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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10:16-44
찬송가 269장 ‘그 참혹한 십자가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이름이 어디에, 어떻게 남겨지느냐입니다. 누군가 인생을 다른 말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과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소망도 시편 69편에나, 빌립보서 4장에나, 요한계시록 3장에서 언급하는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해 보십시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확신하였다면, 그 사람의 매일 매일은 이전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루 하루가 그저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쌓아 왔던 그 어떤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넉넉한 기쁨이 그 속에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와 같은 기쁨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개조하였던 사람들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들을 밝히는 과정(16-17)
본문에 기록된 이름들은 원래 불명예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2차 포로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성전과 성전 중심의 삶을 재건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미스럽게도 1차 귀환 때 먼저 예루살렘에 온 사람 중 일부가 이방인과 통혼하여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이것이 율법에 반하는 일이었기에 울며 통곡하였고, 그러자 이를 바로 잡자는 여론이 일어나,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조사하는 과정에 착수하게 됩니다.
(16-17)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각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고 열째 달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첫째 달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
조사 과정을 약술한 16-17절에 있어 두드러진 사항은 속도감입니다. 16절에 언급된 “그대로 한지라”는 말은 지체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시행했다는 의미입니다. 에스라는 각 종족의 대표를 선임하여 종족 내에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게 했습니다. 조사를 시작한 날이 열째 달 초하루 곧 10월 1일이었고, 조사를 마친 날이 첫째 달 초하루, 곧 1월 1일이었습니다. 조사를 위해 사용된 시간은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가 굉장히 복잡한 일임에도, 단 3개월 만에 깔끔하게 정리된 것은 실로 놀라운 속도이고, 집중력입니다.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을 가리는 일이 보통의 사안이 아닌 이유는 조사 과정에서 이방인과 통혼한 것이 밝혀지면 그 사람은 현재 아내가 된 자를 내보내야 하는 중차대한 일입니다. 가족이 되어 살고 있던 사람이 일시에 생이별을 해야 하는 비참한 일 아닙니까? 지나치게 냉정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 전체가 단 3개월 만에 문제를 일단락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 전체가 오직 하나의 열망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 열망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후에 나에게 주어질 아픔이나, 손해나, 어려움이 무엇일지를 고려하기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떻게 죄인 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까?’하는 그것만 열망하면서 어긋난 것을 바로 잡고자 했기에 이같이 빠른 속도로 집중력 있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에스라서를 ‘개혁의 책’이라고도 부르고, ‘부흥의 책’이라고도 말합니다. 70년의 포로기를 마치고 본토로 귀환한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바로 세우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정확합니다. 종교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곧 우리의 어그러진 신앙을 바로 세우는 부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로 집중된 목표 설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져야 합니다. ‘이러다 세상에서 망하진 않을까? 손가락질당하진 않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도태되거나 무시당하진 않을까?’하는 생각은 목적을 흐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위하기로 했다면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는 집중력이 삶의 개혁, 종교의 개혁을 완성시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빌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 삶이 거룩함으로 개혁되기 위해선 이처럼 푯대를 향하는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꺾으려는 계획과 유혹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에 일일이 반응하다 보면 하나님 앞에 결단했던 일들이 어느 순간 무너지고 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혼잡해지는 때에는 우리가 처음 세웠던 목표를 다시 생각하십시다. 다니엘처럼 ‘창문을 열고’ 주님과 소통하려 했던 결단만 다시 가슴에 새기며,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은 생각의 잔가지들을 가지치기하여, 하나님이 주신 푯대를 향하여 단순하게 달려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방인과 통혼한 제사장들(18-22)
조사 과정에서 발생한 집중력과 속도감을 기술한 에스라는 이제 조사된 명단을 일일이 열거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명단에 있어서는 안 될 이름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들의 이름을 3부류로 나누어 열거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들은 18절에서 22절까지 기록된 제사장 부류입니다. 제사장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연결하는 중보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능통해야 합니다. 율법에 능통한 제사장들이 ‘이방인과 통혼을 하면 안된다’라는 법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이름이 다수 기록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법을 아는 일’과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일’은 항상 일치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들의 실수도 명확합니다. 우리가 짓는 죄 가운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지 몰라서 짓는 죄는 소수입니다. 절대다수의 죄는 알면서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이지 않습니까? 교역자로서 간혹 교우님들을 심방하다보면 자기 앞에 놓인 여러 선택지 중에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듣다가 보면, 답이 분명합니다. 너무도 명확해서 삼척동자라도 알만한 답입니다. 그럼에도 교역자에게 답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싶은 것과 알고 있는 정답이 상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라 시대의 제사장들이 범한 죄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면서도 시대의 악함을 틈타 자기의 욕망을 물타기 하며 이방인과 통혼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할 리 없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죄책감을 갖도록 했는데, 19절에 보니 감사하게도 이들은 자기들의 어긋난 모습을 바로 잡기로 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그들이 맞이한 이방인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였고, 후에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속건제는 ‘의도하지 않은 범죄를 행하였을 시 드리는 제사’입니다. 따라서 이때의 제사장들이 속죄제가 아닌 속건제를 드린 것은 그들이 회개한 후 개혁을 위해 이방인 아내를 내보내게 되면 의도하지 않게 가정이 깨지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그 상황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말씀에 입각하여 행하려다 보니 발생한 어지러운 상황이라 이를 속건제물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우리 삶을 어그러뜨리는 죄는 이처럼 바로 잡으려고 해도 그 결과가 깨끗하게 봉합되지 않습니다. 본문을 읽는 혹자는 ‘과거에 이방인과 통혼한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 거기까지는 그냥 놔두고, 앞으로 그러지 않도록 하면 될 텐데 왜 성경은 굳이 가정이 깨지는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냉정하게 이방인 아내를 내보게 하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버려지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것이 더 큰 악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버려질 여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이해력 안에서 좋은 것을 따지고 계산한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일이지 않습니까? 또 믿음은 ‘합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비록 우리 생각에는 ‘버려진 이방인 아내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보다 가족의 헤어짐을 감수하고서라도 잘못되고 어그러진 것이 있다면 바로 잡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신앙의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때문입니다. 우리가 난감해하는 신앙의 문제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의 갈등이 아닙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문제는 누구라도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진짜 고민은 ‘좋은 것’과 ‘더 좋은 것’ 사이에서의 갈등입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선택지 중에 누에 보이는 좋은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장 좋은 선택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침마다 침묵으로 기도하며 그 답을 기다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생각한 합리적인 방식이 문제를 해결할 것 같지만, 나중에 인정하게 되는 것은 당장에 합리적인 선택이 옳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말씀대론 행한 것이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은 해답은 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하루도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선택지 중에서 말씀대로 행하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그것을 인생의 가장 좋은 해답으로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랑스러운 이름들(23-44)
에스라는 이방인과 통혼한 제사장들의 이름 아래로 23절과 24절에는 레위인과 성전에서 노래하는 사람들과 문지기들, 곧 성전 책임자들의 이름을 나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일반적인 유대인 중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이름들을 세 부류로 분류한 것은 공동체를 성전 중심의 질서로 바로 세우기 위한 일입니다. 비록 다같은 죄를 범하였지만, 죄에 대한 책임이 큰 사람들의 이름부터 나열하여서 독자로 하여금 에스라 시대의 부흥이 이후에 유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를 가늠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방여인과 통혼한 일반 유대인들의 이름이 열거되는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죄를 범한 사람들의 이름 앞에 그가 누구의 자손인지 알도록 그 조상의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 자손 중에서는’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과 통혼하는 죄를 지은 것은 당사자인데, 이를 알리는 과정에서 그 조상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것은 부당해 보입니다. 마치 후손의 죄로 말미암아 그 가문 전체가 악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려에도 에스라가 굳이 그 조상들의 이름까지 밝히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본문에 나열된 이름이 죄인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회개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과거에는 이방인과 통혼하지 말라는 율법을 거슬러 공동체를 곤란에 빠트렸지만, 현재에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애통해하며 심지어 가족이 헤어져야 하는 아픔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명단은 죄인들의 명단이 아니라, 회개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명단이며, 서두에 언급한 것과 같이 그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되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이름들은 전혀 수치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광된 이름입니다. 분명 죄를 지은 죄인의 이름들이지만, 마지막에 그들의 수치가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가 아닙니까? 알다시피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모든 형벌 중에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지만 그 수치는 현재 가장 위대한 영광이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해결사요, 우리의 연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시는 능력 위의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수치스러운 민낯을 고백해도 괜찮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앞이라면 삼가야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강함으로, 우리의 초라함을 위대함으로 바꾸시는 인생의 참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 앞에서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가리겠습니까?
에스라가 성전 중심의 삶을 재건하면서 기록한 ‘부흥의 회고록’인 에스라서 말미에 오늘 본문처럼 죄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마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세대 가운데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지막까지 우리 삶이 수치스러운 불명예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자신을 내려놓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수치로 끝날 인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삶을 영광으로 바꾸시고,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의 이름이 죄인의 명단에 들어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느끼신다면,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낱낱이 고하십시다. 그리고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께 다시 창문을 여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치를 어떻게 영광으로 바꾸시는지를 목도하며, 바로 그 풍성한 은혜의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은총을 덧입혀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비록 과거의 삶은 수치 가운데 있었더라도, 주님께 창문을 연 이상 우리의 마지막은 영광으로 귀결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모든 고난과 결핍의 사슬로 묶인 것 같으나, 하나님은 이를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줄 믿사오니, 모든 순간에 감사를 잊지 않게 하시고, 모든 상황에 넉넉한 웃음과 미소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의 작디작은 이름도 기억하시고 사랑으로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특기할 만한 사항은 무엇입니까?
2. 제사장들도 죄를 범한 모습을 볼 때, 율법을 아는 일과 행하는 일의 상관성은 어떠합니까?
3.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는 방식은 어떠합니까? 그것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4. 그리스도인이 수치스러운 자신의 모습에도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작성: 황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