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경주 일원 답사 자료(‘24. 8. 20) 1. 덕동문화마을 300여 년 넘게 이어온 여강이씨 향단파 집성촌으로 문중과 관련된 문화유산이 함께 형성되어 있다. 2006년 산림청, 생명의 숲, 유한킴벌리에서 공동으로 실시한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대상(생명상)에 ‘덕동마을숲’이 선정되기도 하였다. 특히, 마을의 수구막이 숲으로 조성된 덕동숲은 용계정과 함께 그 가치를 이미 인정받아 2011년 8월에 국가지정 자연유산인 명승 '포항 용계정과 덕동숲'으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는 1988년 3월 1일 교감의 첫 부임지가 포항시 기서면 기서초등학교라서 이곳 덕동과는 이웃 면이라 이따금 와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문화마을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덕동계곡으로 유명하였다. 그리고 2022. 8. 16에 우리 답사팀이 죽장면 상옥에 있는 경상북도 수목원을 탐방하려 갈 때도 이곳을 경유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덕동마을은 경북 포항시 기북면 덕동으로 조선 선조 때 북평사(정6품 문관)를 지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1565~1624)가 임진왜란 때 피란처로 처음 자리를 잡았다.
왜란이 끝나고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인 사의당(四宜堂 : 사계절 따라 마땅하다. 곧 사계절 모두 경치가 빼어나다.) 이강(李堈)에게 집과 재산을 넘겨주고 고향인 진주로 돌아간다. 이강은 회재 이언적의 동생 농재 이언괄의 4대손으로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50리 떨어진 이곳에 정착해 400여 년간 대를 잇는 여강이씨 집성촌의 토대를 마련했다. 포항의 북쪽, 동서로는 비학산과 침곡산, 남북으로는 운주산과 성법령 등 700고지 이상의 준령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분지에 덕동마을이 있다. 한산한 도로와 맞닿은 계류를 건너면 동구의 솔숲이다. 숲 그늘에 '문화부 지정 문화마을 덕동마을' 표지석이 밝다.
회계 이언적의 동생인 이언괄은 자가 자용(子容)이고, 호는 농재(聾齋)이다. 아버지는 번(蕃)이고, 어머니는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이언괄의 호는 형인 이언적의 편지에서 비롯하였다. ‘일체의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어리석고 귀먹은 사람처럼 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호를 농재(聾齋)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학문을 닦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덕동마을 표지석
덕동(德洞)은 '덕 있는 인물이 많다'는 의미의 마을이다. 마을의 옛 이름은 '송을곡(松乙谷)', 즉 '소나무 골짜기'였다. 임진왜란 때 '송(松)자가 든 땅에서는 왜병이 패퇴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당시 의병장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에게 모든 재산을 물러받은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堈)은 삼전도의 굴욕 이후 덕동마을에 은둔했고, 지금까지 이 마을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송계숲
마을 동쪽의 솔숲을 '송계숲'이라 불린다. '송계(松契)'는 '소나무계'다. 송계숲은 논 두 마지기와 밭 여섯 마지기를 소유하고 있다. 마을 문중에서 숲에게 내준 땅이다. 마을 사람들은 논과 밭을 경작해 얻는 수익으로 이 숲을 관리하고, 남은 돈은 마을 어른들의 회갑연이나 동네의 큰 일에 사용하였다. 마을에는 송계숲의 공동관리 사항을 기록한 송계부(松契簿)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송계숲 너머 커다란 건물은 포항전통문화체험관이다. 원래는 덕동초등학교였다.
안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덕동민속전시관이 있다. 마을의 내력을 담은 고문서와 200년이 넘은 사주단자, 생활 용구, 농기구 등 대대로 전해 내려온 2천여 점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길가에 '문화마을' '환경친화마을' '기록사랑마을'이라는 소개가 천연스럽다. 계곡은 용계천이다. 마을의 동쪽 가장자리를 남북으로 흐른다. 또르랑 또르랑 소리를 내면서. 작은 물길이 마을안길을 가로질러 용계천으로 흘러든다. 서천이다. 콸콸 작은 것이 소리도 우렁차다.
용계천
서천과 용계천이 만나는 곳에 무지개다리인 '통허교(通虛橋)'가 놓여 있다. 다리 너머에는 '용계정(龍溪亭)'이 자리한다. 규모가 꽤 큰 용계정은 사의당 이강이 1687년에 착공해 손자 대에 완성했다고 한다. 후원은 용계정과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고 마을안길에 연접해 있다. 덕동숲
향나무·배롱나무 등 100여 그루의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정원이다. 옛날에는 세덕사(世德祠)를 덕연(德淵) 마을에 세워 찬성공(贊成公) 이번(이언적의 부친)을 주향(主享)하고 농재공(聾齋公) 이언괄을 배향(配享)한 '세덕사(世德祠)'라는 서원이 있었고, 당시 용계정은 서원의 강당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종 시절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 서원의 다른 건물들과 용계정을 구분 짓는 담장을 쌓았다. 그렇게 세덕사는 터만 남았고 용계정은 화를 면했다.
용계정
용계정은 용계천을 내다보고 있다. 덕동 사람들은 용계천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곳곳마다 이름을 지어주며, '덕연구곡(德淵九曲)'이라 했다. 덕연계곡 용계정과 마주 보는 암벽은 '연어대(鳶魚臺)'다. 시경에 '솔개는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뛰어오른다.'는 뜻이다. 연어대 상류에는 두 물길이 하나 되는 '합류대(合流臺)'가 있고, 대(臺) 아래에는 구름이 피어오르는 '운등연(雲騰淵)'이 있다. 연어대(鳶魚臺)
이외에도 용계정 서쪽에서 콸콸 쏟아지는 '서천폭포(西川瀑布)', 물이 통해 흐르는 연못인 '수통연(水通淵)', 속세를 멀리한 너른 바위 '막애대(邈埃臺)', 용이 누워 있는 바위 '와룡암(臥龍巖)', 가래로 떠서 들어낸 곳 같은 '삽연(揷淵)', 섬 같은 소나무 숲인 ‘섬솔밭(島松)’이 물길 따라 경영되어 있다. 호산지당과 섬솔밭(島松)
연어대 위에서 정자와 마주하는 소나무 숲은 ‘정계(亭契)숲’이다. 숲과 정자와 계류를 가르며 새들이 비명을 지른다. 소쇄하다.
정계(亭契)숲
용계정의 동쪽 협문 앞에 녹음이 짙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회화나무, 굴참나무가 으리으리하게 높다. 그 아래로 환한 연못이 숲에 둘러싸여 있다. 연못은 삽연, 숲은 '섬솔밭'이다. 안길에서 연못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은 지금 출입 금지이다. 삽연은 원래 합류대의 한쪽 지류가 흐르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경 물길을 메우고 학당을 세웠다.
연못은 20년간 학당의 운동장이었다가 1974년에 다시 연못이 되었다. 삽연은 산세를 보호하는 못이라는 의미로 '호산지당(護山池塘)'이라고도 한다. 송계숲과 정계숲, 섬솔밭은 모두 덕동의 숲이다. 덕동숲은 용계정과 함께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삽연이 내려다보이는 길가에 애은당(愛隱堂) 고택이 있다. 농포 정문부의 가족들이 임진왜란 때 피란처로 사용한 집이다. 이강은 이 집을 물려받은 뒤 동생인 이덕소(李德邵)에게 주었다고 한다. 경북도민속문화재 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애은당(愛隱堂) 고택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여연당(與然堂) 고택이 있다. 이강은 이 집을 둘째 아들인 이덕령에게 주었다고 한다. 경북도민속문화재 제158호다.
여연당(與然堂) 고택 여연당 옆에는 사우당(四友堂) 고택이 있다. '사계절을 벗하며'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집, 경북도 민속자료 제81호인 이강의 집이다. 사우당(四友堂) 고택
사우당 옆에는 1947년에 상량된 근대한옥이 자리한다. 등록문화재 제373호다. 이들 앞에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639호인 '덕계서당(德溪書堂)'이 있다. 여강이씨 16대조인 덕삼(德三) 공을 기리는 별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다. 일단의 마을을 벗어나면 산으로 둘러싸인 하늘 너른 들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땅을 실감한다. 두어 채의 집들이 논밭 속에 서 있다
덕계서당
사우당 시판
원운(原韻 : 次韻할 때에 韻字를 따서 짓도록 하는 漢詩의 원문) 四時光景與誰同(사시풍경여수동) 사계절 풍경을 누구와 함께 할꼬? 愛玩亭前花樹中(애완정전화수중) 정자 앞 꽃나무 속에서 사랑하며 즐기네. 欣欣向榮無世態(흔흔향영무세태) 꽃을 향한 기쁨은 세상에서 때가 없으니, 莫如爲友坐春風(막여위우좌춘풍) 봄바람을 벗하여 앉아 있음만 못하리.
*7언절구 : 칠언은 일곱 자란 뜻이고, 절구는 짧게 잘린 구절이란 뜻으로, 4구절을 뜻함.
호산지당 시비 山强水弱築斯池(산강수약축사지) 산세는 강하나 수세가 약하여 이 연못을 축조하니, 洞壑風光復有奇(동학풍광복유기) 마을 골짜기의 풍광이 다시 기이하도다. 積歲經營成宿志(적세경영성숙지) 긴 세월 경영하여 묵은 뜻 이루었으니, 將來餘慶更新期(장래여경경신기) 장차 남은 경사가 다시 올 새로운 때가 있을 것이네.
疱舍(포사: 관리사무실) : 여드름 포, 천연두 포
*幽居吟(유거음) 그윽한 처소에서 읊다. 臨溪小屋獨閒居(임계소옥독한거)ㅡ 시냇가 작은 집에 홀로 한가로이 거처하니 暖日輕風興有餘(난일경풍흥유여)ㅡ 따뜻한 햇살에 부드러운 바람 흥이 넉넉하네. 山鳥來窺人不到(산조래규인부도)ㅡ 산새가 와서 엿볼 뿐 사람은 오지 않아 柳陰移席坐看書(유음이석좌간서)ㅡ 버들 그늘로 자리 옮겨 책을 읽노라.
冶隱 吉再의 閑居(한가하게 살다) 詩 비슷함 臨溪茅屋獨閑居(임계모옥독한거)- 시냇가 초가집에 홀로 한가로이 사노라니,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달 밝고 바람 맑아 흥취 가득타. 外客不來山鳥語(외객불래산조어)- 오는 손은 없고 산새 지저귀니, 移床竹塢臥看書(이상죽오와간서)- 대밭으로 평상 옮겨 쉬엄쉬엄 글을 읽노라.
2. 이가리 닻 전망대 포항시 북구 청하면 이가리(二加里) 해변가에 있는 닻 전망대는 항구 도시인 포항의 특색에 걸맞게 전망대이다. 푸른 해송과 아름다운 이가리 간이해수욕장 인근에 선박을 정착시키는 닻을 형상화한 전망대로 높이 10m, 길이 102m 규모로 푸른 해송과 아름다운 이가리 간이해수욕장이 어우러진 모습과 시원스레 펼쳐진 포항의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닻을 형상화한 전망대
마을이 동해와 맞닿아 있으며 곳곳에 저수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백암동, 이가리 등이 있다. 백암동은 백암이 보이는 언덕에 마을이 처음 형성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서편 언덕 위에 황새마을이란 작은 촌락이 있었는데, 송림 속에 황새가 깃들던 데서 붙은 이름이다. 이가리 닻 전망대는 JTBC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 ‘런온’의 주요 촬영 장소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명소다.
'이가리(二加里)'라는 마을 이름은 조금 생소하고 특이하다. 마을의 유래는 두 가지 설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옛날 청진과 백암의 갈림길에 두 명의 기생이 터를 잡고, 오래도록 마을을 개척하면서 살았다 하여 지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도씨와 김씨 두 가문이 길을 사이에 두고 각각 집성촌을 일구었는데, 차츰 번성하면서 서로 합하여 한마을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가리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정월 보름이면 김씨와 도씨 두 가문의 신위에 제사를 지내고 4년마다 용왕제 굿을 한다.
청하면 이가리 닻 전망대
이가리 닻 전망대는 동해안 일출 명소로도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안전상의 문제로 이가리 닻 전망대 위에서는 일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강풍, 해일 등 특이사항 발생 시를 제외하고는 이가리 닻 운영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하절기 오후 8시)까지만 운영하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일출 사진은 해안가 마을에서 찍어야 한다. 이곳이 전망대 위보다 사진이 더 예쁘게 잘 나온다.
3. 경북산림환경연구소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소는 신라 천 년의 시간을 흐르는 경주 남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한 산림환경조사, 산림병해충의 친환경 방제, 우량 수목 등 식물 유전자원 보존 및 증식, 천연기념물 후계목의 증식과 보존, 병해충을 방제 등 산림보호를 위한 연구 기관이다. 특히 지방 정원, 숲 체험원 조성으로 생태휴양공간을 마련하고 산림의 효율적인 경영과 보호를 위한 임도 및 사방사업을 수행하는 산림 전문 연구기관이다.
경북산림환경연구원
오랜 세월 가꾸어 온 아름다운 산림자원을 보기 위해 해마다 본 연구원을 찾아오는 20만 명가량의 관람객에게 2023년 4월 [경북천년숲정원] 을 개장하였다. 숲공원으로 지자체가 조성하고 관리하는 국가 정원으로는 국내 5번째이고, 경북에서는 첫 번째 숲 정원이다. 경북천연숲정원 입구
경북천년숲정원은 다양한 테마로 조성된 정원과 오솔길. 메타세콰이어 숲길, 거울숲, 외나무다리 등 이 있으며, 각 구역별 계절별 꽃을 피우는 나무와 야생화들이 식재되어 있어 각기 다른 공간적 특징을 지니며 계절에 따른 변화도 즐길 수 있다. 식물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안내문도 잘 작성되어 있어 아이들의 교육현장으로도 좋다. 숲해설 프로그램과 유아 숲체험원 등을 운영하며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접수를 한다.
4. 박목월 생가 시인이나 작가들은 고유한 운율로 저마다의 정서를 표현한다. 시인 박목월 (1915~1978)은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고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라베라 부르면 나는 앞이 콱 막히도록 좋았다"라며 자신의 고장 말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냈다.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된 박목월 본명은 박영종이며, 그의 고향이 경주이다. 건천읍 모량리 571번지에서 태어나 20대 대부분을 경주에서 보내면서 문학 활동을 벌였다. 그의 문학작품 속에 경상도, 경주가 속속히 배어 있음은 물론이다. 생가는 1980년대에 헐리고, 그 자리에 다른 집이 지어졌으나, 2014년 6월 목월 생가가 복원되었다. 집 앞에 목월 생가라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그러나 요즘 찾는 사람이 적어서인지 매주 월 화요일은 휴관이다. 박목월 생가
그의 필명은 그가 좋아했던 수주(樹州 : 부천의 고려 시대 지명) 변영로의 호(號)에서 '수(樹)' 자에 포함된 목(木)과 김소월의 이름(素月)에서 월(月)을 따 지은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시인 박목월 생가 앞의 입상
민주화운동의 물결 속에서 기존의 권위와 질서가 급격하게 해체되었고, 거칠고 단순한 정치 이념의 논리가 지적 예술적 사유를 억압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목월이 지녔던 기존의 문학적 권위는 해체의 대상이었으며, 목월의 시가 지녔던 여린 서정성과 내면성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술 익는 마을을 노래한 현실 도피적 시인 또는 반민중적 “음풍농월(吟風弄月)”의 대표적 시인이라는 비난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대체로 박목월의 초기 시가 한국적 산촌의 정경을 묘사하는 정서가 두드러졌다고 하겠다. "나그네"가 그러하고 "청노루" 또한 그러하다. 청노루는 사실 없는 것이다. 목월이 만들어 낸 말이다. 작고 시인들은 아름다운 우리 말을 만들어 냈다. 승무의 “나빌레라”는 조지훈이 만든 말이고, 찬 서리가 내릴 무렵의 까마귀인 “서리까마귀”는 정지용이 만든 말이고, “즈려밟고”는 김소월이 만든 말이다.
이처럼 우리 시인들은 모국어를 창조했다. 박목월의 초기 시들은 향토적인 시심을 안고 경상도의 정서를 단조로운 민요적 가락으로 잘 표현했다고 하겠다. 그래서 시인들이 표현한 시어는 토속적인 우리말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 재주 특이하다.
*정지용의 향수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우짖고 : 울며 지저귀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박목월의 '청노루'와 '울어 예는' :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울어 예는(울면 가는) *소월의 진달래꽃 : ‘사뿐히 즈려밟고(지려밟고 : 내리밟고)’ 가시옵소서.
*목월의 작품 세계 평가 정지용의 평가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은 모두 정지용이 '문장'지 추천하여 시인으로 등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정지용은 이들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정지용이 목월의 시를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 소월이 툭툭 불거지는 삭주귀성조(朔州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아. 민요풍에서 시에 발전하기까지 목월의 고심이 더 크다.
소월이 천재적이요, 독창적이었던 것이 신경 감각 묘사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민요”에 시종하고 말았더니, 목월이 요적(謠的) 데생 연습에서 시까지의 작문에는 요(謠)가 머뭇거리고 있다. 요적 수사(修辭)를 충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바로 한국시이다. 본명 박영종, 이승훈 교수, 시인 나태주, 배우 윤여정도 그의 제자이다. 부정적 평가 목월의 시는 80년대를 기점으로 비판을 받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이는 그의 시가 가진 특유의 여린 서정성과 내면성 때문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그의 시는 부정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탈권위주의를 표방하는 시대적 경향은 당시 상당한 문학적 권위를 인정받던 목월의 시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긍정적 측면 한편 목월의 시는 그 특유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순수시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그의 시에 보이는 미학적인 측면은 한국의 현대 시문학을 풍성하게 해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시 후기작에는 그가 주목하지 않았던 일상의 삶에 대한 성찰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가정〉은 시인이며 동시에 한 가정의 가장이 하는 고민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기독교적 색채 목월의 시문학의 한 축이 토속적이고 서정적인 면이라면, 다른 한 축은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둔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유고시집인 《크고 부드러운 손》에는 절대자에 의존하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등장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어머니의 신앙과 관계된 추억들이 간혹 등장하고 있다.
박목월 애정사 "사람은 사랑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말했고, 18세기 영국의 낭망파 시인 바이런은 "시인이 되려면 사랑에 빠지거나 불행해져야 한다"고 했다. 왜 인류는 시인을 낳고 시인은 시를 쓰며 사람들은 시를 읽는가라는 물음에 가장 가까운 대답은 "시 속에 사랑이 있으니깐"일 것이다.
1952년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 서울의 어느 대학교 국문학과 교수가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가정과 명예를 모두 버리고 두 사람은 종적을 감췄다. 그리하여 교수와 19세 여대생 간의 세기적인 로맨스라고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의 부인(유익순)은 남편이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다. 그녀는 한걸음에 제주도를 달려갔다. 마침 남편인 교수와 도피해온 여제자가 집 앞 개울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지 가난하게 살아온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부인은 참담한 심정으로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어 그 여자에게 입혀준다.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돈 봉투마져 손에 쥐어주며 겨울을 따습게 보내라며 말한 뒤, 그 길로 발길을 돌렸다. 부인의 그런 모습에 그 여인과 남편인 교수(목월)은 감동으로 목이 메고 가슴이 아리지만 서로 헤어지기로 한다. 그리고 교수(목월)은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시를 지어 사랑하는 애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시가 바로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를 담은 『이별의 노래 」이다. 이 시를 김성태 작곡가가 곡을 붙여 지은 것이 또한 「이별의 노래」로 우리나라의 서정적인 명가곡이 됩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
5. 동리목월 문학관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406-3 (진현동 550-1)에 있는 공립문학관으로 경주 출신의 소설가 김동리와 시인 박목월을 기리기 위한 문학관이다. 경주 불국사 일주문 맞은편에 있다. 경주시와 동리목월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2006년 3월 24일 개관하였다. 13,847㎡ 부지 위에 건축 전체면적 1,543㎡의 전통 골기와 2층 건물로 지어졌다. 1층에는 영상실, 창작 교실, 자료실이 있으며, 2층 전시실에는 유족으로부터 기증, 위탁받은 저서와 7천여 종의 장서, 육필원고 포함 문학 자료 1,500점, 생활 유품 250여 점, 애장품 3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한 개의 전시관 안에 왼쪽은 김동리 문학관, 오른쪽은 박목월 문학관으로 구성, 배치되어 있다. 문학관 개관 이후 매해 동리 목월 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관람료는 성인 1,500원, 청소년 1,000원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하며, 오전 9시에 문을 열어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 동리목월문학관
수당(修堂) 정정화(鄭靖和, 1900~1991)는 구한말 문신이자 임정 고문을 지낸 독립운동가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의 며느리다.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시아버지와 남편인 한국독립당 대표 김의한을 따라 임정의 일원이 되었고, 해방을 맞아 국내로 돌아올 때까지 임정과 함께했다. 그녀는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으로 일하는 등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이었다. 김구 주석이 상해임시정부에 있을 때 이 글을 정정화 여사에게 친필로 써서 주었다고 한다. 그 문장과 뜻은 이러하다. ‘춘풍대아 능용물(春風大雅 能容物) 추수문장 불염진’(秋水文章 不染塵)‘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능히 포용하고,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즉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면 춘풍(春風)처럼 모두를 품어 안아야 하고, 학자나 문인, 언론인의 글은 추수(秋水)처럼 차고 맑아 사욕이 없어야 한다.
이는 중국 북송시대 형제 학자 이정자(二程子) 정명도, 정이천의 인품과 학덕을 칭송하는 시다. 형 정명도를 ‘春風大雅---’에, 동생 정이천을 ‘秋水文章-----’비유한 글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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