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영상 : https://youtu.be/6WGA0YsHRtI
제목 : 사탄의 계략을 파하자.
본문 : 막 10:42-45
날짜 : 2024. 10. 20 주일오전예배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휴대폰을 보더라도 예전에는 전화만 거는 용도로 사용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우리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다양한 기능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으로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회가 이렇게 좀 더 복잡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이 좀 더 편해지기 위해서 또는 우리의 삶이 좀 더 윤택해지기 위해서 복잡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과거의 삶보다 현재의 삶을 비교해 보면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문제 혹은 심리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과거보다 점점 윤택해지는데 왜 우리 안에는 참된 평안이 없을까요?
인도와 중국 사이에 부탄이라는 자그마한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네팔보다 더 원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접국가들과 교류가 활발이 이루어지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스마트폰이 점점 보급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접하면서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 하위권으로 밀려났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안에는 아직도 아담과 하와의 죄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에덴동산에서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는 선악과를 보는 순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였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는 순간 탐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탐심이 그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그동안 하나님께서 풍족히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과 행복감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대해 단순히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으로 죄를 범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근본적인 범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한다는 것은 죄를 판단하고 그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판결은 오직 누구만이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왕 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삼권분립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왕이 모든 것을 다 주관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최고의 통치권자인 왕처럼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탐욕의 마음으로 사탄은 뱀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미혹시켰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러한 사탄의 계략에 미혹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은 예수님께 다가와 세 가지 시험을 하였는데,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는 시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 자신한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보면 탐욕의 마음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다가와 탐욕의 마음으로 미혹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사탄의 계략을 아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미혹케 하였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을 미혹하려 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탐욕으로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영광 즉, 주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 좌우편에 각각 앉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삶을 버리라.
이방인은 누구를 말합니까? 불신자들을 말하며 세상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남들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탐욕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분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탐욕은 버리되 소망은 가져야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 탐욕의 마음인지 아니면 순수한 소망의 마음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탐욕은 남들보다 더 가지고 싶고 더 높아지려는 마음으로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순수하게 어떤 일 혹은 어떤 것에 대한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과 달리 탐욕을 버리고 소망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과 이방인들의 차이입니다.
2. 섬기는 사람이 되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섬김을 받으면 자존감이 올라가고 행복감마저 듭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리는 어떻습니까? 자존감이 낮아지고 인생의 불행감이 생깁니다.
요즘 어디를 가든 감정노동자들이 많습니다. 마트 직원을 비롯해 전화 상담원 같이 고객을 응대하는 직업을 서비스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감정노동자들은 고객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극심해서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그래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섬기려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이렇게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3.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바라봐라.
옛날에 한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가는데 언덕 위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거기에 소가 한 마리 있었답니다. 그런데 농부는 쟁기질을 하면서 그 기준점을 소에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를 기준 삼아 열심히 밭을 갈았습니다.
이 농부는 밭을 다 간 후에 자신의 밭을 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쟁기로 갈은 밭고랑이 똑바르지 않고 삐뚤삐뚤해 있었습니다.
이 농부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에 기준을 두지 않고 여기저기 풀을 뜯으러 다니는 소에게 기준점을 두었기 때문에 밭고랑이 똑바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준점을 예수님께 두지 않고 세상에 두면 우리의 인생도 삐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우리 인생의 기준점을 두어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범죄케한 사탄은 예수님마저도 미혹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탄의 계략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께 쫓겨난 사탄은 지금도 부단히 기독교인들에게 다가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미혹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목사와 같은 성직자도, 교회의 중직이나 직분자도 예외는 없습니다. 남들보다 더 가지려 하고 더 높아지려 하면 그 순간 사탄이 미혹케 하고 있다는 것을 분별하고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늘 영적으로 깨어서 사탄의 모든 계략을 물리치고, 우리의 대속자시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