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인연 깊은 바이샬리 아쇼카왕 석주 온전히 남아 사자상이 북쪽 보는 이유는 부처님의 열반을 기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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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사리를 봉안했던 아쇼까왕 스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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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의 법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
쿰나하르를 나온 일행은 파트나 시내를 관광하지 않고 바로 바이샬리로 행선지를 정한다. 파트나 도심지 북쪽으로 흐르는 강가강은 강폭이 바다와 같이 넓으므로 유람선을 타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일행은 바이샬리로 가 아쇼까왕 석주를 답사하기로 한 것이다.
파트나의 강가강 강폭이 바다와 같은 까닭은 네 개의 강이 만나기에 그렇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칸타키강과 골고라강, 그리고 야무나강과 데칸고원에서 시작한 손강이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를 비유하여 신분차별이 없음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세상에는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와 같은 신분차별이 있지만 여래의 법 안에는 차별이 없다. 네 개의 강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흐르듯 여래의 법 안에서는 모두 다 하나가 된다.”
파트나에서 바이샬리까지는 70km쯤 된다고 하니 버스로 2시간이면 넉넉할 것 같다. 유마거사의 고향인 바이샬리는 한역경전에 비야리(毗耶離) 혹은 비사리(毘舍離)로 나온다. 바이샬리는 부처님과 아주 인연이 깊은 땅이다.
파후푸트라카(Pahuputraka, 多子塔)에서 마하가섭을 제자로 맞아들이기도 했고, 카필라성을 나와 첫 스승을 만난 곳이기도 하거니와 정각을 이룬 뒤 그곳으로 가 이적으로 가뭄과 질병을 퇴치했고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으며, 열반 3개월 전에 또 다시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이다.
그만큼 부처님은 바이샬리를 사랑하셨고, 또 바이샬리 사람들은 부처님을 존경하였다. 부처님이 열반을 앞두고 바이샬리 거리를 떠날 때의 목소리에는 인간적인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부처님이 바이샬리 교외에 있는 차팔라 사당에 머물 때였다. 바이샬리 거리로 나가 탁발하고 돌아오는 길에 걸음을 멈춘 채 뒤돌아보면서 아난에게 말했다.
“여래가 이 아름다운 바이샬리 거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구나!”
부처님이 바이샬리를 떠나자 릿차비족 사람들은 흐느끼면서 부처님 뒤를 따랐다. 부처님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렸다. 그러나 릿차비족 사람들은 칸타키강에서 부처님과 이별해야 했다. 부처님은 강을 건넜다.
그래도 릿차비족 사람들이 강 저편에서 흩어지지 않고 서 있자 부처님은 강물에 발우를 띄워 보냈다. 부처님이 릿차비족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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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 있는 아쇼까왕 석주 중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의 석주. 부처님의 열반지인 쿠시나가라를 바라보고 있는 석주의 사자상에서 전륜성왕 아쇼까왕의 불법에 대한 예경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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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열반 100년 후 시작된 계율 해석 문제
일행은 아쇼까왕 석주를 답사하기에 앞서 부처님이 열반하셨을 때 8등분한 사리 중에서 바이샬리국 몫으로 받은 사리가 봉안됐던 스투파 유적지로 먼저 가본다. 바이샬리 왕이 조성한 스투파 터 앞에는 제법 큰 카라우나 포카르(Kharauna Pokhar) 호수가 있는데 늘 이곳을 올 때마다 성스러움이 느껴진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강가 강물이 지하 수맥을 타고 흘러와 포카르 호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고, 공화제 왕국으로서 투표로 선출된 바이샬리 왕들은 의식을 치를 때 이 호수의 물을 성수로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인도 국회에서는 옛 바이샬리의 공화제도 정신을 본받고자 이 호수의 물을 떠와 의식에 사용한다고 안내하는 인도 청년이 설명한다.
호수 저편에 일본 절의 흰 탑이 보인다. 인도의 불교성지를 답사하면서 확인한 바지만 중요 성지에는 꼭 일본 절이 들어서 있는데 무엇이든 선점하는 데 있어서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재빠른 것 같다. 일본 절 부근의 숲이 제2차 경전결집의 장소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100년경이었다. 계율 문제로 바이샬리에 사는 젊은 수행자들과 서인도와 동인도에 사는 노수행자들 간에 갈등이 생겼는데 그것이 제2차 결집의 요인이 되었다. 어느 날, 아난의 제자이자 계율에 밝은 서인도 출신의 야사 장로가 상업도시 바이샬리에 왔는데 젊은 수행자들이 신자들로부터 금화와 은화를 시주받는 것을 목격하고는 깜짝 놀랐다.
야사 장로는 즉시 바이샬리의 젊은 수행자들에게 금화와 은화를 시주받는 것은 계율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지적했다. 그러자 젊은 수행자들이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며 반발했다. 실제로 바이샬리 수행자들은 탁발에만 의존하는 숲속생활에서 스스로 수행하는 사원생활로 수행환경이 바뀌어가고 있었으므로 돈이 필요하여 시주를 받았던 것이다. 야사 장로는 바로 바이샬리를 떠나 동인도와 서인도의 수행자 대표를 4명씩 뽑아 돌아왔다. 노수행자 중에는 아난의 직계 제자인 법랍 120년의 사르바카마 장로를 비롯하여 700명의 장로가 참여했다.
그래서 제2차 결집을 칠백인결집(七百人結集), 혹은 칠백결집이라고도 불렀다. 야사가 주도하여 논의된 내용은 십사비법(十事非法), 즉 열 가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 내용인즉 스님들이 음식에 맛을 내는 소금을 지니고 다니는 것도 비법이고, 공양 후 발효된 우유나 술과 같은 발효시킨 과즙을 먹는 것도 비법이고, 금화나 은화를 시주받는 것도 비법이라는 등등이었는데, 10가지나 됐다.
이러한 내용의 시줏물은 당시 바이샬리 사람들의 높은 생활수준에서는 부담될 것이 없었지만 장로들은 제 1차 결집 때 정한 계율을 내세워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스투파 터에 씌운 양철지붕이 별로 아름답지는 못한 것 같다. 1958년 발굴조사 때 부처님의 유회(遺灰) 사리가 발견되었다고 하여 스투파 기단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고 하지만 하루빨리 스투파를 복원했으면 좋겠다. 아쇼까왕이 이곳의 사리 중 일부를 일행이 지금 가고 있는 아쇼까왕 석주 옆의 스투파에 봉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쇼까왕이 바이샬리로 순례 와서 조성한 스투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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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천인(天人)의 모습을 가졌다고 비유한 바이샬라의 릿차비족. 부처님 재세 당시 영화가 무색할 정도로 그들의 현재 생활은 궁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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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까왕이 바이샬리에 석주를 세운 이유는?
아쇼까왕 석주와 스투파 입구에 있는 마을은 인도의 궁벽한 농촌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모습이다. 천인(天人)이 어떤 모습인지 알려면 의식주가 풍요로웠던 릿차비족 사람들을 보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이 무색하다. 부처님께 망고동산을 기증한 유녀(遊女) 암바빨리가 살았던 마을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마차들이 부딪칠 정도로 번화했던 거리가 소와 염소가 꼴을 먹고 있는 조용한 거리로 변해 있다.
그러나 답사일행은 아쇼까왕 석주를 보고 너도나도 놀란다. 지금까지 답사하면서 본 것 중에 가장 완벽한 모습의 석주인 것이다. 석주 상단의 사자상도 완벽하다. 아쇼까왕은 좀 전에 보았던 바이샬리 왕이 조성한 스투파에서 부처님 사리를 가져와 이곳에 봉안하기 위해 스투파를 만든 뒤 석주를 세웠을 것이다.
‘아쇼까왕은 왜 이곳에 스투파를 조성하고 석주를 세웠을까?’
나는 그 해답을 석주 상단에 얹힌 사자상에서 찾는다. 사자상의 사자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쿠시나가라 땅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바이샬리에서 열반을 선언하고 마지막 설법한 것을 기리기 위해 그랬던 것은 아닐까.
원숭이 연못 저편에 바이샬리 왕이 지어 기증한 대림정사 중각강당 터가 보인다. 바이샬리왕이 부처님에게 대림정사를 기증한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당시 바이샬리는 오랜 가뭄으로 사람들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렸는데, 바라문이나 육사외도들이 해결하지 못하자 바이샬리 왕은 부처님에게 사신을 보내 재앙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바이샬리 땅을 밟게 되었고 부처님이 아난에게 〈보경 (寶經, Ratna Sutra)〉을 외우게 하고 자신의 위신력으로 가뭄과 질병을 물리쳤던 것이다. 이에 바이샬리 왕은 부처님에게 대림정사를 지어 기증했고 부처님은 2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지금은 벽돌 무더기만 남아 있지만 당시 부처님은 대림정사에서 〈화엄경〉 입법계품을 설했고, 양모 마하빠자빠띠가 카필라성 여인 500명을 이끌고 와 세 번을 간청하자 출가를 허락했던 곳이다. 물론 아난의 하소연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성도 세존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한다면 남성과 똑같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지 않습니까?” “아난이여, 수행을 완성한다면 누구든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느니라.” “그렇다면 왜 마하빠자빠띠님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까? 마하빠자빠띠님은 마야부인께서 돌아가시자 세존께 당신의 젖을 먹이신 분입니다. 세존을 친아들처럼 정성을 다해 키운 분입니다. 어찌 은혜를 잊으시려고 합니까?”
결국 부처님은 아난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다. 부처님이 여성의 출가를 주저했던 까닭은 남존여비가 심했던 바라문 사회 분위기와 산적이나 무뢰한들의 폭력을 걱정하여 그랬던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파트나에서 보았던 중천의 해가 석양이 되어 기울고 있다. 일행도 깃을 접는 날새처럼 숙소를 걱정해야 하는 시각이다. 인도로 와 동가식서가숙하는 처지가 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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