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꿈 잠시 접고 치킨집 창업”
[김정화 교촌치킨 일원본동점 점장] 佛 유학 거친 언어학 박사 과정 출신… 어린이들 입맛 잡아 성공
글 김명룡 기자 (dragong@joongang.co.kr)
취업이 힘들고 조기퇴직 바람이 불고 있는 요즘에는 고학력자들까지 창업 전선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6년간 유학한 언어학 박사 출신의 김정화(42)씨도 그런 케이스다.
교수가 되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뚫고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강단에 서는 꿈을 잠시 접은 그는 교촌치킨 강남 일원본동점에서 새 삶을 살고 있다.
“옛날 일은 다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데,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려고 하니…”
처음에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나 솔직한 창업 스토리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간곡한 요청에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의 제 모습이 평소 그려왔던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렇지만 치킨 집을 경영한다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지는 않아요. 꿈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이만큼 장사 잘되는 치킨 집도 못 만들었겠죠.”
강사 자리조차 찾기 힘든 냉혹한 현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에서 언어학 석사를 마친 김씨는 1993년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소르본느대학에서 인공지능언어학 박사 과정을 밟던 중 경제적 어려움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98년 교수가 될 부푼 꿈을 안고 귀국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언어학 분야만 해도 저처럼 프랑스 유학을 마친 사람이 수십명은 되더군요. 보따리 강사 자리조차 찾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첫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더군요. 직장을 구하려 했지만 실용 학문이 아닌 인문학을 공부한 저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더군요.”
당장 생계가 문제였다. 기나긴 유학생활로 인해 수중에 남은 재산은 별로 없었다. 멀리 있는 교수 자리만 바라보며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대학 학부까지 합해 16년간 꿈꿔왔던 교수의 꿈을 잠시 접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장 많은 돈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처음 선택한 일이 보험영업이었다. 경남 울산에 보험대리점을 낸 그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까지 보험을 권유할 정도로 열심히 뛰었다. 그는 “오직 생계만을 위해 부끄러움도 잊고 뛰어다니던 시절”이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노력한 덕분에 2001년 무렵에는 월 3백만원 이상의 수입이 생겼다.
7천만원 들여 창업, 월수 5백만원
보험영업으로 생활고는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했다. 향후 진로를 놓고 고민하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치킨을 배달시켜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도 아무 생각 없이 치킨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배가 고팠던 탓도 있었지만 맛이 좋았다.
창업 아이템을 구상하고 있던 그는 주저없이 그 치킨점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손님이 북적댔다. 까다로운 자신의 입맛을 만족시킬 정도의 치킨 맛이라면 창업을 해도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은 돈으로도 창업이 가능하겠더라고요. 어렵게 분양받은 아파트를 6천만원에 전세를 놓고 울산 변두리에 방이 한 칸 딸린 가게를 얻었지요.”
김점장은 점포를 구하고 남은 전세금으로는 프랜차이즈 가맹비를 냈다. 2002년 1월 처음으로 가게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장사가 더 잘됐다. 간장 맛이 나는 교촌치킨의 새로운 소스는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김점장네 치킨은 하루에 40마리씩 팔려나갔다. 하지만 난생 처음 하는 치킨 장사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오부터 밤 12시까지 문을 열고 있어요. 영업 준비하는 데 1시간, 영업이 끝난 뒤 기름 솥 갈고 냉장고에 있는 닭 정리하는 데 두 시간이 더 걸리죠. 하루 꼬박 15시간의 중노동을 하는 셈이죠.”
김점장은 “기름을 끓이고 닭을 튀겨내는 일은 평상시 안 쓰던 근육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더 힘들다”고 설명했다.
“하루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될 만큼 힘들었어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요. 그렇지만 일이 끝나고 잠든 아이들 머리 맡에서 그날 번 돈을 세는 재미 때문에 그만둘 수 없더군요.”
처음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부부 둘이서 요리부터 배달까지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렇지만 밀려오는 주문을 둘이서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찼다.
“무작정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3년은 둘이 해도 가능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건강을 챙기는 편이 낫겠다 싶었죠.”
저녁시간에 일을 도와주는 주방 아줌마를 고용하면서 매출도 덩달아 늘었다. 월 70만원의 임금을 지불했지만 주문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여력도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지나자 배달을 전담하는 아르바이트 학생도 둬야 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치킨이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매달 4백만원씩 저축할 만큼 벌이가 괜찮았어요. 설날엔 고향에도 가지 않고 일을 할 만큼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있었죠.”
그렇게 하기를 11개월. 영업이 잘 되자 서울에서 더 크게 장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교촌치킨점 매장이 4백 군데가 넘지만 불과 8개월 전만 해도 서울 지역에 불과 50군데밖에 없었다. 치킨 집 운영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던 그였다.
퇴근길 주민 상대로 시식 행사
김점장은 틈나는 대로 서울로 올라와 가게 터를 보러 다녔다. 한번 올라오면 여관에 방을 잡고 2~3일씩 서울 시내 복덕방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기를 서너 차례. 지금의 강남구 일원동에 점포 자리를 잡았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가라서 권리금이 없었어요. 배후를 지켜보니 아파트 단지도 많았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지요.”
그는 울산에 있는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수중에 있는 돈은 1억7천만원. 비싼 강남 땅에서 창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창업자금으로 1억2천만원을 쓰고 자신과 가족들은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지하 단칸방으로 옮겼다. 남은 돈 4천만원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남겨뒀다.
“창업의 기본 공식이지만 가장 우선순위가 높은 것이 가게였습니다. 살 집은 맨 나중에 생각했죠.”
그렇다고 창업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입주한 상가에는 이미 3개의 치킨집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점장은 이런 사실을 알고도 그 자리를 택했다.
“치킨 집이 3개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수요가 있다는 방증이지요. 수요가 있으니 경쟁 점포와의 경쟁에서 이기면 된다는 공식도 성립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그의 입점을 꺼리는 경쟁 점포들의 방해공작도 이어졌다.
“전기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상가 전체의 전기를 잠시 끊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막으려고 치킨집 세 군데가 번갈아가면서 24시간 영업을 하기도 했지요.”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4월에 일원본동점을 오픈했다. 처음엔 교촌치킨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 고전을 했다. 김점장은 아파트 단지에 전단지를 뿌리고 퇴근길 주민들에게 무료 시식행사를 하면서 치킨 맛을 알리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독특한 소스의 치킨 맛은 일원동 주민들의 입맛을 잡는 데도 효과를 발휘했다.
지난해 8월부터는 하루 판매량이 1백 마리를 넘어섰다. 지금은 주방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점원 1명, 배달점원 2명이 필요할 만큼 규모가 커졌다. 요새는 조류 독감이라는 복병을 만나 매출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김점장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다. 치킨 맛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다.
“조금 지나면 치킨이 안전하다는 것이 판명될 테니까요. 그때는 다시 열심히 뛰어야죠. 앞으로 몇 년 동안 돈을 모은 후 미뤄 둔 꿈에 도전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