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단원(18-19)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구함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18).
사도의 네 번째 간구의 중심점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습니다. 사도의 간구는 존 스톳트가
지적한 대로 마치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오며,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사랑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고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의 경지는 더 오
를 곳이 없는 정점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고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갑니다.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한 찬송가 가사대로 그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지식과,
사랑”을 결부시켜 언급합니다. 지식(知識)은 신앙에 있어서 첫 손에 꼽을 만큼
중요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알지 못하고 믿는 신앙이란 맹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첫 번 기도(1:17-19)에서는,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9)고 지적인 면에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지식”만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사도는 필경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한 같은 심정에서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말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1장의 기도는 “알기를 원한” 지식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3장의 기도에서는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에 강조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사도는 “지식과, 사랑”의 조화와 균형(均衡)을 잡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균형이 초대교회의 큰 걸림돌로 작용을 했고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전 8:11), 즉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사 대신 죽어주신 형제를 네 지식으로 멸망을
시킬수가 있단 말이냐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지식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롬 14:15)
합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19상)
합니다. 1:17절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한 사도는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그래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고 전방위적으로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복음의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바울과 우리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주님은,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앞의 모든 기도, 즉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오며,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며,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를 드리기 위한 준비 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란 표현을 해석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태평양 한복판에서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측량해 보려는 것, 그 이상의
무모함입니다. 측량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방법으로는 나타낼
수가 없어서 전방위적인 말을 다 동원하여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점을 존 스톳트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용할 정도로 “넓고”, 영원토록 계속될 만큼 “길며”,
가장 타락한 죄인에게까지 미칠 수 있도록 “깊으며”, 그를 하늘에 올릴 만큼
“높다” 고 적고(아가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머리로 깨닫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롬 5:5)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