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1.
봉암사 답사
석가탄신일이다. 조계종단에서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한 문경 봉암사에 왔다. 일 년에 딱 하루, 사월 초파일만 개방하는 절집이다. 도로는 차량이 줄을 잇고 좁은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없다. 구름처럼 몰릴 방문객을 예상한 듯이 공무원과 경찰이 곳곳에 대기하고 있다. 임시주차장을 3개나 준비했으며 봉사 도우미도 셀 수 없이 많다. 명성만큼이나 대단하다. 아침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과 차량으로 바글거린다. 멀리 주차하고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거북이보다 느린 느낌인 것은 마음이 급한 탓이리라.
사람이 요물이다. 사람의 출입을 통제한 봉암사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넘어진 나무나 굴러내린 돌멩이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고운 최치원 야유암역사공원에서 백운대 계곡을 따라 1km 남짓을 걷다 보면 일주문을 만난다. 계곡은 깨끗하고 물이 맑아 바닥에 깔린 돌과 모래가 반짝인다. 침류교를 건너기 전에 다리 기둥을 눈여겨봐야 한다. 기둥 하나가 돌덩이 하나다. 다섯 개의 돌기둥이 침류교를 받치고 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아름답다.
주인 없는 연등이 알록달록하다. 금색전 팔작지붕에 희양산 꼭대기 바위가 걸려있다. 996m의 희양산은 암산으로 봉우리 전체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듯하다. 가족 다섯의 소원을 정성스레 적고 분홍 연등에 달았다. 올해는 부처님의 가피에 힘입어 이루고 싶은 일이 여럿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끝이 없으나 이것 또한 욕심이니 참으로 무안하다.
봉암사는 희양산문의 본거지다. 구산선문 중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이 개산조(開山祖)이고 정진대사 긍양(兢讓, 878∼956)이 899년에 당에 가서 석두 희천(石頭希遷) 문하의 선법을 전해 받고 924년에 귀국하여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서 희양산문(曦陽山門)을 형성했다. 대웅보전을 지나 지증대사탑비(智證大師塔碑) 앞에 선다. 파손의 흔적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귀부와 이수만 덩그러니 남은 탑비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웅장하다.
국보 제315호다.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짓고 분황사의 노스님 혜강이 글을 쓰고 새겼다고 안내되어 있다. 내가 읽을 수 없으니, 한숨이 절로 난다. 읽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글자지만 이 비에는 선종의 전래와 아홉 개의 선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적혀있다. “당에 가지 않고도 대도(大道)를 보았고, 산에 오르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도 보배를 얻었으며, 저 언덕에 가지 않아도 이른 분이 계셨으니, 바로 지증대사이다.”라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천재성과 더불어 선을 실천한 선현이란 생각에서 남명 조식이 겹치는 이유는 또 다른 편견일까.
마애미륵여래좌상이다. 1663년(현종 4)에 제작된 조선시대 마애불이다. 높이가 539.6cm, 너비가 502.6cm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 머리 주변을 깊게 파서 광배 형상을 만들었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선각 느낌이 날 정도로 얕게 부조로 처리되었다. 얼굴형은 갸름하고 오뚝한 콧날에 엷게 뜬 눈과 꼭 다문 입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인간적인 면이 보인다. 용화수인(龍華手印)으로 두 손에는 미륵의 미래 성불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상징하는 깨달음의 꽃가지를 쥐고 있다. 마애미륵여래좌상의 오른발 다섯 발가락에 오른손을 올린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원하는 대로 살게 하소서”
약속 하나는 원하는 대로 이루었다. 불기 2569년 부처님오신날은 앞도 뒤도 없이 무조건 봉암사를 원했다.
첫댓글 조용하게 오빠 혼자서 독차지하고 봣던 무수한 정자 절 탑 ᆢ
이날은 군중속에서 집중한다고 힘들었겠소이다
우리 말로, 그러니까 저잣거리말로 하면
"새가빠지게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