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 화(直火) 구이집인 ‘신씨화로’다. 지난 2002년 3월 해장국 골목으로 유명한 청진동 골목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신씨화로는 채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21개의 점포를 오픈했다.
현재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은 것까지 포함하면 27개에 이른다. 이 중 8개가 본사 직영. 본점 한 곳만 장사가 잘 되면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드는 다른 곳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김원석(40) 사장은 “신씨화로는 가맹비와 인테리어 등으로 수입을 올리는 다른 프랜차이즈와 달리 본점과 가맹점 모두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본점 경영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고 말한다.
신씨화로 점포는 모두 서울과 수도권에 있다. 수도권도 분당에만 있을 뿐이다. 모든 점포가 월 매출액 1천만원(신씨화로 가맹점주들은 이를 ‘1천만원 클럽’이라고 부른다)을 넘자 소문을 듣고 프랜차이즈를 내고 싶다는 문의가 전국에서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김원석 사장은 지방에는 점포를 내주지 않고 있다. 본사가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밖에는 가맹점을 내지 않는다는 게 신씨화로의 경영 방침이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보따리 장사 경험이 밑천
김사장의 장사 인생은 지난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사장은 평소 외국생활에 대한 동경이 많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외국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갔다 와야 외국에 나갈 수 있다고 해서 군 제대 뒤 실행에 옮겼죠.”
수송병 출신이었던 김사장은 군경력을 살려 운전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다. 여행 경비를 마련한 김사장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가 모두 바닥났지만 일본을 더 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현지에서 공사판 노동을 했습니다.”
차비와 식대를 중간에서 가로챘던 공사장 십장과 대판 싸움을 하고 나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항구에서 그는 일본을 오가며 보따리 무역을 하던 아주머니를 만난다. “빈 몸으로 돌아가려는데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학생이냐고 물은 뒤 물건을 사가면 돈이 된다며 돈을 꿔주시더군요. 그래서 깨를 샀습니다.”
부산항에 도착한 뒤 깨를 팔았는데 두 배가 넘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틈틈이 보따리 무역을 해서 돈을 벌었다.
지난 92년에는 선배와 격주간 중고차 매매 전문지를 창간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망했다. “이때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너무 빠르면 안 된다’는 진리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1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목포행 트럭에 몸을 싣다 과로로 병원 신세를 졌다.
“제가 쓰러지자 사장이 회사 일 때문에 쓰러진 게 아니라며 발을 빼더군요. 참담하더군요. 이런 사람 밑에서는 절대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운전을 하면서 만났던 한 가게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의 점포를 맡아 장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가진 돈이 3백만원밖에 없어 전세 개념으로 시작한 장사였지만 경기도 안성에서 오픈한 커피숍은 장사가 잘 됐다. 커피숍의 성공을 바탕으로 빵집도 시작했다. 여기서 모은 돈으로 서울 장안동에 고깃집을 오픈했다. 입맛과 분위기에 까다로운 룸살롱 아가씨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24시간 장사를 했는데 밤부터 새벽녘에는 룸살롱 아가씨들 고객이 많았습니다. 고깃집 같지 않은 젊은 인테리어 감각과 고기 맛이 그들에게 먹혔던 것이죠.”
지난 99년 처음 시작한 고깃집의 성공에 힘입은 김사장이 드디어 자신만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실현한 점포를 구상해 만든 것이 ‘신씨화로’였다. 아이템은 고기로 잡았다.
“쇠고기든 돼지고기든 고기는 범용성이 있는 음식입니다.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젊은 인테리어 감각만 있으면 승산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사도 브랜드가 중요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사 노하우를 신씨화로에 쏟아부었다. 인테리어 컨셉트는 자연 친화적인 벽돌과 나무로 잡았다.
“벽돌과 나무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재료들입니다. 어제 와도 또 내일 와도 한결같이 편안함을 주는 가게여야 손님들이 자주 찾을 것 아닙니까.”
의자 높이와 테이블 크기도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안락함을 느낄까 연구했다. 바닥에서 테이블까지의 높이 70㎝, 의자 높이 43㎝ 등 신씨화로만의 인테리어 모델을 만들어냈다. 권리금을 생각해 위치도 청진동 골목 외진 곳으로 잡았다.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김사장은 브랜드 마케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신씨화로에서 후식으로 주는 사탕 하나에도 신씨화로 브랜드가 찍혀 있다.
숟가락·젓가락·물수건 포장지도 마찬가지다.
술도 소주나 맥주 외에 과감하게 와인 리스트를 따로 준비했다. 가격도 와인 전문점보다 싸게 책정했다. 서민적 공간에서 와인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김사장은 매월 본사 직영 점포에서 나오는 수입 1억원을 모두 회사에 투자하고 있다. 음식 재료 공장만 해도 세 개다. “저에게 돈을 버는 재주는 하느님이 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돈은 제 돈이 아닙니다. 적게는 저희 회사의 돈이고 크게는 저보다 어려운 사람들의 돈이기도 합니다.”
김사장은 1년 전부터 나누는 삶을 시작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매달 통장에 1만원씩 넣어준다. 매년 1억원 정도 기부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규모를 늘릴 생각이다. 잘 벌어 잘 쓴다는 간단하지만 무거운 진리다.
■ 약점은 드러내보일수록 강점이 된다. 실내 분위기가 허름하면 더욱 허름하게 만들어 강조해야 한다. 음식맛만 있다면 허름한 것이 오히려 포인트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어설픈 실내장식으로 허름한 것을 가리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신만의 특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을 모방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아무도 2등은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돈이 달라붙게 생긴 구석은 없었다. 돈이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돈깨나 번 사람의 말투도 아니었다. 그러나 식당 이야기가 나오자 신바람을 냈다. 눈빛이 달라졌고 입에서 침이 튀었다. 그제서야 돈이 왜 그에게 덤비는지 보였다.
고기구이 전문점 '신씨화로'의 김원석(39) 사장. 삼겹살에 와인과 재즈를 접목하는 아이디어로 대박을 터뜨렸다. 말은 안하지만 수십억원을 벌었단다. 고기집 문화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치켜세웠더니 손사래를 친다.
"오히려 늦었지요. 손님들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우리들이 손님 수준을 깔본 거예요."
손님에 대한 김 사장의 배려는 통나무와 벽돌, 참숯화로의 세련된 인테리어가 전부는 아니다. 여러 차례의 연구 끝에 테이블과 의자의 높이가 각각 70㎝, 43㎝일 때 가장 편안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손님들이 드나들기 쉽도록 테이블 간격도 50㎝ 이상으로 했다.
고기집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냄새. 강제배연 후드를 달아 손님들의 옷에 냄새가 배는 것을 최소화했다. 벗은 웃옷도 얼마나 처치곤란한가. 테이블마다 옷 담는 바구니(사진(右))를 놔둬 깔끔히 해결했다.
자연 손님들이 몰려들었고 가맹점 문의가 잇따랐다. 2002년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1호점을 연 이후 신씨화로는 2년여 만에 34호점 개점을 앞두고 있다. 그 중에서 6개 점포는 직영점으로 2층 점포도 있고 10평 남짓한 소규모 점포도 있다.
"직접 운영을 해봐야 가맹점에 노하우를 전해줄 수 있죠. 게다가 가맹점들은 저마다 입지조건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직영점을 운영하는 겁니다. 각종 상황에 맞는 경험을 알려줘야 하잖아요."
김 사장은 아직 써먹지 않은 식당 운영 아이디어를 40여개나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일본을 이웃집 드나들 듯한다.
어릴 적 자가용이 3대나 될 정도로 부유하던 김 사장 집은 아버지의 운수업체가 도산하면서 급격히 어려워졌다. 학비는 물론 가족들의 생계비까지 책임져야 했던 김 사장은 대학을 휴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막노동도 했고 보따리 장수도 했다. 그러다 일본의 음식문화에 눈을 떴다.
"하루 15~20끼를 먹고 다녔죠. 음식보다는 무형의 서비스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 식당은 아무리 작아도 깨끗하고 서비스가 뛰어난데 왜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할까'하는 의문이 갈수록 커졌지요."
김 사장은 스스로 일본식 서비스를 도입해보기로 결심한다. 이후 다방.매점.빵집.고기집 등 웬만한 식당 종류는 다 해봤다. 장안동에서 연 고기집은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장사가 된다 싶으니까 건물주이던 20년지기 친구가 '나가달라'고 하더라고요. 눈앞이 캄캄했지만 어쩝니까."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야속하던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신씨화로는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김 사장은 요즘도 손님이 남긴 음식의 맛을 본단다. 맛이 없었기 때문에 남겼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제 조금 팔릴 만한 맛이 뭔지는 알겠는데 그런 맛을 제대로 만들려면 아직 멀었죠."
화롯불받침- 바닥에 있는 쟁반으로 기름이 떨어짐
질그릇화로- 중앙에 흡기구가 4개고, 숯이 벌거니 달아오른 상태가 아니라 한풀죽은 상태로 들어옴(고기가 안타는 이유1)
석쇠가 올라간상태- 자세히보면 가로로 쇠막대가 하나씩 가다가 세개가 붙여진상태로 되어있음(안타는이유2 : 고기에서 나오는 기름이 이홈을 타고 화로밖 쟁반으로 흘러내려 숯에 떨어짐을 방지,타면서 발생하는 연기도 잡아줌)
이해가 도저히안오는 사람은...사람은...없지요?!
이집 고기맛은 거의완벽함(성인4명 소인3명 모두 A+)
어린이날이라 가족단위손님이 많아 와인을 마시는 테이블이 없어 와인셋팅한 테이블을 보지못했고, jazz도 시끄러워서 제대로 들리지 않음
전통에 모더니즘을 가미한 Fusion Dining Bar를 표방하고 나선 고기집, 신씨화로.
요즘 많은 식당들이 퓨전화를 시도하는 추세에서 신씨화로는 한국인의 입맛에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음식에 대해서는 반퓨전화를 고집하고 있다. 즉, 음식 자체를 퓨전화 한것이 아니라 음식과 인테리어, 음악이 퓨전되어 있는 것이다. 신씨화로에 들어서면 고전적인 질그릇류의 화로가 먼저 눈에 띤다. 이집 맛의 비결은 바로 화로에 숨어 있다. 참숯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고기를 속에서부터 익히기 때문에 고기의 참맛을 느끼게 해 주며 참숯 특유의 향이 고기에 감칠맛을 더 할 뿐만 아니라 최상급의 고기를 육즙과 고기맛의 상관관계를 연구하여 육즙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고기의 크기를 결정하는 정성, 그리고 건강에 대한 관심도를 반영한 부추 양념소스까지 덧붙여 최상의 맛을 낸다.
파 벽돌과 원목 테이블, 블랙 톤의 닥트 등 감각적인 인테리어, 그리고 분위기에 따라서 R&B, Rock Ballad, Jazz까지,,, 젊은층에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차별화된 분위기 이다. 전반적인 국민 생활수준 질의 향상과 발 맞춘 와인에 대한 선호도를 반영하여 '삼겹살과 함께하는 와인' 시판한다.
결국 와인바를 연상시키는 현대적인 감각의 인테리어와 조명, 풍부한 음량의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이국적인 음악, 전통적인 화로를 통한 우리의 옛 맛을 느끼게 해주는 음식 등이 사람의 오감을 통해 서로 잘 어우러진 종합예술을 연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