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육현찬》
영성(천안)의 열 가구, 유려한 유풍.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 진실한 유공이네. 호랑이를 길들이고 샘을 솟게 하니, 눈 대나무 순과 얼음 잉어, 고인들이 어려워한 것이라. 공께서 실로 겸비하여 빛나니, 공이 생전에, 위대한 선철이 되셨고, 그 문을 공경하게 하셨네.
우정랑 유공 연겸
아름다운 산을 두고, 옥이 빛나네. 아름다운 군자, 숨으며 지내네. 진동의 초록, 동양의 탄식. 비록 빈골에 몸이 있으나, 광란을 막으니. 잠재된 빛이 드러나지 않으나, 그 아름다움을 누가 알리. 하늘이 준 작위, 효도와 의라 하네.
우분곡 이공 승벽
맑은 바람의 대, 그늘진 정자. 우뚝한 산, 맑은 물. 그 가운데 시냇물이 있고, 훌륭한 사람이 정직하네. 유경이 전해져 내려오고, 학문이 문을 가득 채우네. 깊은 뜻을 품고, 글을 짓네. 맑은 향기를 마시고, 오래도록 향기롭네.
우희암 현공 덕승
삼강이 풀리고, 해와 별이 어두운 때. 공은 이때, 굳은 바위같이 정직했네. 큰 법도가 오르고, 큰 집이 넓게 용서하니. 공은 이때, 큰 새가 점점 좋아졌네. 넓은 들판과 언덕. 앞선 현인이 말했네. 이는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네.
우사봉 서공 정연
양추의 한 권, 해와 별이 우리의 동쪽. 누가 이를 펼쳤나, 대로의 공이라. 대로가 특별히 기록하였으니, 이생이 있다 말했네. 세 학자가 함께 명성을 세웠네. 북원의 정원을 바라보며, 구름의 단을 이룩했네. 공과 함께 영광을 누리니, 빛나는 옥 같네.
우안곡 이공 중명
사봉의 문, 세습된 유술. 숙학 돈행, 숙부와 조카. 그 사람을 알지 못하나, 그 스승과 벗을 보네. 신중한 재계와 진실한 포수. 화양까지 이르니, 글이 서로 교류하네. 절개를 세우는 칭찬, 나약한 사람도 힘을 얻네.
우복재 서공 한주
《천안 육현찬》은 여섯 현인을 찬양하는 작품으로, 각 현인의 업적과 덕성을 상세히 묘사하고 찬미합니다. 이들 현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공 연겸
이공 승벽
현공 덕승
서공 정연
이공 중명
서공 한주
각 단락은 각 현인의 고상한 덕성, 해박한 학식 및 유교 문화에 대한 기여를 묘사하며, 이들이 당대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와 영향력을 지녔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연천집 > 淵泉先生文集卷之二十二 > 贊 > 豐山洪奭周成伯著
天安六賢贊
寧城十室。蔚然儒風。孰倡其先。肫肫兪公。馴虎湧泉。雪笋氷鯉。古人所難。公實兼美。煌煌棹楔。逮公之存。 偉彼先哲。亦肅其門。
右正郞兪公 彦謙
留麗之山。玉韞而輝。有美君子。在遯而肥。陳東之䟽。董養之歎。身雖空谷。手障狂瀾。潛光不輝。孰識其懿。天與之爵。曰孝曰義。
右盆谷李公 承璧
淸風之臺。就陰之亭。有山嶪峩。有水淸泠。考槃在中。碩人之敦。遺經在丌。束脩盈門。窮格之蘊。亦有文章。淸芬可挹。雖久彌芳。
右希菴玄公 德升
三綱解紐。日星晦冥。公於是時。介石之貞。大猷方升。廈氊宥密。公於是時。漸鴻之吉。委蛇羔紽。坦坦邱園。前賢有述。匪我私言。
右沙峯徐公 挺然
陽秋一部。日星吾東。孰其闡之。大老之功。大老特書。曰有李生。曁三學士。並樹厥聲。瞻彼北苑。載屹雲壇。公與有榮。奕奕琅玕。
右安谷李公 重明
沙峯之門。世其儒術。宿學惇行。是叔是姪。不識其人。視其師友。翼翼愼齋。恂恂浦叟。爰洎華陽。尺牘交重。 立節之褒。懦夫增聳。
右復齋徐公 漢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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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주 (洪奭周)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 할아버지는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며, 아버지는 우부승지 홍인모(洪仁謨)이다. 약관에 모시(毛詩) · 경례(經禮) · 자사(子史) · 육예(六藝)백가(百家)의 글을 모두 읽어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할 정도로 총명해 동료들이 감탄하였다. 1795년(정조 1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고, 그 해 춘당대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사옹원직장을 제수받았다. 1797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1802년(순조 2) 정언이 되었으며, 1807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가선대부에 올라 병조참판이 되고, 181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1832년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183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손부를 제배받고 1842년에 졸하였다.
지위가 정승에 이르렀는데도 자품이 고요하고 겸허해 처하기를 평민과 같이하였다. 그리고 학문이 심수하고 의리에도 정통해 시서역예(詩書易禮)의 교훈과 성명이기(性命理氣)의 철학에 달통하였다. 그는 특히 도학가적인 문학론을 전개해 “심외무부(心外無父)요 도외무심(道外無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문(文)’이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닦아지고 학문이 쌓이면 그것이 덕(德)도 되고 도(道)도 되며, 어(語)도 되고 문도 된다. 바로 도 · 덕 · 어 · 문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마음의 공부도 없이 입만으로 인의성경(仁義誠敬)을 외치므로 말은 문과 맞지 않고 마음은 말과 응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진(秦) · 한(漢)의 고문(古文)을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면서 의고문가(擬古文家: 秦漢派)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진 · 한의 고문은 한유(韓愈) · 구양수(歐陽修) 같은 대문호도 미칠 수 없음을 탄식했는데 하물며 우리가 그를 배우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삼라만상이 쉬지 않고 변하므로 지금에 와서 복고가 안 되는 것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형세가 그렇게 되어 안 되는 것이라며 시의에 맞는 진솔한 글을 쓸 것을 역설하였다.
김윤식(金允植)은 “보취(步趣)에 법도가 있어 구확(矩矱)의 밖을 넘지 아니하며, 우여용용(紆餘舂容)해 감격적이면서도 상하지 않으니 실로 치세(治世)의 글이다.”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연천집』 · 『학해(學海)』 · 『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 『동사세가(東史世家)』 · 『학강산필(鶴岡散筆)』 등이 있고, 편서로는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 · 『상예회수(象藝薈粹)』 · 『풍산세고(豊山世稿)』 · 『대기지의(戴記志疑)』 · 『마방통휘(麻方統彙)』 · 『상서보전(尙書補傳)』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