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심고 떠난 '영원한 청년’
고 김준곤 목사 추모사 - 박성근 목사 (LA한인침례교회)
민족의 밤을 이끌던 또 하나의 큰 별이 졌습니다.
황폐한 조국 땅에 생명의 씨를 뿌리고,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을 꿈 꾸셨던 목사님, 당신은 그 오랜 세월을 수줍은 순같이, 나룻배같이 달려 오셨습니다.
주님을 처음 만만 날 ‘다르게는 살 수 없는 내 운명’이라고 하셨던가요? 일편단심 예수 이름 하나에 전 생애를 걸고 그 험악한 민족사의 준령을 넘어오셨습니다.
8.15, 6.25의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25시’의 주인공처럼 기적을 일군 목사님은 분명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뜻밖의 선물이었습니다. 1958년 그 어둡고 혼란했던 시기에, 목사님은 감히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캠퍼스 복음화의 꿈을 잉태하셨습니다. 흔들 깃발이 없다고 울먹이던 젊은이들에게 민족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환상을 보게 하셨던 당신은 분명 우리 민족의 에스겔이요, 외로운 선구자였습니다.
일찍이 그 누가 예수 혁명을 말했던가요? 정치 혁명, 공산 혁명은 있어도 정신을 개조하고 의식을 바꾸는 예수 혁명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국 지성의 이정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창백한 이성주의와 니힐리즘의 망령에 빠져 방황하던 젊은 엘리트들에게 절대가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난 속에, 설움 속에, 고통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기만 하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족이 될 것이라는.
1971년 8월 그 무덥던 한여름 밤의 대전 충무체육관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 날 처음으로 주님 사랑을 알았습니다. 피를 토하듯 외치는 목사님의 말씀 앞에 영원한 첫 사랑, 내 평생의 절대 단수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얼마나 감격하고 울었던지요. 밤새 통곡했던 그 밤이 제 인생의 분수령이 되었음을 아시는지요? 목사님은 저의 스승이요, 나침반이며, 영원한 도움이셨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드릴 자가 저 한 사람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목사님은 가셨지만, 남겨 놓으신 비전은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들을 통해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강이 흐르고, 온 세상 구석구석에 복음의 꽃이 만발하는 그 날까지 예수 혁명은 계속 될 것입니다.
목사님, 편히 쉬십시오. 순애보처럼 간직해 왔던 첫사랑의 고백을 주님과 나누시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십시오. 그날 그 곳에서 해같이 빛난 모습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 이 글은 미주한국일보에서 읽고 여기로 스크랩해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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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목사님을 그리며...
- 에스더 윤
목사님이 많이 편찮으신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홀연히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마음은 한없이 서글픕니다.
목사님을 직접 뵈온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라와 민족이 어려울 때 목사님이 가르쳐주신 시간들을 감사할 뿐입니다. 나라의 어려움은 정치도 경제도 아닌 젊은이들이 꿈을 잃어버리고.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 젊은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잃지 않고 굳건히 일어날 수 있도록 목적의식을 심어주시며 삶의 소망을 주시던 귀한 분이 김준곤 목사님이셨습니다.
1970년대 그 암울한 때에 삼선개헌으로 유신으로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데모로 인해 학교는 굳게 문이 닫혔고 통기타와 청바지를 입고 생맥주를 마시며 거리를 방황할 때 “정신사의 강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고..., “이 민족의 살길은 한길밖에 없네. 예수, 오직 예수, 예수 밖에 없네”라고 말씀 하시던 분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자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고 말씀 하시며 다르게는 살길이 없다고 삼천리 방방곡곡에 순 모임을 일으키고 캠퍼스마다 마을마다 고을마다 섬마다 사랑방 성서공부를 일으키며 민족 복음화의 횃불을 높이 올리셨던 선두주자 김준곤 목사님.
민족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신 분, 예수 믿으면 나와 가정이 복 받는 것밖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 예수 믿는 것은 나라와 민족과 함께 가는 길을 알려 주신 분,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민족이란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민족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해마다 새해가 오면 원단금식으로 나라를 깨우며 젊은이들을 깨우며 세계로의 눈을 여셨던 분. CCC 건물의 6층 현숙기도실 앞에 있던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는 그 말씀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처음 순모임을 조직하고 부끄럼 많은 어린 자매의 간증을 격려해 주시던 김 목사님. 어느새 그 어린 자매는 그때의 목사님의 나이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별명이 뭔지 아시나요? “친정 아버지”였습니다. 친정 아버지처럼 시집간 딸에게 차근차근 타이르시는 목사님께 우리가 붙인 목사님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10년 후, 20년 후 지금의 젊은이들이 자식들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낼 때는 예수 안 믿는 것이 그 옛날 상놈이 양반과 혼인할 수 없었던 것보다 더 어려운 시절이 오게 될 것이다. 불상놈보다 더 대접받기 힘들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철의 장막이 열리고 곧 한국이 주도하는 선교 한국시대가 올 것을 준비해라. 젊은이들이 그때를 위해 말씀과 기도로 준비해라. 준비된 자 만이 주님이 쓰신다…” 정직한 선지자다운 말씀이셨습니다.
기억하시겠지요? 엑스플로 74를 앞두고 라디오방송이 처음으로 나가고 80 복음화 대회가 공영 TV에 처음으로 방영되던 날, 일간신문에 조그맣게 「예수칼럼」이 매일 나오는 것을 기다리던 날들을… 이제 CCC 시대가 열릴 것을 예고하시며 감격해 하시던 일, 한국 최초로 30만 명이 여의도 광장에서 합숙하며 일주일의 광야 생활을 했던 엑스플로74. 밤마다 100만명, 200만명이 모이던 한여름의 여의도 광장의 추억도… 아름다운 시간들만을 기억하십시오.
35년 만에 참석했던 2009년 강원도 한화리조트 CCC 캠프는 8천 명이 하나된 젊은이들이 일으키는 아름다운 축제 였습니다. 거센 장대비를 맞으며 움직이지도 자리를 뜨지도 않은 채 열심이 찬양하고 기도하는 젊은이들이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비록 CCC의 모든 얼굴들이 세월을 따라 바뀌어도 그곳은 김준곤 목사님의 수고의 산실이었습니다.
6.25로 많은 가족들이 공산당들에게 학살당하고 젖먹이 어린 딸이 엄마 없이 버려졌는데 30도 안된 그 사랑하는 딸이 말기 암으로 쉬지 않는 극심한 고통을 옆에서 친히 지켜 보아야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우시면서 나누셨던 일, 거짓 광우병으로 온 나라가 촛불을 들고 정부를 전복 시키려 할 때 에스더기도운동본부와 함께 그 살벌한 시청 앞 광장에서 공산당의 잔학상을 말씀하시며 예수 믿는 것이 개독교가 되어 손가락질 당하는 현장에 친히 노구로 “이 민족의 위기는 영적 위기이고, 도덕적 위기이고, 시국적 위기”라고 말씀하시며 철저한 회개만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기도로 말씀으로 막으셨던 귀한 분. 그 순간 그 혼잡하던 곳이 김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는 순간 잠잠해지던 것을 기억합니다. 김 목사님은 바로 상처가 있는 곳에 위로를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해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일으키는 이시대의 진정한 사랑의 용사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나라와 민족을 향한 목사님의 사랑을 잊지 않고 목사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깨우며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군대로 죽음보다 강한 생명을 드릴 순교의 군대로 악한 원수마귀의 진영을 부시며 일어서는 권능의 군대로 일어날 것 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군대는 이 땅에 주님의 보혈을 뿌리며 하늘을 여는 군대로 일어설 것입니다.
김준곤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중보기도 하실 김준곤 목사님.
이제는 모든 고난의 시간 다 잊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주님과 함께…………..
미주 에스더 윤 올림(에스더기도운동본부)
>>> 출처 : 크리스천 헤럴드에서
첫댓글 그동안 [J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여기 [다음 카페]로 옮겨오고 있습니다.
이 포스팅은 2009년 9월 29일 올렸던 글과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