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사상’에 대한 소고(8-2)
‘아위자’가 선가(禪家)의 은혜를 입은 것은 <밖으로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명색(=오온 포함)이나 까마(kāma, =오욕락 포함)’에서 ‘답’을 구하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딜레마에 봉착하시는 분>이 ‘진짜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들으시는 분이십니다.
--------------------------------
이론상으로도 ‘오온(=명색)을 떠나서 여래가 있을 수 없는 이치’이고,
실재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오온(=명색)’이라는 것>은 <밖(바히다)에 위치한 것>
이거든요. <반야심경>을 보더라도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이고요.
나아가 <니까야(=5부 니까야)>를 보더라도 온통 ‘오온(=바히다의 것)’이야기입니다.
이 시점에서 먼저, <밖으로 구하지 말라!>고 하셨다하여 <안으로(=아자땅)만 구하는!> 아이큐 한 자리인 ‘못 말리는 분’은 제외하고서 이야기 합니다.[☜그런 분들까지 다 고려해서 이야기 하다가는 해 떨어져 집에 갈 시간이 됩니다.]
<반야>라는 것은 <안으로(=아자땅)>에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불성론’[=여래장 사상]이 ‘불교의 사상’이 아닌 이치가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청정론’을 가지고 변형시키어 ‘불성론’을 만든 것 같은데요, 불교는 <‘청정’만을 이야기 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청정’만을 이야기 하면> ‘심해탈’로 충분합니다.
‘혜해탈’용인 <반야>는 <밖으로(바히다)와의 ‘관계’>에서 <안으로(=아자땅)>에 생겨나는 것[☜‘얻어지는 것’이라는 표현보다는 이 표현이 더 좋아 보임.]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밖으로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에서 <딜레마에 봉착하시는 분>이 ‘진짜 부처님의 말씀’을 알아들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
<밖으로(바히다)>라고 부르는 영역은 참으로 위험한 영역입니다. 빠삐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밖으로(바히다)>라고 부르는 영역에 <‘무식이 용감’이라는 깃발아래 뛰어든 ‘식(識)’[=경전에는 ‘밖으로 흩어진다.’라고 표현 됨]>의 최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빠삐만의 ‘구글 검색’에 걸려 연행되어, “누가 너를 창조하였느냐?”라는 질문에 ‘바른 말’하다가는 종교재판에 넘겨져 “선택권은 주겠다. 고문당하다가 죽을래? 사인(=서명)하고 죽을래?”라는 기로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상황[=딜레마]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중생들이 <반야>를 얻기 위하여[=<안으로(=아자땅)>에 ‘반야’가 생겨나게 하기위하여] <밖으로(바히다)와의 ‘관계’를 가질 때>에 ‘안전한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jhāna(禪, =識이 배제된 곳)>입니다. 여기는 ‘안전한 곳’입니다. ‘識이 배제된 곳’이기에 빠삐만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visaya(=경계)’>를 이용하여 <밖으로(바히다)와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려운’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바로 위에 언급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visaya(=경계)>란 <법(法, dhamma)>입니다. 이 점은 경문상 근거가 있고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법(法, dhamma)이란 것이 무엇인가?>하는 점입니다.
모릅니다. 대충 짐작을 할 뿐입니다.
12처를 보면, <법(法, dhamma)의 근(根)>은 <의(意)>입니다.
<법(法, dhamma)>은 <의(意)>의 ‘visaya(=경계)’라는 말 입니다.
그런데 ‘心意識’은 공통적으로 <법(法, dhamma)>을 ‘visaya(=경계)’로 가지고 있습니다.
12처를 보면, <법(法, dhamma)>은 ‘외입처(外入處)’입니다.
‘밖의 것들이 들어오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안으로(=아자땅)>에 위치해 있는 ‘心意識’이 <밖으로(바히다)의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가 <법(法, dhamma)>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여 ‘心意識’은
<자신의 ‘visaya(=경계)’가 아닌 것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心意識’이 <‘心意識’의 고유한 ‘visaya(=경계)’가 아닌 것들을 ‘경험하는 것’>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반야>를 생각해 보는 것이기에,
<‘心意識’의 고유한 ‘visaya(=경계)’가 아닌 것들을 ‘경험하는 방법론’으로서의 ‘법(法, dhamma)’>이 가지는 독특한 측면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명색(=오온 등)’은 이유 불문하고 <밖으로(바히다)의 것들>이며
그것들이 <‘心意識’의 ‘visaya(=경계)’>라는 언급은 경전에 전혀 없으며,
<‘心意識’의 한계>가 ‘명색’까지인 것은 경전에 나옵니다.
그 ‘명색(=오온 등)’은 빠삐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며, 매우 위험한[=생로병사를 겪는] 것입니다. 그 ‘명색(=오온 등)’을 <꽉 붙들고 있는 것>은 빠삐만을 <꽉 붙들고 있는 것>과 같아서 ⓐ죽음의 고통을 대가로 받아야 하며, ⓑ화약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든 것이며, ⓒ‘무명’이 아니라면[=즉 명(明)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겁 없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명(明)’인 <반야>를 얻기 위해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서
‘명색(=오온 등)’에 뛰어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jhāna(禪, =識이 배제된 곳)>에
들어가면 ‘안전하며’[=빠삐만이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고 함],
‘안전하게’ 그 ‘명색(=오온 등)’을 관찰하여 <반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온(=명색)을 법당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이러하기 때문에 ‘오온’을 부수거나
남의 ‘오온’이라 하여도 훼손시키면 안 되는 것임. 공부방해임. 고등학교 3학년(=아라한)의 공부를 방해하다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머리가 7조각 남) 경전에서 읽어보셨을 것임.]
-------------------------------
12처를 공부해 봅니다.
<안이비설신>이라는 <처(處, =色處)>가 <근(根)의 능력>을 가지려면
반듯이 <의(意)>가 있어야 합니다. 즉 <안이비설신>은 <의(意)>와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만 <근(根)>이고, 아니면 그냥 <色>에 불과합니다.
<색성향미촉>도 그렇다고 보아야 합니다. <법(法, dhamma)>과 관계를 가질 때만
<안이비설신>의 ‘visaya(=경계)’지,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色>에 불과하다고 ‘아위자’는 봅니다. 진짜 외입처(外入處)는 <법(法, dhamma)>뿐이라는 지적입니다.
이제 ‘원시불교’에서 ‘최고로 난해한’ 경문을 이해해 봅니다.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nto tattha sammā samādhiyati sammā vippasīdati.
안으로 身(~法)에서 身隨觀(~法隨觀)하며 머무는 자로 올바른 三昧에 들고 바르게 맑아집니다.
[☜‘올바른 三昧’는 반듯이 ‘안으로(Ajjhattaṃ)’ 드는 것임]
So tattha sammā samāhito sammā vippasanno bahiddhā para-kāye ñāṇa-dassanaṃ abhinibbatteti.
그는 거기에서 ‘바르게 사마타 하는 자, 바르게 맑아지는 자’로서 밖으로 타인인 身(~法)에서 앎과 봄을 가지게 됩니다.
[☜‘명색(=오온 등)’은 ‘빠삐만의 것’이어서, ‘타인(para)의 것’입니다. 경전에 나옵니다.]
Ajjhattaṃ vedanāsu …(pe)… citte …(pe)…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 domanassaṃ. Ajjhattaṃ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nto tattha sammā samādhiyati sammā vippasīdati. So tattha sammā samāhito sammā vippasanno bahiddhā para-dhammesu ñāṇadassanaṃ abhinibbatteti.
Ime kho bh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tāro satipaṭṭhānā paññattā kusalassa-adhigamāyāti. …(la)….
존자들이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아라한, 정등각’이신 그 분 세존에 의해, 이러한 사념처는 善함을 증득하기 위해 밝혀진 것입니다.
Sammā-diṭṭhissa bho sammā-saṅkappo pahoti, sammā-saṅkappassa sammā-vācā pahoti, sammā-vācassa sammā-kammanto pahoti, sammā-kammantassa sammā-ājīvo pahoti, sammā-ājīvassa sammā-vāyāmo pahoti, sammā-vāyāmassa sammā-sati pahoti, sammā-satissa sammā-samādhi pahoti, sammā-samādhissa sammā-ñāṇaṃ pahoti, sammā-ñāṇassa sammā-vimutti pahoti.
존자들이여, 正見으로부터 正思惟가 생겨나고, 正思惟로부터 正語가 생겨나고, 正語로부터 正業이 생겨나고, 正業으로부터 正命이 생겨나고, 正命으로부터 正精進이 생겨나고, 正精進으로부터 正念이 생겨나고, 正念으로부터 正定이 생겨나고, 正定으로부터 正智가 생겨나고, 正智로부터 正解脫이 생겨납니다.[☜이것이 ‘다쌍가(열 가지)’라고 부르는 것임. 이 ‘다쌍가(열 가지)’는 막가가 아님. 아라한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임.]
Yaṃ hi taṃ bho sammā-vadamāno vadeyya;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Apārūtā amatassa dvārā ti, idam eva taṃ sammā-vadamāno vadeyya.
존자들이여, 바르게 말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法(dhamma)’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고, 시간을 격하지 않는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만, 바르게 말하는 자들이 ‘불사의 문이 활짝 열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같은 것입니다.[DN. vol.2. pp.216~217]
위 경문에 언급되는 ‘法(dhamma)’이라는 것이 바로 의근(意根)의 ‘visaya(=경계)’인 그 <法(dhamma)>입니다. ‘아위자’의 지적이 놀라우시지요? 만약 사실이라면 <기절초풍하실 일>이시지요? 아마도 믿어지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반야>는 이렇게 하여서 ‘안전하게’ 얻어[=결국은 ‘빠삐만의 것’을 슬쩍하는 것임] <반야>로서 <안으로(=아자땅)>에 위치해 있는 ‘탐진치’를 모조리 청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의 획득’이고, ‘열반’이며, ‘불사의 문을 연 것’이며, ‘삼계로부터 대자유인이 되신 것’입니다.
관련경문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바로 아래의 경문을 이해하시라고 이제까지 설명한 것입니다.
…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i.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ṃ upasaṃharati,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a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So tattha-ṭṭhito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MN. vol.1. pp.435~436]
… ①初禪(, ②제이선, ③제삼선, ④제사선, ⑤자무량심, ⑥비무량심, ⑦희무량심, ⑧사무량심, ⑨공무변처, ⑩식무변처, ⑪무소유처)을 성취하고서 머문다. 거기에서 비구는 ‘色, 受, 想, 行, 識으로 된’ 그 法들(dhammā)을 ‘무상, 고, 질병, 종양, 화살, 재앙, 고난, 타인(para), 부서지는 것, 空(suñña), 無我인 것’으로 合隨觀한다(samanupassati). 그는 그 法들(dhammā)로부터 心(citta)을 돌아서게 한다. 그는 그 法들(dhammā)로부터 心을 돌아서게 하고서, ‘불사의 界(amata dhātu)’를 위해 이 ‘一切行의 寂止(sabbasaṅkhārasamatho), 一切우빠디의 포기, 愛의 사라짐, 離貪, 滅, 열반이라는 이것은 평화로움이고 최상의 것이다’라고 心을 향하게 한다. 그는 거기에 머물러 ‘번뇌들의 사라짐(āsava khaya)’을 성취한다.
첫댓글 다음 글에서 <法(dhamma)의 위치>에 대하여 언급하려 했으나,
대충 <댓글>로 때우렵니다. 잠도 안 오고 해서 ............. ㅋㅋㅋㅋㅋㅋㅋㅋ
<法(dhamma)의 위치>은 '안으로(아자땅)'라는 영역에 위치하지 않습니다.
외입처가 '안으로(아자땅)'에 위치하면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밖으로(바히다)'라는 영역에 위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안으로(아자땅)'에 위치한 <심의식의 ‘visaya(=경계)’>이기 때문입니다.
<法(dhamma)>은 '심의식의 고짜라'에 속하는 ‘visaya(=경계)’입니다. 보통의 ‘visaya(=경계)’가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더군다나 <法(dhamma)>은 <作意를 기울인 바로 '그 곳'>에 생겨나는 특징이
있다고 '아위자'는 봅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제가 말 해 놓고도 '이상한 말'같아 보입니다만,
사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안으로(아자땅)'에 위치하는 <탐진치>에
<作意를 기울이면> 그 <탐진치>가 <탐법, 진법, 치법>으로 바뀐다고 저는 봅니다.
그렇게 <법>으로 바뀌었을 때, <반야(=이것도 법입니다만. 선법이 생겨나면 불선법은 멸함)>로 비추어 '滅'하는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반야>는 3단계로 보는 것이 좋은데요,
첫 단계는 <정견>이라는 '반야'인데요, 내용이 <지집멸도>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아빈냐>라는 '반야'인데요 설명은 생략합니다.
세번째가 <사성제>라고 부르는 반야인데요, 내용이 <고집멸도>입니다.
그 <반야>들 앞에서 <法(dhamma)>이라는 <法(dhamma)>은
그 어떤 <法(dhamma)>도 맥을 못 씁니다. 꼼짝을 못한다는 말.
<法(dhamma)에 대한 '반야'>이기 때문입니다. "너 집멸하는 놈이지?"라는 검문에
모든 <法(dhamma)>이 꼬리를 내린다는 말입니다. <法眼>이거든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위자 생겨날 때는 <번개같이> 생겨나고, 사라질 때도 <번개같이> 사라지는 것이 <법>입니다.
흔적도 없습니다. 조금전까지 우리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던 <法(=위사야, =경계)>이
'오해가 풀리는 그 순간'에 <귀신같이> 사라지던 경험을 많이 해 보셨을 것입니다. ㅋㅋㅋ.
@아위자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댓글>로는 안 되겠습니다. <무봉탑>을 설명해야 하는데...
여러분께서 검색창에 [벽암록 무봉탑]이라고 치셔서 '무봉탑'이라는 '화두'를 읽어 보십시오.
그 '화두'의 '무봉탑'이 바로 <法(dhamma)>을 말하는 것입니다. ㅋㅋ
@아위자 <不二>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안으로(아자땅)'와 '밖으로(바히다)'가
어떠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기에 <연기>에 그러한 것이 없다고 망말을 하시오?
<선법의 集>도 <'集'이라는 연기>라고 그렇게 설명하였것만!
<대념처경>에 <'안으로(아자땅)' 集하는 法을 수관하며 머물고>, <'밖으로(바히다)'集하는 法을 수관하며 머물고>, <'안으로(아자땅)''밖으로(바히다)'集하는 法을 수관하며 머문다>라고 설해집니다.
요즈음은 <동네 할머니들>도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 것이 있다'라고 알고 있는 것을
'환희봉행'님만 모르고 있으니.......... <동네 할머니들>이 "이 놈 또 껌씹는 소리하네!"라고 잔소리하는 거요.
그건 그렇고, 인터넷에서 <무봉탑>은 찾아 보셨수?
그 걸 <왜 찾아 보라고 하느냐?> ..... 하면 ........ <'안으로(아자땅)'와 '밖으로(바히다)'>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무봉탑>이라는 것이 바로 <'안으로(아자땅)'와 '밖으로(바히다)'>를
연결 시키고 있는 탑이요!
@아위자 禪窓이라는 말.
@아위자 <'안으로(아자땅)'라는 영역에 있는 것들[=탐진치 등등]>도 <法>으로 보고,
<'밖으로(바히다)'>'라는 영역에 있는 것들[=명색 등등]>도 <法>으로 보고,
관찰하다가 ........ 그것들을 꿰뚫게 되면 ..... <반야>가 생겨난 것!
@아위자 대상을 '명색'으로 보고, 대상에서 '명색'만을 보고서 아무리
<공하니 공하고 공하도다!>라고 '허무주의'[=空病이라고 함. 입원해야 할 정도의 환자라는 말]에
빠져 보아도 <반야>는 요원한 것임.
@歡喜奉行 <마음이 어리니 하는 짓이 다 어리다.>
토정비결 좀 보시구 똥누쇼! 정초인데..............혹시 아쇼........
토정비결에 <올 해에는 로또가 당첨되느니라>라고 나올지..........
@아위자 아니면 <'이쁜년' 만나서 복상사하게 되느니라>라고 나와도
<'이쁜년'>만 눈에 들어와 ......... "므하하하"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오.
@歡喜奉行 헉! 방점을 <복상사>에 찍어서 읽어야만 '12연기'가 보인다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歡喜奉行 <먹고 죽곘다는데야> ............<마음이 어리니 하는 짓이 다 어리다.>라는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음이로다.
@歡喜奉行 디지더라도 <오온을 법당으로 만들어 놓고> 디져야 ..............하는디......
<죽음(=오온의 붕괴)은 내 알 바 아니다>라고 <형이상학>만 하고 있으니.......
차라리 <허리하학>을 권장해 보는 것임. 혹시 '약'이 될까 싶어서.
<허리하학>에는 '이쁜년'이 최고임. ........<먹고 죽으쇼(=오온의 붕괴를 방치하시라는 말)>!
@歡喜奉行 근디......... <空> 좀 알기위해 '오온'이 필요한 것 아님?
@歡喜奉行 호~~~~~~~~~~ 삐지셨구나!
그려~~ 그려~~ '환희봉행'님이 <무조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