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13일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 되고 말았다.
열쇠로 집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니 소리가 나질 않았다.
살펴보니 전기선과 전화선이 잘려져 있었다. 다시 열쇠를 넣어 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안쪽에서 괴성과 함께 문이 내 쪽으로 덮치듯이 열렸다.
그리고 검은 쇠파이프가 내 머리를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막았지만 나의 왼쪽 머리는 터졌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괴한들이 떠나고 난 뒤, 집에 있는 아내의 모습은 다시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처참했다.
손과 발이 뒤로 묶여져 있었고, 얼굴은 옷가지로 가려져 있었다.
나는 아내가 그렇게 결박당해 있으리라고만 생각했다.
옷가지를 들추는 순간, 아내의 머리에서 흐른 엄청난 양의 피가 거실 바닥에
쏟아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입을 틀어막은 재갈을 부엌칼로 잘라내고 실신해 있는 것 같은 아내를 깨웠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닦아가며 제발 아내가 살아 있기만을 바랐다. 목의 맥박을 확인했으나 뛰지 않았다.
가슴을 짚어보았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나는 아내를 끌어안고 하나님께 외쳤다.
"하나님, 제발, 제발, 아내를 살려주세요, 하나님, 제발, 아내가 숨쉬게 해주세요, 하나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하나님, 제발... ."
이윽고 경찰이 도착했고 나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머리를 치료받았다. 그리고 자정까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믿을 수 없는 악몽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치 짐승처럼 울었다. 제발 꿈이길 바랐는데, 새로운 아침을 맞았어도
주위 사람들의 움직임은 울음바다 그 자체였다. 아, 꿈이 아니구나. 아내의 여권용 사진이
확대되어 영정으로 놓였다.
경찰에서는 총력을 다해 범인 검거에 나섰다. 그리고 불과 60시간 만에 범인을 잡았다.
그렇게 빨리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던 이유는 9월 20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자흐스탄 정부에서도 이 일이 한국과 카작
사이에서 외교적인 마찰을 빚지 않도록 범인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붙잡힌 범인들은 마약 사범으로 이미 경찰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우리 집에 10만 달러가
있다는 잘못된 정보 하나만 가지고 침입했다가 돈이 나오지 않자 아내를 잔인하게 고문한 것이다.
아내는 그들의 구타로 인해 치아가 빠져나갔고 입술이 터졌다. 눈도 멍들었고 양 손등은
날카로운 흉기로 수없이 찔림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쇠파이프로 아내의 머리를 무참히
가격했다. 당시 아내의 비명소리를 주위에서 들었던 이웃들이 있었지만, 가정사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아내의 사인을 두개골 함몰과 뇌출혈로 판정했다. 고통당하던 아내를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다. 아내가 이 못난 남편을 찾았을 텐데... .
" 여보, 살려줘, 여보... ."
그녀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오히려 나와 두 딸들을 걱정하며 주님께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 주님, 우리 남편, 우리 두 딸 성경이 진경이를 부탁해요."
오, 주님 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아내의 사고 소식이 대사관을 통해서 양쪽 부모님께 알려졌다. 나는 부모님께 할 말이 없었다.
현지에서는 여러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사건 처리를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아내의 장례
절차와 장지 결정을 논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뼈를 묻는 것에 의미를 두고 모두 동의했다.
그런데 갑자기 장모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장모님은 "내 딸 살려내, 내 딸 내놔...." 하며
울기만 하셨다. 장례를 카작에서 치르기로 결정 했다고 하니, 어머님은 다리 한쪽이라도 들고
오라며 실신하셨다. 내가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비록 죽은 몸이지만 가까이
두고 싶어 하시는 어머님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아내가 떠난 지 5일째 되던 금요일, 카라간다 라드닉교회에서 현지 장례식이 치러졌다.
병원에서 교회로 아내의 주검이 출발했다. 나는 교회 밖에서부터 아내의 시신을 맞기 위해
장갑을 끼고 기다렸다. 아내는 관에 누운 채로 내 앞에 왔다. 나는 오열했다.
10년 전 결혼식장에서 아내를 나의 신부로 맞이하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감격이었고 환희였는데, 지금 아내는 내 앞에 결혼식이 아닌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누워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 하나님, 저 아내와 함께 10년밖에 못 살았어요, 이제 한 달만 지나면 결혼 10주년인데
이렇게 빨리 데려가시면 어떡하나요? 나도 죽여주시지 왜 나만 살려두셨나요?"
장례식에 참석한 카자흐스탄의 선교사들과 현지 성도들은 눈물로 아내를 천국에 보냈다.
장례식을 마칠 무렵 찬양 가운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 아내를 받았느니라."
'오, 주님. 그러셨군요. 제 아내 주께 드리오니 받으소서.'
나는 두 손을 들어 하나님께 나의 사랑하는 아내를 올려드렸다.
2004년 9월 20일,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아내의 주검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실렸다.
아이들이 내게 물었다.
" 아빠, 엄마는 어디 계세요.?"
" 엄마는.... 먼저 천국에 가셨단다."
두 아이의 손을 붙잡고 인천공항을 빠져나오는 나의 마음은 암담했다.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과 친구들, 여러 목사님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부모님께 천하의
불효자식이 되고 말았다. 선교사로 떠나는 것만 해도 나는 이미 불효자의 길을 선택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부모님 낯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이제 어떻게 키워야 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에, 나의 삶과 사역의 근간이 뒤흔들리며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제는 선교도
목회도 다 못할 것만 같았다. 아내가 있었기에 모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내는 부여 장례예식장에서 이틀을 보낸 뒤, 바로 양수리 수양관 침례교 총회 장소로 옮겨졌다.
마침 침례교단 총회가 열리고 있었고, 총회에서는 아내의 순교를 두고 총회장으로 치르기로 결정
했다. 그리고 여주 남한강 공원묘지 향했다. 여의도교회 한기만 목사님이 땅 한 평 없는 나에게
'순교자 김진희 선교사'를 위해 장자를 제공해주신 것이었다.
나중에 한기만 목사님을 뵈었을 때, 그 분이 말씀하셨다.
"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한밤에 자고 있던
나를 깨워 말씀하셨네, '너 가만히 있을 거야.?"
그날 한 목사님은 새벽 예배를 마치고 교회 중직자들을 모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을 이야기하시고, 순교자의 가족을 어떻게 섬길 것인지 의논한 결과
교회 공원묘지를 내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주님,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요?
그 뒤로 여러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된 이야기들은 더욱 놀라웠다. 어느 사모님한테는
아내가 순교하기 이틀 전에 어떤 고난을 통해서 어떻게 순교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두 번 보여주셨다고 한다. 사모님은 그것을 보고도 기도하지 않았음에 오히려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부여의 한 성도는 아내의 영정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갑자기 영안을 열어 보게 하시더니,
영정 속의 영인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해주었다.
한 인터콥 사역자는 알마티에서 있을 여름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서 준비하는 동안
갑자기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두 번의 똑같은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 내가 이 땅 가운데서 내 사랑하는 종 하나를 취하여 가겠노라."
그는 어느 누구를 취하실 것인지 현지 사역자들을 주시하였지만, 모임 가운데엔 없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리고 9월 13일 한국의 뉴스를 통해 카자흐스탄 선교사의 소식을 접하며
주님께 물었다고 했다.
"주님, 주께서 취하여 가시겠다고 말씀하신 종이 바로 저 선교사였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10월에 친구의 손에 이끌려간 중보기도 세미나에서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을 감히 원망할 순 없었지만, 너무 힘든 마음에 왜 그 일을 허락하셨는지를 여쭙고 싶었다.
" 왜 그러셨나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오히려 내게 물어오셨다.
"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이 길이 죽여야 되는 길이란 것을 모르고 갔더냐.?"
나는 그 말씀에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가는 이 길이 바로 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떠난 길이었기에.... . 선교사로 떠날 때 주 앞에 고백으로 찬양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나는 그때 마음만 드린 것이 아니라 나의 몸도 주님께 드리지 않았던가?
" 이번에 하나님이 순교하시라면 나는 순교하겠습니다."
필리핀에서 카작으로 떠나기 위해 한국에 머문 두 달 동안 설교시간에 두 번이나 내가
고백했던 말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 그렇군요, 주님, 죽을 줄 알고 떠난 길인데도.... 아버지, 그래도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은 계속 내게 말씀해주셨다.
" 너의 마음을 내가 아노라. 내 아들을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줄 때 나의 마음도
너와 같았느니라."
이 말씀 앞에서 나는 하염없이 또 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왔다.
만약 아내의 죽음이 우연한 사고였다면, 그때 그 순간 아내를 지켜 주지 않으신 하나님을
감히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내를 카작 땅에 순교의 제물로, 희생의 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택하셨음을 나는 분명히 믿기에, 그 하늘 아버지의 하신 일 앞에 그저
죄인으로서 머리를 숙이기로 했다.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올 그날의 주님 오실 길을 예배하며...
주께서 주신 동산에 땀 흘리며 씨를 뿌리며
냄 모든 삶을 드리리 날 사랑하시는 내 주님께
비바람 앞을 가리고 내 육체는 쇠잔해져도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내 사모하는 내 주님께
땅 끝에서 주님을 맞으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노래 가득 안고
땅의 모든 끝 찬양하라 주님 오실 길 예비하라
땅의 모든 끝에서 주님을 찬양하라
영광의 주님 곧 오시리라
고형원( 땅 끝에서 )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북경충원먼교회
https://cafe.daum.net/bjcwm
최신글 보기
|
인기글 보기
|
이미지 보기
|
동영상 보기
검색
카페정보
북경충원먼교회
브론즈 (공개)
카페지기
부재중
회원수
65
방문수
0
카페앱수
0
검색
카페 전체 메뉴
▲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간증모음
스크랩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한재성 선교사
선영,선혜=천사
추천 0
조회 263
09.08.21 12:14
댓글
2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출처:
광저우 제일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 사랑
댓글
2
추천해요
0
스크랩
0
댓글
선영,선혜=천사
작성자
09.08.21 12:16
첫댓글
이 글을 읽는내내 눈물이 저도 몰래 흘렀습니다.무었때문이지요?
다니엘
09.08.22 08:06
아멘!!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
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
율
환
자
환
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첫댓글 이 글을 읽는내내 눈물이 저도 몰래 흘렀습니다.무었때문이지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