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조(太祖) 4년(1395)부터 도성(都城)쌓기에 들어갔다. 도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과 그 사이사이에 4개의 작은 문을 만들었다. 성곽의 길이는 당시 영조척(營造尺)으로 59,500척(약 17km)에 달했다.
창의문(彰義門)은 성곽의 서북에 자리하였는데, 오늘날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자리한지라 지금도 이 고개를 '창의문 고개'또는 '자하문(紫霞門) 고개'라 부르고 있다.
북문 격인 숙청문과 서문 격인 돈의문 사이에 자리한 창의문을 일명 '자하문'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조 때 이 일대를 개성의 자하동처럼 골이 깊고 물과 바위가 아름다워 '자핫골'이라 부른데서 비롯된다.
서울에서 4개의 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그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창의문은 광희문이나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에 비해 그 규모가 훨씬 작다. 그러나 성곽을 구성하는 문인만큼 쌓아올린 축대에선 매우 탄탄한 기풍을 느낀다.
서울의 육조거리(세종로)를 빠져나와 바로 청운동 골짜기에 접어들어 허위허위 이 자하문 고개에 올라서서 아마득한 도성의 장안의 정경을 뒤돌아 보고는 창의문을 나서면 고양(高陽), 양주(楊州) 방면으로 줄달음치던 길이 이 문과 통했던 것이다.
한때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문루에는 나무로 만든 큰 닭이 걸리기도 했다. 이는 창의문 밖의 지형이 마치 지네(百足蟲)와 흡사하다 하여 그 기세를 억누르기 위해 지네의 상극인 닭을 걸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또 태종(太宗) 16년(1416)에는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설에 따라 폐문되었다가 중종(中宗)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인조반종'(仁祖反政)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인조반종은 광해군(光海君) 15년(1623)에 이귀 등 의군(義軍:서인)이 불의에 항거, 창의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들어가 광해군과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당시 능양군 종(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政變)이다.
이귀, 김유, 김자겸, 이괄 등의 의군은 반정계획이 사전에 일부 누설되었음에도 예정대로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1623년 3월12일 밤 홍제원에서부터 달려와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는 창덕궁에 들이닥친 끝에 반정에 성공하였다.
뒷날 영조(英祖:1741)는 이 정변을 기념하기 위해 창의문의 성문과 문루를 개축하여 반정공신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게 하였는데 서쪽 벽에는 지금도 그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이곳에는 1968년 1월21일 북한에서 밀파한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 침투를 막기위해 최후로 이를 검문하다 의롭게 순직한 당시 종로경찰서장 고 최규식 경무관의 공적비가 서있다.
현재 창의문은 6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자동차 매연에 시달리는 숭례문, 흥인지문과는 달리 아직도 의(義)로 얼룩진 역사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으니 '창의문'(彰義門)이란 '의'(義) 자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