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첨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 4편, 5편)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6)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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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humsak Kanoknan) 헌법재판소가 2008년 9월 9일 사막 순타라웻 총리의 요리쇼 출연을 문제삼아 그의 총리 자격을 박탈하자, 원내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던 친탁신 성향 '국민의 힘 당'(PPP) 소속 국회의원들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매제인 솜차이 웡사왓(중앙)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을 총리로 지명했다. 솜차이 총리가 2008년 9월 18일 자택에서 총리임명 국왕령을 공식적으로 전달받은 후, 가족들을 대동하고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부인 야오와파 웡사왓(좌측)은 탁신 전 총리의 큰 여동생으로서, 여당 내에 자신의 계파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중진 정치인이기도 하다. 솜차이 총리가 취임하자, 보수 옐로셔츠 진영은 웡사왓 정부에 대해서도 공격을 계속해나갔다. 2008년 12월 2일, 헌법재판소는 3개 연립 여당이 부정선거를 치뤘다며 정당해산 명령을 내렸고, 솜차이 웡사왓의 총리 재임기간은 불과 3개월도 넘기지 못했다. 이후 2년반 동안, 보수정당인 '민주당'은 총선 없는 정계개편을 통해 집권을 하게 된다. [크세] |
2008년 10월 15일, 태국과 캄보디아의 분쟁 국경에서 양국간 적개심이 분출했다. 태국과 캄보디아 군대는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 프레아비히어 사원) 주변의 분쟁구역에서 포격전을 주고받으며 무력충돌의 불길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태국 정치에서도 동일한 느낌의 위협적 분위기가 만연했다. 전직 총리인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1932년생)이 10월16일 미국대사관의 제임스 엔트위슬(James Entwistle) 대리공사에게 발언한 바에 따르면, 군부는 새로운 쿠테타 시도에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왕당파들은 정부 전복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아난은 "언어적 측면에서 전통적 의미의 쿠테타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시켰지만, 향후 3주 동안 태국에 심각한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음. 그는 태국이 "역사상 이토록 심각하게 분열된 적이 없었다"고 말함.
아난은 이 위기를 타개할 명확한 방법을 모르겠다고 고백함. 하지만 그는 10월7일에 사망한 '옐로셔츠 운동 '(PAD) 지지자의 장례식 직후인 10월14일에 자신이 공개적으로 발언했던 내용에 관해 해명했음. 즉,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전 총리가 이 정치위기를 해소할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임. 탁신이 자신의 위반 사실에 관해 사법적 판결 및 운명적 결과를 점차 수용해야만 하며, 정치활동 자금을 대거나 활동을 지도하는 일도 중단하고, 태국이 전향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것임. 아난은 탁신이 돈과 권력 양자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음. |
한편, 미국 외교관들은 쿠테타를 일으키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 '네트워크 군주제' 내의 핵심 인사들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갑작스레 그들과의 연락이 단절됐다. 이것은 상당한 음모가 진행중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 (Prem Tinsulanonda: 1920년생)과 위원인 싯티 사웻실라(Siddhi Savetsila: 1919년생) 양자 모두 [현 정권인] 솜차이 웡사왓(Somchai Wongsawat: 1947년생) 총리 정부를 실각기키기 위한 시도에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임. 10월16일, 그들은 본 대사관과의 접촉과 대화를 사양했음.
쁘렘의 보좌관인 한 [예비역] 해군 중장은 본 대사관에 말하기를, 쁘렘 의장이 현재와 같은 "민감한 시기"에 외국 외교관을 만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면서, 쁘렘이 영국 대사로부터도 유사한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한 적이 있다고 첨언했음.
싯티의 비서 한명은 본 대사관에 말하기를, 싯티가 이번주에는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말함. 전직 총리를 역임한 바 있는 추밀원 위원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1943년생)은 코랏(Khorat: 공식명칭-나콘 라차시마)을 방문했다가 방콕(Bangkok)으로 돌아온 후, 10월17일 밤까지도 본 대리공사의 전화를 받지 않았음. (논평: 본 대사관은 추밀원 위원들이 우리가 만남을 요청하는 목적을 추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들이 관여해서는 안 될 미묘한 의사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보고 있음. 논평 끝.) |
한편 육군사령관인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chinda: 1949년생) 장군은 10월16일 연설을 통해, 솜차이 총리의 사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면서 "피바다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선언했다. 또한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의 궁정 측근인사인 아누폰 '조' 까셈손(Anuporn “Joe” Kashemsant)은 10월17일 미 대사관 관계자들에게, 왕당파들이 정부를 실각시키기 위한 다양한 전략들을 탐색하고 있다고 전언하여, 아난이 암시했던 내용을 재확인해주었다. 미 대사관의 10월17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아누폰 까셈손은 '국왕 개인비서실'(Office of Principal Private Secretary: PPS 혹은 OHMPPS) 내에서 시리낏 왕후의 국제연락관을 맡고 있음. 그는 10월17일 본 대사관에 말하기를, 다양한 정치적 술책들이 진행 중이라고 밝혔음. 그는 "2006년 9월 19일의 쿠테타 같은 군사 쿠테타 방식은 태국의 정치위기 해소를 위한 선택지들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함. 그는 군부가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됐기 때문이라고 그 까닭을 말함. 그가 말한 조건은 아난 전 총리가 10월16일 본 대리공사에게 언급한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음. 아난은 "언어적 측면에서 전통적 의미의 쿠테타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었음. 아누폰은 향후 며칠 이내에 상당한 사태전개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지만, "2가지 방식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 외에는 무슨 일이 발생할지 더 이상의 예측은 거부했음. |
사실 탁신의 영향력에 대한 왕당파의 공세는 2가지 공격 전략을 통해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나는 사법부의 개입이고, 다른 하나는 옐로셔츠(PAD) 시위대가 혼란을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10월21일, 태국 대법원은 탁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대법관들은 탁신의 아내 퍼짜만 다마퐁(Potjaman Damapong: 1956년생)이 2003년에 정부로부터 토지를 불하(구매)받은 일과 관련하여, [당시 총리로 재임 중이었던] 탁신에게 부패 혐의를 적용해 징역 2년형을 언도했다. 이제 탁신의 귀국 전망은 더욱 더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탁신은 미국대사 에릭 존(Eric G. John)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극도로 분노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미국 대사관의 10월21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대법원 판결 직후, 탁신은 본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왔음. 그는 자신에 대한 유죄판결이 "독이 든 사과"라고 맹비난하면서, 대법원이 오로지 [2006년 쿠테타 이후 설치된] '자산평가위원회'(Asset Examination Committee)가 준비한 자료들에만 근거해 판결을 내렸다는 점을 강조했음. '자산평가위원회'는 탁신에 대해 가장 맹렬한 적들로만 구성되어 있음. 탁신은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자신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음. 왜냐하면 자신의 정적들이 자신을 불공정하게 대우한 결과로 인해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임. |
10월22일자 외교전문은 미국 대사에게 걸려온 탁신의 전화통화 내용에 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서술했다. 이 전문에는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이 군부가 이번에는 개입해서 안 된다는 입장을 단호하게 견지하고 있지만 시리낏 왕후가 새로운 쿠테타를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이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탁신은 자신의 견해를 장황하지만 할기차게 드러냈음. 그는 자신이 2005년 총선에서 '타이락타이 당'(TRT)을 이끌고 얼마나 큰 압승을 거뒀는지 회상하면서, 그 정권이 오로지 2006년 쿠테타로 인해 실각하게 됐다는 점을 이야기했음. 탁신은 자신이 아직도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확언하면서, "나의 정당"(현재의 여당인 '국민의 힘 당'[PPP]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마도 그 역시 연속적인 후신 정당이란 의미로 그러한 지칭을 한 것으로 보임)이 앞으로도 선거에서 상당한 격차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함.
탁신은 자신이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사령관에게 군대가 권력을 탈취해서는 안 된다는 메세지를 보냈다고 밝혔음. 탁신은 통화에서, 만일 현 상황에서 쿠테타가 발발한다면 그것은 [당시의 육군사령관이었던] 손티 분냐랏끌린(Sonthi Boonyaratglin: 1946년생) 장군의 주도로 일어났던 지난 2006년의 쿠테타와는 결코 유사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장담한다고 말함. 즉, 새로운 쿠테타는 [무혈 쿠테타였던 2006년 쿠테타와는 달리] 평화적이지도 않을 것이고, 아누퐁 장군도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임.
탁신은 본 대사에게, 아누퐁 장군은 쿠테타 시도를 바라지 않지만 시리낏 왕후가 아누퐁 사령관에게 압력을 가한다고 말함. 또한 푸미폰 국왕이 쿠테타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누퐁 사령관도 알고 있다고 단언했음. 탁신은 시리낏 왕후가 사망한 PAD 시위참가자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푸미폰 국왕이 바로 그와 동시에 솜차이 총리를 접견하여 왕후보다는 보다 긍정적인 대중적 메세지를 보냈다는 점에 초첨을 맞췄음. 탁신은 자신의 유죄판결에 대한 대응으로 서한 1통을 작성해 거의 공개하기 직전까지 갔었지만 측근의 만류로 그만뒀다면서, 자신의 논조가 지나치게 분노했었고 군주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밝힘. 탁신은 자신의 의제들(아마도 해당 편지 속의 내용일 것) 중 하나가 <형법>에 규정된 왕실모독죄(lese majeste) 조항을 폐지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밝힘. 그는 왕실모독죄로 기소될 위험이 존재하는 한 태국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주장을 정당하게 밝힐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함. |
탁신의 최고위급 동지 중 한명으로 국회 대변인을 지낸 바 있는 용윳 띠야빠이랏(Yongyuth Tiyapairat)은 10월28일 에릭 존 미국대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초강경 왕당파들이 종국에는 왕실을 훼손할 수도 있는 의제를 밀어부치기 위해 푸미폰 국왕을 의사소통에서 배제시키고 국왕을 착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10월28일자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용윳은 낙담해서 말하기를, 태국이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라고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는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처럼 보이는 일이 자주 있다고 말함. 왕실이 군대의 요직이나 고위 공무원의 임명을 점검하고 있고, 국왕을 "마치 신처럼" 대접하고 있다는 것임. 일반적으로 국왕에게 접근하는 일은 어려운 편이며, 국왕 주변 인사들이 국왕에게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임. 예를 들어 PAD(옐로셔츠 운동) 같은 많은 사람들이 왕실에 대한 영향력 유지에 노력하고 있고, 반대파에 대해서는 국왕에 대해 불충하다고 주장하는 방식을 통해 대중적 분노를 조장한다는 것임. 용윳은 이러한 분위기가 태국을 위해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면서, 장기적으로는 왕실에도 해로운 일이라고 보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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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eongJoon Cho / Bloomberg) 태국 최초로 임기를 마치고도 다시금 총리로 선출된 탁신 친나왓. 그는 2005년 총선에서 승리한 이듬해에 발생한 쿠테타로 실각했고, 이후의 태국 정치는 크게 친-탁신파와 반-탁신파의 싸움으로 비춰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크세] |
2008년 10월에는 지극히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했지만, 태국 언론은 물론이고 국제 언론들도 이 사건을 적절하게 보도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푸미폰 국왕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고 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국왕은 초강경 왕당파들에게 국왕 자신이 대치상황과 폭력적인 혼란을 조성하는 전략을 중단하길 바란다는 메세지를 명확하게 보냈다. 오랜 기간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있던 옐로셔츠들이 이제 중단해야만 할 때였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메세지를 그다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는다. 하지만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측근들 중 가장 신뢰할만한 3인에게 자신의 메세지를 직접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첫번째 메세지 전달자는 푸미폰 국왕이 네 자녀들 중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자 여전히 자신의 곁에 머물고 있던 자녀였다. 그것은 바로 차녀인 마하 짜끄리 시린톤(Maha Chakri Sirindhorn: 1955년생) 공주였다. 시린톤 공주는 미국을 방문 중이던 10월9일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시린톤 공주가 외신기자들이 접촉할 경우엔 엄격하게 연출된 방식으로만 가능했고, 시린톤 공주 역시 자신의 해외 방문이 조용하게 지나가는 편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치적 논의에 말려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피해왔다. 하지만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시린톤 공주는 이때 옐로셔츠 운동에 관해 예상치 못한 논평 몇가지를 내놓았다. AP통신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태국의 시린톤 공주는 목요일(10.9) 발언에서, 자국 내의 시위대(=옐로셔츠 반정부 시위대)가 국왕을 이롭게 하기 위해 시위를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린톤 공주는 목요일 월링포드(Wallingford)에 위치한 '초트 로즈메리 홀 사립 초등학교'(Choate Rosemary Hall prep school)에서 발언하면서, 공공 서비스의 중요성에 관해 말했다. 그녀는 이후 '펜실바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으로 이동해 교육에 관한 토론에 참석했다.
시린톤 공주의 미국 방문은 태국에서 지난 10년 사이 최대의 정치적 폭력사태가 발생한 와중에 이뤄진 것이다. 수많은 시위대가 정부청사 단지를 점거하고, 선거제도의 변화와 태국 정치에서 부정부패를 몰아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태국의 보건 당국에 따르면, 화요일(10.7) 발생한 폭력적인 충돌과정에서 시위대 423명과 경찰관 20명이 부상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여성 1명과 남성 1명이 사망했다. 이번 사태는 1992년에 군부의 지원을 받는 정부를 축출하려던 민주화 시위대를 군대가 공격해 수십명을 살해한 정국혼란 이후 최악의 정치적 폭력사태이다.
기자회견에서는 시린톤 공주의 발언이 끝나자, "[옐로셔츠] 시위대가 국왕을 위해 행동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공주도 시위대의 그런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어찌하여 국왕이 [이번 사태에 관해] 발언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쭤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
대부분의 태국 언론들은 이 내용을 무시했다. 주류 언론 중에 시린톤 공주의 발언 내용을 보도한 것은 <카오솟>(Khao Sod)이 유일했다. [옐로셔츠 운동의 지도자이자 선동가인]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1947년생)은 절규에 가까운 반박을 해댔다. 손티는 미국 언론인들이 탁신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런 질문을 하고 기사를 쓴 것이라면서, 시린톤 공주의 발언 내용도 잘못 번역됐다고 주장했다.
푸미폰 국왕은 이후 10월달의 또 다른 시기에 옐로셔츠 시위대의 혼란 조성과 시위 지속을 반대한다는 뜻을 재차 표명했다. 이번에는 측근 2명을 통해 공개적인 발언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 중 한명은 '차이 파따나 재단'(Chaipattana Foundation) 사무총장인 수멧 딴띠웻꾼(Sumet Tantivejkul: 1939년생 [역주] '시암시멘트 그룹'(SCG) 이사. 인사부문)으로, '차이 파따나 재단'은 1988년부터 왕실 사업들을 관장하는 기관이다. 다른 한명은 '라차누크라오 재단'(Rajanukhrao Foundation 혹은 Rajaprajanugroh Foundation) 이사장인 디사톤 와차로타이(Disathorn Watcharothai)로, '라차누크라오 재단'은 왕실이 후원하는 재난구호 기관이다. 에릭 존 미국대사가 [일년 뒤인] 2009년 11월 23일 작성한 비밀 외교전문 <태국 왕실 내부의 인맥집단 분석>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푸미폰 국왕의 측근 집단 중에서도 핵심 인사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다양한 소식통들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국왕을 보필하는 그러한 극소수의 사람들은 궁내청 사람들이나 정치적 행위자들이 아니라, 국왕의 자선적 개발사업 재단이나 국왕의 최측근 보좌진 정도라고 함. 독설가로 유명한 탄푸잉(Thanphuying: 평민 여성 최고 품계) 부뜨리 위라와이티야 (Butrie Viravaidya)도 여기에 포함됨. 그녀는 '국왕 개인비서실' 부실장을 맡고 있고, "콘돔 킹"으로 유명한 [가족계획] NGO 활동가 미차이 위라와이티야(Meechai Viravaidya 혹은 Mechai Viravaidya: 1941년생)의 부인이기도 함. (부뜨리는 현재 '시리랏 병원'에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임.) 그리고 '국왕 개인비서실'의 또 다른 부실장인 웃 수밋(Wud Sumitra), '차이 파따나 재단' 사무처장 수멧 딴띠웻꾼(Sumete Tantivejkul), '라차누크라오 재단' 이사장이자 대(大)-시종의 아들인 디사톤 와차로타이, '왕립 관개국'(RID)의 전직 국장이었던 쁘라못 마이끌랍(Pramote Maiklap)도 여기에 포함됨. 추밀원 위원 중 국왕과 가장 절친한 사람은 아마도 깜톤 신타와논(Kamthon Sindhavananda: 1926년생) 예비역 공군 소장으로 보임. 그는 오랜 기간 '태국전력공사'(EGAT) 사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농촌 지역들에 전력을 공급하여 국왕의 신임을 얻었음. 깜톤이 최근 수년간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는 활동은 매주 토요일 늦은 밤에 자신의 밴드와 함께 행하는 잼 세션 연주임. 고령인 그의 밴드 단원들은 지난 수십년간 [섹소폰 주자이기도 한] 푸미폰 국왕과 함께 연주를 했던 사람들임. |
2009년 8월 27일자 비밀 외교전문 역시 수멧과 디사톤이 2008년 10월에 개입을 했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2008년 10월 말,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심복 2명에게 심부름을 시켰음. 수멧 딴띠웻꾼은 국왕의 '차이 파따나 재단' 사무총장이고, 디사톤 와차로타이는 '라차누크라오 재단' 이사장임.
10월26일, 수멧은 당시 태국을 볼모로 잡고 있던 옐로셔츠 운동(이들은 국왕을 수호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일군의 학자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시위대가 "폭력을 중단하고 대화를 통해 평화를 보장하라"고 촉구했음.
게다가 사흘 뒤인 10월29일, 디사톤은 춤폰(Chumphon)에서 개최된 세미나에 참석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음. --- "PAD(옐로셔츠 운동 )든 UDD(레드셔츠 운동)든 상관없이, 여러분이 국왕 폐하를 사랑한다면 정부청사에서 농사를 짓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서든 세 과시를 하지 마라. (중략) 여러분이 국왕 폐하를 사랑한다면 집으로 돌아가라. 여러분이 그곳(=정부청사)에서 힘을 과시해봐야 어떤 이로움도 만들지 못한다. 더욱 나쁜 것은, 그런 일이 불화만 초래할 뿐이란 점이다. 나는 진정한 [국왕의] 사람이자 진정한 [국왕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여기서 감히 말을 하고자 한다. 나는 국왕 폐하의 메세지를 전한다." |
그들의 메세지에는 실수가 없었다. 심지어 디사톤의 경우 자신이 국왕의 권위를 빌어 발언하고 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밝히기조차 했다. 푸미폰 국왕은 옐로셔츠들(PAD)이 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있는 일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비록 PAD는 계속해서 자신들이 국왕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PAD가 국왕의 후원을 받지 못했다. [왕실의 공보부문 자문이던] 삐야 말라꾼(Piya Malakul)은 2008년 11월 4일 미국대사 에릭 존에게 밝히기를, 푸미폰 국왕은 옐로셔츠들이 시위를 중단하고 귀가하길 바랬다고 밝혔다. 2008년 11월 6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시리낏 왕후의 자문위원인 삐야 말라꾼이 11월4일 본 대사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푸미폰 국왕은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사령관에게 쿠테타를 시도하지 말라고 명확히 말했다고 함.
국왕이 아누퐁 장군에게 쿠테타를 일으키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삐야의 주장은, 푸미폰 국왕이 쿠테타를 반대한다는 내용 및 그것을 아누퐁 장군에게 말했다는 내용과 관련하여, 본 대사관이 이제까지 들은 내용들 중 가장 강력한 설명임. 현 정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자인 추밀원 의장 쁘렘과 위원인 싯티가 최근 본 대사와의 만남에서 쿠테타가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임. 삐야는 그러한 대화를 어디서 들은 것인지 특정해서 밝히진 않았지만, [푸미폰 국왕의] 그러한 의도된 훈시가 아누퐁 사령관의 행동 양상과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며, 태국 군 내부의 여타 고위 인사들이 본 대사에게 확언한 바 및 여타 경로들로 보고된 내용들과도 일치함.
삐야는 PAD가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있는 상황 및 반정부 단체들이 일으킨 여타 혼란들 때문에 푸미폰 국왕이 대단히 짜증을 내고 있다고 지적함. 하지만 국왕은 PAD로 하여금 정부 청사를 비우도록 할 수 있는 최선책에 확신을 갖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함. 삐야에 따르면, 푸미폰 국왕은 자신이 최측근 2명을 통해 PAD가 정부 청사에서 떠나길 바라고 있다는 메세지를 전달토록 지시했다고 함. 하지만 삐야는 PAD 지도자 손티 림텅꾼이 고집불통이라고 보면서, 손티가 자신만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함. |
옐로셔츠 운동 지도부와 초강경 왕당파로 구성된 기득권층 연합세력은 푸미폰 국왕이 명확하게 표명한 바램을 따르지 않았다. 손티 림텅꾼은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드는 가운데, 정부청사 인근의 '마까완 다리'(Makkawan bridge)에 설치된 PAD의 집회장 무대에 올라 연설하면서, 수멧과 디사톤을 맹렬히 비난했다. 손티는 그 무대를 통해 날마다 더 광신도로 변해가던 지지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연설을 하곤 했다. [일년 후인] 2009년 11월 23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손티의 반응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옐로셔츠(PAD) 활동가들이 국왕을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정부청사 및 종국에는 방콕의 공항들까지 점거하면서 발생한 2008년 말의 정치위기에서, 10월에 이르러 수멧과 디사톤이 "국왕은 옐로셔츠들이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시린톤 공주와 동일한 입장에 섰음. 심지어 디사톤은 한 세미나에 참석해 "여러분이 국왕 폐하를 사랑한다면 귀가하라"고 말하기까지 했음. 하지만 PAD 지도자인 손티 림텅꾼은 무대 연설을 통해 두 사람을 저주하면서 비난했음. 손티는 2008년 11월 15일의 집회에서도 디사톤에 대한 비난을 반복했음. |
손티 림텅꾼은 푸미폰 국왕이 가장 신뢰하는 측근 3인이 전달한 메세지를 고의적이고도 명시적인 방법으로 거역했다. 그는 그것이 푸미폰 국왕을 공개적으로 거역하는 셈이 된다는 것을 명심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손티는 그들을 저주하면서 모욕하기까지 했다. 한 연설에서 손티는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종말론적이고도 구세적인 느낌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태국이 올바른 세력과 올바르지 못한 세력으로 양분됐다고 말했다. 손티는 수멧에 대해 경멸적인 어법을 사용하면서, "그가 올바른 편에 서는 대신 단합을 설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국왕을 숭상한다고 말하던 손티가 푸미폰 국왕에 대해 그토록 뻐기면서 건방지게 굴 수 있다는 것은, 시리낏 왕후 및 기득권 세력과 군부 내의 왕후의 동맹세력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에 상당한 확신을 갖지 못할 경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리낏 왕후는 부부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푸미폰 국왕은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굴욕까지 맛봤다. 손티가 PAD 집회장 무대에서 라마 9세(=푸미폰 국왕)의 메신저들을 맹비난한 것은, 동시에 푸미폰 국왕과 국왕의 측근 그룹에 대해 메세지를 보낸 셈이기도 했다. 즉, 이제 당신들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다.
시리낏 왕후와 그녀의 패거리들은 상황을 지휘하고 있었고, 왕후는 심지어는 명색이 국왕인 남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초강경 왕당파들은 푸미폰 국왕의 명확한 중단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향한 자신들의 십자군 전쟁을 중단할 의사가 없었다.
그로부터 한달도 채 되지 않아, PAD는 "최후의 전쟁"(Final War)을 선포하며 혼란조성 작전을 드라마틱하게 고조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히로시마'(Hiroshima)와 '나가사키'(Nagasaki)라는 암호명이 사용된 작전들도 포함됐는데, 그것은 방콕의 공항들로 쇄도해 점거하는 일이었다. 미국대사 에릭 존은 비밀 외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찰했다.
PAD 지도자 손티 림텅꾼은 국왕의 메세지에 긍적적으로 반응하기는 커녕, 수멧과 디사톤의 "간섭"을 맹렬히 비난했음. 그리고 3주 뒤, 옐로셔츠들은 공항들을 점거하면서 자신들의 공세를 고조시켰음. |
세익스피어(Shakespeare)의 리어 왕(King Lear)은 평화롭고 편안한 은퇴를 바라면서 왕위와 왕국을 포기했지만, 결국 자신이 통치권을 소유하지 못한 상황에 분노하고 마는 무기력하고 고통에 찬 노인으로 전락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푸미폰 국왕은 자신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왕당파들에게 무시당하고, 손티 림텅꾼과 같은 어릿광대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가운데, 자신이 이제 주변부로 밀려난 이방인이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수백만명의 태국인들이 국왕을 위해 죽을 수 있을 만큼 국왕을 사랑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푸미폰 국왕은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있던 시위대에게 해산하고 귀가하라는 설득조차 할 수 없었다. 시위대가 입고 있는 티셔츠와 손수건, 그리고 팔목띠에는 국왕을 사랑한다는 선언이 구호로 적혀 있었지만, 그들은 국왕이 요청한 일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푸미폰은 빛바랜 노인이었고, 사망하면 왕당파 기득권층에게 어떠한 보호막도 제공해줄 수 없는 존재였다. 이제 왕실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권력자는 시리낏 왕후였다. 왕위계승이라는 트라우마가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기득권 세력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됐고, 시리낏 왕후를 최선이자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게 됐다. 푸미폰 국왕은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와 탁신 친나왓의 앙갚음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없을 터였지만, 어쩌면 시리낏 왕후는 그렇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엘리트 계층의 왕당파들은 종말론적 분위기의 통치 말기적 염원을 향유하는 가운데, 시리낏 왕후를 자신들의 수호천사로 여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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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Bangkok Post) 태국 언론 재벌로 반탁신 '옐로셔츠 운동'(PAD)의 핵심 지도자이자 선동가인 손티 림텅꾼. 그는 2006년 및 2008년의 태국 정치위기에서 반탁신 반정부 시위의 선봉장이었다. 하지만 기세등등했던 그도 2009년 4월 17일 기관총 세례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구한 후 활동의 폭이 거의 줄어들고 만다. 많은 이들은 그가 왕당파 기득권층 내부에서 "팽"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크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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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동영상) 손티 림텅꾼의 집회장 연설 모습. 2008년 10월 5일. 과두독재를 위해 민주주의를 보류하자고 주장하면서, 국가주의 고취를 위해 이웃국가인 캄보디아인들을 '악마'로 묘사하는 이 인물이 바로 미국의 UCLA 대학 출신이란 점을 생각하면, 태국 정치가 21세기 국제정치의 여러 경향들을 얼마나 앞서서 보여준 것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손티는 UCLA 유학 시절 학보사 학생기자도 했던 인물이다. 태국 중상류층의 고학력자들을 접할 때마다, 정치적 양심과 제도권의 학력이 얼마나 무관계할 수도 있는 것인지 새삼스레 놀라게 되곤 한다. [크세] |
2008년 11월 1일, 탁신 전 총리의 지지자 9만명 정도가 방콕의 '라차망갈라 경기장'(Rajamangala Stadium)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이들 중에는 붉은 옷을 입은 이들이 압도적이었고, 이후 태국에서 빨간색은 '탁신에 대한 지지'를 상징하는 색깔이 됐다. 그것은 왕당파 성향의 라이벌 대중운동인 PAD가 노란색 옷을 착용하는 것에 대응한 것이었다. 탁신은 알려지지 않은 해외의 한 장소에서 화상통화를 통해 군중들에게 연설했다. 그는 2006년 쿠테타와 자신에 대한 유죄판결을 맹비난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발언을 통해 왕당파들에 대한 자신의 싸움을 다시 한번 고조시켰다. 탁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를 고향으로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왕 폐하의 자비(royal mercy) 아니면 피플 파워(people’s power)입니다. |
탁신의 발언은 모호하면서도 잠재적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기획된 것이었다. 이 발언 속에는 암묵적인 경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자신이 국왕의 사면령을 받고 왕당파 기득권 세력이 자신을 괴롭히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왕실에 대항해 국민들을 동원하는 일 밖에는 없다는 의미였다. 미 대사관의 11월3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탁신의 발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탁신의 발언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며, 마땅히 그러하다고 봄. 통상 국왕사면령은 일정한 형기를 복역한 후에 요청되는 것이며, 투옥을 피하려 외국에 피신한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임. 그렇지만 탁신은 푸미폰 국왕이 자신을 위해 행동에 나서주도록 촉구한 것으로 보임. 또한 그가 '피플 파워'를 '국왕의 자비'에 대한 대안으로 거론한 것은, 탁신이 마치 왕실의 지존성에 이의를 제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왕실과 '국민들'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는 시도로도 보일 수 있음. |
이후 11월6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탁신의 발언에 관해 더욱 상세한 분석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왕당파 재벌기업가인 ['싱하 맥주'(Singha beer) 가문의] 쭈띠난 피롬팍(Jutinan Bhirombhakdi 혹은 Chutinant Bhirombhakdi)의 발언 및 탁신이 용의주도하게 국면을 조성해나간다는 증거도 포함되어 있다. 이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쭈띠난은 탁신 전 총리가 11월1일 지지자들에게 연설한 내용에 관해 토론했음. 탁신의 발언 내용은 "국왕의 자비 아니면 피플 파워"만이 자신의 귀국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내용임. 쭈띠난은 탁신이 제시한 병렬적 선택지를 대단히 전략적인 것으로 보았음. 그는 이 발언이 왕당파 진영의 탁신의 정적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예측 가능한 영향력을 지녔다고 보았음. 즉, 그러한 반응이 나타날 경우, 왕실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반-탁신 전선의 진용에 참가하여, 군주제가 정치를 초월하는 제도라는 성격에서 파생된 왕실의 특권을 그들이 잠식하게 된다는 점을, 탁신이 공개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임.
(이와는 별개로, 탁신의 법무팀 소속 한 인사는 탁신의 발언 이후 본 대사관과의 대화에서, [탁신이 연설한] 해당 문장이 "매우 정제되어 나온" 부분이라고 말함. 그녀는 탁신의 연설 리허설 과정에서 "4~5차례"나 들었던 문장이라고 밝힘.) |
탁신의 발언은 태국에서 왕실과 국민이 단합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서, 대단히 체제전복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한 관점은 화합의 왕국이라는 공식적인 전설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공식적 관점에서 보면, 군주는 자신을 흠모하는 백성들에게 이타적으로 헌신하는 존재이다. 또한 탁신의 발언 속에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국왕이 아니라 탁신 자신이라는 점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탁신이 내놓은 대부분의 도발적인 발언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발언 역시 상당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태국 역사상 최초로 상당한 수의 보통사람들이 군주제에 반기를 드는 방향으로 변했던 것이다. 미 대사관의 11월12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에 대한 이의제기>(Questioning the Unquestionable)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외교전문은 시리낏 왕후의 행동이 낳은 결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10월7일 발생한 PAD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시위참가자의 10월13일 장례식에 시리낏 왕후가 참석한 이후, 왕후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 현저하게 증가했음. 좌파 매체인 <새임 스카이 매가진>(Same Sky Magazine)의 편집인 타나폰 애우사꾼(Thanapol Eawsakul)은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자사의 웹사이트에 비판적 댓글이 급증했고 접속량 역시 하루 1만회 정도에서 하루 3만회 정도로 증가했다고 밝힘.
타나폰은 이전에 <새임 스카이>에 게재한 자신의 글 때문에 '왕실모독 처벌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전력이 있는 인물임.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왕식모독죄 혐의가 적용될지도 모를 게시물들을 삭제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말함. 그러한 내용 중에는 왕세자 부인의 누드사진이나 악명높은 생일파티 동영상, 왕세자의 외설적 성행위에 관한 다수의 신음소리, 사우디 아라비아가 [태국으로] 도난당한 유명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시리낏 왕후가 착용한 사진들(타나폰은 이 사진들이 디지털로 합성된 것으로 보았음), 그리고 태국 왕실 가족들이 도난당한 사우디의 보석과 연관된 것처럼 보이도록 의도된 증거들을 게시해놓은 여타 사이트들로의 링크 주소 같은 것들이라고 함.
타나폰이 특히 놀란 부분은, 심지어 푸미폰 국왕이 자신의 형인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 라마8세: 1925~1946) 국왕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게시물까지도 올라오는 것이라고 함. 일부는 푸미폰이 아난타에게 총을 쐈을 것이라는 데까지도 나아간다고 함. 게시자들은 또한 푸미폰 국왕의 재산이 350억 달러에 달한다는 <포브스>(Forbes) 지의 최근 보도 내용을 올리기도 하며, 국왕의 재산이 여러 세대에 걸친 착취의 결과라는 데 탄식하기도 하며, 곧 있을 국왕의 누나 [깔리야나 와따나(Galyani Vadhana: 1923~2008) 공주의] 장례식이 납세자들의 돈을 낭비하는 일이라 말하기도 한다고 함. |
<쁘라차타이>(Prachatai)는 태국 언론들 가운데 군주제에 관한 이슈들을 진지한 저널리즘으로 다루는 극소수의 언론사에 속한다. <쁘라차타이> 역시 유사한 도약을 보였다. 미 대사관의 11월14일자 비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쁘라차타이>(Prachatai.com)의 사장 찌라눗 쁘렘차이폰(Chiranuch Premchaiporn)은 본 대사관에 밝히기를, 2006년 9월 쿠테타 이후 방문객 수가 하루 1천명에서 1만명으로 증가했고, 지난 10월7일 옐로셔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한 후 하루 방문객 수가 1만5천명에서 3만명 선으로 증가했다고 말함. 이 사이트의 댓글 수 증가 역시 <새임 스카이>의 경우와 유사하며, 잠재적으로 위반의 소지가 있는 게시물들을 "육안"으로 검사하여 삭제하는 데 상당한 양의 추가적 시간이 투자되고 있다고 함. |
시리낏 왕후에 대한 비판은 인터넷 상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적인 대화에서 왕후의 행동에 관한 가십이나 불평을 말하는 태국인들의 수가 증가했다. BBC 특파원 조나단 헤드(Jonathan Head)에 따르면, 친-탁신 성향의 지방이나 마을들, 특히 오랜 기간 방콕 중심의 통치에 반감을 갖고 있는 북동부 이싼(Isaan) 지방에서는 왕후에 대한 불쾌감이 놀랄 정도로 공공연히 표출되었다. 미국대사 역시 그의 말을 외교전문에 인용했다.
BBC 특파원 조나단 헤드는 11월3일 북동부지방 우돈타니(Udon Thani)에서 본 대사관과 전화통화를 통해 왕실모독과 관련된 현 상황에 관해 대화를 나눴음. 그는 우돈타니 사람들이 자신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강도로, 시리낏 왕후에 대한 분노를 공개적으로 표출했다고 함. 그는 "왕후가 [PAD]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규정집을 찢어버린 셈"이라면서, 자신이 최근에 행한 인터뷰들을 어떻게 하면 태국의 왕실모독 처벌법에 걸리지 않고 BBC 보도문에 집어넣을 수 있을지 아직도 확신을 못가진 상태라고 밝힘. |
온라인 상에서 시리낏 왕후에 대한 공격이 봇물을 이루자, 이에 놀라 경각심을 갖게 된 군부는 자신들에게 부여된 헌법적 권한의 근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흐름에 왕실모독 처벌법을 동원하려는 강경한 자세를 강화했다. 미국 대사가 다음과 같이 비밀 외교전문에서 지적했듯이, 군부 내 '왕후 근위대'(Queen’s Guard: 육군 제21연대) 계파가 이 싸움을 선도했다.
아누퐁 파오찐다 육군사령관은 10월27일 TV 기자회견을 통해, 군주제에 대한 비판에 연루될 위험성을 태국 국민들에게 경고했음. 한 영자지에 따르면, 아누퐁 장군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음. --- "군주제에 대한 모독이나 무례한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군주제에 관해 모독이나 무례한 언동을 하는 집단이나 개인에 대해, 육군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처할 것이다." 아누퐁의 발언은 최근 군주제에 관한 비판이 증가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으로 보임.
해설: 태국 형법은 왕실모독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고 있음. 하지만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이에 대해 육군이 사법조치를 취하는 것은 법률적 근거가 없는 것임. 그렇지만 헌법은 국왕이 태국 군의 [명목상] 수장이라고 규정하고 있음. <국내치안법>(Internal Security Act: ISA)은 '국내 안보작전 사령부'(ISOC)의 여러 임무들을 규정하면서,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 종교, 국왕을 수호할 의무를 자각하도록 장려"하는 일도 규정해두었음. ISOC는 총리가 의장을 맡고 육군사령관이 부의장을 맡는 합동기구임.
레드셔츠 운동(UDD)의 공동 지도자 중 한명인 짜란 딧타아피차이(Jaran Ditapichai 혹은 Charan Ditthaphichai)는 본 대사관에 주장하기를, 레드셔츠 지지자들 중 왕실모독 혐의로 수사를 받는 대부분의 경우는 ISOC 산하 '태스크포스 6080'(Task Force 6080) 때문이라고 말함. '태스크포스 6080'은 군주에 대한 공격 행위들에 초점을 맞추는 조직으로서, 아누퐁 육군사령관에게 보고를 하고, 이후 아누퐁 사령관이 이 사건들을 경찰로 넘기고 있음. 짜란은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1954년생) 육군본부 참모장이 시리낏 왕후의 측근이라면서, 쁘라윳 장군이 ISOC 사무처장 자격으로 '태스크포스 6080'을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음. |
정부 당국 역시 왕실 가족이 포함된 비판들을 방지하려는 노력을 강화했다. 미국 대사는 비밀 외교전문에서 태국 정부가 취한 조치들 중 일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보고했다.
'정보통신기술부'(MoICT)와 '내무부'(MoI)가 최근 10월 말부터 시작된 육군과 경찰의 왕실모독죄 단속 활동에 동참했음. '정보통신기술부'는 웹사이트 편집자들이 자기-검열을 해주도록 협조를 구하는 한편, 왕실모독 내용을 담은 게시물을 걸러낼 수 있는 고가의 게이트웨이를 만들 것이라고 발표함. '내무부'는 각 지방 도지사들에게 전단지 및 지역 라디오 방송이 반-군주제 성향의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은지 검열하도록 지시했음.
해설: '정보통신기술부'가 최근 인터넷 채팅에서 반-군주제 성향의 내용을 더욱 상세히 감시하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왕실가족들, 특히 시리낏 왕후에 대한 비판이 보다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음을 인식한 것에 따른 대응이란 점을 반영하고 있음. 웹사이트들과 여타 온라인 미디어 운영자들은 태국 정부가 자신들에게 조치를 취할 것을 우려하면서, 왕실모독죄 혐의가 적용될지도 모를 내용들에 대한 선제적인 자기 검열을 강화해나가는 실정임. 그 결과, 군주제에 대한 비판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이전보다 덜 공개적인 방법으로 밝히고 있고, 심지어는 익명으로 글을 쓰기도 함. 군주제의 수호자들은 왕실모독 처벌법 조항을 보다 공세적으로 엄격하게 적용할 의도를 갖고 있음. 요약 및 논평 끝. |
하지만 군주제 및 왕위계승에 관한 공개적인 토론에 관해 과잉대응적 탄압은 반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고, 태국 사회에서 왕실의 적절한 역할에 관해 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미 대사관은 비밀 외교전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경고를 담아 보고했다.
육군사령관의 성명 내용은 왕실모독 행위들이 단순한 범죄 행위를 넘어서 태국의 최고 제도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음. 극도로 민감한 왕실모독 사건들이 증가하고, 왕실모독의 경계선을 오가는 온라인 댓글들이 빈발하며, 당국의 대응도 강도 높게 이뤄진다는 것은, 군주제 그 자체까지는 아닐지라도 왕실가족 중 일부 인사들의 행동에 대해, 사회 일각에서 높은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임. 당국이 군주제 비판자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가하기로 했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음. 즉, 여러 사교계들에서 은밀히 회자되던 내용이 일부 왕족들의 불쾌한 행동에 관한 가십 수준에서, 광범위한 사랑을 받던 푸미폰 국왕의 사후에 있어서 군주의 역할 그 자체에 관해 보다 무게감 있는 의문을 제기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는 것임. |
2008년 11월 23일, 손티 림텅꾼은 정부에 대한 "최후의 싸움"(final battle)을 부르짖으며 옐로셔츠 시위대를 정부청사로 결집시켰다. 처음에는 그러한 일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닉 노스티츠(Nick Nostitz)는 자신의 책 <레드 대 옐로>(Red vs. Yellow)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최후의 싸움"(Final War)은 옐로셔츠(PAD)의 명백한 패배와 함께 시작됐다. 아니면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다. PAD는 10만명의 지지자를 결집시킬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패했다. 대신 그들은 약 2만4천명으로 추정되는 군중들만 거리로 나오게 만들 수 있었다. 그들 대다수는 [방콕 인근의] 촌부리(Chonburi) 도와 남부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옐로셔츠는 경찰이 폭력사태에 말려들도록 하는 데 실패했다. |
11월24일, PAD는 임시 정부청사가 위치해있던 '던므앙 공항'(Don Muang airport)을 포위했다. 정부청사가 반정부 시위대에게 점거당한 이후 국무위원들은 이곳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11월25일, PAD는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Suvarnabhumi International Airport)마저 점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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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08년 11월 29일 밤, '수완나품 국제공항'으로 접근하는 도로의 옐로셔츠 시위대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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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08년 11월 26일~27일 사이의 '수완나품 국제공항' 모습. 국가 기간시설을 힘으로 점거한 이들의 시위는 사실상 무혈 테러행위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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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한 PAD 사수대원들의 과격성을 폭로한 동영상. |
군대는 시위대가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설치(이후 '던므앙 공항'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짐)하는 데도, 그러한 일의 제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누퐁 육군사령관은 11월26일 기자회견을 열어, 쿠테타는 일으키지 않겠지만 솜차이 총리가 사임할 것을 다시 한번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당시 솜차이 총리는 페루에서 개최 중이던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에이펙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태국에 있지 않았다. 솜차이 총리의 전용기는 방콕 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친탁신 성향이 강한 북부지방의 치앙마이(Chiang Mai) 공항에 착륙했다. 노스티츠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정부는 점차로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상황을 여전히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상태였다. 친정부 진영의 몇몇 인사들은 해외로 빠져나갔는데, 아마도 군부 쿠테타가 발발할 경우 망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또 다른 이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자신들의 강력한 근거지인 [북동부] 이싼 지방 및 북부지방에서 무장투쟁을 조직할 계획도 세웠다. 정부는 이미 자국 내에서 사실상 망명정부 신세가 되어 있었다. 솜차이 총리가 북부지방의 치앙마이에서 친정부 세력의 보호를 받는 가운데 정부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안군(=군부)은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군부는 경찰과의 공조를 거부했다. 공항들에서 발생한 시위에 대해 2차례나 해산명령이 내려져 진압 준비까지 갖춰졌지만, 경찰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11월28일, 파차라왓 웡수완(Patcharawat Wongsuwan) 경찰청장이 공항의 옐로셔츠 시위대 해산 명령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이제 내전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처럼 보였고, 며칠 안에 내전이 발발할 것처럼 보였다. |
합법적인 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극단주의 성향의 폭도들이 방콕의 공항들을 봉쇄하고 국가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가하며 국제사회에서 국가적 명성까지 실추시키는 상황이 발생했다. 태국이 이렇게 위태롭고 무서우며 결정적인 순간에 도달하자, 많은 태국인들은 푸미폰 국왕이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 믿었다. 대부분의 태국인들이 국왕이 나서야만 해결될 국가적 위기라고 생각하던 그 상황이 바로 이 상황이었다. 태국인들은 항상 그렇게 배워왔다. 하지만 그들은 깊은 실망감에 빠졌다. 푸미폰 국왕은 이미 10월에 개입을 시도했다 굴욕을 당했고, 그의 위신은 심하게 실추된 상태였다. 푸미폰은 한편으로 기울지도 않았지만, 다시금 개입해서 영향력을 발휘하지도 않았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을 보면, 미국대사 에릭 존은 11월28일 국왕이 나서 상황을 풀어보도록 명시적인 압력을 가했다. 이것은 미국대사의 활동으로는 대단히 이례적인 자세였다. 하지만 왕당파의 지도급 인사들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고집을 부렸다. 해당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PAD 지도자인 짬렁 시므앙(Chamlong Srimuang: 1935년생)은 11월28일 공항에 설치된 무대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면서, 요인(태국어-'푸짜이'[phu jai]) 한명이 자신에게 시위를 중단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밝힘. 하지만 그는 국가를 위해서라도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고 자신이 대답했다고 밝힘. 짬렁은 PAD의 공항 점거를 솜차이 총리의 하야 때까지 지속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만일 PAD 핵심 지도자들이 검거될 경우 수많은 옐로셔츠 지지자들이 소요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함. 동료 지도자 중 한명도 발언에 나서, 경찰의 행동에 대비하여 공항 2곳에서 "경무장" 사수대원들의 배치를 강화했다고 밝힘. 11월28일 밤 늦게 '수완나품 국제공항'에서 촬영된 동영상을 보면, 의료진 마크와 적십자사 마크를 부착한 여러 대의 트럭들에서 무기들이 하역되는 모습이 포착됨.
현 시점에서, 공항 점거 및 정치적 대치의 현 위기를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최선의 해법은 아마도 태국 국왕의 개입일 것임. 그러한 예외적인 개입은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헌법 외적인 일이지만, 푸미폰 국왕 재위기간 중 2차레나 존재함. 1973년과 1992년이 바로 그것임. 본 대사는 이러한 의도를 갖고 11월28일 추밀원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적극적인 인사 2명을 만났음. 그들은 쁘렘 띠나술라논 추밀원 의장과 싯티 사웻실라 예비역 공군대장임. 본 대사는 그들에게 국왕의 개입이 태국의 유혈사태를 막고 국익을 위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책이 아닌가 타진했음.
쁘렘과 싯티는 그런 개입은 없을 것이라면서, 자신들은 국왕이 정치위기로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수호할 것이라고 말함. 쁘렘은 국왕이 유혈사태 이후에는 개입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는 불가하다고 말했음. 쁘렘은 PAD 시위대와 정부 사이의 대치상태 및 정부와 군부 사이의 대치상태에 대해 탄식만 하면서 어떠한 해법도 제시하지 않았음. 두 사람은 대화 중 반복적으로 탁신을 거론했으며, 진정한 문제는 PAD 시위대와 공항점거 사태가 아니라,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끝까지 싸우고 있는 탁신 때문이라고 말함. 쁘렘은 국왕의 개입이 1992년처럼 효과적일 수 있으려면 탁신과 짬렁이 한 방에 모여야 하는 것이지, 솜차이와 짬렁이 모여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
특히 본 대사가 PAD 시위대 및 공항점거에 대한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묘사하면서, 국왕 수호에 나섰다는 PAD의 행동이 실제로는 결정적 국면에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국왕의 입지를 갉아먹게 되는 것인지를 설명하자, 쁘렘은 의기소침해졌음. 쁘렘은 국왕을 해롭게 하는 자가 탁신이라며 반론했음.
싯티 역시 동일한 화제로 이야기했음. 그는 11월26일에 있었던 추밀원 회의가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고 인정하면서, 유혈사태 발생을 두려워했다고 말함. 특히 친탁신 레드셔츠 운동이 행동에 나서게 될까봐 더욱 그러했음. 싯티는 시간이 PAD의 편이 아니라고 말함. 그는 현재의 최선책이 PAD 시위대가 공항을 포기하고 다시금 정부청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할지에 관해서는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음. 싯티는 헌법재판소가 12월 2~3일 사이에 솜차이 총리의 집권 '국민의 힘 당'에 대한 정당해산 명령을 내릴 수도 있을 것으로 보면서, 그것이 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음. 하지만 쁘렘은 헌재가 몇몇 증인들을 추가로 소환하길 바라고 있다면서, 판결이 더 늦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함. |
12월5일의 국왕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푸미폰 국왕이 태국에서 깊어지고 있던 대소동에 관해 언급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특히 전통적으로 12월4일에 행해지는 그의 생일 연설에 이목이 모아지고 있었다.
한편, 정치적 성향에다 편파적이기까지 한 태국의 사법부가 다시 한번 정치적 교착상태 타개를 위해 개입할 것이란 관측도 증가했다. 그 경우 기본적인 법규를 적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부정선거를 빌미로 집권 '국민의 힘 당'의 활동을 금지시킬 것이란 예측이었다.
12월2일, 침묵 중인 푸미폰 국왕이 시리낏 왕후 및 와치라롱꼰 왕세자와 함께 '연례 군 열병식'에 참석하고 있을 때, [보수 야당인] '민주당' 총재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는 자신의 친구이자 측근인 꼰 짜띠꽈닛(Korn Chatikavanij: 1964년생)과 함께 '와이어리스 로드'(Wireless Road)에 위치한 에릭 존 미국대사의 사택을 방문했다. 미 대사관의 12월2일자 비밀 외교전문에 따르면, 아피싯은 자신이 옐로셔츠 운동의 시위를 통해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의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푸미폰 국왕의 침묵에 관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해당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아피싯은 현재의 대치국면을 빠져나올 길을 쉽게 찾지 못하겠다면서 좌절감을 표출했음. 아피싯은 아누퐁 육군사령관이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이기보다는 사적으로 제안했어야 한다고 말은 했지만, 아피싯 자신은 솜차이 총리가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고 본 아누퐁 장군의 최근 제안을 오랜 기간 우호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함. 선거를 보류하고 (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특별한 위원회를 통해 통치하려는 왕당파들이 국회해산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취할 것이라는 점을 일부 집권 '국민의 힘 당' 소속 인사들이 우려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음. 하지만 아피싯은 이러한 시나리오가 "미친 것"이고 "쓰레기" 같은 것이며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음. (논평: 하지만 본 대사관은 그러한 전망을 쉽사리 일축해버릴 수 없음. 추밀원의 한 지도급 인사는 본 대사에게, 자신과 여타 고위급 왕당파들은 그런 방식의 위원회가 설치되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음. 논평 끝.)
아피싯은 정말로 비관적인듯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는 자신이 총리 후보가 되기 위해 국회 내에서 과반수 지지를 확보하려 한다는 설을 부인했음. (해설: 사막 순타라웻 총리가 지난 9월 법원에 의해 총리직에서 밀려나자, [국회 내 투표에서] 아피싯이 공식적으로 [야당의] 총리 후보로 나선 바 있음. 해설 끝.) 아피싯은 다른 정당의 계파 지도자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려고만 한다면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말함. 하지만 자신이 다가가서 그들에게 지지를 구애하는 일은 부적절할 것이라고 말함. 아피싯은 집권 '국민의 힘 당' 인사들이 '프어타이 당'(Puea Thai party: 태국을 위한 당)으로 옮겨가게 될 속도를 지적하면서, 집권당 인사들 사이에 불화의 징후가 나타나는 것을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말했음. '프어타이 당'은 친탁신계 인사들이 만의 하나 '국민의 힘 당'이 해산당하는 상황에 대비해서 만들어둔 예비적 정당임.
아피싯은 PAD의 공항 점거가 매우 부정적인 선례를 만들었다면서, [대립하는] 양 진영 모두가 향후 수년간 구상하고 있는 각본에 그것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지적했음. 일각에서 태국이 내전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희미하고 끔찍한 전망을 내놓는 것에 대해, 아피싯 자신도 그것을 배제하지 못하겠다고 말함.
아피싯은 푸미폰 국왕이 매우 어려운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을 지적했음. 푸미폰 국왕이 지난 몇년간 싸움에서 벗어나 있었고, 태국의 사회적 갈등의 양 진영 모두에서 존경을 받았다는 것임. 하지만 친탁신파가 마치 국왕이 현재의 정치위기에서 편향된 참가자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한다는 것임. 본 대사가 국왕이 현재의 교착상태를 평화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묻자, 아피싯은 국왕이 국가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호소를 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음. 하지만 그는 어떤 특정한 제안은 군주제에 "엄청난 위험"을 수반할 수 있다고 말했음. 만일 국왕의 조언이 무시를 당할 경우, 군주제의 권위가 상실될 것이라는 이야기임. 본 대사가 군주제의 지속적인 효용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 국왕이 개입하지 않는 일 역시 군주제를 갉아먹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질문하자, 꼰은 코웃음을 쳤고, 아피싯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음. - "당신은 이미 [영국] BBC 홈페이지에 올라온 그 질문을 담은 댓글들을 읽어보았군요." |
몇시간 후, '헌법재판소'는 집권 '국민의 힘 당'에 대한 해산명령을 내리고, 솜차이 총리 및 여타 고위 당직자들의 정치활동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국민의 힘 당'과 함께 연립 정권에 참여했던 군소정당들인 '찻타이 당'(Chart Thai Party: 태국 민족당)과 '마치마 티빠타이 당'(Matchima Thipathai Party: 중도 민주당) 역시 해산당했다. 헌법재판관들이 다시 한번 탁신 및 그 동맹세력의 약화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하지만 차기 정부를 누가 구성할지도 불분명했고, 옐로셔츠들이 공항 점거를 풀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미국대사 에릭 존은 비밀 외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은 널리 예상되던 일이었음. 하지만 반정부 시위가 중단될 수 있을지, 혹은 친정부 지지자들로부터 폭력적인 반응이 촉발되지는 않을지, 그러한 점들은 불분명한 상태임. 본 대사관이 느끼기로는 PAD 지도부는 분열되어 있는데, 그들이 방콕 공항들의 점거가 자신들의 기반인 방콕 중산층 및 상류층 사람들의 지지를 빠르게 잠식할 것이란 점을 깨달았을 수도 있음. 이번 판결은 그들(=PAD 시위대)에게 승리 선언 및 공항 점거를 해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임. 또한 대중들의 관심도 국왕의 생일 기념행사들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할 것임. 아피싯이 예견한대로, 만일 PAD 시위대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경우, 푸미폰 국왕은 12월4일의 대중연설에서 시위를 중단하라는 명확한 신호를 보내지 않을 것이고, 교착상태도 가시적인 종료 시점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지속될 가능성이 있음. |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수백만명의 태국 평민들의 관점에서 보면, 헌재의 결정은 사법부의 정당성과 신뢰도를 더욱 더 갉아먹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도급 왕당파 인사들은 수개월 동안 '국민의 힘 당'의 해산이 예견되는 결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마크 애스큐(Marc Askew)는 자신의 논문 <2008~2010년 사이 태국에서의 대립과 위기>(Confrontation and Crisis in Thailand, 2008-2010)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2008년 말 무렵, 조직화된 가두 소요와 시민불복종, 편집증적인 민족주의, 광적인 왕당파들의 히스테리, 군부의 고의적인 태만, 법원의 징벌적인 결정이 치명적인 조합을 이루면서, 드디어 '국민의 힘 당'이 이끌던 정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
푸미폰 국왕은 12월4일의 생일 연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거짓 '건강악화'를 핑계로 숨어버렸다. 푸미폰 국왕이 편치 않다는 것을 의심할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그가 연설을 하지 못할 정도의 상태라는 진정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대사는 비밀 외교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12월4일, 와치라롱꼰 왕세자와 그의 여동생인 시린톤 공주가 귀빈들 앞에 함께 나타나, 푸미폰 국왕이 아픈 상태이며 전통적인 연례 연설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발표했음.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국왕 대신 간략한 발언을 한 후, 시린톤 공주가 설명에 나서 부왕이 기관지염을 앓고 있다면서, 국왕이 쇠약하여 정맥주사에 의존하면서 식사를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함. 이어진 궁정 관리들의 보고에 따르면, 푸미폰 국왕은 열이 나고 감염 증세를 보이긴 하지만, 12월8일 경에는 호전되면서 가벼운 음식을 섭취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함.
(논평: 태국 정계에서 와치라롱꼰 왕세자와 시린톤 공주 사이의 라이벌 관계는 잘 알려져 있음. 본 대사관은 이들이 함께 공개석상에 나온 것을 왕실이 단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신호로 보고 있음. 시린톤 공주가 국왕의 건강에 관해 설명한 것은 그녀가 최근에 국왕을 만나고 있어서 정당화되는 일이고,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각종 행사에서 공식적으로 국왕을 대리하고 있음. 논평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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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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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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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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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대단한 글입니다..
앞으로 앤드류 마샬의 글을 읽어보지 않거나
그의 글을 인용하지 않고 태국 정치에 관한 글을 쓴다면..
학문적 사기꾼이 되고 마는 시대가 왔네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속도를 좀 높여야죠 ^^
사실 이 논문의 마지막은 이런 내용입니다..
"이 글은 태국의 이 어두웠던 10년간 정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해
조금이나마 얻어들은 지식을 겸허하게 기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내 글은 오직 태국인들의 입에 재갈이 물려져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한에 있어서만 가치가 있다.
그들이 나보다 더욱 지혜롭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들 태국인들이 태국의 암울했던 시기에 관해 완전히 말할 수 있게 되어
그러한 일을 통해, 태국을 이 상황으로부터 빠져나가게 만들어 더욱 번창하게 만들어주길 바란다"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앤드류 마샬의 저러한 결론은 겸손한 것이라고 생각되고요..
아마도 태국인들 중 뛰어난 학자라고 해도
저와 같이 동일한 자료들(=방대한 양의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제공해줘도..
이렇게 오밀조밀하게 잘 정리해주기란 쉽지 않을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앤드류 마샬은 매우 치밀한 언론인이자 좋은 학자라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이 글을 최대한 빨리 번역한 후에..
일단 완역을 마치면..
'크메르의 세계' 공식 파티를 홍대에서 한번 열도록 하겠습니다.. ^^
정회원님들의 많은 동참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