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 스님의 유식삼십송] ③식의 종류와 작용
마음 작용은 세 가지 계층으로 구분되지만
근본은 하나이며 기능에 따라 달라졌을 뿐
그것은 경험내용을 저장하는 아뢰야식,/ 사량하는 말나식 /
그리고 대상을 표상하여 인식하는 요별식 등 세 가지이다 /
첫째의 아뢰야식은 이숙 혹은 일체의 종자식이라고도 한다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위는 『유식삼십송』의 두 번째 게송이다.
여기서 식전변의 주체는 경험한 내용을 저장하는 아뢰야식(阿賴耶, 8식),
끊임없이 사량하는 말나식(末那, 7식), 대상으로 표상하는 요별식(了別, 6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마음작동의 세 층위이다.
아뢰야(alaya)식에서 아뢰야로 음역된 Alaya의 어원은 a-lI로서,
심리적으로 어떤 대상을 ‘집착한다’는 것과 경험내용을 ‘저장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집착의 의미는 주로 초기불교에서는 사용되고,
저장의 의미가 부각된 것은 유식학파에서 비롯되었다.
심리적인 현상에서 집착과 저장은 서로 전혀 다른 개념은 아니다.
우리는 집착의 대상을 마음에 담고 정확하게 기억하지만,
관심이 없는 부분은 전혀 기억이 되지 못한 경우를 보면 이점을 알 수가 있다.
아뢰야식의 기능을 이숙(異熟, vipaka)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숙이란 말 그대로 시간에 따라서(異) 과일처럼 익어간다(熟)는 뜻이다.
집착되어 저장된 경험내용들은 어떤 잠재적인 힘을 가진 씨앗처럼,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점차로 익어가서 행동으로 표출됨을 함축한다.
여기서 점차로 익어가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잠재적인 힘을 ‘종자(種子, bIja)’라고 부른다.
이것은 반복된 행위의 원인이 되거나 혹은 그 결과로 나타난 기운이기 때문에,
습기(習氣, vasana)라고도 한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게 되면,
잠재의식 속에서 식당으로 가는 행위가 발생된다.
식당으로 발을 옮기게 하는 내적인 공능은 반복된 행위의 결과로서,
아뢰야식에 저장된 기운이다.
무착은 『섭대승론』에서 종자의 유형을 ‘언어적인 사유작용’,
‘자아의식’, ‘선악의 윤리적인 행위’ 등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사량(思量)이란 제7식을 말한다. 보통 제7식을 말나(末那)식이라 한다.
이것은 ‘생각하다’는 의미의 man의 명상형인 manas의 음역이다.
이것의 특징은 끊임없이 ‘사량’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근대적 의미의 개인의 특징을 사유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곧 사유한다는 것은 바로 나의 존재의 증거라고 본 것이다.
제7식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잠재화된 힘을 기반으로 하여,
전변에 의한 표상된 세계를 끊임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량의 주체적인 입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생각하는 자아의 본질은 불안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량한다.
생각을 생각하면서 실존의 안정성을 확보할 것으로 믿지만,
그럴수록 자아는 더욱 불안하여 진다.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별(了別)식은 제6식을 말한다.
색깔, 냄새와 같은 대상을 인식하여 구별한다는 의미에서 요별(了別)이라고 한다.
감각기관에 기초한 의식은 현재에만 관련되지만, 제6식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관념을 가진다.
인식의 과정에서 저기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표상하고,
그것을 언어와 결합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감각기관은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지만, 결코 그것을 표상하여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을 언어와 결합시키는 것은 바로 제6식의 역할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작동은 세 가지 계층으로 분류된다.
가장 심층에 존재하는 것이 아뢰야식이고,
인식대상을 향하여진 요별식이 표층의 작용이라면,
이런 경험내용을 사량하여 조직화하는 일은 말나식이 담당한다.
이들은 모두 마음 그 자체로서 각각 별도의 몸통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들의 몸통은 하나로서 작용하는 기능에 따라서 구분할 뿐이다.
2008. 09. 01
인경 스님 동방대학원대 명상치료학 교수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