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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40-42(7) 작은 이들에 대한 배려 2025. 9. 7.
우리나라 속담에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십리 줄을 잇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드물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승이 살아 있을 때에는 정승의 눈에 들려고 개가 죽어도 문상을 갑니다. 하지만 정승이 죽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문상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각박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가, 유학자, 저술가, 중신(重臣)이었던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대단한 정치적 위세를 누렸으며, 인조부터 숙종까지 4대조를 섬긴 원로대신으로, 그의 후학들에게 공자, 주자에 버금간다며 송자(宋子)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해동성인(海東聖人)으로 불려졌습니다. 대학자 율곡 이이도 듣지 못한 칭호였습니다.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언급될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국에 있는 사림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문하에만도 수천 명이 있었고, 당대 최고의 권력과 지위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기사환국(1689)으로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사약을 받고 죽자, 살아 생전 그의 집을 메우던 수많은 문객들은 대부분 모습을 감추어 버립니다. 권세와 학문적 명성이 절정일 때는‘문전성시’였지만, 몰락 후에는 속담 그대로가 ‘정승이 죽으니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격’이 되어 버립니다. 속담이 현실로 입증되어 버린 실례입니다.
이런 것이 세상인심입니다. 잘 나가는 사람 곁에는 떨어지는 콩고물이라고 주워 먹으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립니다. 더 넓고 편한 길로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좁은 길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성경은 ‘가난하고 낮은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말고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세상인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가지고 없는 사람은 더 없어지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베풀고 나누는 것에 인색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회에는 <양극화현상>이 발생해서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나보다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돌보아야 하며, 작은 이들을 배려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베풀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주후 3세기 경에 활동하였던 교부 성 바실리오는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지 않는 것은 그를 굶겨 죽이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단순하게 빵 몇 개 던져주는 자비심을 넘어 기독교적 정의(Justice)의 차원에서 행동과 실천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이런 사상은 성경적 근거가 있는 내용입니다. 잠언 22:22절,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라.”가난한 자의 배고픔과 굶주림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58:7절은 “네 양식을 주린 자와 나누어 주며…”라는 말로 좀 더 적극적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져야 하는 성경적인 물질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내가 가진 것은 다 내 것이라’주장하는 목소리를 줄여야 합니다. 칼빈이 말한‘성도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내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이 주셨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달란트이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나는 그것을 잘 관리하여서 하나님에게 다시 돌려 드려야 하는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돌려 드리는 선한 청지기가 있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악한 청지기가 있는 것입니다.
마10:8에는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삼으실 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우선 우리가 거저 받았음을 깨닫게 합니다.
지난 주간 며칠 동안 정말로 더웠습니다. 이번년도 8월은 왜 그리 길게 느끼지는지요. 아마도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로 무덥고 짜증나는 더위였습니다. 아직도 한낮에는 무더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 뜨거운 햇볕이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만드는 마중물임을 알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너무 따가워서 짜증이 나지만, 사람과 동식물이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햇볕의 값을 안 내고 우리는 쓰고 있습니다. 공기도 돈을 지불하지 않고 거저 쓰고 있습니다.
이런 곳들을 통해서 거저 받은 것은 거저 주는 것이 옳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합니다. 나는 거저 받아놓고 남에게 값을 지불하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이쇼 히로시의 “아침형 인간”에 보면, 건강하고 장수하는 노인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우선 심리적으로 거의 다툼이 없고, 낙천적이고, 희로애락의 감정기복이 적다. 그리고 항상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강하고 욕심이 적다’고 적고 있습니다.
즉 간단히 말하면, 베풀어 주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말입니다. 아등바등 이것저것 많이 먹으면서 욕심 부리는 사람보다 나누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타도시를 여행하기 위하여 기차를 이용하는 중, 기차에 타려고 올라서다가 그만 승강장에 신발 한 짝을 떨어뜨립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에 신발을 주우려고 내릴 수 없습니다. 기차가 움직이자 간디는 재빨리 다른 한 쪽의 신발을 이미 승강장에 떨어져 있는 신발 부근으로 힘차게 던져버립니다.
수행하던 사람이 ‘왜 그렇게 신발을 버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남아 있는 한 짝은 필요 없는 한 짝이지만, 내가 이것을 저기로 던져서 짝이 맞는 한 켤레 신발이 되게 한다면, 누군가 가난한 사람이 저걸 주워서 신을 수 있으니 아름다운 헌신이라 말할 수 있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두고 간디의 무소유 정신을 말하고, 또한 남을 생각하는 간디의 이타심(利他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간디의 모습은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의 마음과 행동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배려와 남을 생각하는 모습이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긍휼이라는 말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긍휼(矜恤)이란 말은 동정과 마찬가지로 상대방 옆에서 같이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넓게는 친절, 배려, 관용의 뜻도 들어있습니다. 나보다 가진 것이 작은 이들에 대한 긍휼의 모습. 나보다 힘이 없는 사람에 대한 긍휼의 모습,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이 드신 분들에 대한 긍휼의 모습, 요즘 우리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갑의 입장에서 을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도 긍휼의 모습입니다.
행 20:35에는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직전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한 설교의 마지막 끝 부분의 말씀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는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고, 또한 이것은 친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 강조합니다. 율법으로 배울 수 없는 말씀을 예수님에게 배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이 말씀을 잘 배워, 작은이 에게 우리가 작아져 먼저 손을 내밀고, 나의 것을 먼저 베품으로 주의 말씀처럼 복이 있는 자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1. 구하는 자에게 주어야 합니다.
마 5:42 상반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라고 합니다.
나에게 구하는 자에게 내가 왜 조건도 없이 주어야 할까요?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이 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고 판단하면 내 소유물이기에 거저 주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너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다 내 것이 아니라고 판정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다 내 것이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흔쾌하게 주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이 말씀과 병행구절인 눅 6:30에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말씀은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거저 주라고만 말씀했는데, 누가복음 말씀은 이것보다 한발 더 앞서 나갑니다.
누가복음에는‘내 것을 가져간다는 말은 내 허락받지 않고 내 물건을 무단으로 가져가는 도둑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고픈 자가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내 허락 없이 내가 먹는 빵을 가지고 갈 때 쫓아가서 빼앗지 말라는 말입니다. 도둑질을 묵인하거나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므로 오해해서 안 됩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생존을 위해 먹거리를 찾는 것을 인류애를 가지고 포용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자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구하는 대로 주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역시 내가 구하는 것을 그대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요 16:24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내게 구하지 말라, 구해도 안 주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아낌없이 기도를 들어 주시고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나보다 연약한 자들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는 것에 인색해서 안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더 많이, 더 자주, 더 정성을 담아 베풀어 주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입니다.
신 15:10에는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로 계산이 정확한 분입니다. 사람은 돈 빌려 놓고 세월이 지나서 까먹는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잊어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장 없는 명령을 하신 적이 없고, 보장 없는 요구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면 하나님은 내게 주시기 때문에, 나는 절대 손해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맙시다.
본문 40절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속 옷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거저 주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요즈음에는 비싼 속옷도 있습니다만, 당연히 겉옷이 더 비쌉니다. 연약한 자가 구하는 것이 나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싸구려 속 옷이라고 해도,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덧 입혀서 그 사람이 구하기 어려운 비싼 겉옷 까지 아끼지 말고 주라는 말입니다.
눅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주는 자에게 하나님은 넘치게 주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특별히 나보다 더 연약하고 작은 이에게 많이 베푸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 5:42 하반절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은 말씀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 말은 절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큰일 납니다. 왠지 아십니까? 잘 생각해 보셔요. 누가 나에게 돈을 꾸러 왔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꾸고자 하는 자가 나에게 찾아오면 거절하지 말라고 말했으니, 내가 말씀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다 꾸어준다고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까요?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꾸어달라는 대로 다 꾸어주게 되면 누구나 다 쫄딱 망합니다.
이 말씀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을 꾸어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 11: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잠 22:26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등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보증서지 말라는 말은 타인에게 무한정으로 꾸어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무엇이든 다 준다고 해서 살인자에게 칼을 건네주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연약한 사람이 적은 도움을 바라고 있는데, 내가 인색하게 움켜쥐면서 아까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가진 물질이 귀하고 아껴야 되는 것이지만, 나보다 연약한 사람이 나의 도움을 원한다면, 나는 거절하지 말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라는 말입니다.
41절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라고 합니다.
<억지로 가게하다>란 말의 헬라어 원뜻은 “강제적으로 징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돈 아깝지 않고, 내 시간과 물질이 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내 돈 , 내 시간, 내 물질이 소중하지만, 연약한 사람을 살리는 길이라면, 억지라도 나서서 기쁘게 도와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가요? <구레네 시몬>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로마 병사에게 붙잡혀서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올라갑니다. 하지만 억지로 지고 올라간 십자가 이지만, 그 십자가가 구레네 시몬에게 최고의 축복과 영예를 안겨다 주는 십자가가 됩니다. 우리 모두 구레네 시몬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의 모습이, 바로 억지라도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는 점을 예수님은 말합니다.
목사님들 모임 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돈놀이하는 분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한국교회가 송두리 체 무너지는 소리입니다.
신 15:8에는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합니다. 쓸 것을 넉넉히 꾸러주라는 말은, 고리대금 이자를 붙여서 받아 챙겨 먹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 형편에 따라 넉넉하게 그냥 빌려주라는 말입니다.
칼뱅은 제네바 교회에서 엄격하게 고리대금업자를 배격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돈을 필요에 따라 꾸어주되, 절대 무리한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사회통념상 인정되는 이자는 허락하지만, 통념과 상식을 뛰어 넘는 과도한 이자는 기독교인이라면 절대로 따라 행동해서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난한 자를 위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그냥 주라, 그냥 주는 것이 힘들다면 그냥 꾸어주라, 빌려주라’는 것입니다.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주고 그냥 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냥 빌리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내가 빌리고 내가 꾼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점이 성경적입니다. 내가 그냥 갚지 않고 꿀꺽 먹어버린다면, 이것은 명백한 8계명의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하는 범죄행위입니다. 또한 내가 어려울 때에 도움을 받고 위기에서 벗어난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나 또한 기꺼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행이 이어지는 선순환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1912년에 열린 스톡홀름 올림픽에 세실 힐리 (Cecil Patrick Healy, 1881–1918)라는 선수가 100M 자유형 호주 수영대표선수로 출전합니다. 100m 자유형 결선 때에 미국수영선수이자 강력한 금메달 라이벌인 듀크(Duke Kahanamoku)선수가 경기 지각으로 실격해 버립니다.
이때 힐리는 ‘그가 없으면 금메달도 의미 없다’고 여겨, 재시합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그 결과, 듀크가 기회를 얻었고, 금메달을 획득하고 자신은 은메달을 따게 됩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챙겨주는 힐리의 훌륭한 스포츠맨십을 기리기 위해 호주 올림픽위원회는 ‘Cecil Healy 스포츠맨십 상’을 제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타인을 배려하였던 힐리는 1918년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솜 전투에서 36살의 젊은 나이로 전사를 하게 됩니다. 지금도 호주에서는 세실 힐리를 호주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영웅이며 뛰어난 스포츠 선수로 추모하며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작은 배려가 가장 따듯한 손길일 수가 있고, 가장 많은 돈일 수도 있습니다. 배려는 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작은 관심을 가지고 내 주변을 돌아 봅시다. 나보다 낮고 연약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실천하는 참된 크리스천이 되어 보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