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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1-5).
지금까지 우리는 이 다섯 구절 속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영광이 구원 사역을 통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내디뎌서 우리의 구원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영원한 회의 (the Eternal Council) 속에서 하나님이 그 구원을 계획하신 것과 그 구원의 일을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따로 구별해 놓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구원이 계획되고 구상되고 어떻게 실천으로 옮겨졌는지를 좀더 상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자의 삶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특별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동일한 내용이 우리를 강력하게 깨우쳐 줍니다. 즉 이 '영광'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것은 모두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성자의 영광을 살펴보겠는데, 다시 여기서 우리는 성자의 구원 사역과 관련된 전체적 활동 사항이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말하자면 이 놀라운 파노라마를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정신과 상상력에까지도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구원의 전체 그림이 여기 우리의 눈앞에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도록 펼쳐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몇 구절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경외심과 경이감과 찬송이 터져 나오는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 오늘 현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크게 모자라는 부분 중 하나를 다같이 정직하게 인정하시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저는 지금 일반적인 교회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로 정직하게 말한다면, 스스로 복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우리들 중 상당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예배와 기독교적 삶의 실천에 있어서 가장 큰 결격 사항은 경이감 부재, 찬송의 열정과 예배 의식의 부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확신을 갖고 말씀을 드리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너무 주관적이라는 사실로 크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저는 본 장 강해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이 말씀을 드려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볼 때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배워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분위기와 상태와 조건들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심리학적 태도를 갖고 있어서 나 자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하며 분석적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기독교의 복음과 구원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들에만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갖게 된 나머지 성경 자체에 드러나 있는 복음의 위대한 영광을 놓쳐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채셨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간증'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는 대부분 우리가 무엇을 체험했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핍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간 성도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그들이 자기들의 시간 거의 대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며 사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간증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품에 대하여 증거하였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일들, 우리가 발견한 행복들, 우리가 체험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정말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강조점을 집중시켜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세기 전의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진실이었던 것으로부터 정말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여러분의 찬송가를 펴고 위대한 찬송시들을 읽어 보십시오. 특별히 19세기 중엽 이전에 쓰여진 찬송가들을 읽어 보십시오(제가 보기에 주관적 요소가 그맘때쯤에 나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이작 왓츠(Isaac Watts)에서 시작해서 그 이후의 위대한 전통을 따라 내려와 보면 그들의 찬송시들은 이 영광스러운 객관성을 담고 있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자신의 체험을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찬송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었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작 왓츠의 찬송시 속에서 그들은 영광의 왕이 매달려 죽으신 그 놀라운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것이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상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님을 예배하고 찬미하며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만 할 핵심요점이며, 따라서 우리가 이리로 돌아올 때까지는 부흥과 참된 각성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방식을 말씀 드리자면, 우리가 시간을 들여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며 그 기이한 진리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론적인 차원에서만 말씀 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간절한 열망이 있습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주관적 사고에서 생기는 질병을 대부분 치료할 수 있는 진정한 처방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영광에 깊이 매료된 나머지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전혀 갖지 않을 정도가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심리학적으로도 참 바람직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지금 매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굴지 맙시다.
우리는 이제까지 인류가 거의 경험해 보지 못한 문제들과 고통스럽게 씨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시대에는 사람들이 항상 병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집착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타입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경이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의 관건은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외의 어떤 사람에 대하여, 또는 우리 외의 어떤 것에 대하여 완전히 몰입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나 그 사물이 너무나 영광스럽고 놀라워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어떤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또는 어떤 사람에게 완전히 반해 버릴 때 흔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 우리 이 사실을 무한대로 확대시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들여다보십시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어떤 것을 붙잡읍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영혼의 응어리와 홍역'이 대부분 자동적으로 치유될 것이며, 우리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도 건강한 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구원에 대하여, 신약성경의 히브리서 2장이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그 큰 구원'에 대해서 어떤 것들을 알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저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바 기독교 구원의 위대성을 과연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의심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그렇게 하는 방법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위대함을 측정하는 방법입니다. 그저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만 가지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거기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건져냅시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을 가지고만 자꾸 측정하려 든다면 끝내 우리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의 이단들이나 정신분석학자들에게 반박할 말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구원을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과거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이 구원의 위대성을 측정하는 방식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그의 영광을 살펴보고, 그가 하신 어떤 일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바로 이 다섯 구절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5절에서 시작해서 그 진행 과정을 살펴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생애가 끝나갈 무렵에 하나님께 "아버지여 창세 전에 제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이 특이하고 놀라운 영광스러운 인성을 갖고 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인격을 힘써 연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베들레헴 아기에서 시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거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인간이 태어난 방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광 중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세계에서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성경 다른 어느 곳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한 하나님의 본질적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다고 본 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유한한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살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한 하나님이 존재하시지만 영원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격인 성자께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영광을 누리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선언과 같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이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인격이 분명한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옛날 표현을 빌어 사용하자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시며, 동등하시고, 동일한 영원성을 공유하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품속에 계신 영원한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복되신 성삼위의 제2격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바로 이 분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완전한 영광을 함께 누리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색을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단계는 명백히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던 그 영광으로 다시 아들을 영화롭게 해 주십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함축되어 있는 사실은 그 영광에 관련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히 신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누렸었던 영원한 영광을 사양하신 것입니다. 우리 여기에서 아주 주의하십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말하도록 하십시다. 저는 지금 예수님이 신성을 버리셨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양하신 것은 그의 신성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를 멈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친히 갖고 있는 영광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화산상에서 일어났던 일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화하셨습니다. 일종의 광채가 예수님께 임하였는데, 그것은 그 제자들이전에 보았었던 어떤 빛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였습니다. 그 광채와 평소에 예수님이 나타내시던 모습과 비교해 보십시오. 또는 다시 한번, 다메섹을 향하여 가고 있던 다소 사람 사울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한낮의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하늘에서 내리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광채가 이 영화로우신 나사렛 예수님의 얼굴에서 뿜어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행 9장). 그런데 여러분이 지금 본문에서 보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그 영광을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에 대하여 표현된 모습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라" (사 53:2, 3).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이 자가 누구인가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막 6:3)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벗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 및 그의 본질적 신성에 관련된 것은 단 한 가지도 벗어두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 영광을 붙잡지 않았으며, 또 그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외투를 벗어놓는 것처럼 그 영광을 벗어놓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실로 저는 이 주제에 대하여 더욱 깊이 들어가 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적 영광을 육체로 가리우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신적영광은 여전히 예수님의 모든 능력과 함께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베일이 그 영광을 가렸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구약의 실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모세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았는데, 그것이 너무나 찬란했기 때문에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써야 했습니다. 그 영광은 여전히 거기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수건이 그 영광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사람으로 오신 정도가 아닙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영광이 육체에 의해 가려졌다는 것만 사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육체가 되셨다고만 말하는 것은 옳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셨다는 기록을 발견합니다(롬 8:3). 실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한 사람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빌 2:7). 만일 이 영원한 왕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함과 왕의 영광을 갖춘 인간 왕으로 한 궁정에서 사셨다 하더라도 이는 정말 놀랍고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가난한 환경 속에서 한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보통의 제사를 드릴 만한 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한 쌍의 비둘기밖에는 제물로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일을 하시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주택을 소유하지 않으셨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에 머리를 두고 잘 마땅한 거처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모양을 취하시고 소위 시간 세계의 크다고 하는 자들에게 멸시와 탈취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그렇게 낮은 자리로 내려와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는 그 영광을 갖지 아니하셨는데, 이제 그 영광을 자기에게 되돌려 주실 때가 되었다고 성부 하나님께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이런 찬송가는 특별한 절기에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육체 속에 가려진 신격을 보라!
찬양하세,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을,
온유하게도 그 영광 내려놓으시네.
태어나신 것은 사람들로 죽지 않게 하려 하심일세.
이 역설을 보십시오. 이 엄청난 대조점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게 그 영광을 벗어 놓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성을 취하시고,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사람처럼 태어나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서 스스로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을-진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물론 그렇게 하시면서 어떤 의미로는 육체 속에 가려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셨으며 선언하셨습니다.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영광스러운 하나님 같은 모습을, 다름 아닌 성부 하나님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눈길과 더불어, 그분의 깊은 이해심과, 그리고 도와 주고 축복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 친절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뵈올 수만 있다면 하십니까? 한번은 주님의 제자 빌립이 이렇게 요청하였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러자 주님이 빌립을 바라보시면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8, 9) 하시며 꾸중 섞인 말씀으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그 영광을 자기의 삶과 모든 활동과 자기의 존재 속에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가운데서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복되신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로부터 직접 나온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가르침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들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심지어 구약의 계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관한 이 진리를 여기저기서 부분적으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것을 그 사랑하시는 아들 속에서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충만하게, 완벽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이 모두 이 놀라운 사람이신 복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들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사명을 주시고 파송하신 그 일을 해내심으로써 그 일을 훨씬 더 현저한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으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은 스스로 율법을 준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율법을 인류 전체에게 주시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율법의 전체 정신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몇 가지의 규례나 규칙을 지키는 정도나, 이런 일을 행하고 저런 일은 행하지 않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의 진정한 목적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를 가르치고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주신 첫 번째 사명은 그 율법을 존중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지켜냄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적 부분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구속받은 사람들을 대표하기 위해서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에서 우리는 복되신 주님의 대제사장직에 대해 매우 놀라운 말을 듣게 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영광의 주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실 수 있게 되기 전에 어떤 것들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의 완전한 지도자가 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일이 있었고 이 과정을 통과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과하셔야만 우리가 시험당할 때 지원해 주실 수 있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이해심과 자비심이 충만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에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 모든 것들에 자기 자신을 복종시켰습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시면서 단지 자기 자신의 영광에 관한 것만을 보여 주려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구원의 방법의 원기획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기이하고 놀랍습니까! 오, 나의 친구 여러분, 우리는 이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이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 점을 상세하게 살펴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 분이 바로 영광의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 분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며 아버지의 인격의 형상이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구유에 누이신 그분, 광야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당하고 계시는 그분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의 창조자이신 영광의 주님이 그 영광을 온유하게 내려놓으시고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친히 사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실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한 가지를 대하게 됩니다. 1절에 보면,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5절에 있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와 같은 내용의 것일까요?
저는 여러분들께 그것이 같은 내용이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두 가지 간구는 정확히 같은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1절의 간구는 때가 이르렀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할 그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모든 위기 중에 가장 큰 위기에 처할 시기가 왔다는 것입니다. 오 예수님이 그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아기로 태어나시고, 스스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상이요,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여인의 자궁 속에 누워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모든 시련과 고난은 우리가 도저히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막 견뎌내려 하고 계신 이 최후의 시련, 즉 십자가와 관련된 모든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심오하고, 더 위대하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여기 이 땅에서 사람으로서 사셨던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의미는 "아버지여, 나를 능하게 하시고 힘있게 하사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보여 주고 입증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히브리어 5장을 보면,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려 자기를 붙잡아 주시고 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또한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그 기도의 응답을 받으셨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자 이것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셔야 하는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무거운 죄를 친히 짊어져야 할 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책이라는 그 엄청난 짐을 한 몸에 짊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의 등에 올려놓는 그 짐입니다. 그 짐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예수님의 몸과 영혼을 짓누르는 무게였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그 엄청난 죄짐의 무게에 눌려 깨지고 말 것인가? 예수님이 과연 그 짐을 견뎌내실 수 있을까? 인류를 위하여 죄가 없는 분이 죄가 되셨으므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는 그 절망감을 참아내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인류의 죄짐과 그에 대한 형벌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여, 저를 능하게 하시고 붙잡아 주셔서 제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세상에 입증하시고 이 세상에서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것이 1절에 나오는 간구의 의미입니다. 그 기도는 응답 되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하늘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여러분에게 미리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육체가 되셨고, 죄 있는 육체의 모양을 입으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대항하는 죄인들의 거슬림을 견뎌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표현한 대로,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 죽음보다 더 깊은 죽음은 없습니다.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고통의 십자가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를 능하게 하시고 힘있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으며, 아버지는 그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화롭게 되셨고, 힘과 능을 얻으셨고,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아내셨습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그 죄짐과 형벌 아래서 으스러지지 않았습니다. 과업은 끝났고, 예수님은 모든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자, 이제 5절에 나오는 간구의 내용을 살펴보십시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자기 앞에 남아 있는 일을 예상하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하라고 지정해 주신 모든 일들을 완수하고 나서 사실상 이렇게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제 전에 제가 있던 그 자리로 제가 돌아갈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까? 저는 모든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이제는 신인(神人: God-Man)으로 돌아가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완전무결한 신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광을 공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인 (神人)으로 돌아가십니다. 신인이신 예수님, 우리 인류의 대표자가 되신분으로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요청에 따라 일시적으로 내려놓으셨던 그 영광을 회복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인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중보자로서 다시금 영원한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공유하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 역시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때 응답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활 사건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자들에게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에는 잘 몰랐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했듯이, 우리 주님께서는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사망과 무덤을 이기고 일어나신 그분이 누구입니까?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부활 후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여러 가지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잠겨져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먹을 것을 좀 가져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기가 유령이 아니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숯불에 구운 생선 조각과 떡'을 드렸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보다시피 바로 나다. 나는 뼈와 살을 가졌다.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이다.” 이것이 부활하신 이 예수님의 영화로우신 인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승천에서 훨씬 더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분들이 승천일을 지키지 않고 있지요?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다소 일관성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와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은 지킵니다. 또 성령 강림 주일도 지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일은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어 가는 모든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승천은 매우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던 중에 공중으로 들림받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을 통하여 그 영광을 더욱더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시며,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영광 중에 앉아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모든 원수들을 그의 발 받침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 앞에 요한복음 17장의 첫 다섯 구절에 묘사된 영광에 관한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지고의 하늘 영광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십자가와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그 형언할 수 없는 성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도 인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 모든 일을 행하셨을까요?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다 좋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가한 곳이고 아무런 일도 없고 염려와 걱정거리도 시련도 없는 곳이라면 이 모든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다루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손에 잡히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목사님은 이런 것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공부해 온 것을 통해서 아직도 그런 식으로 느끼는 분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금까지 애써 하고자 한 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에게 생생하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과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말로 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성령과 그 모든 능력을 받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모든 것이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 같고 나와 관계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것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을 위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하셨습니다. 이 점이 바로 그 영광의 위대함입니다.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고통의 십자가로
이 모든 것은 죄의 포로들을 속량하기 위함이니
나의 찬양이 영원무궁토록 흐르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불멸의 구주시여, 가소서 돌아가서
당신의 발 받침대를 떠나 당신의 보좌를 취하소서.
거기에서 돌아오셔서 영원무궁히 다스리소서.
나라가 모두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고찰해 온 것들에 대한 참된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그는 죄의 포로들을 속량하기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다름아닌 여러분을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닫는다면 로버트 로빈슨(Robert Robinson)의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당신의 찬양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까?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합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찬양합니까? 당신 감격은 다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해 줍니까?" 요즘 우리들은 우리가 좋아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영화 배우들과 정치가들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칭찬하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그런 글들을 발견합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책을 집중해서 읽으려고 할 때도 사람들이 그런 유명 인사들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로버트 로빈슨의 말에 동의하고 싶습니다. "내 혀를 자르소서. 그 죄악된 침묵을!"
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이런 것들의 영광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신속히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주시어 여러분의 눈이 이 영광스럽고 보배로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활짝 열리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것들이 실제적으로 절감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것들을 분명히 인식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우리의 온 존재를 드려서 찬미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영광스러운 일들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머리와 마음과 이해력 속에 그 일들을 너무나 확실히 새겨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일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올 나머지 마침내 우리는 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제 5 장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1-5).
지금까지 우리는 이 다섯 구절 속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영광이 구원 사역을 통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내디뎌서 우리의 구원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영원한 회의 (the Eternal Council) 속에서 하나님이 그 구원을 계획하신 것과 그 구원의 일을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따로 구별해 놓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구원이 계획되고 구상되고 어떻게 실천으로 옮겨졌는지를 좀더 상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자의 삶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특별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동일한 내용이 우리를 강력하게 깨우쳐 줍니다. 즉 이 '영광'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것은 모두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성자의 영광을 살펴보겠는데, 다시 여기서 우리는 성자의 구원 사역과 관련된 전체적 활동 사항이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말하자면 이 놀라운 파노라마를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정신과 상상력에까지도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구원의 전체 그림이 여기 우리의 눈앞에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도록 펼쳐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몇 구절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경외심과 경이감과 찬송이 터져 나오는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 오늘 현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크게 모자라는 부분 중 하나를 다같이 정직하게 인정하시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저는 지금 일반적인 교회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로 정직하게 말한다면, 스스로 복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우리들 중 상당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예배와 기독교적 삶의 실천에 있어서 가장 큰 결격 사항은 경이감 부재, 찬송의 열정과 예배 의식의 부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확신을 갖고 말씀을 드리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너무 주관적이라는 사실로 크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저는 본 장 강해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이 말씀을 드려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 말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볼 때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특별히 배워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분위기와 상태와 조건들에 너무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심리학적 태도를 갖고 있어서 나 자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민감하며 분석적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기독교의 복음과 구원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들에만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갖게 된 나머지 성경 자체에 드러나 있는 복음의 위대한 영광을 놓쳐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채셨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간증'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는 대부분 우리가 무엇을 체험했고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핍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간 성도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그들이 자기들의 시간 거의 대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며 사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간증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품에 대하여 증거하였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일들, 우리가 발견한 행복들, 우리가 체험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정말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강조점을 집중시켜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세기 전의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진실이었던 것으로부터 정말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왔습니다. 여러분의 찬송가를 펴고 위대한 찬송시들을 읽어 보십시오. 특별히 19세기 중엽 이전에 쓰여진 찬송가들을 읽어 보십시오(제가 보기에 주관적 요소가 그맘때쯤에 나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이작 왓츠(Isaac Watts)에서 시작해서 그 이후의 위대한 전통을 따라 내려와 보면 그들의 찬송시들은 이 영광스러운 객관성을 담고 있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자신의 체험을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찬송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었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작 왓츠의 찬송시 속에서 그들은 영광의 왕이 매달려 죽으신 그 놀라운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것이 전체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상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주님을 예배하고 찬미하며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만 할 핵심요점이며, 따라서 우리가 이리로 돌아올 때까지는 부흥과 참된 각성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방식을 말씀 드리자면, 우리가 시간을 들여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며 그 기이한 진리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론적인 차원에서만 말씀 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간절한 열망이 있습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주관적 사고에서 생기는 질병을 대부분 치료할 수 있는 진정한 처방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영광에 깊이 매료된 나머지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전혀 갖지 않을 정도가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심리학적으로도 참 바람직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지금 매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굴지 맙시다.
우리는 이제까지 인류가 거의 경험해 보지 못한 문제들과 고통스럽게 씨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시대에는 사람들이 항상 병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집착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타입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경이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의 관건은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외의 어떤 사람에 대하여, 또는 우리 외의 어떤 것에 대하여 완전히 몰입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나 그 사물이 너무나 영광스럽고 놀라워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어떤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또는 어떤 사람에게 완전히 반해 버릴 때 흔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 우리 이 사실을 무한대로 확대시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들여다보십시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어떤 것을 붙잡읍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영혼의 응어리와 홍역'이 대부분 자동적으로 치유될 것이며, 우리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도 건강한 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구원에 대하여, 신약성경의 히브리서 2장이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그 큰 구원'에 대해서 어떤 것들을 알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저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바 기독교 구원의 위대성을 과연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의심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그렇게 하는 방법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위대함을 측정하는 방법입니다. 그저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들만 가지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거기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건져냅시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을 가지고만 자꾸 측정하려 든다면 끝내 우리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의 이단들이나 정신분석학자들에게 반박할 말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구원을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과거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이 구원의 위대성을 측정하는 방식은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그의 영광을 살펴보고, 그가 하신 어떤 일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 이것이 바로 이 다섯 구절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5절에서 시작해서 그 진행 과정을 살펴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생애가 끝나갈 무렵에 하나님께 "아버지여 창세 전에 제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이 특이하고 놀라운 영광스러운 인성을 갖고 계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인격을 힘써 연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베들레헴 아기에서 시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거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인간이 태어난 방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광 중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세계에서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성경 다른 어느 곳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한 하나님의 본질적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다고 본 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유한한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살펴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한 하나님이 존재하시지만 영원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격인 성자께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영광을 누리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선언과 같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이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인격이 분명한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도 동일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옛날 표현을 빌어 사용하자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시며, 동등하시고, 동일한 영원성을 공유하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품속에 계신 영원한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복되신 성삼위의 제2격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바로 이 분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완전한 영광을 함께 누리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색을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단계는 명백히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던 그 영광으로 다시 아들을 영화롭게 해 주십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함축되어 있는 사실은 그 영광에 관련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히 신약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누렸었던 영원한 영광을 사양하신 것입니다. 우리 여기에서 아주 주의하십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말하도록 하십시다. 저는 지금 예수님이 신성을 버리셨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양하신 것은 그의 신성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를 멈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친히 갖고 있는 영광을 일부러 드러내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화산상에서 일어났던 일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변화하셨습니다. 일종의 광채가 예수님께 임하였는데, 그것은 그 제자들이전에 보았었던 어떤 빛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였습니다. 그 광채와 평소에 예수님이 나타내시던 모습과 비교해 보십시오. 또는 다시 한번, 다메섹을 향하여 가고 있던 다소 사람 사울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한낮의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하늘에서 내리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광채가 이 영화로우신 나사렛 예수님의 얼굴에서 뿜어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행 9장). 그런데 여러분이 지금 본문에서 보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그 영광을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에 대하여 표현된 모습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라" (사 53:2, 3).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이 자가 누구인가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막 6:3)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벗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 및 그의 본질적 신성에 관련된 것은 단 한 가지도 벗어두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 영광을 붙잡지 않았으며, 또 그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외투를 벗어놓는 것처럼 그 영광을 벗어놓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실로 저는 이 주제에 대하여 더욱 깊이 들어가 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적 영광을 육체로 가리우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신적영광은 여전히 예수님의 모든 능력과 함께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베일이 그 영광을 가렸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구약의 실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모세는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았는데, 그것이 너무나 찬란했기 때문에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써야 했습니다. 그 영광은 여전히 거기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수건이 그 영광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사람으로 오신 정도가 아닙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영광이 육체에 의해 가려졌다는 것만 사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육체가 되셨다고만 말하는 것은 옳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셨다는 기록을 발견합니다(롬 8:3). 실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한 사람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빌 2:7). 만일 이 영원한 왕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이 세상의 모든 화려함과 왕의 영광을 갖춘 인간 왕으로 한 궁정에서 사셨다 하더라도 이는 정말 놀랍고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런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가난한 환경 속에서 한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보통의 제사를 드릴 만한 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마리아와 요셉은 한 쌍의 비둘기밖에는 제물로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일을 하시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주택을 소유하지 않으셨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에 머리를 두고 잘 마땅한 거처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모양을 취하시고 소위 시간 세계의 크다고 하는 자들에게 멸시와 탈취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그렇게 낮은 자리로 내려와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는 그 영광을 갖지 아니하셨는데, 이제 그 영광을 자기에게 되돌려 주실 때가 되었다고 성부 하나님께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이런 찬송가는 특별한 절기에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육체 속에 가려진 신격을 보라!
찬양하세,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을,
온유하게도 그 영광 내려놓으시네.
태어나신 것은 사람들로 죽지 않게 하려 하심일세.
이 역설을 보십시오. 이 엄청난 대조점들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게 그 영광을 벗어 놓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성을 취하시고,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사람처럼 태어나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 속에서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서 스스로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을-진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물론 그렇게 하시면서 어떤 의미로는 육체 속에 가려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셨으며 선언하셨습니다.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영광스러운 하나님 같은 모습을, 다름 아닌 성부 하나님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눈길과 더불어, 그분의 깊은 이해심과, 그리고 도와 주고 축복할 준비가 되어 있으신 친절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뵈올 수만 있다면 하십니까? 한번은 주님의 제자 빌립이 이렇게 요청하였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러자 주님이 빌립을 바라보시면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8, 9) 하시며 꾸중 섞인 말씀으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그 영광을 자기의 삶과 모든 활동과 자기의 존재 속에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가운데서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의 복되신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로부터 직접 나온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가르침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들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심지어 구약의 계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관한 이 진리를 여기저기서 부분적으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것을 그 사랑하시는 아들 속에서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충만하게, 완벽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이 모두 이 놀라운 사람이신 복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들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사명을 주시고 파송하신 그 일을 해내심으로써 그 일을 훨씬 더 현저한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으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은 스스로 율법을 준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율법을 인류 전체에게 주시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율법의 전체 정신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몇 가지의 규례나 규칙을 지키는 정도나, 이런 일을 행하고 저런 일은 행하지 않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의 진정한 목적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를 가르치고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주신 첫 번째 사명은 그 율법을 존중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지켜냄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적 부분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구속받은 사람들을 대표하기 위해서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에서 우리는 복되신 주님의 대제사장직에 대해 매우 놀라운 말을 듣게 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영광의 주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실 수 있게 되기 전에 어떤 것들을 배우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의 완전한 지도자가 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일이 있었고 이 과정을 통과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과하셔야만 우리가 시험당할 때 지원해 주실 수 있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이해심과 자비심이 충만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에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 모든 것들에 자기 자신을 복종시켰습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하시면서 단지 자기 자신의 영광에 관한 것만을 보여 주려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구원의 방법의 원기획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기이하고 놀랍습니까! 오, 나의 친구 여러분, 우리는 이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이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 점을 상세하게 살펴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 분이 바로 영광의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 분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며 아버지의 인격의 형상이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구유에 누이신 그분, 광야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당하고 계시는 그분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의 창조자이신 영광의 주님이 그 영광을 온유하게 내려놓으시고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친히 사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실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한 가지를 대하게 됩니다. 1절에 보면,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5절에 있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와 같은 내용의 것일까요?
저는 여러분들께 그것이 같은 내용이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두 가지 간구는 정확히 같은 문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1절의 간구는 때가 이르렀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할 그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모든 위기 중에 가장 큰 위기에 처할 시기가 왔다는 것입니다. 오 예수님이 그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아기로 태어나시고, 스스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상이요,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여인의 자궁 속에 누워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모든 시련과 고난은 우리가 도저히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막 견뎌내려 하고 계신 이 최후의 시련, 즉 십자가와 관련된 모든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심오하고, 더 위대하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여기 이 땅에서 사람으로서 사셨던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의미는 "아버지여, 나를 능하게 하시고 힘있게 하사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보여 주고 입증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히브리어 5장을 보면,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려 자기를 붙잡아 주시고 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또한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그 기도의 응답을 받으셨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자 이것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셔야 하는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무거운 죄를 친히 짊어져야 할 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책이라는 그 엄청난 짐을 한 몸에 짊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의 등에 올려놓는 그 짐입니다. 그 짐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예수님의 몸과 영혼을 짓누르는 무게였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그 엄청난 죄짐의 무게에 눌려 깨지고 말 것인가? 예수님이 과연 그 짐을 견뎌내실 수 있을까? 인류를 위하여 죄가 없는 분이 죄가 되셨으므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는 그 절망감을 참아내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인류의 죄짐과 그에 대한 형벌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여, 저를 능하게 하시고 붙잡아 주셔서 제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세상에 입증하시고 이 세상에서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것이 1절에 나오는 간구의 의미입니다. 그 기도는 응답 되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하늘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여러분에게 미리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육체가 되셨고, 죄 있는 육체의 모양을 입으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대항하는 죄인들의 거슬림을 견뎌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표현한 대로,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 죽음보다 더 깊은 죽음은 없습니다.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고통의 십자가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를 능하게 하시고 힘있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으며, 아버지는 그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화롭게 되셨고, 힘과 능을 얻으셨고, 마침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아내셨습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그 죄짐과 형벌 아래서 으스러지지 않았습니다. 과업은 끝났고, 예수님은 모든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자, 이제 5절에 나오는 간구의 내용을 살펴보십시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자기 앞에 남아 있는 일을 예상하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하라고 지정해 주신 모든 일들을 완수하고 나서 사실상 이렇게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제 전에 제가 있던 그 자리로 제가 돌아갈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까? 저는 모든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이제는 신인(神人: God-Man)으로 돌아가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완전무결한 신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광을 공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인 (神人)으로 돌아가십니다. 신인이신 예수님, 우리 인류의 대표자가 되신분으로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요청에 따라 일시적으로 내려놓으셨던 그 영광을 회복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인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중보자로서 다시금 영원한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공유하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 역시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때 응답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활 사건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자들에게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에는 잘 몰랐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했듯이, 우리 주님께서는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사망과 무덤을 이기고 일어나신 그분이 누구입니까?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부활 후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여러 가지 모습을 묵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잠겨져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먹을 것을 좀 가져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기가 유령이 아니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숯불에 구운 생선 조각과 떡'을 드렸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보다시피 바로 나다. 나는 뼈와 살을 가졌다.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이다.” 이것이 부활하신 이 예수님의 영화로우신 인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승천에서 훨씬 더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분들이 승천일을 지키지 않고 있지요?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다소 일관성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와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은 지킵니다. 또 성령 강림 주일도 지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일은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어 가는 모든 과정 속에서 예수님의 승천은 매우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던 중에 공중으로 들림받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오순절날 성령 강림을 통하여 그 영광을 더욱더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시며,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영광 중에 앉아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모든 원수들을 그의 발 받침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 앞에 요한복음 17장의 첫 다섯 구절에 묘사된 영광에 관한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지고의 하늘 영광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십자가와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그 형언할 수 없는 성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도 인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 모든 일을 행하셨을까요?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다 좋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가한 곳이고 아무런 일도 없고 염려와 걱정거리도 시련도 없는 곳이라면 이 모든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다루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손에 잡히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목사님은 이런 것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공부해 온 것을 통해서 아직도 그런 식으로 느끼는 분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금까지 애써 하고자 한 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에게 생생하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과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말로 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성령과 그 모든 능력을 받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모든 것이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 같고 나와 관계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것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바로 당신을 위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하셨습니다. 이 점이 바로 그 영광의 위대함입니다.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서
가장 낮은 고통의 십자가로
이 모든 것은 죄의 포로들을 속량하기 위함이니
나의 찬양이 영원무궁토록 흐르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불멸의 구주시여, 가소서 돌아가서
당신의 발 받침대를 떠나 당신의 보좌를 취하소서.
거기에서 돌아오셔서 영원무궁히 다스리소서.
나라가 모두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고찰해 온 것들에 대한 참된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그는 죄의 포로들을 속량하기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다름아닌 여러분을 위해서 그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닫는다면 로버트 로빈슨(Robert Robinson)의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당신의 찬양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까?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합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찬양합니까? 당신 감격은 다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해 줍니까?" 요즘 우리들은 우리가 좋아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영화 배우들과 정치가들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칭찬하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그런 글들을 발견합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책을 집중해서 읽으려고 할 때도 사람들이 그런 유명 인사들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시 로버트 로빈슨의 말에 동의하고 싶습니다. "내 혀를 자르소서. 그 죄악된 침묵을!"
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이런 것들의 영광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신속히 하나님께 나아가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주시어 여러분의 눈이 이 영광스럽고 보배로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활짝 열리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것들이 실제적으로 절감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것들을 분명히 인식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우리의 온 존재를 드려서 찬미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영광스러운 일들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머리와 마음과 이해력 속에 그 일들을 너무나 확실히 새겨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일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올 나머지 마침내 우리는 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