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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기사전송 2008-05-0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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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병만 기자 = 9일 오전 여의도당사에서 열린 자유선진당 창당 100일 기념식에서 당원인 백창기씨가 도포에 삿갓을 쓴 특이한 복장으로 나타나 주위 시선을 끌었다.
숭례문을 위로하는 대금연주
【서울=뉴시스】 방법은 달라도 ‘숭례문 화재 아픔 우리가 달랜다’
【서울=뉴시스】 인사동에 울려 퍼지는 대금소리
‘평화가 높은 곳에 있다 하여도 오르고 또 오르면 언젠가는 만나리라. 희망이 제 아무리 멀리 있다 하여도 가고 또 가다보면 반듯이 얻으리라. 하면 된다 이루리라!’는 억척같은 의지로 역사적 진실과 시대적 정의를 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그다. 독도 망언에 불끈한 백씨는 삿갓을 쓰고 검은 도포를 입고 지난 3월 8일부터 23일까지 일본대사관앞에서 단식을 하며 목청을 돋워 일본을 꾸짖었으며, 그 후 단식을 풀고 일본대사관저와 일본문화원을 수시로 돌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40여개의 시민단체에 가입해 동분서주하며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태극상생대인군자. 상생을 외치고 큰 어진 것(大仁)을 외치는 ‘군자’가 시민운동을 하고 투쟁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그 해답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존재의 거역할 수 없는 힘의 선택’에 있다. 기구한 운명, 특이한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이끌림에 붙들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소위 신접(神接)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인사동 찻집에서 4시간 동안 한 사람의 별난 인생 스토리를 들었다. 백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태몽으로 5개의 큰 태양이 치마폭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양구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던 그의 집안은 갑작스런 몰락의 길을 걸었다. 네살 소년은 빈 집을 혼자 지키는 때가 많았다. 그때 자신의 집에 머물며 소년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준 홍안의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은 그에게 세상을 구하는 대장부가 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했다고 한다. 네살 때 일이 기억나느냐고 하자 세살 때 이미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부친으로부터 한글 성경을 익혔다고 한다.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좋았다는 얘기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온갖 것이 궁금했다. 또래들과 어울리질 못하고 경로당에 가서 동네노인들과 함께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서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질문을 자주 해 이상한 애 취급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면서기가 되었다. 군대를 가서 헌병으로 삼청교육대 감독관까지 했다. 천주교 모태신앙인 그는 한 때 신부가 되려고 했으나 이 또한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85년, 4년의 짧은 공무원 생활을 접고 한마리의 야생마가 되어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후 그는 외판원, 다방, 술집, 사채업, 버스기사 등 발길닿는 곳에서 인연닿는대로 직장을 구했다. 도대체 겁이 없었다고 한다. 45번이나 직업을 바꿨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을 체험하기 위한 그 자신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28세 때 13살 나이 많은 연상의 여인과 함께 살면서 아들 하나를 두었다. 시간이 나면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했다. 정치, 경제, 철학, 종교서적을 탐독하며 세상의 이치를 구했다. 머리가 엉킨 실타레처럼 복잡했다. 밤이면 꿈속에서 석가 공자 예수 마호메트가 나타나 메시지를 주었다. 그게 20년 동안 계속 됐다고 한다. 나중에는 그게 지겨워 잠을 아예 안 자려고 몸부림치기도 했다. 혼돈속에 내재하는 절대적 진리를 찾은 그는 이제 또다른 세상 속으로 뛰어들 결심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때 잠시 같이 지냈던 천상병 시인의 부고를 접했다. ‘아니 80살까지 건강하게 산다고 하시더니 약속을 어기고 훌쩍 가버리다니…’. 서울로 문상을 갔다. 그런데 그때 그가 처음 본 서울의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 성 그 자체였다. 최루탄이 난무하고 사람과 사람의 갈등과 투쟁이 곳곳에서 보였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그러던 차에 두 명의 친구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으로 자살을 했다. 그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고향에 내려간 그는 심하게 앓았다. 신병(神病)이 시작된 것이다. 온몸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극심한 요통을 겪으며 분단 조국의 아픈 현실을 체험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상경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존재로부터 거역할 수 없는 천명을 받게 되었다는 것. “‘대한민국을 아름답고 희망찬 나라, 슬기롭고 생기찬 나라로 만들어라. 우리 겨레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희망이 넘치는 아름답고 슬기로운 겨레다’라고 말한 분(네살 때의 홍안의 노인)이 있었는데 그분의 말씀이 가슴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는데 그걸 감당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여러 가지 세속적인 일이 발목을 잡는데도 불구하고 거역할 수 없는 그 힘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 힘이 잡아끄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더라고요. 많이 울고 많이 대들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은 고독과 고난밖에 없는데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합니까.’ 그런데 덤빈다고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고 출발한 것이 95년 11월 18일입니다.” 그의 출정식은 곧 아내와의 이별식이 됐다. “그때는 몰랐어요. 정신적인 혼돈이 어마어마했거든요. 사람들은 그걸 접신이라 하는데 저는 접신이라 하지 않고 깨달음의 과정이라고 봐요. 환골탈태지요. 머리털 솜털이 다 빠져요. 온 몸의 껍질이 뱀껍데기처럼 홀딱 벗겨지는 거에요. 겨레의 혼을 심고 맥을 잇고 기를 살려라고 하는 스승님의 말씀이 오늘의 현실에 누군가는 해야 하는 그런 일임을 깨닫고 결심을 굳게 했습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그의 스승이고 천상천하 삼라만상이 그의 배움터라는 사실이 와닿았다. 다시 태어난 그가 바라본 우리나라는 패륜의 풍속이 난무해도 그를 제도할 법이 없고 백성들이 곤경에 처해 있어도 그를 구제할 도가 없는 나라였다. 그후 10년동안 그는 동가숙서가식 하면서 태극상생평화를 외치고 역사운동을 펼쳤다. 춥고 배고프고 절망이 엄습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4번이나 목숨을 버렸다. 그때마다 이 사람 저사람이 살려놓았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을 수 없는 것이 태극상생대인군자로 다시 태어난 그의 목숨이라는 것. 지난해 7월에는 전남 담양에서 청와대까지 40일동안 장승머리에 태극기 치마를 두른 십자가를 이끌고 상생평화행군을 실시, 방송(‘세상에 이런 일이’)에 보도되기도 했다. “불인불용(不仁不容)이요 대인대용(大仁大用)이라-. 어질지 못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고 크게 거듭나 크게 어진 것이라야 크게 쓰이는 것입니다.” 그이 입에서 한 귀로 듣고 흘리기에는 아까운 말들이 막힘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얀 매, 검은 진돗개, 붉은 고래, 뿔호랑이로 상징되는 ‘거역할 수 없는 존재’가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내몬다는 그는 한이 쌓이고 분노가 폭발하는 상극의 현장에서 상생과 평화를 전하는 상생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강민영기자/myka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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