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2007.4.7.)
순례의 마지막 코스에서도 대모님(김영자 마리아)은 열두 밤을 새우면서 단둘이 한방에서 한밤도 오붓하게 지내지도 못했다. 이유인즉슨 대모님께서 몸이 불편하신 어머님 두 분을 손수 도와서 여정 속에 힘드시지 않도록 함께 하시려고 맘을 먹었다고 하시면서, “마리아야, 아무리 생각해도 긴 여행 동안 내가 함께 잠을 자야겠다. 그러니 이해해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마지막 날까지도 내가 다니는 성당 유스티나 자매님과 마지막 날까지 한방을 쓰면서까지 대모님과 단둘이 룸메이트를 하지 못한 점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로마 성 베드로 성지순례 마지막 코스로 백미이라 할 수 있는 로마 안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가려고 서둘렀다. 그날이 바로 부활 대축일이었기 때문이다. 성지순례 길에 오르기에 앞서 날짜에 맞추려고 계획표대로 한 것이었다. 캐리어 속에서 열흘이 넘도록 보관한 한복을 꺼내 입었다. 그곳에서 새삼스럽게 우리 한복을 입는다는 것이 어색했다.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한복을 알리고 싶기도 했고 또한 정성을 다하는 마음가짐으로 미사를 드리는데 큰 비중을 두었다. 드디어 바티칸에 도착했다. 우리는 한복차림으로 성 베드로 성당 입구에서 입장을 하려고 줄을 섰다. 바티칸은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 안에 또 하나의 작은 국가이다.
로마시 북서부에 있는 독립 시국으로 교황에 의해 통치되고 신권국가로 가톨릭교회의 상징이며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사도 베드로가 순교 당한 후 이 언덕에 묻히면서 가톨릭이 국교가 된 후 베드로의 묘지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고 5세기경에는 바티칸 궁전이 건립되기도 하였단다. 이후 역대의 교황들이 바티칸 궁전 주변의 땅을 매입하였고 8세기부터는 베드로의 세습령 즉 교황청을 통치하는 교황의 정식 주거지가 되었단다.
그 이후로 1870년 이탈리아 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에 의해 로마가 점령되면서 이탈리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이후 교황들의 교황령에 대한 전통적인 권리를 주장한 결과 1929년 2월 11일 교황청과 이탈리아 무솔리니 부 사이에 라테란조약이 체결되면서 바티칸은 독립 국가로 재출발한다. 바티칸 시국에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성베드로대성당 앞 광장 입구에서 약 2시간 소요하여 드디어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웅장하고 엄숙한 건축물이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타원형의 광장에 영주 위에는 높이 3.6m인 140명의 성인 입상이 우리를 환영하는 듯했다. 나는 소리 죽여 “오, 주여, 제가 왔나이다.”라고 감사의 응답을 하고 싶었다. 해마다 부활 축하 미사를 드리려고 세계 각국 신자들이 거의 십만 명 정도 모여서 성대한 부활 미사를 드린다고 했다.
성 베네딕도 교황님께서 단상에 나와서 곧바로 부활 미사가 시작되었고 십만 명의 질서정연한 모습에서 서로 다른 나라와 언어도 통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라틴어 미사 집전에도 다 알아듣기라도 하듯이 하나가 되는 듯했다. 단상이 너무 멀다 보니 타원형 벽면 곳곳에 대형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어서 교황님을 볼 수가 있었다.
내 생에 이런 시간이 또 있으리라는 것은 보장하기 어렵기에 내내 성스러운 광장에서 서성일 뿐 마음과 눈으로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날은 한복차림을 한 우리들에게 각국에 신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 색다른 추억으로 남았다. 미사 시간이 길어서 귀국할 비행시간이 촉박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고, 아쉬움만 가득하여 다음 기회를 약속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성지순례를 하도록 이끌어 주신 대모님께 고마움을 전하며 주님께 감사드리며 묵주 알을 잡는다.
첫댓글 고운 한복이 돋보이네요.
멋진 날 아름다운 추억이 행복을 만들어주었을 것 같아요.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한 글입니다.
의미있는 여행이야기 올려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