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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13-15(309) 십자가만을 자랑합시다 2023. 9. 17.
요즈음에도 방송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TV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집안에 간직하고 있었던 진귀한 물품들을 가지고 나와서 감정을 받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집안 구석에 쳐 박아 놓았던 항아리가 진짜 고려 항아리로 판별되어 몇 억짜리 금액이 되고, 진짜라고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단돈 몇 만원도 하지 않는 가짜인 것도 밝혀집니다. 이런 반전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이 프로그램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처럼 여기는 한문 문서를 들고 나왔습니다. 조상 대대로 이어지는 진품 문서이고 이 문서가 무엇이며 가격이 얼마 하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 남자는 이 문서가 가문이 자랑하는 가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문서를 감정한 결과 깜짝 놀랄만한 사실이 발견됩니다. 한문으로 가득 쓰여진 그 문서가 바로 “집안 대대로 이어졌던 노비문서”였다는 사실입니다.
졸지에 그 사람은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노비였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자랑거리를 알지 못하고 자랑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자녀자랑, 취직자랑, 돈 자랑, 지식자랑,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헛된 것입니다. 자랑은 잘 못하다보면 자랑이 아니라 수치가 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우스개로 도는 이야기 중에 교인의 종류를 말하는 내용입니다.<달구지 교인>이 있습니다. 뒤에서 밀어줘야 비로소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는 교인입니다. <연 교인>이 있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실을 붙들어 주지 않으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교인입니다. <풍선 교인>이 있습니다. 잔뜩 부풀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교인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 교인>이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교인입니다. <시험관 교인>이 있습니다. 설교시간만 되면 점수를 매기는 교인입니다. <공작 교인>이 있습니다. 교회에 올 때마다 활짝 펼 자랑거리를 가지고 와서 자랑하기 시작하는 교인입니다. <묵상 교인>이 있습니다. 설교를 시작했다 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교인입니다.
왜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을 구분할까요? 그것은 자랑거리가 뭔지, 언제 자랑을 하고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를 구분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얍 4:16에는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세상의 허탄한 자랑이 다 악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간사회에는 자랑이 많습니다. 맛 자랑도 있고, 멋 자랑도 있고, 노래자랑도 있고, 몸매 자랑도 있고, 솜씨 자랑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자랑들은 뒤돌아서면 아무 것도 아니고 심지어 후회할 것들 천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겸손한 사람은 자랑할 것이 하나님께만 있고, 나에게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렘 9:23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 지혜를 자랑하고, 용사가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고, 부자가 자신의 부함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허풍이 아니고 진실이기에 당당한 자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례미야 선지자는 그런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 하면, 이런 자랑은 성도가 나타낼 덕스러운 자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조금 많이 가졌다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와 술을 마시다 술김에 자신의 과거 범죄사실을 자랑하다가 경찰에 검거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다가 친구가 예전에 자신이 잘 놀았던 사람이라고 자랑하자, “그것도 자랑이냐?” 이러면서 자신의 과거 숨겨진 범죄를 자랑하다가 살인사건을 술김에 발설했고 결국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랑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시 52:1에는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면 악한 계획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면 악한 계획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랑은 다 헛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하고 있는 이런 십자가의 자랑이 우리 덕민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자랑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갈 6:14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이전에 세상의 영광, 인간적인 성공 때문에 십자가를 멸시하고 부정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것들, 세상의 명예, 세상의 물질, 세상의 지식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목숨을 걸고 얻으려 하고 지키려 하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사람들은 불철주야 노력하고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목숨을 걸고 얻으려고 했던 세상의 것, 그리고 가장 사랑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제가 설교 초두에 말씀드렸듯이 분별하지 아니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제 것인 양 으스대면서 자랑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인 앞에서 종이 주인의 것을 가지고 자기의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종의 것은 다 주인의 것인데, 종이 자기의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모두 자기 돈이라고 자랑하고, 어리석은 군왕은 모든 권력이 자기 것이라 자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 모든 것이 허사이고 어리석은 일에 불과합니다.
바울의 자랑거리는 오직 십자가입니다. 바울의 자랑거리는 자신의 약함입니다. 바울은 사실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성경에 보면 건강은 좀 좋지 않았지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많은 유산을 가지고 있었고, 좋은 스승 아래서 교육을 받아 지식으로 대가였고, 유대의 율법적 지위도 상당하여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요즈음에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나면 다들 자랑하기에 바쁜 세상입니다. 여성들은 미모를 자랑하고, S라인이라는 체형을 자랑합니다. 남성들은 근육을 자랑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대학에 들어가도 또 자랑합니다.
하지만 성도의 자랑거리는 오로지 십자가뿐이요, 십자가와 고난을 자랑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나요? 그것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찬송 가운데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나를 죄에서 구속한 주님의 십자가만 보이면 참 신앙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를 다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의 주님만 우리 눈에 보이기를 바랍니다.
종편 방송에 나온 대학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아주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역사에 얽힌 대부분의 숫자들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끄집어 냅니다. 갑오경장이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조선시대의 개혁운동이라는 것도 말합니다. 우리 나라 역사만 정확한 것이 아니라, 잔 다르크의 출생이 1412년 1월 6일, 프랑스혁명이 1789년 7월 14일, 러시아혁명이 1917년 10월 26일, 명성왕후의 출생이 1851년, 시해가 1895년이라고 자신의 기억력을 자랑합니다. 저도 대학원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한터이라 세계사에 대한 숫자는 아주 민감하거든요. 그 분의 비상한 기억력이 어마나 부러웠던지요. 그런데 한 출연자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아내의 생일이 며칠인지 아세요?” 그러자 그 분은 아내의 생일을 제대로 알아 맞추지 못해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자랑합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자랑합니다. 살기 좋아졌다고 자랑합니다. 나의 용모를 자랑합니다. 나의 출세를 자랑합니다. 내가 가진 물질을 자랑합니다. 나의 지식을 자랑합니다. 나의 명예를 자랑합니다. 나의 자식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세상과 나를 다 헛된 것을 알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십자가만 드러나게 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이 우리도 자랑할 것이 십자가뿐이기를 바랍니다.
2. 새로 지으심을 받은 십자가 때문입니다.
갈 6:15에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새로 지으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할례가 사람을 새로 지어줍니까? 아닙니다! 율법이 사람을 새로 지어줍니까? 아닙니다! 지식이 사람을 새로 지어줍니까? 아닙니다! 사람의 지위가 사람을 새롭게 지어줍니까? 아닙니다!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만들어 주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할례나 무할례. 이런 행위는 십자가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례나 무할례는 구원도 생명도 아닙니다. 단지 율법적 의식이며 상징에 불과합니다. 할례는 구원의 표이지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우리의 세례도 할례와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구원의 표이지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고전 7:19에는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 즉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할례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 때문에 할례가 가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떠난 할례는 미신적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 때문에 세례가 가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난 세례는 미신적 해위에 불과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지만, 예수님이 없는 성찬식은 미신이고, 십자가가 없는 성찬식 또한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으면서 세례 받은 것을 자랑하고, 성찬에 참여한 것을 자랑하고, 교회의 중직자인 것을 자랑하고, 자신의 지위를 자랑하는 것은 다 쓸모없는 자랑입니다. 새로 지음 받은 것 외에 어떤 것도 참 의미가 없습니다.
“지으심을 받은”이란 말은 헬라어로 <크티시스>라는 말인데, 만드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에서“피조물(크티스마)”라는 단어가 만들어 졌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새로 지음을 받는 곳입니다. 왜요? 십자가는 죽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는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없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부활 때문에 우리에는 소망이며, 하나님께는 영광입니다.
◎고후 5:17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갑니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오로지 십자가를 통해서 들어갑니다. 내가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전에 국내 최대의 유리 회사인“한국유리 공장”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모래를 잔뜩 쌓아두었습니다. 모래를 가지고 유리를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깨진 유리조각과 헌병들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유리조각과 헌병에는 더러운 먼지와 이물질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가자 말자 모든 유리들이 다 녹으면서 더러운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전의 더러운 이물질도 깨끗이 없어지고, 깨지고 찌그러진 모습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문자 그대로 거듭난 것입니다.
십자가가 나를 새로 지었다는 말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십자가가 나의 더러운 것을 다 씻고, 완전히 내 모습을 죽여 질적으로 외형적으로 새것으로 태어나게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아무리 죄가 쌓이고 더러워도, 아무리 모습이 망가져도 새롭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빙점’의 작가로 익히 알려진 미우라 아야코를 예수 믿게 한 인물이 있습니다. 마에가와 다다시라는 분입니다. 다다시가 아야코에게 복음을 전하자 아야코는 말합니다.
“다다시씨, 나는 정말 크리스천이 싫어요. 아니 그게 뭐예요? 성인군자처럼. 나는 당신의 설교를 들을 마음이 조금도 없어요. 잘난 척 하기는? 크리스천들은 정신적 귀족이에요. 우리를 불쌍한 인간으로 취급하며 위에서 내려다보듯 하잖아요.”
다다시는 아야코가 예수 믿기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아야코가 건강하게 살아주기를 얼마나 열심히 빌었는지 몰라. 아야코만 살 수 있다면 내 생명까지 줄 수 있단 말이야”. 그 때 아야코는 결핵성 척추 카리에스를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결국 다다시의 끈질긴 사랑은 아야코를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자신은 35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다다시가 세상을 떠난 다음 아야코는 1952년 7월에 병상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으로 많은 작품을 남기고 1999년 10월 12일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롬 4:2에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할례나, 율법이나, 행위나 어떤 것도 자랑이 아닙니다. 십자가만이 구원받은 자의 자랑입니다. 우리도 이 자랑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 만을 부끄러워하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100명만 있으면 나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죄를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 멀리 하는 사람. 그리고 오로지 십자가만 자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100명만 있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웨슬레는 말하였습니다.
웨슬레의 말을 듣다 보면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가 생각납니다. 저는 의인 10명의 숫자를 채우지 못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인 한명만이 있었더라도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명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세상을 자랑하는 자는 세상을 타락시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세상 자랑거리는 성도의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을 것들입니다.
“참 군인은 갑옷을 입을 때에 자랑하지 아니하고 갑옷을 벗을 때에 자랑하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마지막에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옷을 다 벗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비로소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승승장구할 때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로 새로 지음 받은 새 사람됨을 감사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십자가 자랑꾼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