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민22:15)
2001년
지난 주일에는 인간의 이기성으로 뭉쳐진 모압이라는 민족적 조직이 하나님의 축복을 거역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이라는 것을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즈음 민족주의가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혈통, 한 민족의 생존권과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지상적 과제(최고의 목표)로 생각하니까 자기 민족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민족은 침해하고 죽여 없애 버려도 좋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싸움이라든지, 아프리카 르완다의 참상이 이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일의 극우파 학생들이 타민족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이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좌익적 성향을 가지고 통일 운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념보다 민족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좌우간에 한민족이 통일되고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를 하든 공산주의(민중 민주)를 하든 민족이 통일을 하고 나서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유 민주주의로 통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민족보다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앞서는 듯합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라야 민족의 생존과 이익을 가져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자유 민주라는 것도 민족을 위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자유 민주주의라도 민족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 혈통 또는 한 민족이란 인간 최고의 이념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든 우든 민족을 최고로 중시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민족도 하나님 앞에서는 육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민족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살뿐입니다. 민족과 같은 육의 세상을 초월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뿐입니다. 그러므로 민족국가가 하나님을 대적하면 여지없이 민족국가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오늘 우리는 이기성에 얽매인 한 무당이 어떻게 그것에 이끌리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무당에게 하나님이 축복한 자를 저주하지 말며 그들을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무당은 발락이 보낸 사신들과 함께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발락은 또 다시 더 존귀한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청했습니다. 최고의 대우를 하며 원하는 대로 시행할 것을 약속도 했습니다.(17) 아마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 같은 군사로서의 대우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또 부귀공명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보장을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던 발람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더 하실 지 알아보겠다고 합니다.(19) 하나님이 말씀을 더 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What more the Lord will say to me)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하신 것 외에 또 다른 말씀을 더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발람의 욕심 때문입니다. 절호의 기회를 자기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하는 꿍꿍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대면하는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잘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삶에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장래의 진로나 직장이나 결혼이나 사업이나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면서 기도하면 방향이 보이고 가닥이 잡히며 현재의 위치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래라, 저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알므로 인해서 하나님 닮은 자로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깨닫게 되고 또 여러 가지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이의를 달고 다른 핑계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욕심입니다. 이 경우는 이래서 안되고, 저 경우는 저래서 안되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단순한 진리에 ‘다른 무엇을’(What more)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원리를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란 것을 기억합시다.- 발람은 돈에 욕심이 났던 것이 분명합니다. 3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 . ..”라고 했는데 이 “패역”을 유다서 11절에는 “삯을 위하여 발람이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발람이 돈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고쳐서 다시 말씀해 주실 것을 기대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8절에서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한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서라기 보다는 은근히 하나님을 빙자해서 많은 은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발람의 길 즉 도리가(The way) 패역했다고 하십니다. 여호와를 빙자하여 얼마나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이래서 유다서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재물을 축적하는 거짓 선지자의 전형으로 발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발람이 얼마나 욕심에 깊이 빠져 있는지를 보십시다. 발람이 탄 나귀가 여호와의 천사가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 가 버렸습니다. 발람이 채찍질하여 길에 돌아 왔더니 이번에는 포도원 돌담에 발람의 발을 비비어 상하게 하였습니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여 전진했습니다. 이번에는 피할 데 없는 좁은 길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나귀가 엎드려 버렸습니다. 죽기 싫다 그랬더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이쯤 했으면 무엇인가 낌새를 차리고 깨달아야 하지요? 이런 것을 흔히 ‘하다가 하다가 안되면 신학교 가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하고 엇길로 가다가 항복하게 되는 것에 적용해야 옳은 적용입니다.
하도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하니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하십니다.(28-30) “ . .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얼마나 논리적인 항변이냐?
참으로 기가 막힐 광경입니다. 나귀가 말을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귀를 탄다는 것이 섬뜩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미련함이 더욱 섬뜩합니다. 얼마나 욕심에 이끌려 완고해졌기에 천사가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하십니까? 말 못하는 나귀가 항변을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여십니다. 그제야 천사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32)는 천사의 책망은 너는 “나귀 보다 못하냐? 나귀도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알아보는데 너는 사람이 되어 나귀보다 깨닫는 것이 더디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보다 못합니다. 발람 한 사람을 두고 인간 모두를 도매급으로 말할 수 있느냐고 하지만 모든 인간이 욕심에 빠져 있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다면 그것은 눈을 열어 준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라도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렇게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인간이 고집을 피우고 자기의 욕망을 쫓을 때에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시지만 고집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좌절하는 일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위험스런 모습을 직시합시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욕심을 바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이 있습니다. 핑계가 많습니다. 늘 그렇게 하려고 하는 유혹에 시달립니다. 저는 설교를 한다고 하지만 이런 욕심의 유혹에 시달리는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합리화시키지는 않습니까? 세상적 욕심 때문에 신앙 원리를 변절시키지는 않습니까? 물론 이런 것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만, 있어도 아파할 줄도 모르고 덤덤하고 혹은 오히려 욕심을 따라 행하려고 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생활 전반에 걸쳐서 점검해 보십시오. 먼저 하나님에 대한 마음부터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 것으로만 가득차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과 기도와 예배함이 사모함으로 행해지고 있습니까? 생활 터전에서 주님을 모신 기쁨과 평안이 어느 정도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에 대해서 변명하며 변절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과 신앙 원리를 변절시키고 있는 세상적 욕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고 질식하여 죽는 이유는 ‘이 생의 염려와(the cares of this world) 재리의 유혹(속임 ; άπατη the deceitfulness of riches)에 막혀서(마 13:22) 그렇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문제들에 막혀서 진리의 말씀이 우리들 속에서 질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관심으로 채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 세상살이가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살이가 진리로 인해 통제가 되고 정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