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자: 2010년 12월25일(토)-26일(일)
가는 곳:
(첫째날: 12/25) 오전 맑음 / 오후 눈발 날림
07:30시 서울 교대역 앞에서 출발 -> 13:00시 점심식사 (병영 설성 식당) -> 강진 하멜기념관 -> (월남사 -> 녹차밭 -> 무위사) -> 해남 녹우당 -> 저녁식사 (해남천일식당) -> 숙소 (두륜산 온천랜드)
(둘째날: 12/26) 오전 맑음 / 오후 눈발 날림
07:20시 아침식사 -> 진도 (남도석성, 운림산방, 용장산성, 벽파진) -> 13:40시 점심식사 (진도 통나무집) -> 울돌목과 진도대교 -> 15:00 진도 출발
운림산방은 조선 말기 한국 남종화의 대가 허련이 만년에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 진도로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인데 달리 운림각이라 하기도 했다.
운림산방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흰 수련을 기르고 연못 안에 만들어 놓은 섬에는 배롱나무가 보기 좋게 자라고 있다.
흰 수련 잎사귀가 마치 어렷을 적에 즐겨 먹었던 아이스케키의 팥처럼 얼음 속에 파묻혀 있다.
ㄷ자 기와집인 운림산방과 그 뒤편에 초가로 된 산림채, 그리고 이 옆에 새로 지은기념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가 산림채 뒤에 있는 사당, 운림사. 소치 허련(허유)의 초상과 위패를 모셔 놓았다.
운림사 안에 있는 소치 허련(허유)의 초상화
운림산방 울타리 주위에 심은 조경수가 남도의 정취를 풍긴다. 황금빛 열매가 주렁 주렁 맺힌 유자 나무
남도의 진도엔 벌써 동백꽃이 활짝 피기 시작한다.
흰눈이 점점 함박눈으로 변한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생가를 바라보며 찍었다. 기와집이 소치 허련의 사당, 운림사이다.
소치 허련은 순조 9년(1809)~고종 29년(1892)에 걸쳐 사신 분으로 호는 소치,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의 효시인 왕유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에 재주가 있었는데 28세부터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녹우당에 보관되어 오던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빌려다 보며 그림 공부를 했다. 30대 초반에 초의 스님의 소개로 서울로 가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화 수업을 하여 남화의 대가로 성장했다. 김정희는 허련과 그의 그림을 대단히 사랑하여 원나라 4대 화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을 대치라고 하는데 빗대어서 소치라는 호도 지어 주었고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까지 칭찬하였다. - 뿌리와 샘 답사 안내서 -
아래는 소치의 그림을 이어받은 가계도이다.
소치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첫째아들 온이 그림 재주가 있어 그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열심히 가르쳤는데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실망이 컷다고 한다. 다행히 네째아들 형이 그림 솜씨가 있음을 뒤늦게 우연히 발견하여 그에게 자신의 그림솜씨를 전수했다고 한다. 미산 허형의 남종화 그림 솜씨는 그의 아들인 남농 허건에게 전수되었고 남농에 이르러서 한국 남종화를 대표하는 소치 집안이 다시 크게 부흥하였다.
소치는 스승인 완당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로 귀양가서 8년간 위리안치되셨을 때, 3회에 걸쳐 제주도를 방문하였고 한번 방문할 때면 6개월 이상 머물며 스승으로부터 그림 지도를 계속 받으면서 말벗도 되고 수발도 들고 하여 스승께서 힘든 귀양살이를 잘 견딜수 있도록 힘이 돼주셨다. 스승이 타계하셨을 때, 그는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 진도로 내려 왔다. 그의 나이 49세 되던 철종 8년(1857)이었다. 그는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그림에 몰두하여 만년을 보내다가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선면산수도'가 대표작으로 꼽히며 '몽연록', '소치실록'을 써서 남겼다.
아래 그림은 소치의 손자 허림이 그린 메추라기 그림이다.
조선시대 전통 한국화(또는 전통 중국화(국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메추라기 2마리를 그렸고, 이 위에 이름모를 화초와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를 그렸다. (꽃은 용담꽃을 닮은 듯하고, 빨간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엔 가시가 달렸는데... 무슨 나무의 열매일까?) 아뭏든 이 메추라기 그림은 전통화의 그림 그리는 형식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려 한 것 같다.
아래는 조선 후기 화가인 최북의 '메추라기와 조' 그림인데, 전통 그림 그리는 형식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이다.
메추라기 위에 주렁 주렁 달린 것은 '조'이다.
메추라기와 조, 종이에 담채 (17.7x27.5cm), 최북(1712∼1786?)
최북(崔北)은 조선 후기의 화가로, 스스로 자신의 호를 호생관(毫生館)으로 지었는데 이는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또 자신의 이름, 북(北)字를 좌,우로 파자(破字)하여 '칠칠(七七)이'라고도 하였으니, 그의 호에서 당시 사농공상의 계급 사회, 양반만이 득세했던 조선 사회을 바라보는 화가 최북의 인생관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고도 하였으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도 불렸다. 옛 그림에는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동물, 꽃, 나무, ...)이 한자(중국어)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자 성어를 그림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다. 이 조밭에 그린 메추라기는 반드시 암컷을 그려야 하는데 이는 암컷 메추리는 편안할 安(안)을 의미하고 (중국말로 암컷 메추리 암과 편안할 안(安)은 발음이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조밭은 和(화)를 의미한다. 즉, 이 그림은 서로 화합하여 편안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그림(메추라기와 조)을 일컬어 안화도 (安和圖)라고 부른다. 즉, 메추라기 그림으로 하나의 완성된 의미를 전달하려면 메추라기와 함께 반드시 조를 그려야 그 뜻이 통하게 된다. 위의 허림이 그린 메추라기 그림은 이런 전통화의 그림 그리는 방법, 아니 그림 읽는 방법(독화법)의 원리를 그만 모르고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된다.
이 그림은 소치가 그린 8폭 산수화 평풍이다. 소치의 장기인 남종산수화가 그윽하게 펼쳐졌다.
이 그림은 남농 허건의 그림인가? 전통 한국화에 대해서 평을 할 실력은 안되지만.. 이 그림을 보니 남농의 필법은 할아버지 소치의 전통 산수화 (남종 문인화) 그리는 틀에서 약간 벗어난 듯 하다. 실경산수에 가까워 보이고 그만의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한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한국의 남종화에서 남농을 알아주는가 보다.
첫댓글 휴~~ 졸음이 쏟아져서 다 못 쓰고... 나머지는 주중에 마무리해야겠어요. 메추리 그림얘길 좀 더 해야하는데..
알겠습니다. ^^ 시간날 때마다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