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풍경이 있는 에세이]연암 박지원의 통곡
김윤배 발행일 2018-11-23 제18면
'열하일기'에서 광활한 요동벌판
한점 인간의 미미한 존재 깨달음
세상 떠난 아내에게 바친 '도망시'
신의왕후 능 관리하며 쓴 시 '재거'
그의 정신적 궁핍함 담겨 마음 아파
미세먼지가 보통이다 하는 날은 초미세먼지가 나쁨이란다. 우리들의 일상이 하늘에 달린 것이다. 그렇더라도 오늘은 면천의 골정지를 다녀와야 한다. 면천군은 본래 백제의 혜군이었다.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혜성군으로 개명했다가 조선 태종 13년에 면천군으로 개칭된, 지금의 당진시 면천면 일대의 행정구역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1797년부터 4년간 면천군수로 재직했다. 군수 부임 때 그의 나이 61세였다.
연암은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버려진 연못을 보수해 주변의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했다. 그때 만든 연못이 '골정지'다. 연못 안에 원형의 인공섬이 있고 인공섬에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 칭한 정자가 있다.
애민정신이 강했던 연암은 과학영농서인 '과농소초'와 토지개혁서인 '한민명전의'를 저술하다 지치면 골정지의 연꽃을 보며 휴식을 가졌을 것이다. 골정지 연꽃은 색색의 꽃잎이 크고 아름다워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정자 뒤쪽으로 향교가 있어 유생들 또한 공부에 지친 몸을 정자에 기대어 쉬며 시문을 읊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로 널리 알려진 문장가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연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가는 삼종형 박명원을 수행하여 황제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쓴 견문록이 '열하일기'다.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재직할 때 정조는 문체를 타락시킨 저서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 순정한 고문을 지어 올리라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1792년 다시 정조가 문체반정을 명해 연암은 순정문을 지어 임금에게 바쳤다. 연암의 문체는 당대의 현대문으로 양반사회 비판에 거침이 없었으며 사실적이어서 남인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열하일기'에서 감동적인 장면은 아마도 드넓은 요동벌판을 마주하는 순간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볼만 하구나.'라는 대목일 것이다. '오늘 요동벌판에 이르러 이로부터 산해관 일천이백 리까지의 어간은 사방에 도무지 한 점 산을 볼 수 없고 하늘가와 땅끝이 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고금에 오고간 비바람만이 이 속에서 창망할 뿐이니, 이 역시 한번 통곡할 만한 자리 아니겠소'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연암이다.
울음은 인간의 칠정 중 슬픔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칠정 모두 지극하면 울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슬픔, 기쁨, 노여움, 즐거움, 욕심, 미움, 사랑이 극에 달하거나 사무치면 울음이 터지는 것이다. 통곡 후에 오는 카타르시스를 연암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광활한 대지가 주는 감동, 그 가없는 대지에 한 점 인간의 미미한 존재를 깨닫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연암은 '열하일기' 외에 '허생전' 등의 소설뿐만 아니라 곡진한 시편을 남겼다. 특히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바치는 도망시(悼亡詩)는 애절함이 가슴을 저민다. '한 침상에서 지내다가 잠시 헤어진 지가 이미 천년이나 된 듯./눈이 다하도록 먼 하늘로 돌아가는 구름 바라보네./하필이면 나중에 오작교 건너서 만나리오./은하수 서쪽 가에 달이 배처럼 떠 있네.' 이 시를 읽노라면 연암이 왜 재혼하지 않고 홀아비로 평생을 살았는지 알 것 같다. 늘 가난했던 살림살이를 견디어낸 아내,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할 때도 실망하지 않던 아내, 누구를 원망하지 않던 아내를 위해 연암은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연암은 정조 14년,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태조비 신의왕후의 능을 관리하는 재릉영(齊陵令)으로 임명되어 이듬해까지 재직했다. 그때 쓴 시가 '재거(齋居)'다. '한두 잔 막걸리로 혼자서 맘 달래노라/백발이 성글성글 탕건 하나 못 이기네/천년 묵은 나무 아래 황량한 집/한 글자 직함 중에도 쓸데없이 많은 능관일레/맡은 일 쥐간처럼 시시해 신경 쓸일 적다만/그래도 계륵처럼 내버리긴 아깝구려'에 이르면 그의 정신적인 궁핍함이 마음 아프다. 오늘의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당대 식자들의 등용문이며 취업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