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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설교자와 청중을 잇는 설교의 연결고리
최 명 훈
I. 들어가며
설교의 형식적인 3요소는 성경, 설교자, 청중이다.
설교자는 성경과 청중을 잇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과 청중과의 연결고리에 주의,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잇는 오늘날의 기독교 설교는 주해설교, 본문설교, 주제설교, 강해설교,
이야기식설교, 멀티미디어설교 등등 다양한 형태로 강단에서 선포되어지고 있다.
어떤 형태로이든, 설교는 결국 성경, 설교자, 청중의 교류를 통하여 완성되게 된다.
J. M. 스프롤(Speorule)은 설교 커뮤니케이션이 자아에 미치는 4가지 요소로,
첫째, 설교자를 향한 청중의 반응
둘째, 청중에 대한 설교자의 반응
셋째, 설교자 자신과 설교자가 전하는 메시지 사이의 관계,
넷째, 설교자가 설교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평안한 분위기를 느끼는가?1)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인 설교의 완성을 가장 적절히 표현된 말로 볼 수 있다.
성경과 설교자와 청중을 잇는 연결고리(link)를 찾는 것은 결국 설교의 궁극적인 완성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장중심의 교회론을 전개해왔고, 결과적으로 설교는 설교 자체로서의 본질적 사명보다는 도리어
교회성장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많은 논문들도 설교 본질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관점보다는 교회성장과 연계한 논문이 많았점 점도 사실이다.
설교의 본래적 사명을 찾는 것이 앞으로 한국교회의 설교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경과 설교자와 청중들간의 사이를 바로 이을때, 한국교회의 설교는 본래적 사명을 회복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설교의 정의와 본질에 관하여 논하고 난뒤 ,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자의 지적인 준비와 영적인 준비, 청중의 공감대와 필요를 중심으로 고리를 차근차근 연결해 나가고자 한다.
1. 설교의 본질과 정의
목회의 본질은 무엇일까? 목회적 본질을 이해한다면, 설교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은 무엇일까? 목회라는 말 자체에는 목양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설교라는 방식을 통하여 말씀의 선포하고, 교육하는 기능도 있다. 시워드 힐트너는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의미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의미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난 다음부터 ‘목회’란 말이 씌어져 왔다.
그러네 여기에는 대개 두 가지 다른 뜻이 내포돼 있었던 것이다. 즈빙글리가 쓴 ‘목자’(The Shepherd)라는 책에서 부터
시작해 보자. 여기 보면, ‘목회적’이라는 말은 명사 ‘목자=목사’(pastor)의 기능을 연장한,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
목자나 목회자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목회적’ 이라 보았던 것 같다.
… ‘목회적’ 이라는 말은, 둘째로 성서적인 비유를 당돌하게 그대로 강조하는 뜻으로 씌어지기도 했다.
18세기나 19세기에 가 보면, ‘포메이닉스’(poimenics)라는 말이 씌어져 있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은 목회를 연구한다는 말로서, 희랍 말의 ‘포이멘’(poimen)에서 나왔는데, 본래는 양떼를 먹이고 돌본다는
동사(動詞)에서 유래한 말인 것이다. ‘포이메닉스’는 목사와 교회의 여러 다른 기능을 포함하는 말들과 함께 씌어 졌었다.
가령 종교적인 교훈을 연구하는 ‘카테케틱스’(catechetics)라든가, 종교적인 진리 전달이라든가, 설교를 연구하는 설교학(homiletics), 그리고 그 이외의 여러 것들이 다 그런 것들이었다. …
둘다 이 목회에 관한 규범적인 개념 형성에 한가지씩 공헌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먹이라고 부탁하신 양들을 풍성히 먹이고, 돌보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며, 목회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구체적인 삶의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
찰스 제퍼슨(Charles Jefferson)은 이러한 점에서 다음과 같이 목회와 설교자간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양들을 먹이는데 실패한 목자가 좋은 목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설교를 잘 할 수 없는 좋은 목회자란 있을 수 없다.
목회자로서의 해야 할 역할의 하나는 양을 먹이는 것이며 이 역할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부분이다.
목회자들의 목회사역 중 가장 훌륭하고 효과적인 여러사역은 그의 설교 안에서 감당되어진다.
설교로써 그는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치료하고, 구출하고 양육할 수 있다.
목회자는 강단에 설 때 비로소 목자로서의 본래의 위상을 갖게 된다.3)
이상의 내용들을 놓고 볼 때 설교의 본질은 성경을 설교자를 통하여 청중들에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설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정인교 교수는 설교에 대하여 “설교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거시는 ‘하나님의 말걸음의 장소’”라고 하였다.4)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는 “설교란 인간에 의해 인간에게 전해지는 진리의 전달이다.
설교에는 두가지 요소가 담겨 있으며, 그것은 바로 진리와 인격이다. 이것은 어느 것도 생략될 수 없으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5)라고 하였고, 윌리엄 에반스(William Evans)는 “설교란 인간에 대한 구원의
복음선포이다”6)라고 하였다. 설교가 설교자와 청중을 중심으로 본다면 위의 정의는 확실히 옳고 적절한 정의이다.
그렇지만, 본질적 내용에서 본다면 다소 광범위한 정의라고 지적할 수 있다.
좀더 세분하여 설교를 살펴본다면 내형적인 측면과, 외형적 측면으로 고려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설교의 기능적 측면에서는 선포(Kerygma)와 교육(Didache)이 내용에서는 은혜와 심판이라는 양 주제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7) 십자가 없는 설교는 연설이나 도덕 강연이라고 여긴지는 이미 오래이다. 본질적 측면에서 선포는 십자가의 메세지를 말한다. 교육은 성도들의 실제적 삶의 적용까지 나아가게 하는 설교의 양날과도 같다.
십자가의 선포는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이라는 양면을 가지고 있다. 소위 정죄만하고, 청중을 전혀 십자가의 은혜로
나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설교는 설교의 본질적 측면을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흥배 목사는 설교의 요소들을 본질적, 기능적, 형식적 요소로 분류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8)
ꋫ설교의 본질적 요소 : 케리그마, 디다케
ꋫ설교의 기능적 요소 : 선포, 해석, 적용
ꋫ설교의 형식적 요소 : 성경, 설교자, 청중
위의 분류는 설교에 대한 신학적 기반이자 이해가 되는 뼈대와도 같다.
설교자는 각각의 요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설교에 대한 신학적 빈곤에 의해 강단의 혼란을 경험하고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고쳐야 할 한국교회 설교 6가지를 박희천 목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설교자의 본문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
둘째, 잘못해석한 성구를 인용(본문에 사용된 의도, 뜻을 무시),
셋째, 주관적인 대지 가름,
넷째, 본문을 설정한 뒤 본문과 관계없이 강연, 연설하는 설교,
다섯째, 성경에 있는 사실을 근거 없이 추측하는 설교,
여섯째, 비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허무맹랑한 예화를 드는 경우라고 하였다.9)
박희천 목사는 한국교회의 설교가 이렇게 심각하게 된 것은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설교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평양신학교 설교의 특징은 3대지 설교와 계시의존사색10)이 아닌 추리의존사색이 주류인 설교였다.11)
그 결과 본문의 대지는 인위적으로 나뉘게 되었고 성경본문이 말씀하시는 의미보다는 개인의 추론과 추리에 의한
기발한 해석이 본문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본문왜곡 뿐만 아니라 심각한 문제는 비록 바른 해석을 하였다고 해도 적용이 전혀없는 설교는 똑같이 설교의 결핍을
가져온다. 설교의 기능적 요소를 볼때 설교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현실에 대한 적용은 설교의 두 기둥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이 없으면 설교가 아니다.12) 워렌 위어스비는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의 「Promised-Land Living」이란 책을 추천하였는데 이유에 대하여 “이 책이 극도의 영적 의미를 끝도 없이 구하기 보다는 오늘날 적용할 수 있는 진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13)고 말하고 있다. 적용이 없는 성경강해는 심오한 신학강연이나, 현장이 없는 종교적 신비주의에만 머무르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실제적 적용이 있는 설교는 성도들에게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또한 구체적이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의 삶은 변화한다.
2. 성경에 대한 이해
2.1. 성경에 대한 확증
“설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정의가 성립하려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두가지 전제에 부합되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인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할 때, 둘째, 설교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일 때 가능하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으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성경, 설교’의 3가지 형식으로 규정하면서 말씀을 유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보았다.14) 성경본문에 대한 설교자의 태도와 인식도
중요하다. 에이든 토저(A.W. Tozer)는 말씀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진리에 대한 확신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의 정수이다. 주님은 하나의 의견을 제공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의견들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한번도 추측하신 적이 없었다.
주님은 확실히 알고 계셨고 지금도 알고 계시다. 주님의 말씀은 솔로몬의 말처럼 지혜의 소리나 날카로운 관찰의 결과를
요약한 것도 아니다. 주님은 자신의 충만한 신성(神性) 안에서 말씀하셨으므로 그의 말씀은 곧 진리이다.15)
설교자는 성경본문에 대한 확고한 진리가 서 있어야 한다.
우물주물 강단에서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거나,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의견을 제시하거나 견해,
청유형 식의 권유를 하는 태도로 본문을 이해하고 설교를 해서도 아니 된다. 설교자는 성경의 영감과 귄위에 대한
확증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청중들은 풍성한 만나를 맛볼 수 있다.
2.2. 성경에 대한 해석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은 많은 노력과 주의를 필요로 한다.
성경본문은 히브리어, 헬라어를 직접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차선으로 번역서를 참조할 수 있다.
설령, 원서를 직접 읽는다고 하여도 원서 자체에도 의미와 뜻을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다.
또한 당시 사회적 문화배경이 없다면 전혀 다른 의미를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 참고서적들을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주석서들도 견해가 교리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여러권을 참고해보는 것이 유용하며, 성경본문에 대한 배경을 밝혀 주는 저서들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성경본문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뒤에 논하게 될, 설교자의 지식적 준비에서
더 많이 다루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준비들은 대부분의 설교자들에게는 익히 들어온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설교자의 부주의함과 게으름은 설교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된다.
설교자는 본문을 선정하고 난 뒤 통상적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된다.
물론,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기도하는 중에 어떠한 목회적 비전을 발견하고 나서, 혹은 설교 주제를 먼저 찾고 나서,
성경 본문을 볼 수도 있다. 이런, 저런 경우 모두 결국 성경본문을 살펴야 한다.
성경본문을 통하여 설교자는 비로소 설교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그나마 충실한 설교자는 본문을 중심으로 강해설교를 하던, 주제설교를 하던 집중적으로 준비하고 연구하게 된다.
그러나 게으른 설교자는 본문을 무시하고, 대충 설교를 준비하게 된다.
본문을 무시하고, 준비가 부족할 때 통상적으로 반복되는 설교의 우(愚)는 소위 뷔폐식 설교를 작심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많은 음식이 있는데, 무엇을 오늘 먹었는가 질문한다면, 딱히 무엇을 먹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주제없는 설교, 초점없는 설교의 위력이라 할 수 있다. 한세완 목사는 한국강단의 대표적인 이러한
설교에 대해 설교자의 무성의, 준비부족이라고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다.
오늘도 강단으로부터 B-29 폭격기 한 대가 활주로를 이륙합니다.
설교자의 거대한 입이 열리며 마치 하늘에서 성냥개비처럼 보이는 폭탄이 떨어지듯 회중석 위에 수많은 교훈들이
내리꽂힙니다. 대지(大指)만도 10개가 넘으며 그 대지 속에 소지(小指)가 또 5-6개가 됩니다.
설교를 듣고 교회당 문을 나서는 성도들은 오늘 들은 말씀 중에 어느 것을 기억해야 될지 몰라서 아예 기억을 싹
지워버립니다. 이미 뇌가 추적할 수 있는 정보 분량을 넘어섰기 때문에 그 축적을 멈춘 것입니다.
…설교 준비가 부족하면 논리성이 허약해지고 설교가 전체적으로 물 흐르듯 연결되지 않습니다.
논리적 연결에 부담감을 느끼면 잘라서 늘어놓게 됩니다. 첫째는 성경보라 하고, 둘째는 기도하라 합니다.
또 셋째, 넷째, 다섯째, 이런 식으로 한없이 나열됩니다. 이 내용들이 틀린 말이라는 것이 아니고 논리성과 집중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본문에 적합한 말이기 보다는 개인적인 신앙관에 의해 좋은 약은 모두 내어놓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도대체 52주에 걸쳐 설교할 것을 단 한 주 설교에 말하는 설교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준비하지 않은 설교자입니다.16)
2.3. 성경과 청중의 연결고리
앞에서 언급하였던 성경에 대한 확신과 믿음, 성경본문연구에 대한 열정을 가졌다 할지라도 성경과 청중을 잇는 작업에서 실패한다면, 그동안의 노고는 헛수고로 끝날 수 있다. 따라서 성경과 본문을 잇는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본문과 청중의 연결고리는 결국 설교자일 수밖에 없다. 성경과 청중을 연결하는 지점에 바로 설교자가 서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따라서 본문에 대한 이해에 먼저 집중하여야 한다.
김서택 목사는 목회적 주석이 바로 이러한 연결고리를 잇는 작업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성경 본문에 대한 성경신학적 해석과 설교 사이에는 여러 개의 징검다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다리가 긴 사람이라도 넒은 시내를 한순간에 뛰어 건널 수는 없다.
여러 개의 징검다리가 있어야 안전하게 건널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을 건너게 할 수 있다. 바로 그 징검다리를 회복해
성경 말씀이 오늘 시대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설교자가 서재에서 해야 하는 작업이다.
사실 성경 본문 주석과 설교 사이에는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들이 있다.
이 잃어버린 고리들을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신학과 주석책을 가지고도 설교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17)
김서택 목사가 말하는 목회적 주석이란
첫째, 본문에 대한 과학적, 신학적 해석을 기초로 한다.
둘째, 오늘 이 시대에 구체적인 상황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인들을 염두로 말씀을 묵상한다.
셋째, 목회자는 상상력(그 시대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을 발휘하여 더 실감나게 본문의 의미를 파악한다.
넷째, 이 시대의 교인들에게 적합한 적용이 있는 해석을 하여 이곳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계속되도록 노력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18) 목회적 주석은 결국 설교자와 본문과의 씨름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적 주석은 결국 성경에 대한 확신,
성경에 대한 바르고도 성실한 해석이후, 설교자가 성경과 청중들의 간격을 채우는 연결고리인 셈이다.
이것이 없다면, 성경은 결코 청중들에게는 화석화된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경낭독의 의미 이상을 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적 주석은 성경과 청중을 잇는 견고한 연결고리이다.
3. 설교자
3.1 설교자의 소명(召命)
설교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다.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언어능력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학문적으로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이 없는 강단은 실로 생존을 위한 목회를 선택한 삯꾼 목자가 선 것과 다를 바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목사는 설교자의 소명은 영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에서 다음의 두 가지의
증거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설교자(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어떤지? 그랬다는 것은 어떻게 당신은 아십니까?”
나는 몇가지의 확실한 시금석(試金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명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意識)의 형태로 출발합니다.
즉 어떤 압력이 자기의 심령에 가해지는 것같은 느낌을 느끼게 되고 영계(靈界)에 어떤 혼란이 일어나는 것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설교자(전도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의 성령으로 그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줄곧 거의 강권적으로 역사합니다.
그런 다음에 영계(靈界)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 그 사람에게 말하며 질문들을 던지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통해서
확실하게 되고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사람들이 설교자로 부름 받는 것은 흔히 이러한 방식입니다.
…우리는 좀더 깊은 무엇으로 나아 가야 합니다. 역시 거기에는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장 중대한 시금석 입니다. 그것은 나는 다른 일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믿기로는 스펄전(Spurgeon)이 젊은 사람들에게 자주 이 말을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목회를 안하고도 견뎌 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십시요.” 나는 어떠한 주저도 하지 않고 그 말을 분명하게
합니다. 말씀 증거를 하라는 부름을 받은 사람만이 다른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할 겁니다.
그는 다른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이 말씀 증거하라는 소명이, 그 위에 그렇게 떨어지는 그러한 압력이 그에게 그렇게 가(加)해졌기 때문에 그는 “나는 다른 일은 할 수 없어 나는 전도만(말씀전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소명을 감추어 놓거나 그것을 저항할 수 없을 때 여러분은 확실한 소명(召命)을 가진 것입니다.19)
스펄전은 설교자의 소명에 대한 설명은 더욱 문학적이며 체감적인데, 마티 로이드 존스와 다르지 않다.
“내 생각에 정말 부르심을 받은 자를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거대한 폭포를 멈추게 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의 컵으로 그 세찬 물살을 받아내는 것과 같다.”20)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명(calling)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설교자로서의 분명한 부르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불타는 소명이 바로 설교자에 있어야 한다.21)
3.2. 설교자의 태도
설교자는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그 사명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부르심만을 통하여 설교자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는 많은 연단과 훈련을 통하여 좀더 주님께서 쓰기에
요긴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제랄드 케네디는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신앙과 인격의 전반적인 준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너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한 어떤 것이든지 설교하지 말라.
2. 너는 한 귀를 금전등록기(金錢登錄器)에 기울이면서 설교하지 말며 어떤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
3. 너는 개인의 경건한 생활을 등하시하지 말라.
4. 네 생활 속에 거룩한 장소를 기억하고 그곳을 거룩되이 지키라.
5. 네 동료의 성공을 찬양할지언정, 그의 양식이나 태도를 탐내지 말라.
6. 너는 신도들의 존경을 말살해 보려는 여하한 일도 저지르지 말라.
7. 본체(本體)를 대용(代用)으로 바꾸어 설교하지 말라.
8. 너는 진리를 과장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거짓되게 하지 말라.
9. 너는 직업화되지 말고 항상 종으로 자처하라22)
설교자는 끝임없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과 영성을 배워야 한다.
지도자의 영향을 통하여 교회는 변화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격으로 교회를 따듯하게 섬기고
이끈다면 그 교회와 강단은 풍성해 질 것이다. 교회의 분위기는 지도자가 어떠한 태도로 교회를 섬겼느냐에 따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강준민 목사는 설교자의 기본적인 자질로서 긍정적인 태도를 먼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목회자는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한 목회자를 보는 성도들은 행복합니다. 불행한 목회자는 불행한 신자를 만들어 냅니다.
저는 목회의 행복을 섬김에 두었습니다. 섬기는 것을 특권으로 선택했습니다.
섬기는 것을 최상의 기쁨으로 선택했습니다.”23) 목회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설교는 목회자의 태도에 의해 많은 부분이 영향을 받는다. 비관적인 목회자, 소심하고 부정적인 감정과 내면속에 똘똘뭉친 열등감으로 가득찬 설교자는 결국 그것을 설교에 담아 낼 수 밖에 없다. 교회는 강단의 태도에 의해 그 표정을 결정하게 되어 있다. 결국, 설교자 자신에 대한 인격적 자질과 영성의 문제이다. 김남준 목사는 근원적인 문제보다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더 관심과 애정을 쏟는 설교자들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다.
성경의 원어를 연구하고, 바람직한 설교전달의 기술을 익히며, 모델이 될 수 있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관찰하여,
나름대로 자기 방법을 터득해 가는 그런 모든 교육 과정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런 모임에
참석하거나 또 강해 설교의 목회적 적용에 도전해 보려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설교만을 바꾸기를 원하지, 설교하는 자신이 바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까 하는 것 입니다. 그들은 오직 어떻게 하면 은혜를 끼치는 설교자,
성경대로 설교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데 온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24)
설교자 스스로 변화에 대한 열정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도 거둘 수 없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설교자 자신이 변화되지 않는 한, 설교를 변화시켜 보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으며.25) 설교자의 진정한 영적 변화 없이
설교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꿈과 같다.26) 그렇다면 태도변화와 함께 어떠한 궁극적 설교자의 변화를 위한 준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영적이고, 지적인 설교자의 준비가 병행될 때 가능하다.
설교자가 필요한 두가지 준비를 김남준 목사는 영적준비와, 지적준비가 필요하다고27) 하였고, 김서택 목사는 인격적 준비와 신학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28) 김서택목사의 인격적 준비안에는 영적인 준비가 포함되어 있고, 김남준 목사의
지적준비안에는 신학적 준비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결국, 이 두 말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설교자는 지적인
준비와 영적인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목회자의 지적인 준비와 영적인 준비를 다음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3. 설교자의 지적준비
설교자의 설교준비에 있어서 지적인 부분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설교자는 지속적인 독서, 예화의 수집, 정기간행물, 다른 사람의 설교집 등을 참조 할 수 있다.29)
김남준 목사는 말씀 사역의 최대 걸림돌은 “말씀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무지”30)라고 지적하였다.
제임스(James McCutcheon)는 지적인 준비가 부족한 설교자로 인해 교회가 연약해졌음을 이야기 한다.
오늘날 교회의 약점중 하나는 포스딕, 버트릭, 쉐러와 같은 위대한 학자이면서 설교자가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같은 시대를 살며 뉴욕에서 설교했다. 그들의 독서량는 놀랄 정도였다. 설교때마다 역사가, 수필가, 과학자, 시인,
소설가, 예술가, 위인전기작가의 글을 인용하였다. 포스딕은 그의 자서전에 “5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중요한 주제를
택하여 그에 관한 지난날의 중요한 기록을 다시 찾아 보았고 그리고 나서 또 다른 주제를 찾는 것을 평생해 왔다.”고 했다. 버트릭은 아무리 바쁜 때에도 적어도 일주일에 한권씩, 새책을 읽었는데 이것은 「해석자의 성경」을 계획하는데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쉐러는 계속 책을 읽었는데 아침에는 어려운 책을, 저녁에는 쉬운 책을 읽었다.
그는 언제나 서 있을 때에는 뉴욕 타임즈를 읽었고, 공부해야 할 시간을 결코 낭비하지 않았다.31)
지적 준비가 되지 않은 설교자의 위험성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
독선, 편협한 사고가 설교자를, 말씀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제한할 수 있으며, 너무 지성이 강조될 경우, 참된 영성의
본질마저 위협할 소지가 있다. 지적을 무지한 경우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처럼 잘못된 체계위에 신학을 정립해 나아감으로 결국 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성경해석을 하게 된다. 지성이 심각하게 강조된다면, 결국 죽은 신학의 강연장으로 강단이 전략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설교는 지성과 영성 사이에 균형을 잃어버리게 된다. 김남준 목사와 에이든 토저는 다음과 같이 그 위험성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지적인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독선에 빠지기 쉬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독선적인 설교자는 모든 것을 대결 구도로 끌고 가기 때문에 교인들의 신앙의 폭이 좁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마귀의 시험이라고 생각한다.32)
참 종교의 본질은 자발성, 즉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자주적인 움직임이다.
인간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이것은 영적 우월함을 증거하는 특징, 비실재의 세계안에 있는 실재의 증명이었다.
종교가 자주적인 특성을 상실하고 단순한 형식으로 전락하면, 자발성이 상실되고, 그 자리에는 선례, 교양, 조직,
그리고 서류등을 중시하는 심리 상태가 들어선다.
모든 것을 서류로 정리하여 보관하려는 심리 상태의 배후에는 영성이 조직화될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
그리하여 종교와 전혀 관계없는 사상들-수, 통계학, 평균률, 그리고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이 종교에 도입되며,
그것들의 뒤에는 언제나 섬뜩한 죽임이 따른다.33)
3.4. 설교자의 영적준비
찰스 스펄전은 청중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수사학적 측면의 강의도 하였지만, 그가 진정 강조하였던 부분은 목회자의
영성이었다. 그는 “목회로서의 우리들에게 성령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성령없이는, 우리들의 일을 단지 명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34)라고 말하였다. 이엠 바운즈도 설교자의 영성이 곧 설교의 완성이며 능력임을 밝히 증거하고 있다.
설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리고 기도는 설교와 항상 병행한다. 그것은 능력있고 고상한 일이다.
설교는 생명을 주는 일이며, 영생의 씨를 심는 일이다. 참으로 우리는 그것을 잘 감당해야 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서 수행해야 하며, 성공적으로 성취시켜야 한다!
…기도의 성격은 설교의 성격을 결정한다. 능력 있는 기도는 능력 있는 설교를 낳는다.
기도는 설교를 강력하게 하며 능력 있게 만든다. …성경적 설교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최고의 헌신이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불타는 열정에만 근거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들은 가치 있고 도움이 되는 본질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 위에 임하는
신적 임재를 깨닫는 것이며, 설교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위대한 설교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부여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오른 손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35)
김서택 목사는 특히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체험이 있을 때 영감있는 성경 해석이 가능하며, 반드시 설교자에게 이러한 과정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점은 분명, 연설이나 강연과는 확연히 구분되어지는 점이기도 하다.
설교에는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기름부으심 함께 할 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해야 한다. 말씀이 해석되면서 그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나를 높이
끌어올리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이 나를 완전히 압도해서 내가 그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나를 붙들고 사용하는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후에는 설교를 두려워하는 대신, 설교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엄청난 영적인 부담을 느끼게 된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깨달아질 때이다.
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준비되어 있을 때,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처럼 심한
심리적인 부담이 생긴다.36)
설교자에 대한 회중의 인격적 신뢰가 설교의 수용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본문에 대한 설교자의 이해, 영적인 교류, 본문과의 씨름 여부를 청중들은 이미 알고 있기에37) 설교자는 인격적인 준비와, 영적인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스펄젼도 설교자의 진보에 관하여 이야기 하였을때 도덕적 자질과 영적인 자질의
진보도 포함하여 이야기하였다.38) 참된 영성이란 하나님에 대한 한 설교자의 진실함과 성실함, 사람에 대한 진실함과
설실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참된 영성이 바로 세워질때 진정한 성경과 청중들간의 다리를 놓는
견고한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4. 청중
청중을 위한 고려는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설교가 준비되었다고 해도 청중들이 전혀 설교를 알아듣고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설교는 허공을 떠도는 메아리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중을 위한 고려는 수사학적인 측면과, 청중에 대한 설교자의 이해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회중에 대한 고려가 집중적으로 이루어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다.
이전에는 설교자와 본문에 대한 이해에 깊은 관심과 열정, 연구가 이루어졌었다.39)
설교학의 고전이라는 필립 브룩스의 「설교학 강의, Lectures on Preaching」에서도 청중에 대한 부분은 거의 없다.
청중과 설교자를 잇는 연결고리를 이곳에서 살펴볼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중과 설교자를 잇는 연결고리는 청중들을 위한 수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설교자와, 청중과 잇는 연결고리는 바로 ‘공감대’이다. 청중들에 대한 대상적 측면에서 볼 때 설교자와, 청중을 잇는 연결고리는 바로 청중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4.1. 청중에 대한 수사학적 측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첫째,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을 할 때 그렇다.
10대들의 은어를 60대 할아버지에게 말하는 것, 의사들이 환자 치료시 쓰는 전문용어를 일반인들에게 사용하는 것,
강단에서 신학용어를 남발하는 것 등등도 이에 적적할 비유가 될 수 있다. 둘째는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20대 젊은이들에게 “연애학강의”를 한다면 그들의 눈은 반짝 반짝 빛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노후, 어떻게 살것인가?”에 관한 강연을 한다면 다들 졸 것이 뻔하다.
청중을 설득시키고 설복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구체적인 적용에 있다. 적용은 공감대를 통해 급속히 그 힘을 얻는다.
성도들은 의외로 목회자의 강력하고도 구체적인 적용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실제로 긴장감있는 부담감은
공감대를 더욱 단단하게 형성하게 된다. 전병욱 목사는 예배에 참여(공감대를 형성)시키기 위한 적용을 다음과 같이 한다.
설교가 모호해지고 추상적이 되는 것은 왜 그런가? 성도들에게 부담을 덜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저 선문답(禪門答)같이 자기가 알아서 해석하라는 식이다. 나는 한국교인들이 이런 경향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예배가 중요합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저녁 예배에 나오십시오”라고 한다면 ‘상당히’ 부담을 느낀다. 나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새벽 예배에 나오기 위해서는 카풀 해야 합니다. 모닝콜 해야 합니다. 교회 근처로 이사와야 합니다.
그것도 안되면 교회에서 자야 합니다.”
여기까지 나가니까 설교가 ‘강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설교가 강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른 소리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퇴로를 다 막아놓으니까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구체적이면 강하다고 느끼게 된다.40)
청중들이 설교를 듣고도 고개를 갸우둥하거나, 냉냉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설교에 대한 신학적 기초적인 이해가 전혀
없는 설교자 탓이다. 설교는 선포라는 신학적 개념과, 설득이라는 설교의 실제적 형식의 두가지 외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41) 선포만 있는 설교는 소위 “결론만 말하는 설교”를 말한다. ‘기도하자, 충성하자, 인내하자...
’등등의 성경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설교자가 말하지만, 청중들은 설교를 듣고도 기도할 생각도, 충성할 생각도,
인내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포만 있고, 전혀 청중으로 하여금 설득하여 설복시키는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설교 자체는 흠잡을때 없이 성경적이다. 신학적으로도 올바르다. 그럼에도 교회안은 냉냉하며, 성도들은 변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선포만하고, 설득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교회를 10년이상 다닌 성도, 30년 이상된 집사, 권사,
장로들의 경우에는 선포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설교자가 본문만 읽어내려가도 무슨 내용(선포)이 나올지
대지까지 다 구분하여 알고 있다. 그런데 설교자는 강단에서 선포적 대지만 계속 읽어 내려간다. 기도하지 않게, 충성하지 않게 만들기 보다는 그저 막연히 이렇게 하자고 뭉뚱그린다. 설교가 준비하기 어렵다는 점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설득의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청중과의 연결고리는 바로 공감대이다. 해돈 로빈슨(Haddon Robinson)은 이점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이 그들의 체험과 일치되고 있음을 보여 줄 때 사람들의 주의를 사로잡게 된다. …
「비즈니스 위크(Business Week)」, 「Advertising Age」, 「Wall Street Journal」에서 얻은 자료를 사용할 수 있다.
사업가는 그 설교에 공감할 것이다. 분명히 이 설교자는 이야기를 독점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다룰 수 있다. 설교자는 예화들을 통해서 그의 학식, 생각, 삶에 대한 인식을 나타낸다.
어떤 설교자의 삶의 어떤 영역들이 청중들의 삶의 영역들과 일치할 때, 청중들은 그 설교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럴 때 그는 신뢰를 얻게 된다. 효과적인 설교의 요소는 회중의 삶과 연결되는 특정한 자료를 사용하는 것이다.42)
공감대는 중요하다. 공감대의 형성은 청중과 같은 시대를 설교자도 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때 가능하다.
‘목사님은 우리와는 너무 다른 거룩한 곳에서 사셔서 우리의 고단한 삶을 몰라’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결코 청중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 빌 하이벨스도 역시 이러한 점을 이야기한다. 동시대를 살며,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음을 청중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나는 「타임」, 「뉴스위크」, 「유에스앤드」, 「월드 리포트」, 「비즈니스 위크」를 읽는다.
최소한 두가지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차에 있을 때에는 라디오 뉴스 방송을 듣는다.
그 이유가 무었이겠는가? 동 시대의 예화를 사용할 수 있을 때, 신뢰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도 나와 꼭 같은 세상에 살고 있군, 숀 코네리(Sean Connery)와
로저 무어(Roger Moore)가 더 이상 007역을 맡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는 몇해 전에 일어난 일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아. 내가 오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떤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43)
4.2. 청중에 대한 대상적 측면
청중에 대한 고려는 간과할 수 없다.
설교자는 청중이 누구냐,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그런 다음 그들의 필요를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스튜어트 브리스코(Stuart Briscoe)는 청중에 대한 필요를 채워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주일 날 교회에는 수 많은 필요와 기대, 여러 수준의 성숙함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나는 그들 모두를 살지게 하는 설교 메뉴를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계획적인 성경 영양사(營養士)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44)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다.
옛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온다.45) 옥한흠 목사는 청중들이 귀기울이며 필요를 채우도록 하기 위해서 새롭게 들리도록 하는 설교가 필요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누가 하는 설교든간에 그 내용은 열의 여덟은 똑같다. “십자가의 은혜”라는 제목을 가진 설교 테이프를
구할 수 있을 만큼 구해서 비교해 보라. 어휘나 내용이나 스토리 전개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성경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중은 알게 모르게 똑같은 내용을 수 없이 반복해서 듣게 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자의 입장에서 가장 큰 보담은 들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청중의 입장에서는
‘또 그소리’ 하면서 귀를 막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 생명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새롭게 들리도록 해야 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46)
청중과의 교류는 말씀과 청중을 잇는 연결고리이다. 성경과 설교자가 목회적주석을 통해 연결되었다면 이제는 청중과
설교자는 청중의 필요에 의해 연결되어야 한다. 존 킬링거(John Killinger)는 청중에게 필요한 복음을 설교하기 위하여
설교자는 그들과 접촉하고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면서 그들 속에서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47)
에드가 잭슨(Edgar Jackson)의 「인간의 요구에 대하여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란 책에서 4천여명의 응답자들의 답변은
거의가 개인적인 문제(필요)였다고 조사하였다. “무익함, 고독, 불안, 열등감, 질병, 성문제, 알콜중독, 결혼, 죄책감” 같은 내용이며, 응답자중 1/4이 자녀교육, 별거, 이혼, 가정 내의 종교간의 차이, 결혼, 가정문제, 나머지는 사회, 공동체,
국가문제, 또는 전통적인 종교문제를 들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놓여서 그들의 자리에서부터 삶을 보아야
한다. 설교자가 성공적으로 설교하려면 대화식으로 설교하면서 회중의 근심과 관심사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48)
위렌 위어스비는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할 때 연결고리가 끊어짐을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성도들의 현실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는 과제 앞에 놓여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의 정황(context)과 절연된 말씀이 아닌 그들의 삶을 휘저어 줄 수 있는 능력있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자신과 상관없는, 자신의 삶에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얘기에 흥미를 느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49)
그러나 청중의 필요를 무제한으로 채우는 것에 대한 경고는 중요하다.
소위 마케팅 이론에서 도입된, ‘소비자는 왕이다.’, ‘손님은 항상 옳다.’는 식으로 청중을 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청중의 필요를 성경과 무관하게 무조건, 무제한 적으로 채우려는 시도는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과 다를 바 없다.
워렌 위어스비는 조셉 페커(Joseph Parker)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좀더 신선하고, 독특하고, 톡 쏘는 놀랄만한 무언가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들고 앉아 있기는 하지만, 설교하는 사람이 계시에 비추어 보아 올바르게 전하는가 하는 것은 전혀 관심
밖의 일입니다. 그저 그들이 원하는 것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받아 갑니다.50)
나가며
이상으로 성경과 설교자와 청중을 잇는 설교의 연결고리가 무엇이지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한국교회가 왜 완성된 설교가 아닌 고리가 끊어진 불완전한 설교를 해 왔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기본적으로 선포와 설득에 대한 개념이해가 없었던 것과, 설교자의 무지와 말씀사역에 대한 게으름으로 오는 성경해석의 오류가 있었음도 지적하였다. 설교의 본질적 요소, 설교의 기능과 형식적 요소등을 통하여서 설교의 신학적인 측면도
고려하여 살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선결작업을 했던 것은 성경과 설교자와 청중들사이의 견고한 연결고리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서두에서 살펴본 대로 설교의 형식적 3요소는 성경, 설교자, 청중이다.
각각의 요소들은 독립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온전히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설교는 완성되게 된다.
설교를 온전하게 연결해주는 연결고리는 다음과 3가지 부분의 완성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첫째 성경본문과 청중의 연결고리는 바로 목회적 주석이다. 성경본문과 청중의 연결고리는 결국 설교자이다.
성경과 청중을 연결하는 곳이 설교자의 정확한 위치(position)이기 때문이다.
목회적 주석은 청중에 대한 궁극적인 필요와 본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적용을 찾아낸다. 목회적 주석을 통하여 비로소
설교는 기계적 성경낭독 이상의 생명력을 갖게 되고 끊어졌던 고리를 연결하게 된다.
둘째 설교자는 성경과 청중, 두 사이의 연결고리의 지점에 놓여있다.
설교자와 성경, 설교자와 청중을 잇는 연결고리는 설교자의 참된 영성과 지성이다. 영성과 지성은 성경본문과 청중들
사이의 교감을 일으키는 중요한 촉매적 요소이다. 설교자는 끊임없는 자신에 대한 경건의 훈련을 쉬지않고 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성과 지성이 배타적이거나 편중적이지 않고 조화를 이룰 때 설교자와 청중들간의 견고한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김남준 목사의 말씀 사역의 최대 걸림돌은 “말씀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무지”란 부분은
다시 되새길 만하다.
셋째 청중과 설교자의 연결고리는 수사학적 측면과 대상적 측면에서 볼 때, 공감대와 청중의 필요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들리지 않는 설교는 청중에 대한 공감대를 전혀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령, 청중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언어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궁극적인 그들의 필요를 외면한다면 설교는 허공을 맴돌 수 밖에 없다.
대학의 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시설이나 후원금규모, 성적이 높은 학생들의 지원, 교수의 실력 등등 많이 있다.
그러나 대학의 수준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요인은 바로 대학교수의 실력이다. 교수의 학문적 완성도와 사회적 기여도에
의하여 대학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실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도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설교자의 위치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경과, 청중을 잇는 연결고리는 결국 설교자이기에 그렇다. 본문에서는 성경, 설교자, 청중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중심으로 각각 살펴보았으나, 결국 이것은 설교자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부지런히 성경과 청중을 살펴야하는 것이다. 본질적인 설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목회적 적용과 영적, 지적인 준비, 청중의 공감대를 찾고 필요를 채워줄 때, 설교자로서의 연결고리는 견고하게
연결될 것이며,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본래적 위치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1) 김점옥, 「미국교회를 움직이는 7인의 설교자」 (서울:기독교신문사, 1998), p. 71.
2) Seward Hiltner, 「牧會神學原論」 민경배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9), pp. 13-5.
3) Charles Jefferson, 「이런 목회자가 교회를 성장시킵니다」 김점옥역, (서울: 엘맨, 1996), pp. 78-9.
4) 정인교, 「설교 살리기」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p. 17.
5) Phillips Brooks, Lectures on Preaching (Michigan: Grand Rapids, 1978), p. 5.
6) William Evans, How to Prepare Sermon (Chicago: Moody Press, 1978), pp. 11-2.
7) 이흥배, 「설교학」 (서울: 성우, 1998), p. 213.
8) 이흥배, pp. 55-81.
9) 박희천, 「성경에서 방금 나온 설교」 (서울: 요단출판사, 1997), p. 169.
10)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
11) 박희천, pp. 172-192. 참조.
12) 김남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서울:두란노, 1996), p. 16.
13) J. Oswald Sanders, Promised-Land Living 은 한국어로 「철저히 이기시게 하시는 하나님」
초판은 「영적훈련」(Promised-Land Living) 김옥현 역, (서울: 나침반, 1988, 1993)으로 번역되었다.
여호수아서를 중심으로 한 강해서이며 탁월한 적용이 가득하다.
14) 정인교, pp. 21.-2. Hans Umer, Gottes Wort unt unsere Predigt, Berlin 1961, p.51.
15) A.W Tozer, 「인스턴트 크리스천」 엄성옥역, (서울: 은성, 1992), p. 32.
16) 한세완, 「평신도가 갈망하는 설교」 (서울: 아가페, 1999), pp. 17-9.
17) 김서택, 「강해설교의 기초」 (서울: 홍성사, 2001), p. 89. 본문과 설교사이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7) 김서택, 「강해설교의 기초」 (서울: 홍성사, 2001), p. 89. 본문과 설교사이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문해석→문맥관찰을 통한 저자의 의도파악→저자의 메시지 복원→목회적주석→설교작성
18) 김서택, 「강해설교의 기초」, p. 94.
19) D. M. Lloyd-Jones, 「목사와 설교」 서문강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9), pp. 114-6.
20) 옥한흠, 「제자훈련열정 30년」 (서울: 두란노, 1998), p. 135.
21) 정성구, 「개혁주의 설교학」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1), p. 227.
22) 한세완, pp. 136-7.
23) 강준민, 「뿌리깊은 영성으로 세워지는 교회」 (서울: 두란도, 1999), p. 73.
24) 김남준, p. 16.
25) 김남준, p. 17.
26) 김남준, p. 21.
27) 김남준, p. 28.
28) 김서택, 「강해설교의 기초」 p. 130.
29) 김서택, pp. 108-111.
30) 김남준, p. 220.
31) James McCutcheon, The Pastoral Ministry (Nashville: Abingdon Press, 1978), p. 17.
32) 김남준, p. 220.
33) A.W. Tozer 「인스턴트 크리스천」 엄성옥역, (서울:은성, 1992), p. 172.
34) C. H. Spurgeon, 「스퍼젼의 설교학」 김병로역, (서울: 신망애출판사, 1993), p.86.
35) E. M. Bounds, 「기도의 무장」 한준수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81), pp. 103.-110.
36) 김서택, 「건축술로서의 강해설교」 (서울: 홍성사, 1998), pp. 28.-9.
37) 정인교, pp. 58-60.
38) 스펄젼은 설교자의 진보에 관하여 다음 4가지를 이야기 한다.
첫째는 정신적인 교육에 있어서의 진보,
둘째는 말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질(수사학적측면)에 있어서의 진보,
셋째는 도덕적자질에 있어서의 진보, 마지막 넷째는 영적인 자질에서의 진보이다. C. H. Spurgeon, pp. 131-152.
39) 1920년대 출판된 로이(H.Reu)의 「설교학」은 당시 독, 영서의 설교관련 서적을 수렴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곽안련 「설교학」이 비슷한 시기, 30여종의 영문서를 참조로 출간. 학문적으로 미흡하며
2차세계대전후 블랙우드(Andrew W. Blackwood)의 「설교의 준비」, 생스터(W.E. Sangster)의 「설교의 기술」등이
기술적면에서 발전하였다,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 영향으로 보이며, 1950년대 후반 1956년 존스(Ilion T. Jores)의
「설교의 원리와 실제」가 출간, 12단계설교준비가 특징이며, 1950년대 후반 리차드 챔미러(Richard R. Caemmerer)이 쓴
「교회를 위한 설교」는 루터교 전통의 루이 박사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귀납적 설교를 도입한 1950년대 후반 헨리 데이비스(Henry G. Davis)의 「설교의 구상」이 나오며, 설교 내용, 형태를
분석이 시도되었다. 박근원, 「오늘의 설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초판, 1998 증보), p. 67.
40) 전병욱,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 (서울: 규장문화사, 2001), p. 287.
41) 정인교, 「설교 살리기」, p. 35.
42) Bill Hybels, Stuart Briscoe, Haddon Robinson, 「현대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횃불, 1993), p. 20.
43) Bill Hybels, Stuart Briscoe, Haddon Robinson, p. 41.
44) Bill Hybels, Stuart Briscoe, Haddon Robinson, p. 51.
45) Robin R. Meyers, 「설득력 있는 설교의 비밀」 이호형역, (서울: 쿰란 출판사, 1999), p. 50.
46) 옥한흠, 「제자훈련열정 30년」 (서울: 두란노, 1998), p. 137.
47) John Killinger, Foundametals of Preaching (Philadelpia: Fortress Press, 1988), p. 23.
48) John Killinger, pp. 27-8.
49) 한세완, p. 88.
50) Warren W. Wiersbe, 「정직의 위기」 이규준역, (서울:두란노서원, 1995), p.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