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사적 제5호)◑
백제의 수도인 사비를 수호하기위한 성왕16년 (538)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 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헌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泗批城,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부소산성은 부여읍 북쪽에 위치한 표고106M 의 부소산에 둘레2,200M 면적 746,202M의 자연스러운 경사와 언덕을 이용해 축조된 토석혼축 산성으로 북쪽은 백마강에 접해 있다.
산성형식은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주위에 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泗批樓,迎日樓,半月樓,皐蘭寺,落花巖,사방의 門址,軍創址와 三忠臣(階伯,成忠,興首)을 모신 三忠祠가 있고 삼천궁녀를 모신 궁녀사가 있다.
성내에 절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西腹寺址와 迎日寺址가 있으며 왕궁지로 추정되는 구 정문주위에 부여문화재연구소가 있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목책지와 현혈상의 주거지가 발견 되었다.
이 산성은 성내에 군창지와 건물지들이 있는것으로 보아 일단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으로서 구실을 했던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사비천도 이후 백제 멸망시까지 국도의 중심산성으로서 인근의 청산성,청마산성등의 보조산성으로 왕도의 방어를 강화한 성곽발달사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백마의 전설 조룡대(釣龍臺)◑
나당 연합군의 물밀듯한 침공에 7백년 백제의 사직은 무너지고 망국의 치욕에 떨던 의자왕도 포로의 몸이 되어 멀리 불귀의 땅 당경에 끌려가자 백마강은 그쓰라린 기억을 어서 잊으려는듯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백마강위로는 이제 아름다운 궁녀를 태우고 태평세월을 구가하던 그 강상에 이제는 소정방의 깃발이 나부끼는 군선만 오락가락 하였다. 그많던 배들이 이제는 사비성을 외면하고 당의 도독부가 설치된 웅진(지금의 공주) 도독부로 향했던 것이다. 이제 사비는 7주야 밤낮없는 약탈 방화로 완전 토초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마강의 주인인 용신은 이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백제의 유민들이 광복운동을 위해 일제히 궐기함을 안 용신은 때를 같이 하여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돌연 고요하던 백마강에는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나라 군선들이 부소산 근처에 접근하기만 하면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돌풍을 몰아오고 호수와 같던 강물은 마치 바다의 노도와 같이 거세게 소용돌이 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당의 군선과 군병들은 물속에 삼켜졌다. 이런 당병들의 아비규환의 참변이 거의 한달이나 계속 되었다. 사비성을 초토화 시켰으니 웅진성에 머물던 소정방은 이 계속되는 참변의 소식을 듣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일관을 불러 그원인을 물어보니 일관은 "백마강의 용신이된 무왕의 혼이 하는 짓이 틀림 없읍니다"
"무왕의 혼 ? "
"예 의자왕의 부왕인 무왕은 원래 소부리의 궁남지에 살던 용이 그 곳 궁녀와 상통하여 낳은 자 임으로 죽어서 용으로 환생 한것입니다"
"그용을 낚아채는 방법이 없겠는가? "
"있지요 용은 백마의 고기를 가장 즐긴다 하오니 그를 미끼로 하면 틀림없이 용이 걸릴 것입니다." 소정방은 곧바로 소부리로 내려가 일관이 일러준 대로 부소산 북쪽 강물 속에 솟아난 바위에 올라 부하를 시켜 만든 철사 낚시줄에다 백마의 고기를 끼워 강물속에 던졌다 마침 용은 비바람을 몰고 강물의 파도를 일으키랴 피곤도 하고 시장기도 있어서 백마의 날고기를 보고 꿀꺽 삼켰다 바위에서 소정방과 용은 옥신각신 필사의 싸움을 하고는 기력이 다한 용은 황금비닐을 번쩍이며 백마강 동쪽마을 지금의 용전의 논두렁에 뚝떨어져 죽었다. 마을에 떨어진 용은 마침 더위에 썩어 썩은내가 80리 떨어진 공주의 한마을까지 진동 하였다한다 이때부터 그마을 이름이 <구린내>라고 한다.
그런데 전설은 이러한데 전설의근원은 백제시대가 아닌 고려시대 삼국유사(三國遺事=註1)와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註2)등에 의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윤색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조룔대의전설을 분석 재고해 보자. 먼저 용이란 임금을 말함이다. 또 백마란 임금이타던 애마를 상징함이라 왕과 백마의 상관 관계를 알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6 의자왕조 또는 신라본기 제6 문무왕조의 양쪽 기록에 의하면 - 백제 사비성 함락된 후 백제의 유민들은 광복을 위해 얼마나 격렬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봉기 하였음을 알수있다 당은 이를 수습하는데 수년간이나 끌었다. 그래서 당은 궁리 끝에 당경에 포로로 끌려갔던 왕자융(隆)을 불러들여 웅진 도독으로 삼은뒤 강변에 제단을 쌓고 백마의 피를 마시게 해서 사태를 수습할 것을 왕자에게 맹세시켰다한다. 말하자면 이 때 당은 왕을 유인 낚으기 위해 백마를 이용 희생 시켰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역사 기록을 비유하며 전설화 시킨 것이 오늘의 조룡대 전설이 아닌가 싶다.
또 백마강이라는 이름도 그렇다 강의 이름도 이보다 앞선 160 여년 전 웅진의 무령왕 시대의 기록에 이미 보이고 있다
[ (前略) 白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
"백가가 나와 항복 하므로 왕(武寧王)은 이를 참형하여 백강(白馬江)에 던져 버렸다"
(三國史記 白濟本紀 第 四)
▣<註 1>
[又泗比 河邊有一岩 蘇定方嘗坐此上 釣魚龍而出 故岩上有龍詭之跡 因名龍岩]
三國遺事 券第二 南扶餘條
[또 서자강변에는 하나의 바위가 있느바 당의 소정방이 여기에 앉아서 어룡을 낚아낸 까닭에 바위위에 용이 끓어 앉은 자취가 있다하여 용암이라 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권 제 2 남부여조)]
▣<註 2>
釣 龍 臺
[自虎岩順流而南至干扶蘇山下有一怪石聳 立波濤之中石上有龍만之跡諺傳蘇定方
伐百濟 臨江欲渡忽風 雨大作以白馬爲餌而釣得一龍須史開霽遂渡師伐之故曰白馬岩曰釣龍臺]
新增東國與地勝覽 卷 十八 扶餘縣條 古蹟欄
[조룡대는 호암으로 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부소산 아래에 이르러 한괴석이 강가에 걸터앉은 것이있고 돌위에는 용이 발톱으로 할퀸흔적이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마리를 나꾸어 얻으니 잠깐 사이에 날은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롱대라고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18 부여현조 고적란
◐삼천궁녀의 넋이 어린 낙화암(落花岩)◑
부여의 부소산 서북편에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의 이름이 곧 낙화암이다. 의자왕 20년(660년) 7월 사비도성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왕은 공주로 피신하게 되었고 성내에 살던 왕족을 중심으로 한 고위층의 남자들은 모두 전몰하거나 포로가 되자 비빈과 궁녀 등 도성내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침략군이 산성내에까지 몰려들자 이들 백제의 여인들은 적군에 잡혀가서 치욕스러운 삶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유사의 태종(太宗) 춘추공(春秋公)조에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느바 [백제 고기에 이르기를 부여성 (사비성 ∼ 부소산성)의 북각(北角)에 큰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에 임하였다 .........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적의 손에는 죽지 않겠다 하고 이곳에 달려와서 몸을 던져 죽었다. 이러한 연유로 타사암(墮死岩-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전해온다.]
위에서 타사암이 여인을 꽃에 비유해서 아름답게 불러 꽃이 진 바위 즉 낙화암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고란초의 향기 고란사(皐蘭寺)◑
부소산의 낙화암 아래 강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암자의 명칭이 바로 고란사이다.
이 사찰의 건립시기는 백제의 17대 아신왕 당시 혜인 대화상께서 초창하셨다는 설이 있으나 고증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의 백제 무왕조에는 [무왕 37년 (636년) 3월에 왕은 좌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의 북포에서 연화를 베풀고 놀았다. 이 포구의 양쪽언덕에 기암과 괴석이 솟아있고 그사이에 기화이초를 심었는데, 마치 그림폭과 같았고 왕은 술을 마시고 즐거운 흥이 다하면 북을 치고 거문고를 뜯으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신하들은 번갈아 춤을 추니 사람들은 그곳을 가리켜 대왕포라고 말하였다. (三十七年 春三日 王率左右臣療 遊燕於泗批河北浦 兩岸奇岩怪石錯立 間以奇貨異草 如畵圖 王飮酒極歡 鼓琴自歌 從者屢舞 時人謂其地 爲大王浦)]라는 기록이 있다. 현재 사비하의 북포는 부여읍 쌍북리 북포마을(뒷개마을)로 부소산성과 청산성 사이의 북편강변에 위치할 뿐만아니라 사기에 나오는 북포 혹은 뒷개(후방에 있는강)의 지명이 여전하게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북포와 고란사간의 거리는 불과 0.5km내외이며 선박을 이용하여 왕래하며 놀기에 안성마춤인 곳으로 만약 현재의 고란사가 당시에도 사찰이였다면 왕이나 신하 모두가 불신도로서 하필이면 사찰경내며 불당의 바로 전방에서 음주와 가무를 즐겼을 것인가도 의심의 여지가 크다. 여러가지 면에서 고찰해 볼 때, 고란사는 백제 당시의 화려한 정자가 세워졌 있던 곳으로 짐작되며 신라의 통일기를 지나 고려초기에 들어와서야 고란사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초기에는 유서 깊은 곳에 석불이나 사찰을 건립한 예가 많을 뿐만 아니라, 더우기 통일 신라의 압력에 짓눌리던 백제의 유민들이 고려가 개국되자 낙화암에서 국운과 더불어 수중의 원혼이 된 백제의 여인들의 위령사찰을 건립하기에 바빴을 것으로 보인다.
현존한 고란사 건물은 은산의 숭각사를 옮겨 지은 것으며, 1959년에 다시 고쳐 지을때에 대들보밑에서 상량문이 나왔다. 그 글은 정조 21년 서기 1797년에 중건할 때 한지에 적어서 넣어둔 것으로 그보다 더 오래된 상량문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었으나 모두 좀이 먹고 상하여 판독할 수가 없었다. 1959년에 고쳐 지을때 사찰의 내부 구조와 지붕을 주로 개수하였으며 기와는 부여 경찰서 옆에 있던 옛날 기와집을 감리교회로 사용하다가 헐리게 되자 그 기와를 옮겨 사용하였다.
고란사에서 유명한 것은 고란초와 약수터라 할 수 있다. 이 고란초와 약수에 관한 전설은 백제왕실과 연결된다. [임금님께서 항상 고란사에 있는 약수를 애용하였는데 매일 같이 사람들을 보내어 이 약수를 운반해 왔던 바 마침 고란 약수터 주변에만 자생하는 기이한 풀이 있었으니 이름을 고란초라고 불렀던 것이며, 이 고란초의 이파리 하나씩을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고란약수라는 증명이 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임금님은 이 약수를 항상 즐겨 마신탓으로 원기가 왕성하여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드시고 사셨다.]는 줄거리의 설화가 아직도 전해오고 있다.
◐능산리 고분군(사적 제14호)◑
부여에서 동으로 논산가도를 향해 약 3km 쯤되는 능산리 뒷산남쪽 기슭에 총 7기의 고분이 일군을 이루고 있는데 앞열에 3기, 뒷열에 3기가 전후좌우로 정열되어 있고 맨 뒷편에는 보다 작은 고분 한기가 위치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이 고분들을 일러 전하기를 왕릉이라 하며, 옛지명도 능뫼부락이라고 하였다. 이 고분들은 1915년 여름에 일본학자인 구로이다가 2기, 세끼노가 2기를 발굴 조사하였는데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그후 1917년에 노모리가 3기를 추가 조사하였고, 같은해 이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소계곡을 건너서 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4기 가운데 2기를 발굴하였다
한편 1937년애는 우메하라에 의해서 전왕릉군의 동쪽 마을 뒤에서 동고분군이라 칭하는 고분 5기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이 능산리 고분군은 동 서와 중앙에 각각 1군을 이루어 3군으로 총 16기가 분포되어있는데 그들 가운데 중앙부에 일군을 이루고 있는 전왕릉군 7기만이 현재 사적 14호로 지정 보호되어 있으며, 사적지 지정 면적은 233,351m 이다.
당시 조사된 고분들은 잘 다듬어진 판석을 결구하여 석실을 구축하였는데 현실과 연도로 구분되는 두개의 방으로 된 횡혈식 석실분이다. 이들 고분은 모두 왕과 왕족들의 분묘라고 생각되는데 백제 후기의 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현적인 석실분들이다.
특히 동하총은 벽화분으로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바 이들 고분 가운데 특수한 천정양식을 보여 준 대표적 고분이다.
◐동하총(東下塚)◑
이 고분의 봉토직경은 27m 이었는데 봉토아래에는 할석을 2, 3단 쌓은 호석이 봉토 연변을 따라 돌려져있다. 현실은 장방형으로 앞뒤가 길며 네벽과 천정에 벽화가 있다. 현실의 크기는 3.25m 1.15m 의 평면에 높이는 1.94m 인 상자형 방이다
각 벽석과 천정석은 각 각 한매의 판석으로 물갈이를 하여 면을 매끄럽게 다듬었는데 북벽과 동벽은 편마암을 썼으며 기타는 화강암을 이용하였다. 바닥은 전돌을 깔고 그 중앙부에 전돌을 가로 세워 한 단 높여서 관대를 설치하고 관대 아래에는 배수로를 구축하여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현실내의 벽화는 주· 황· 적· 흑색으로 네벽에는 사신도를, 천정에는 날으는 구름과 그 구름사이에 연화문을 예리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그렸다.
다시 말해서 북벽은 현무, 남벽은 주작, 동벽은 청용, 서벽은 백호 등 사신도를 그리고, 천정은 연화비운문(蓮花飛雲文)을 채색하였는데 천정의 연화문만은 아직도 선명한 반면, 서벽의 백호는 머리 부분만이 희미한게 남아있을 뿐이고 기타의 벽화는 적외선 사진으로 약간 나타날뿐이다.
현실 전방의 입구에는 연도를 두었는데 연도의 길이는 3.7m , 폭 1.43m , 높이 1.68m로 현실과 접해서 바깥쪽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차츰 벌어지고 있다. 현실은 거대한 1매의 방형판석으로 폐쇄하고 연도는 방형의 전돌을 쌓아서 막았으며, 연도의 좌우 벽은 할석을 쌓고 회를 발라서 벽면은 회벽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묘제는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후기 고분과 통하고 있어 고구려의 문화적인 영향이 백제 후기묘제에 반영되어있음을 살 필 수 있는 것이다.
◐중상총과 기타고분◑
중상총의 현실 평면은 약 3.25m, 폭은 1.45m로 장방형을 이루고 , 높이는 1.7m인데 벽면 형성은 양귀를 크게 접어서 5각형( )으로 결구하였다. 좌우 벽과 뒷벽은 잘 다듬은 화강석재 판석으로 조립하고 상단부의 귀접이 한 벽석은 좌우수직벽 위에 눌러 얹어서 안으로 기울인 후 천정석을 덮었다.
동측에 약간 치우쳐 있는 연도는 길이가 약 1.1m에 불과하나 현실과 연도를 각각 판석으로 폐쇄하였다. 이러한 고분 양식은 부여 지방에 대종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는데 주목되는 점은 현실 중앙바닥에 높이 17cm의 석상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목관과 관뚜껑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시신의 머리쪽에는 장신구로 보이는 금동제 파편들이 집중되어 있는 점이다. 목관 옆과 주위에서는 머리 부분만 도금된 못과 꽃 모양으로 된 크고 작은 도금 장신구 10여개와 옷에 장식하였던 금실 몇 오라기가 수습되었으며, 기타 송곳모양으로 된 쇠붙이도 2점이 발견되었다. 또한 부식된 배모양 조각들도 확인 되었는데 이 고분도 도굴된 상태였다.
관장식구에는 다양한 문양을 투각하였는데 이러한 장식적인 요소는 각각 장식금구마다 심볼로 나타나고 있다.
중하총은 천정 구조가 터널형으로 되었고 각 벽은 회를 발라 도장하였으며 서하총은 중상총과 구조가 거의 같으나 연도가 거의 중앙부에 있느며, 동 서 고분군의 구조는 중상총 서하총과 같은 구조로서 여러 장의 치석된 판석을 결구하여 석실을 구축하였다.
◐왕궁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 43호)◑
부여의 지세는 백마강이 동북쪽으로부터 서쪽으로 들어오다가 부여 중심부를 감싸고,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다시 동쪽을 향해 흐르는데 그 모양은 마치 반월과 같은 형세여서 부여의 고성을 일명 반월성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지세의 이점을 한껏 이용하여 그 국도를 정한 백제는 도성 방어를 목적으로 나성을 구축하였는데 그 주축은 부소산성에 두고 있는 것이다.
부소산성은 도성과 궁성 방어의 주된 목적으로 이룩된 산성으로서 그 남록은 평탄대지를 이루고 있다. 부소산을 진산으로 남록중심에 전개된 대지는 그 면적이 약 25,000평에 달해 동서쪽에는 각각 낮은 구릉이 부소산과 연결되어 발달하였으므로 자연적으로 이 대지를 포용하였다.
이러한 이러한 입지적 면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지대로서 지형또한 높아서 부여중심가를 굽어 보게 된다. 이러한 점에 연유되어서인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이곳을 관아지로 채택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사항은 이들 관아 건물에 모두 백시대제의 초석과 판석을 전용하고 있는 사실이다.
관아 건물에 전용된 석재 또한 규모가 크고 치석 수법도 정교하여 일반석재와는 구별되고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조선시대까지 이곳에 산재하였던 석재를 이용하여 관아건물을 지었던것으로 판단하는데 이는 멀리서 가져온 것으로는 그 수량이나 중량으로 미루어 수긍이 되지 않는다. 현재도 민가에는 100여개 이상의 석재가 남아있고 부지내에서는 당대의 와당을 비롯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이 일대가 백제시대의 왕궁지로 추정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백제 왕궁지에 대해서는 그 범위를 부여박물관 부지와 인접 지역일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시되고 있는 것이다.
부여박물관 부지내에 있었던 백제시대의 석조(보물194호)에는 당나라 소정방의 기공 비문이 일부 조각되어있는데 이 석조는 궁실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박물관 앞에서 도로 포장작업 중에 발견된 석조나 이곳에서 건축 기초공사 중 발견된 배수구 등의 유구는 백제시대 왕궁지와의 관계를 예상 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들이다. 또한 유 인원 기공비가 삼충사 후록에 세워졌던 배경도 왕궁지와 관계가 있을 것이며, 부소산 남록(부여여고 후정)에 있는 팔각정(八角井)이 궁정(宮井)으로 전하는 것도 왕궁지와 관련된 것이라 본다. 또한 부여 양조장 앞을 통과하여 정림사지에 이르는 도로는 부여 시가지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도로가 왕궁지에서 정림사에 이르는 당대의 도로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나 하듯 석목리에서 부여에 진입하는 중심가도를 포장할 때에 두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거대한 방형 초석 4개가 출토됨으로써 이 곳이 왕궁지로 통하는 문지이거나 궁궐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따라서 부소산성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이 일대를 왕궁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타당한 것이다. 공주지역의 백제 왕궁지도 공산성을 뒤에 두고 그 남록에 궁궐을 경영하고 시가 중심에 대통사지를 배치한 도성 경영 방법과 합치되는 점도 백제 왕궁지 탐색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1982 ∼ 1983 2차에 걸쳐 충남 대학교 박물관 유적 조사단이 박물관 입구를 발굴 조사한 바 백제시대의 유물과 왕궁의 궁원에 시설되었던 연못으로 추정되는 곳이 발견되어 83년 9월29일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 43호로 지정 되었다.
◐궁남지 (사적 135호)◑
궁남지는 백제궁성의 한 별궁에 속한 궁실의 원지로서 무왕때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못은 주민들에 의하여 [마래방죽]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되어 왔고 자연적인 못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간 백제 문화의 다방면에 걸친 연구의 결과로 백제 시대에 조영된 인공 연못으로 주목되면서 궁남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궁남지 연못으로 명명하였다.
이 후 이 연못에 관심이 높아져 세인이 주시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궁남지는 본래의 면적이 약 3만여 평엥 달하는 광대한 면적이였으나 깊은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매립되어 농경지화하였다. 이 후 나머지 9,500여 평도 매립될 위기에서 사적지로 지정되어 일부나마 보존된 것이다.
1965년 7월 정부에서 이에 대한 일부 복원공사를 실시한 결과로 현재의 규모로 보존되고 있는데 13,772평으로 축소되어 있다. 궁남지는1964년에 사적135호로 지정되었으며, 정화공사는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삼국사기(백제 본기 무왕 35년조)에는 "궁성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이끌어 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한 바에 따라 수중도서를 두고 무왕 출생 설화와 관련하여 지금의 정자 이름도 포룡정이라 현액하였다.
궁남지 동편에 있는 화지산 서록의 평탄대지에는 몇몇초석과 지대석열이 지하에 묻혀있고 주변에는 백제시대의 와편이 다수 흩어져 있는데 이곳이 당대의 건물로서 이궁지로 전하고 있으나 궁남지 변에 세워진 별궁의 유지인듯 하다. 또 동 부지내에는 잘 다듬은 대리석 장대판석을 결구하여 8각으로 짜 올린 우물이 있어 어정이라 이르는데 별궁과 관련된 우물임이 시사되고 있다.
이 유구들은 무왕의 출생설화와 관계가 있는 것들로써 삼국유사 무왕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화가 전한다.
[무왕의 이름은 장이며 그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목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그 아이 이름을 서동이라 하였으며 그 동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때문에 마동이란 이름을 지은 것이다] 또한 이 설화에 따르면 서동은 신라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와 서동요를 퍼뜨려 결혼한 후 후사가 없는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다.
이와같은 설화 내용에서는 남지변이 별궁지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남지가 별궁원지란 점이 암시되는데 이는 설화적인 한계성이 있음을 살피게 된다.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이 부합되지 않는데, 삼국유사는 무왕의 어머니가 집을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지었다는 것이고, 삼국사기는 무왕 35년 3월에 궁남에 연못을 팠다는 점에서 아는 이미 있던 연못을 확장하였거나 고쳐 수축한 내용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앞선 임류각을 살펴보면 [동성왕 22년 봄에 임류각을 궁성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길이나 되었고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이 있는데 현재의 그 유구들이 학술조사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신라의 안압지보다 74년이나 앞선 동성왕대의 일이며, 안압지와 임해진은 문무왕14년 2월의 일이니 궁남지가 40년 앞서 조성된 것이다.
무왕이 연회를 베풀었다는 망해루와 궁남지, 측근의 군수리 폐사지는 임해전과 안압지 및 천주사지와 서로 비교되는 공통적인 유사점이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신라의 안압지는 궁남지의 모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군수리사지(사적 44호)◑
군수리사지는 사원이름이 전하지 않는 백제시대의 폐사지이다. 1953년과 1936년의 2차에 걸친 이시다에 의해 백제사원지에대한 최초의 발굴조사가 되었다. 그결과 가람의 배치를 밝힐 수 있었음은 물론 사지 전역에 걸쳐서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연화문과 안동문이 아름답게 양각된 상자형전들이 귀중한 와전이 출토되었다. 탑지 조사에서는 목탑지의 구조 파악은 물론 심초석 부근에서 금동 미륵보살 입상(보물 330호)과 남석재여래좌상(보물329호)이 출토되어 백제 사원과 불교문화연구에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강당지는 남북 약 20m, 동서 30m이었으며 18m를 겨한 남쪽에서는 남북약 20m, 동서 약 27m의 기단이 발견되었는데, 초석과 적심석을 통해서 전면이 9간인 금당지임이 확인되었고, 금당지에서 10m 떨어진 남쪽에서는 목탑지가 있었다. 목탑지중심부의 지하 1.2∼1.5m 사이에서는 앞에서 말한 2점의 불상과 토기· 철기· 금제고리· 작은 구슬 등을 발견하였으며 1.8m 밑에서 1변 약 93cm의 방형으로 다듬은 중심주좌가 있는 큰 초석을 발견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목탑지의 기단부임이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가람 배치는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선상에 배치된 백제시대의 단탑계 가람 배치임이 최초로 확인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백제시대의 사원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시하여 주었다.
이상 예시한 가람 배치나 출토 유물울 통햐서 백재의 불교 문화가 그 일부나마 드러남과 동시에 학계의 관심은 날로 증대되어 차후 이 지역에서 많은 학술조사가 실시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당시 출토되었던 유물을 살펴보면 금동 광배편은 강당지 남쪽에서 출토되었는데 주물로 만들어 도금하였다. 장식 문양은 수겹의 평행곡선으로 된 화염문 위에 인동당초문이 들어가 있다. 토제광배편과 금고리는 탑심초석 옆에서 발견되었고, 옥류(구슬류)는 금당지 주위와 탑지에서 다수가 출토되었는데 1,150여개에 달한다.
옥류를 분리하면, 유리질의 파리옥· 옥돌로된 마노옥· 은제옥· 토제옥 등인데 황· 녹· 적색 등 각색이 구비되어 있다.
금동제 방울과 구두모양 금구는 금당 서측에서 발굴되었고, 그 외 철못은 각 건물마다 다수가 발견되었으며 토기도 삼족토기· 접시형토기· 사발형토기 등 많은 양의 출토가 있었다.
그러나 출토 유물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의 출토이다. 목탑지 중심초에서 발견되었는데 길이는 1자 7치이었다. 이때 발견된 칠지도는 현재 그 소재가 불명이나 백제시대의 칠지도인 하나가 일본 이소노가미시사에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일본국보로 지정되어있는 이 칠지도는 주간을 이루고 있는 한 좌우에 각각 세 가지씩 곁가지 칼이 뻗어 있어 도합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칠지도라는 이름이 유래된 듯하나 주간을 이룬 칼 몸통에는 백제시대의 제작품임을 시사하는 명문이 전후 면에 남아 있다. 금으로 상감한 명문은 칼에 대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한일 고대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데 이 칼에 대한 역사기록으로는 일본 서기에 전하고 있어 이를 근거로 백제 근초고왕때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에 있는 칠지도의 상감 명문을 해독하면, 앞면에 [태화 4년 9월 16일에 강철을 강하게 연마해서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이를 가지고 나아가면 백병을 물리칠수 있을 것이므로 의당히 제후왕들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가 제작함]이라 하였고, 뒷면에는 [선세 이래로 아직 이러한 칼이 없었던 바여서 백제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이 왜국 왕지(王旨)를 위해서 만들었으니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하는 내용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 칠지도는 부여 박물관에 현재 모조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군수리 폐사지 목탑지심초석에서 발견된 칠지도와 비교되는 백제 시대의 작품이다. 이와 같이 백제가 538년 사비 천도 이후에 백제 불교문화는 찬란하여 백제 영내에서 불교 문화의 융성과 불사 건축이 활발하였음은 기록 통해서 추찰되어 왔지만 그 문화유산과 유지로서 확실히 입증되었으며 당대의 문화수준은 신라, 일본의 불사 건축을 지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라가 국가적 대업으로 황룡사 탑을 건립하고자 할때에 그 역량이 미치지 못하여 백제의 공장 아비지를 청해 간 사실이나, 일본에 있어서는 불사건축에 관계되는 공장들을 파견한 사실 등을 삼국유사 ( 권3 황룡사9층 목탑조)나 일본서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두 백제의 높은 문화수준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의 사찰의 가람 형식도 백제의 공인에 의해 추진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여 일본 가람형식의 연원을 찾고자 조사한 최초의 백제사지가 군수리 폐사지이다.
◐소박 장중한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9호)◑
정림사지 내에 외로이 서 있는 5층 석탑은 일명 "백제탑" 이라고 부른다. 이 탑은 부여의 표상이며 또한 자랑거리인데, 1350여년을 옛 모습 그대로 예나 현재나 한결같이 나그네를 반기고 있다.
백제가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할 때,사찰은 전화 속에 불타 버리고 오직 석탑만이 오늘에 유일하게 전하여 온다. 이 탑은 잘 다듬어 마름질한 화강석재 149매를 결구하여 짜 올렸는데,높이가 8.33m에 이른다. 한편 탑의 가구적인 면에서는 목조탑의 수법이 그대로 계승되어 나타난 관계로 목조탑파의 번안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7세기 초의 걸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가장 빼어난 탑상이다.
한때는 초층 탑신에 새겨진 소정방의 비문으로 인하여 소정방이 세운 탑으로 오인 되었으며 또한 평제탑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간의 학술 조사와 연구 결과에 의하여 그 오명을 벗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대당평 백제국 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머리 글자로 시작되어 탑초층 4면에 해서체로 새긴 소정방의 기공비문은 당 현경 5년(서기 660년)8월 15 일에 건립(癸未建)이라 되어 있어 이 탑이 이 때에 건립된 것으로 오해되어 왔으나 백제가 같은 해 7월 18일에 멸망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계미건(癸未建)은 석탑건립을 말함이 아니고 비문을 탑에 새긴 날짜임을 알았으며 또한 그간의 조사 연구로 백제시대의 가람 중심에 위치한 불사의 신앙적인 탑파임이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탑파는 불교의 신앙 중심인 건축물로서 항상 가람의 중심에 위치하고 또한 가람 형성에 있어서 탑을 중심으로 불전이 배치되고 있음을 살필수 있는데, 이러한 탑파 중심의 고대사원에서 목조탑이 성행되다가 석탑으로 변화를 꾀하여 후대에는 완전히 바뀌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나라에 많은 석탑이 현존하고 있어서 석탑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연원은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러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변화의 과정을 이 탑은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며 조형적인 면에서 그러한 사실과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을뿐만 아니라 석탑의 창안이 백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또한 그 증거로서 강조되고 있는 실체이다.
이와같이 석탑 창안의 효시로서 탑파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최고의 모범적인 석탑이다. 오늘날 탑중의 탑으로 극찬되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적인 조형 미술의 값진 유산이며, 우리 민족 문화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것이다. 이와같이 크나큰 의의를 지니면서 당대의 건축미를 뽐내고 있는 탑은 익산의 미륵사지의 서탑과 같이 일견하여 목조탑파의 구조와 유사한 특색이 가미되어 있음을 지적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목조탑에서 석탑화한 본보기를 목탑의 수법이 계승되어 남아있는 형식변화의 일면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제탑의 구조는 좁고 낮은 단층기단을 정연하게 마련한 가운데 옥신은 한 간 벽을 구성하여 두장의 판석으로 짰고, 네모기둥은 엔타시스(배흘림)양식으로 되었다. 또한 옥개석의 전각 머리는 살짝 치켜들어 반전시켜서 목조 건물의 처마와 같이 경쾌한 맛을 자연스럽게 가하고 있다. 제2층 이상의 옥신은 높이가 낮아져 변화없이 처리되었으나 초층과 다르지 않으며 다만 4,5층에 이르러서 옥신의 벽이 1매의 돌로 간략화되고 있다. 2층 이상의 옥신 괴임돌은 별석으로 정연하게 짜여 있으나 탑신과 옥개의 사이에는 두공양식을 표현한 한장의 판석을 얹었고 다시 그위에 모를 죽인 소로받침을 놓았으니, 이것이야 말로 목조에서 석조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보인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수법의 출현임을 알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다른 탑파에서는 일찌기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기법의 발생으로 지적될 뿐만아니라 각층의 짜임새나 체감률도 알맞게 조화되어 있어서 [리드미칼]한 인상을 주고 있다. 따라서 장중하면서도 안정된 조형미로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위력에는 옥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고대탑파가 목탑에서 석탑화한 전형적인 예를 이 탑에서 찾게되는 것이며, 이 탑 또한 그러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탑인 것이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이야말로 백제에서 창안된 석탑의 효시이자 새로운 양식 창출에 성공한 석탑의 모범이며, 그 조형을 위하여 결구적 수법을 최초로 채택함으로써 영원불멸의 탑상 조영에 성공한 우리나라 최고의 탑파이다.
이 탑을 가리켜 정림사지 5층 석탑이라 함은 강당지 부근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암기와에 찍힌 절 이름에서 비롯한 것이다.
◐정림사지 석불좌상(보물 108호)◑
정림사지 내 북쪽에 위치한 이 석불은 한때 지방민들 사이에 소정방 상으로 와전되었으므로 현재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소정방 상이라고 믿게 한 그릇된 판단은 이 석상이 지닌 이례적인 면에서나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비문으로 어림한 나머지 그같은 엄청난 오류를 범하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철저하게 사라져버린 백제문화 유산은 이곳에 사찰 이름조차 남기고 있지 않았으므로 탑신에 남아있는 비문을 근거로 생각한 나머지 터무니 없는 속설이 와전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석상 자체가 불상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주저하게 되는 해학적이고도 특이한 형상을 취한 그 모습에서돋 그와 같은 부질없는 오류를 가능하게 하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석상은 사실 머리 부분과 보관은 본래의 것이 아닌 것이다. 후대 어느 시기엔가 파괴되었던 이 불상에 지방인들이 연자방아의 멧돌로 머리 형태를 만들어 얹고 다시 보관을 씌웠으므로 현재와 같은 기형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불상의 통례적인 조상양식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 불상은 심한 마멸과 파손으로 형체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뿐 세부적인 내용 파악은 어려운 처지에 있다. 왼쪽 무릎과 바른 팔은 없어졌으나 좁은 어깨와 왼손이 가슴께로 올라가 오른손과 한데 모아지는 형상을 취하고 있는 모습은 지귀인을 한 비로나자불이 틀립없다. 이 상은 일명 대일여래라고도 하는 상인데 불체에 비하면 대좌는 훨씬 잘 남아 있다. 좌대는 뛰어난 작품으로서 상대에는 앙연화가 조각되었고, 중대의 팔각간석은 각 면마다 안상을 표현하였다. 하대는 복판복연화 8엽을 두드러지게 볼륨을 주어 처리하였고 그 아래 지대석은 두단의 8각석 각면마다 세개씩 안사을 새기고 있다. 이러한 우수한 조각수법은 불상도 동일하였을 것이지만 지금은 겨우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현편이다. 석불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은 백제 시대 사찰내의 강당지 중심인데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 곳에 불당을 건립하고 "정림사"라 현액하여 이 석불을 주존불로 하였던 것이 그간의 조사 결과에 의해 밝혀졌다.
이 석불 주변에서 수습된 글자 박힌 기와를 통해서도 그 연대와 절 이름이 확인되고 있다. 암기와의 표면에 찍힌 명문에는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 大藏當草)]라 하였는데, 태평은 거란족인 요나라의 연호로서 서기 1028년 고려 현종 19년에 해당한다. 이때에 사찰을 이곳에 다시 건립하고 정림사라 하였던 것을 알겠으며, 이 불상의 제작도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명문자료이다. 따라서 그간의 학술 조사에서 백제시대의 강당지 유구가 하층에 남아 있고 상층에는 고려시대의 불당유규가 겹쳐있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서 이러한 내용을 더욱 뒷받침하여 주었다.
◐신동엽 생가와 그의 시비◑
신동엽의 생가는 계백 장군 동상근처의 부여 동남리 294번지이다.그는 1930년 그곳에서 태어 났으며 그의 나이 40이 되던해인 1969년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신동엽 생가는 비교적 관리가 잘되고 있다.부친 신연순옹이 집을 지켰으나 세상을 떠난 뒤 지금은 홍산중학교 임의수선생이 집을 관리한다고한다. 큰 방에는 추모제때 학생들이 만들었다는 시화들이 가득 걸려 있다.그는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된 후10년동안 그의 작품세계는 일관되게 한국의 문예부흥을 노래하였고 <금강>이란 서사시에서 그의 작품은 민족의 혼을 끌어안는 강인한 힘을 보여 주었다.
신동엽은 그의 시세계에서 언제나 역사의식을 불어 넣고 있다.바로 그것이 신동엽을 부여의 시인,이미 사라져 간 백제의 시인이라 부르는 바다.
그의 대표적 서사시인 <금강>은 1894년 갑오년의 농민전쟁의 발생과정과 그성쇠의 의미를 오늘의 관점에서 확인 해주는 작품이다.바로 미완의 혁명인 4.19를 동학 농민전쟁과 연결시켜 작품화 한것이다.
또한 1967년에 간행된 57인 시집에 실린 <껍데기는 가라>역시 순수한 마음의 회복과 현실적으로 순박한 마음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힘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시이다.
신동엽의 시비는 백제교 옆에 호젓이 서 있다.시비 건립 당시에 탄압으로 인해 그의 시비에는 그의 대표적 시인 <껍데기는 가라>와 같은 작품을 새기지 못하고 서정시에 가까운 <산에 언덕에>를 각인하게 하여 시인의 정신을 유약하게 만들기 까지 하였다.부소산에 시비건립을 에정하였으나 결국에는 백마강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었다.오히려 그의 시 정신을 생각할 때 그곳이그가 원하는 곳이었을지도 모른다.왜냐하면 그는 진정 부여를 사랑하고 사라진 아사달과 아사녀의 후예들이 이 땅에서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안녕
언젠가 또 다시 만나지리라
논길
서해안으로 뻗은 저녁노을의 들길,
소담스럽게 결실한
붉은 수수밭 사잇길에서
우리의 입김은
혹
해후할지도 몰라."
◐무량사 5층 석탑 (보물 185호)◑
무량사 극락전 앞에 세워진 거대한 5층석탑으로서 웅대하고 장엄한 기품이 위압적이다. 조탑 형식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수법을 따랐으나 옥개석의 처마끝을 처리한 물막이 흠 같은 것은 고려시대의 수법이다. 또한 이 탑은 일견하여 정림사지탑의 양식을 따른 것 같잉 보이는데 이는 지역적인 영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탑은 여러 양식을 절충하였지만 이들을 잘 조화된 고려초기의 빼어난 탑상이다. 이 탑은 도괴의 위험이 있어 1971년 해체복원하였는데 5층 탑신에 직경 15cm, 깊이 10cm의 둥글게 판 사리장치 구멍이 있었다,. 이 석탑에서는 사리구(청동내외합)가 나왔는데, 그 안에는 수정소병과 다라니경· 자단목· 향가루 등이 있었고 회백색 사리 93과(?)가 든 청동제 병을 비롯하여 수정 소병에서도 청색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또한 제3층 탑신에서도 도금된 소형좌불 1구가 발견되었으며, 초층탑신 내에서도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좌상, 관음보살좌상이 남쪽을 향하여 앉아있었다. 이상의 불상 4구와 5층 탑신의 사리병은 무량사에서 현재 보관중이다.
◐무량사 극락전 (보물 제 356호)◑
무량사를 사찰측에서는 신라범일국사의 창건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밝혀진 학술적 자료에 의하면 고려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된다.
무량사는 임진왜란때 불타고 조선 인조때 재건되었는데 인조14년(서기 1636년)에 주죄된 범종과 불화가 전하며 김시습의 자화상도 간직되어있다.
극락전 내에는 토불 3좌가 봉안되었는데 중앙에는 아미타여래좌상(높이 8척, 가슴둘레 24척)과 좌우 협시불에 지장보살 대세지보살(높이 16척, 가슴들레18척)이 정좌하여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극락전은 중층건물인데 내부는 상하층 구분없이 하나로 통해버린 가구 양식을 보이고 잇다. 내부평면 구획은 주위 4면엥 외둘레 간을 두고 그 양쪽에 3간 × 2간의 평면을 구획하여 고주를 세웠다. 불단은 이 중앙 부분의 뒤쪽 절반을 차지하여 마련되고 그위에 삼존불을 안치하였는데 이러한 불전 건축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다.
이 극락전을 개축하고 3존불을 개금하는 불사를 할때에 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연기지를 비롯한 불경 등이 들어있었다. 연기지는 숭정 16년(서기1643년)의 연대기명이 있어서 불상의 제작연대를 알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불경은 청· 흑· 홍색의 다라니경 목판본 500여장과, 화엄경외에 한글로 풀이한 화엄경 2책 등 30여책이 있었고, 묘법연화경도 2책이 들어있었다. 따라서 은제통에는 5보· 색실· 다섯가지 베조각· 다섯가지 약· 오곡 등이 들어있었으며, 은판도 나왔다.
◐무량사 석등 (보물 제 233호)◑
5층석탑앞에 있으며 1971년 보수공사시에 지하에 매몰되었던 4각형 지대석이 발견되어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지대석은 2매의 판석으로 되었는데 한변의 길이가 117cm에 두께는 10cm이었고, 그 아래에 한변의 길이가 174cm인 안상석을 다시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출시킨 하대석과 상대석에는 풍요한 인상과 연판이 조각되었으며, 평면이 8각형으로 이루어진 석등이지만, 화사석은 부등변 8각형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은 8각 추녀마다 반전이 뚜렷하여 경쾌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낙수면은 합각이 현저해서 둔하지 않다.
전체적인 조형미는 옥개석이 약간 큰 감이 없지 않으나 처마를 살짝 치켜든 후 화사석에 얹혀 연봉과 조화되면서 경쾌한 맛을 더 했다.
◐김시습 부도와 자화상(부도:유형문화재25호/자화상 :유형문화재64호)◑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때 생육신중의 한사람으로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불교 의식으로 부도가 세워졌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또는 동봉으로 5세때 중용, 대학에 신통하여 신동이라 하였고,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이라 지어주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그는 홍산현 무량사에 입적하였는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후에 파보니 얼굴이 산사람과 같았다. 생존시 자신이 그린 자화상이 무량사에 전하며 그의 부도는 무량사 무도밭에 있는데 일정시 폭풍으로 거목이 쓰러지므로 부도가 도괴되어 내부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부도의 형식은 8각 원당형이다.
◐무량사 당간지주 (유형문화재 57호)◑
천왕문밖의 오른쪽을 향해서 서 있는데, 거대한 한쌍의 돌기둥이 정교하게 다듬어져 신라시대의 당간지주와 공통된 조각솜씨를 보이고 있다. 건립시기는 무량사 석탑이나 석등과 같은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간지주는 당간을 받치는 기둥을 일컬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간은 불가의 종파를 나타내는 기를 게양하였던 깃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