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입적 소식이 있네요.
종교간의 벽을 허문 분이라는 평이 있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음은 법정스님의 산문집 중에서
제가 무척 좋아하는 글인데요, 예전에 함 보셨죠?
○ 예수님과 부처님이 자리를 같이한다면?
법정스님의 ‘무소유’ 중에서
내가 즐겨 읽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부처님’으로 바꿔 놓으면 사이비 불교도들에게 해당될 적절한 말씀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오늘날 만약 예수님과 부처님이 자리를 같이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으르렁대는 사이비 신자들과는 그 촌수가 다를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의기가 상통한 그들은 구태여 입을 벌려 인사를 나눌 것도 없이 서로가 잔잔한 미소로써 대할 것 같다. 그들의 시야는 영원에 닿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맺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똑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로따로 길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 될 것은 없다. 사실 종교는 인간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특유한 사고와 취미와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본다면 털끝만큼도 이질감이 생길 것 같지 않다. 기독교나 불교가 발상된 그 시대와 사회적인 배경으로 인해서 종교적인 형태는 다를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보다 지혜롭고 자비롭게 살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이해의 농도는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4장 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