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 교회사 36
(신사참배 반대운동 3)
총회의 배도는 한국교회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나
이들이 교계 전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사참배 반대하는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평양에서는 주기철 목사, 주남선 목사,
평북 신의주에서는 이기선 목사,
경남지방에서는 한상동, 손양원, 이인재, 손명복 목사,
만주에서는 한부선 선교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200여개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000여성도가 투옥되었고
약 50의 교직자들이 순교를 당했음에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그칠줄 몰랐다.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불식시킬것으로 기대했던 일제의 계산은 빗나가고 말았다.
남, 북장로교의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 보수적 입장을 취하던 평양 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를 타협의 대상으로 보지않고
성경의 절대권위를 존중하며 말씀대로의 실천을 모토로 하고
나부열 교장과 방위량 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모든 교수와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전국노회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개인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한 박관준 장로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이듬해에
안이숙(죽으면 죽으리라 저자)과 함께
일본 중앙정부를 찾아가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제기하기도 하고 제국의회(일본국회)에서
신사참배를 법제화시키는 신 종교법안이 상정되는 날
"여호와의 사명이다." 라고 외치며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담은 진정서를 단상에 던졌다.
물론 그 자리에서 체포된 박관준장로는 투옥되어
32일간 일본 경시청에 갇혀 있다가
귀국후에도 계속된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또 다시 체포되어 6년간의 옥고 끝에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주기철 목사인데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 교회는
갖은 협박에도 동요하지 않자
교회는 문을 닫게 되고 "일사각오" 설교를 한 주기철 목사는
4번의 투옥으로 결국 그 또한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그 외 한상동 목사를 포함한 신사참배의 강요에 항거하다
순교한 이들의 수도 약 50명에 달한다.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순교한 이들 대부분
역사에 묻혀 버렸지만
마치 아벨의 피가 하늘에 호소한 것처럼
그들의 피 역시 하늘에 호소한 것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이들이
옥중에 있는 동안 교회당은 매각되어
각종 공장으로 변했고 수많은 평신도들은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들만 외롭게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처음부터 신사참배 문제에
단호한 입장을 가졌던 대부분의 장로교 선교회 가운데에서도
몇몇 사람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고군분투하는 한국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돕다가
외국인임에도 옥고를 치렀으며
자금을 지원하고 신사참배 반대이유를
인쇄물로 반포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