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구 스타로 발돋움
이승삼을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준 계기는 1982년에 열린 대통령기 전국장사씨름대회였다.
대학천하장사로 불리던 이 대회의 최고 스타는 단연 이승삼이었다.
결승에서 이승삼은 0-1로 뒤진 상황에서 단신(173㎝)의 체구로 인간기중기로 불리던 이봉걸(2m5)을 정면(360도)뒤집기로 넘겨버렸다.
서로 밀어내기로 반판씩 거둔 상황에서 이승삼은 이봉걸에 들려 밀려나가기 직전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승삼은 있는 힘껏 발을 땅에 짚고 몸을 비트는 필사의 공격으로 기어코 이봉걸을 모래위에 눕혔다.
“그때 경계선에 흰 테이프를 붙여놓았는데 두세 발만 더 내딛으면 밀리겠더라구요. 그래서 마지막 시도를 했죠. 그때 흰 테이프가 어찌 눈에 보였는지...”
드라마 같은 역전승이었다. TV로 생중계된 이날 경기로 이승삼은 일약 전국에 그 이름을 알렸다.
“그때 다들 힘들다고 했어요. 오죽하면 저희 감독님도 결승까지 온 것도 잘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얼마나 오기가 생겼는지. 그래서 더 잘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 대회 이후 이승삼은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그 시합이후 마산에 술집 어느 곳에 가도 공짜 술을 얻을 먹을 정도였어요. 지금도 그 흰 테이프를 못 챙긴 것이 많이 아쉽네요. 저에게는 특별한 기억인데.”
◇시련과 부상, 그리고 아쉬움
인기선수가 됐다. 사람들은 그의 뒤집기에 열광했다. 그리고 이듬해 천하장사 대회가 개막했다.
“한번은 꼭 따고 싶었죠.” 실제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이상하게 안 되더라구요.”
번번이 이만기에게 가로막혔다. 1품(2위)만 두 차례. 1988년 열린 14회 천하장사 대회 결승전은 못내 아쉬웠다.
자신도 있었다. “당시 승률에서 이만기 장사에게 앞선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모두 저를 천적으로 꼽았어요.”
출발도 좋았다. 8강에서 장지연(3대 천하장사), 4강에서 ‘불곰’ 황대웅(21·22대 천하장사)을 연거푸 꺾고 결승에 올랐다.
그러나 이만기에 1-3으로 지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천하장사와는 악연이다. 82년 대통령기를 제패하고 절정의 기량을 뽐낼 때 이듬해인 제1회 천하장사대회서 인대가 끊어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만다.
“이준희 장사와의 시합이었는데, 그 당시 의술이나 재활 수준이 무척 열악했어요. 그 때가 제가 대학 4학년, 한창 전성기였는데, 맘고생이 심했죠.”
수술을 했지만 선수생명이 위기였다.
“병원에서도 힘들겠다고 하던데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그 뒤 이승삼은 2년간 재활에 온 힘을 기울였다. 매일같이 수영장에 가서 재활에 전념했다. 남들 잠자는 시간에 물리치료를 받다 잠이 들곤 했다.
“그때 부상만 안 당했더라면 천하장사도 충분히 가능했을 거라는 아쉬움도 있어요. 그래서 그 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4급 사원으로 현대중공업에 입단했다. 그러나 1년 만에 팀이 해체됐다. 이후 무적생활이 이어졌다. 그 때 부상여파도 있고 팀까지 해체되다보니 모교인 경남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해 가며 홀로 훈련했다.
“수입이 없다보니 주변의 지인들께서 이승삼후원회를 만들어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게 큰 힘이 됐죠.”
그리고 이승삼은 1985년 한라장사에 올랐다. 그 당시 언론은 이승삼의 우승을 두고 ‘방랑장사 이승삼’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그의 심경을 알 법하다.
◇지도자로 새롭게 출발
“지금도 사람들이 알아보기는 씨름선수 중에 제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걸요. 껄 껄 껄”. 푸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외모에 얼굴에는 익살스러움이 넘쳐난다.
털보장사, 뒤집기의 명수로 불리며 모래판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십 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승삼(50)은 고향에서 지도자로, 행정가로 후학양성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이승삼은 1991년에 은퇴를 했다. 그 때를 또렷이 기억한단다. “이만기 장사와 같이 은퇴했어요. 그 당시 대회에 출전해 저는 한라급에서 3월 17일, 이만기는 백두급에서 18일에 은퇴식을 가졌죠.”
그러고 보니 대학2년 후배인 이만기와는 보통 인연이 아닌 셈이다. 이승삼은 이만기와 얽힌 에피소드를 살짝 소개했다.
“대학 2학년 때인가. 하동 섬진강에 산악훈련을 하러갔어요. 숙소까지 지름길이 섬진강을 헤엄쳐 건너는 길이 있었죠. 근데, 이만기는 수영을 잘 못했어요. 고집이 보통 고집이 아니에요. 끝까지 수영해 건널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승삼이 헤엄쳐 막 건너편에 도착하니 갑자기 뒤에서 ‘형님, 살려 주이소’라는 소리가 들려왔단다. “뒤를 돌아보니 이만기가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거예요. 급히 뛰어들어 손을 잡고 빠져나오려니 갑자기 이만기가 제 목을 끌어당기는 거예요. 한손으론 헤엄을 쳐야 하는데 아찔한 순간이었죠. ‘아 이래서 죽는 거구나’ 생각이 들던 찰나에 선배들이 구해 준 기억이 납니다.”
그런 이만기와 은퇴도 나란히 했으니 그때의 그 일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듯 싶다. 은퇴직후 이승삼은 쏟아지는 지도자 제의를 거절했다.
“그때는 지도자보다는 노후를 위해 개인사업을 준비했어요. 스카웃 제의는 많았지만 마산을 떠나 울산에서 사업을 하려고 했죠.”
그러나 모교인 경남대의 삼고초려에 결국 뜻을 꺾었다. “그때 총장님이 3번이나 제의를 하셨어요. 차마 더 이상 거절 못한 게 지금에 이르렀죠.”
“지금도 아내가 ‘마산이 그리 좋냐’고 한 마디 해요. 그런데 어떡합니까. 너무 좋아 떠나기가 싫은데.(웃음)”
그렇게 91년부터 2007년까지 경남대를 이끌고 선수권, 회장기 대회 등 숱한 우승기록을 남긴 이승삼은 제자인 모제욱에게 감독직을 물려줬다.
현재는 마산씨름단의 감독을 맡고 있다. 황철곤 시장과 시의회에서 관심이 대단해 내년이 더 기대된단다.
얼마 전에는 대한씨름협회의 기술위원장까지 맡았다. “할 게 참 많다”고 했다. 씨름교실을 꾸준히 여는 등 생활체육으로의 저변확대에도 관심이 높다고 했다. 씨름을 많이 접해봐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향 마산에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마산은 용마고, 경남대 등 뿌리가 탄탄합니다. 그만큼 투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역의 기업체에서 씨름에 좀더 관심과 지원을 해 주면 씨름열기도 얼마든지 타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경남씨름의 역할도 강조했다.
“김성률, 양점배, 이만기, 김칠규, 최욱진 등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씨름인이 경남에서 배출됐습니다. 민속씨름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이승삼은 씨름의 부흥을 위해 많은 일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화려한 뒤집기로 모래판을 장식했던 털보장사 이승삼. 그의 씨름인생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사진설명(위 부터)
1.한라장사에 오른 뒤 모교 경남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오른쪽 첫 번째)
2.현역시절 이승삼은 털보장사로 불리며 인기가 높아 단골 인터뷰 대상이었다.
3.한라장사 등극 후 이승삼이 마산시내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