깨어진 다음부터가 세상이라고
저 하찮은 나방이가 혁명을 한다
이 아침은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버러지로 기록될 제 한 생애를 허물어버린다
언제나 벽 너머는 허공 아니면 낭떠러지열리지 않은 창의 유리 한 장 깨어본 적 없는 나에게
온 몸으로 보여주는
저 은빛 비유
나는 무엇의 고치집인가
상처에 대하여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강은 말랐을 때 비로소 깊어진다
가뭄이 계속 되고
뛰놀던 물고기와 물새가 떠나버리자
강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처음으로 자신의 바닥을 보았다
한때
넘실대던 홍수의 물높이가 저의 깊이인줄 알았으나
그 물고기와 물새를 제가 기르는 줄 알았으나
그들의 춤과 노래가 저의 깊이를 지켜왔었구나
강은 자갈밭을 울며 간다
기슭 어딘가에 물새알 하나 남아 있을지
바위틈 마르지 않은 수초 사이에 치어
몇 마리는 남아 있을지......
야윈 몸을 뒤틀어 가슴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강은
제 깊이가 파고 들어간 바닥의 아래쪽에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가문 강에
물길 하나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석쇠의 비유
꽁치를 굽든 돼지갈비를 굽든간에
꽁치보다 돼지갈비보다
석쇠가 먼저 달아야 한다
익어야 하는 것은 갈빗살인데 꽁치인데
석쇠는 억울하지도 않게 먼저 달아오른다
너를 사랑하기에 숯불 위에
내가 아프다 너를 죽도록 미워하기에
너를 안고 뒹구는 나는 벌겋게 앓는다
과열된 내 가슴에 너의 살점이 눌어붙어도
끝내 아무와도 아무 것과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고독하게 알고 있다
노릇노릇 구워져 네가 내 곁을 떠날 때
아무렇지도 않게 차갑게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나는
너의 흔적조차 남겨서는 아니 되기에
석쇠는 식어서도 아프다
더구나
꽁치도 아닌 갈빗살도 아닌 그대여
어쩌겠는가 사랑은 떠난 뒤에도
나는 석쇠여서 달아올라서
마음은 석쇠여서 마음만 달아올라서
내 늑골은 이렇게 아프다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구두 뒤축에 대한 단상
겉보기엔 멀쩡한데발이 빠져나간
구두의 뒤축이 한쪽으로 심하게 닳았다
보이지 않은 경사가 있다보이는 몸이 그럴진대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마음의 경사여
구두 뒤축도 없는 마음의 기울기는무엇이 보정(補正)해주나 또
뒷모습만 들켜주는 그 경사를 누가 보아주나
마지막 구두를 벗었을 때생애의 기울기를 볼 수는 있을 것인가
수평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되어버릴 생이여, 비애여
닳은 구두 뒤축 덕분에 나는 지금 멀쩡하게 보일 뿐이다
어느 대나무의 고백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하건대 나는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난세의 죽장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회초리의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사의 바람소리에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있는 것이다.
복효근 시인은
196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버마재비 사랑』『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이 있다.
1995년 편운문학상 신인상
2000년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