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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75편 1 (856) 감사하고 감사함은 2024. 10. 20
미국의 어느 부흥사 목사님이 부흥회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한 눈으로 봐도 엄청나게 뚱뚱한 흑인 여성이 아이 둘을 데리고 비행기 복도를 걸어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럴 경우에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더군다나 내 옆자리가 비워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저 뚱뚱한 여자가 내 옆자리에 앉으면 어떡하나? 다른 자리에 앉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저도 필리핀에서 집회와 강의 때문에 종종 비행기를 탈 때에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합니다.
“좌석 중에서 제발 내 옆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로 4시간 운행했으면 좋겠다. 그나마 옆자리에 사람이 앉는다면 뚱뚱하고 덩치가 큰 사람보다는 체격이 작은 사람이 앉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비행시간 4시간이 지옥과 같은 고역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안락한 나만의 시간이 될 수 있는 차이점이 여기서 판가름 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 좋은 것은 꼭 생각하는 대로 들어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 뚱뚱한 흑인여성이 아이 두 명과 함께 목사님이 앉아 있는 자리에 덥석 앉습니다. 결국 시간이 조금 흘러가면서 뚱뚱한 여성과 아이들로 말미암아 목사님은 자꾸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순간 불평이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자신이 목사이고, 또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얼른 회개하는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 옆의 이 뚱뚱한 흑인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세상의 감사는 이처럼 바리새인의 감사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위선적인 감사가 많습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만들어지는 잘못된 감사가 많습니다.
순수한 감사는 하나님 중심의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감사입니다. 내가 즐거운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감사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없는 것을 보지 말고 있는 것을 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받은 선물을 보지 말고 선물을 주는 손을 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왜 좌절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보지 못하고, 거친 광야만 보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영원히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땅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메마르고 거친 바람만 부는 광야의 현재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보면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미래를 보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감사는 수학의 더하기와 같아서 어떤 일을 당해도 감사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감사하면 플러스로 복을 받게 된다.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수학의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죄 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 사람이 보여주는 감사의 깊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입으로 감사하면 마음의 감사가 생깁니다. 입으로 감사를 외치면, 생활 속에서 감사하는 내용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힘들고 짜증나는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감사합니다”(Thank God)를 입으로 하다보면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힘들지만 감사가 우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가 만들어 내는 기적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시편기자는 1절에서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이라고 합니다. ‘감사하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호디누’인데, 이 말의 기본적인 뜻은 “경배하다, 고백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감사라는 말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환절기 10월의 중순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시간 속에 우리 모두가 머물고 있습니다. 10월의 모든 시간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여 주셨음을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다가오는 10월의 시간을 보내도록 합시다.
1.주의 이름이 가까움으로 감사합니다.
1절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고 합니다.
시편기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하고 감사하다는 말로 감사라는 단어를 두 번 연거푸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이나 성품 혹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내 곁에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와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이 내게 가까우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내가 하나님을 부르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 곁에 가까이 계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내 곁에 가까이 계시고, 그리고 내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에 더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가사(401장)에 보세요. “주의 곁에 있을 때 맘이 든든하오니 주여 나를 생전에 인도하여 주소서”. 주님이 가까이 계시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염려와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감사의 조건입니다.
남북한이 긴장 관계로 인해 시끄러운 요즈음입니다. 나라 일각에서는 북한의 핵문제를 대응하기 위해서 주한 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한미군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주한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해야 할까요? 주한 미군의 한국 주둔을 유지하고 지속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지출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됨으로서 세계 최강의 미군 전력을 통해 우리가 북한의 전쟁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존재하는 한, 북한은 함부로 남함을 건드리지 못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초대교회와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가 풍성하게 넘쳤습니다. 생활에 활력이 넘치고, 감사가 충만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행 1: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만나고 헤어질 때에 하였던 대표적인 인사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 고전 16:22)라는 인사였습니다. 요한도 그의 계시록 마지막 22:20절에서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말로 맺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기대 때문에 그들은 열정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정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체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얌전한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활력 있는 사람은 까부는 사람으로 보이고, 잘 웃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세상 만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서 올바른 판단을 놓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자신에게만 손해가 주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면, 감사가 나오고 자기 영혼이 소생하는 힘을 얻습니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잘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쉽고 무너지기 쉬운 것이 마음입니다. 잠 4:23절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에는 감사가 생기고 결국 복이 오지만, 부정적인 마음에는 불평이 생기고 결국 불행해집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긍정적인 믿음이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전도사가 교회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가 그냥 정류장을 통과해 버립니다. 너무 화가 나서 구청에 신고해 버립니다. 그리고 며칠 후 통지가 왔습니다. “과태료 10만원 부과시켰음.” 그 통지를 보고 속이 후련합니다.
며칠의 시간이 흐른 후, 주일날 한 성도를 지하철역에 내려주고 돌아오는데, 앞에서 차가 길을 비켜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빠져 나갈 공간이 있는 것 같아서 핸들을 돌려 빠져나오려고 하다가 그만 그 차를 약간 긁어 버립니다.
그 차주가 말합니다. “어떻게 하실래요? 보험 처리하겠습니까?” 전도사는 보험보다는 현금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그냥 보상하겠습니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 그 차주가 말합니다. “페인트 약간 벗겨졌지만 20만원은 되어야 수리가 되겠네요.” 그렇게 20만원에 합의를 보고 교회에 돌아오는데, 갑자기 며칠 전에 운전기사에게 10만원 과태료 물린 것이 생각났습니다. 남에게 10만 원 물리니까, 자기 돈 20만원이 나간 것을 보고 기분이 아주 묘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깨달으니까 다행입이다만, 깨닫지 못하는 무지함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성도는 정직과 신뢰를 가까이 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권모술수와 기만을 가까이 하게 되면, 언젠가는 그것이 나에게 칼날처럼 되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만 성도에게 늘 복이 된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2. 주의 기이한 일을 전파하므로 감사합니다.
1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본문의 “주의 기이한 일들”이 지칭하는 직접적인 것은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던 앗수르의 대군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몰살 당한 것을 말합니다. 왕하 18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엄청난 대군을 끌고 와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르 보내서 산헤립의 군대가 몰살당할 것이고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남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왕하 19:3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185,000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군사들이 하룻밤 사이에 몰살을 당하자 산헤립은 급하게 자기들의 나라로 도망 가 버립니다. 하지만 도망가서 자신이 믿는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하다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인생을 마감해 버립니다.
인간의 계산으로 보면, 산헤립이 이렇게 허망하게 물러가서 죽임을 당하고, 그 무섭고 엄청난 앗수르의 대군이 하룻밤 사이에 몰살당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 모든 일들을 두고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내가 전파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와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외치고 전파해야 합니다.
‘행여 나는 깜짝 놀랄만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적도 없고,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엄청난 사랑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말과 판단은 정말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매우 교만한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의 기이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일 가운데 기이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에게 주어진 그 날이 새로운 새날인 것이 기이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부딪치는 하루 생활이지만,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보십시오. 그렇게 덥다가 이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입니다. 그리고 이 가을이 지나고 나면 한여름의 햇살이 그리울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다가 올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치고, 계절의 변화가 오고, 곡식이 익어 가을걷이를 하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것이 온통 기이한 것밖에 없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손가락 세 개만 달린 오른팔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처지에 환멸을 느껴, 이런 저런 방법으로 죽으려다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삶을 사는 일본 여인 <다하라 요네꼬>의 자전적 고백입니다.
그녀는 절망과 한숨만이 가득한 삶을 살아갑니다. 절망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수면제를 차곡차곡 사 모으기 시작합니다. 수면제를 많이 모아 자살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하라 아키토시>라는 신학생의 전도를 받게 됩니다.
아키토시는 그녀에게 고후 5:17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결국 요네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처량한 처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모습에서 뛰쳐나와, 이제는 오른팔에 손가락이 세 개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을 전도한 그 신학생이 청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두 딸을 가지고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녀는 책의 말미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행복하다가 아니고 황홀하다”라고 말합니다. 감사하는 모습이 있었기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황홀한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세 개의 손가락이 5개의 손가락으로 바뀐 것이 전혀 없습니다. 내 몸의 장애는 없어지지 않았지만, 내 마음의 장애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 결과 인생을 살아가야 될 가치가 있는 황홀한 삶인 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우리 가까이 계심을 믿고 늘 감사합시다. 내가 홀로 외롭게 있지 않고 우리 주님이 가까이 오심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이한 은혜를 헤아리고 매일매일 행복에 겨워 황홀하게 사는 감사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내에 페밀리 레스토랑 가운데 TGI라는 이름을 가진 업체가 있습니다. 미국 외식 업체로서 한국에 진출해 있는 기업인데, “TGI”라는 제목에는 숨은 뜻이 있습니다. TGI란 “Thank God. It's Friday(하나님 감사합니다. 금요일입니다).”라는 말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 5일간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 즐겁게 가족들과 외식할 수 있게 해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주말이 되어서 비싼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말에 가족들이 둘러앉아서 통닭 한 마리를 뜯어 먹으면서도 “하나님이 이 한 주간을 지켜 주신 것도 감사하고, 주말에 이런 맛난 음식을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의 단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범사에 감사함으로 더욱 큰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