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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런웨이》
제35회 ― 순자 씨의 하늘색 원피스
다음 날 오후.
K예술대학교 의상디자인과 실습실.
창가 쪽 커다란 작업대 위에는 여러 종류의 하늘색 원단이 펼쳐져 있었다.
맑은 여름 하늘 같은 색.
비 오기 전의 흐린 하늘 같은 색.
푸른 바다를 닮은 짙은 색.
햇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연한 색.
미송은 원단들을 하나씩 들어 창가에 비춰 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강인은 원단의 두께와 결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미송이 연한 하늘색 천을 들어 올렸다.
"이건 어때?"
강인이 천을 만져 보았다.
"너무 얇습니다."
"안감을 쓰면?"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미송은 아쉬운 표정으로 원단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짙은 하늘색 천을 집었다.
"그럼 이건?"
강인은 천을 빛에 비춰 보았다.
"형태는 잘 잡힙니다."
"그런데?"
"순자 선생님이 원하시는 색인지 모르겠습니다."
미송의 손이 멈췄다.
강인은 원단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선배가 좋아하는 하늘색과 순자 선생님이 좋아하는 하늘색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미송은 여러 장의 원단 견본을 바라봤다.
"맞아."
잠시 뒤 미송이 웃었다.
"네가 웬일로 사람 마음을 먼저 생각해?"
강인이 그녀를 바라봤다.
"저도 가끔은 압니다."
"가끔?"
"네."
"연애도?"
강인의 몸이 순간 굳었다.
귀 끝이 붉어졌다.
"그건 아직 어렵습니다."
미송이 웃었다.
"솔직하네."
"대신."
강인은 잠시 미송을 바라봤다.
"선배가 좋아하는 색은 압니다."
"무슨 색인데?"
"분홍색."
"그건 지난번에 말했잖아."
"하나 더 있습니다."
미송의 눈이 반짝였다.
"뭔데?"
강인은 미송이 입고 있는 재킷을 바라봤다.
갈색 체크 재킷.
자신이 처음으로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만든 옷.
"갈색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미송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강인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자주 입으시니까요."
미송은 재킷의 깃을 살짝 만졌다.
"옷이 좋아서 입는 걸까?"
강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미송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만든 사람이 좋아서 입는 걸까?"
강인의 손에서 줄자가 떨어졌다.
툭.
미송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실습실 문이 열렸다.
"학생."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봤다.
오순자 씨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평소 입던 남색 작업복.
조금 낡은 검정 운동화.
가지런히 빗어 넘긴 짧은 머리.
그리고 손에는 하늘색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미송이 반갑게 달려갔다.
"오셨어요?"
순자는 실습실 안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재봉틀.
마네킹.
벽에 붙은 스케치들.
원단이 가득한 작업대.
그녀의 얼굴에는 설렘보다 긴장감이 더 컸다.
"내가 정말 여기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럼요."
미송은 순자의 손을 잡아 작업대 앞으로 이끌었다.
"선생님 옷을 만드는 곳인데요."
순자는 펼쳐진 원단들을 바라봤다.
"이게 전부 하늘색이에요?"
"네."
"하늘색도 이렇게 많아요?"
미송이 웃었다.
"원단마다 조금씩 달라요."
순자는 원단에 손을 대려다가 멈췄다.
"만져도 돼요?"
미송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물론이죠."
"비싼 천 아니에요?"
"원단은 만져 봐야 알 수 있어요."
강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순자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원단을 만졌다.
첫 번째 천.
부드럽고 가벼운 소재.
두 번째 천.
조금 거칠지만 형태가 잘 잡히는 천.
세 번째 천.
은은한 광택이 도는 실크 혼방.
순자는 세 번째 원단에서 손을 멈췄다.
손끝으로 천의 표면을 천천히 쓸었다.
미송이 물었다.
"마음에 드세요?"
순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고운 것 같아서."
"그래서요?"
"나한테는 안 어울릴 것 같아요."
미송은 순자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순자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세제와 찬물에 거칠어진 손.
손톱 끝에는 오래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이런 손으로 이런 천을 입으면 이상하지 않겠어요?"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강인의 표정도 굳었다.
미송은 순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선생님."
순자가 고개를 들었다.
"옷은 손이 고운 사람만 입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선생님이 매일 닦아 주신 복도를 저희가 걷잖아요."
"……."
"선생님 손이 아니었으면 학교가 이렇게 깨끗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순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미송은 원단을 순자의 어깨 가까이에 대 보았다.
연한 하늘색이 순자의 얼굴 옆에서 부드럽게 빛났다.
"저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순자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남색 작업복 위에 살짝 얹힌 하늘색 원단.
익숙하지 않은 색.
자신과는 상관없는 색이라고 생각했던 빛.
순자가 아주 작게 말했다.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강인이 대답했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순자가 강인을 바라봤다.
강인은 거짓말을 못 하는 얼굴이었다.
"정말이에요?"
"네."
강인은 원단의 색과 순자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다만 지금 색은 조금 차갑습니다."
미송이 물었다.
"그럼?"
강인은 여러 원단 중 하나를 골랐다.
하늘색에 아주 약간의 회색이 섞인 부드러운 색이었다.
순자의 어깨에 다시 대 보았다.
이번에는 얼굴빛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이쪽이 더 좋습니다."
미송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순자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다 같네요."
미송이 물었다.
"어떤 바다요?"
순자는 잠시 생각했다.
"아침 바다."
"보신 적 있으세요?"
순자는 고개를 저었다.
"사진으로만요."
목소리에는 작은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미송은 원단을 바라봤다.
"그럼 이 옷을 입고 바다를 보러 가세요."
순자가 놀라 돌아봤다.
"내가요?"
"네."
"졸업작품인데 가져도 되는 거예요?"
"선생님을 위해 만드는 옷이잖아요."
순자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말없이 원단을 쓰다듬었다.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옷을 선물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미송은 줄자를 꺼냈다.
"이제 치수를 재 볼게요."
순자의 얼굴에 다시 긴장감이 번졌다.
"여기서요?"
"안쪽 가봉실로 가면 돼요."
순자는 자신의 허리와 배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꼭 재야 해요?"
미송이 줄자를 든 채 멈췄다.
"옷을 만들려면 필요해요."
순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젊을 때보다 살이 많이 쪄서."
"괜찮아요."
"허리도 굵고."
"괜찮아요."
"팔도 두꺼워요."
미송은 줄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순자와 눈을 맞췄다.
"선생님."
"네."
"치수는 잘못된 몸을 찾아내는 숫자가 아니에요."
순자가 미송을 바라봤다.
"그 사람에게 맞는 옷을 만들기 위한 숫자예요."
"……."
"옷이 선생님에게 맞아야지, 선생님이 옷에 맞출 필요는 없어요."
순자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조금 사라졌다.
강인은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이영숙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좋은 디자이너는 모델을 마네킹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순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 봐요."
미송은 미소 지었다.
"네."
가봉실 안.
미송은 순자의 치수를 천천히 쟀다.
어깨너비.
팔 길이.
가슴둘레.
허리둘레.
엉덩이둘레.
치맛단 길이.
숫자가 나올 때마다 미송은 아무 표정 없이 기록했다.
순자는 자꾸 미송의 얼굴을 살폈다.
"많이 크죠?"
미송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허리."
"선생님 허리인데요."
순자가 눈을 깜빡였다.
미송은 태연하게 기록을 계속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어요."
"학생은 이상한 말을 잘하네요."
"어떤 말이요?"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말."
미송의 손이 잠시 멈췄다.
"다행이에요."
"왜요?"
"제가 만들고 싶은 옷도 그런 옷이거든요."
순자가 웃었다.
"그럼 벌써 반은 만들었네요."
미송이 놀라 바라봤다.
순자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여기가 벌써 편해졌으니까."
미송의 눈빛이 흔들렸다.
옷을 만들기도 전인데.
순자는 이미 조금 웃고 있었다.
미송은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말한 행복은 완성된 옷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그 사람이 숨기고 싶어 했던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바라봐 주는 것.
그것도 옷을 만드는 과정의 일부였다.
한편.
실습실 반대편.
도윤은 소희가 만든 첫 번째 가봉복을 입고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각기 다른 자투리 원단을 이어 만든 재킷과 넓은 바지.
꽃무늬와 체크무늬.
짙은 남색과 붉은 갈색.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각들이 소희의 손을 거쳐 하나의 옷이 되어 있었다.
도윤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멋있습니다."
소희는 바지 옆선을 확인하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
"정말 멋있어요."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어."
"제가 입어서 더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소희가 핀을 입에 문 채 도윤을 노려봤다.
도윤은 즉시 자세를 바로 했다.
"조용히 있겠습니다."
소희는 재킷 앞부분을 손으로 당겨 보았다.
"팔 들어 봐."
도윤이 두 팔을 들었다.
"이렇게요?"
"조금 더."
도윤이 팔을 더 높이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찍—
작은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소희의 얼굴이 굳었다.
"잠깐."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무슨 소리였습니까?"
소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의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를 살폈다.
서로 다른 천을 이어 놓은 봉제선 한쪽이 벌어져 있었다.
소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찢어졌어."
도윤이 급히 팔을 내렸다.
찍—
이번에는 더 큰 소리가 났다.
"움직이지 마!"
소희가 소리쳤다.
도윤은 어색한 자세로 굳었다.
"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움직이지 마."
"팔이 아픈데요."
"참아."
"얼마나요?"
"내가 보라고 할 때까지."
도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델은 힘든 직업이군요."
소희는 찢어진 부분을 살폈다.
꽃무늬 면직물과 짙은 모직을 연결한 자리였다.
두 원단의 두께와 늘어나는 정도가 달랐다.
도윤이 팔을 들자 힘이 한곳에 몰리면서 약한 면직물이 찢어진 것이다.
소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잘못했어."
도윤이 거울 속 소희를 바라봤다.
"어디를요?"
"원단이 다르다는 건 알았는데."
소희는 벌어진 봉제선을 손끝으로 만졌다.
"그냥 단단히 박으면 된다고 생각했어."
강인이 다가왔다.
찢어진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봉제 문제만은 아닙니다."
소희가 물었다.
"그럼?"
"서로 다른 원단이 움직이는 힘을 받는 방식이 다릅니다."
"보강하면 될까?"
강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소희를 바라봤다.
김태석 교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신 만들어 주지는 마.
"선배는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소희는 찢어진 부분을 한동안 바라봤다.
"두꺼운 원단에 맞춰서 전부 단단하게 박으면."
강인이 말했다.
"얇은 원단이 또 찢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 얇은 천에 맞추면?"
"두꺼운 천의 형태가 무너집니다."
소희의 표정이 굳었다.
도윤이 어색한 자세로 서서 물었다.
"그럼 둘을 붙일 수 없는 겁니까?"
소희가 대답하지 못했다.
도윤은 찢어진 천들을 내려다봤다.
"서로 다르다고 꼭 똑같이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야?"
"힘이 다른데 같은 방법으로 붙이려고 해서 찢어진 거 아닙니까?"
강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도윤은 별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중간에 다른 천을 하나 넣으면 안 됩니까?"
"다른 천?"
"네."
"둘 다 잡아 줄 수 있는 천."
소희는 찢어진 봉제선을 바라봤다.
얇은 면직물.
두꺼운 모직.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 줄 부드럽고 질긴 천.
"바이어스."
소희가 중얼거렸다.
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소희의 눈빛이 밝아졌다.
"봉제선을 감싸면서 연결하면 힘이 한곳에 몰리지 않을 거야."
강인이 말했다.
"움직임도 더 자연스러워집니다."
소희는 곧바로 작업대에서 얇고 질긴 바이어스 테이프를 찾았다.
도윤이 물었다.
"이제 팔 내려도 됩니까?"
소희가 그를 바라봤다.
도윤은 여전히 두 팔을 올린 채 서 있었다.
"왜 아직 그러고 있어?"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보라고 할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면서요."
미송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인도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혜린과 세나까지 실습실로 들어오다 그 모습을 보고 멈췄다.
세나가 물었다.
"쟤 뭐 해?"
소희가 대답했다.
"수련 중이야."
도윤이 억울하게 말했다.
"모델 중입니다."
혜린이 웃었다.
"팔 내려."
도윤은 조심스럽게 팔을 내렸다.
그리고 어깨를 돌렸다.
"팔이 없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소희는 바이어스 테이프를 찢어진 자리에 대 보았다.
서로 다른 천 사이로 새로운 선이 생겼다.
숨기려고 했던 봉제선이 오히려 장식처럼 보였다.
세나가 가까이 와서 말했다.
"그 선, 밖으로 드러내."
소희가 바라봤다.
"밖으로?"
"어차피 네 주제가 「이어진 마음」이잖아."
세나는 바이어스를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이어진 자리를 숨기지 말고 보여 줘."
현우도 뒤따라 들어와 원단을 살폈다.
"괜찮은데."
소희가 물었다.
"지저분해 보이지 않을까?"
세나가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만든 선처럼 정리하면 돼."
"색은?"
"원단들과 다른 색."
"왜?"
"이어 주는 존재가 눈에 보여야 하니까."
도윤이 말했다.
"분홍색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도윤은 미송과 강인을 번갈아 봤다.
"안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다면서요."
미송의 눈이 커졌다.
"그걸 네가 기억해?"
"저도 가끔은 기억합니다."
강인이 말했다.
"분홍색은 안 보이는 곳에 쓰던 말이야."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보이면 더 좋지 않을까?"
소희는 연한 분홍색 바이어스를 원단 사이에 대 보았다.
꽃무늬와 체크.
짙은 남색과 갈색.
그 사이로 부드러운 분홍색 선이 지나갔다.
이상하게도 모든 천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
미송이 말했다.
"예쁘다."
세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소희는 도윤을 바라봤다.
"네가 골랐어?"
도윤이 턱을 들었다.
"저도 색 감각이 있습니다."
"빨강이랑 주황도 구분 못 하면서?"
"분홍색은 구분합니다."
"왜?"
도윤은 소희를 바라봤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선배 얼굴이 자주 그 색이 되니까요."
소희의 얼굴이 정말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도윤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제 말은……."
소희는 분홍색 바이어스 테이프를 집어 그의 입에 물렸다.
"조용히 해."
도윤은 입에 테이프를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혜린은 순자가 고른 하늘색 원단을 바라봤다.
그리고 미송의 스케치를 살폈다.
"원피스로 할 거야?"
미송이 대답했다.
"응."
"치맛단은?"
"종아리 아래까지."
순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 더 길면 안 될까요?"
미송은 바로 연필을 들었다.
"왜요?"
"무릎이 보이는 게 싫어서."
혜린이 말했다.
"길면 키가 더 작아 보일 수 있어요."
순자의 얼굴에 다시 걱정이 떠올랐다.
미송은 혜린을 바라봤다.
혜린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말은……."
미송이 순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느 길이가 편하세요?"
순자는 자신의 종아리 중간을 가리켰다.
"이쯤."
미송은 스케치의 치맛단을 길게 수정했다.
"그럼 여기까지 만들게요."
혜린이 놀라 물었다.
"실루엣은?"
미송이 대답했다.
"다시 생각하면 돼."
"네가 처음 그린 선이 달라지잖아."
"응."
미송은 순자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건 순자 선생님 옷이니까."
혜린은 잠시 미송을 바라봤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이제 진짜 디자이너 같네."
강인도 말없이 미송을 바라봤다.
미송이 물었다.
"왜?"
강인은 눈이 마주치자 귀가 붉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미송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김태석 교수와 이영숙 교수가 실습실로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김태석은 순자와 작업대 위의 원단을 바라봤다.
"모델을 정했군."
미송이 자세를 바로 했다.
"네."
순자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김태석은 순자에게 다가왔다.
"학생들이 귀찮게 하지는 않습니까?"
순자가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잠시 미송을 바라보고 웃었다.
"오히려 제 말을 너무 많이 들어 줘서 제가 미안할 정도예요."
김태석의 시선이 미송에게 향했다.
"무슨 말을 들었지?"
미송은 수정된 스케치를 펼쳤다.
"처음에는 허리를 잡고 치맛단이 조금 짧은 원피스를 디자인했습니다."
"그런데?"
"순자 선생님은 몸을 조이는 옷이 불편하고, 치마는 종아리 아래까지 내려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네 디자인을 바꿨나?"
"네."
김태석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처음 디자인에 자신이 없었나?"
미송의 얼굴이 굳었다.
"아닙니다."
"그럼 왜 바꿨지?"
미송은 순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제 주제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김태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명해 봐."
"제 작품은 「당신을 위한 봄」입니다."
미송은 스케치를 손끝으로 짚었다.
"제가 생각한 봄을 입히는 게 아니라."
순자의 하늘색 손수건을 바라봤다.
"이 옷을 입는 사람이 기다려 온 봄을 만들어야 합니다."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이영숙 교수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김태석은 한동안 미송을 바라봤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좋아."
미송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러나 김태석은 바로 덧붙였다.
"생각만."
미송의 표정이 굳었다.
"옷으로 증명해."
"네."
김태석은 소희의 작업대로 향했다.
찢어진 가봉복과 분홍색 바이어스를 살폈다.
"문제가 생겼나?"
소희가 대답했다.
"서로 다른 두께의 원단을 같은 방식으로 연결해서 얇은 쪽이 찢어졌습니다."
"그래서?"
"사이에 바이어스를 넣어 힘을 분산시키려고 합니다."
김태석은 분홍색 선을 바라봤다.
"왜 숨기지 않지?"
소희가 말했다.
"이어진 흔적도 옷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생각이지?"
소희는 잠시 도윤을 바라봤다.
"처음 실마리는 도윤이가 줬습니다."
김태석의 시선이 도윤에게 향했다.
도윤은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박도윤."
"네."
"무슨 말을 했나?"
"힘이 다른데 같은 방법으로 붙이려고 해서 찢어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김태석은 잠시 도윤을 바라봤다.
"자네가?"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제가 그런 말을 하면 이상합니까?"
김태석은 짧게 대답했다.
"조금."
실습실에서 웃음이 터졌다.
도윤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교수님까지 그러십니까?"
김태석의 입가에도 아주 잠깐 웃음이 스쳤다.
이영숙 교수가 소희에게 말했다.
"좋은 도움을 받았네."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도윤을 바라봤다.
"가끔은 쓸모 있어요."
도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가끔?"
"응."
"그래도 인정받았습니다."
늦은 오후.
순자의 첫 가봉을 위한 무명천이 작업대 위에 펼쳐졌다.
미송은 초크를 들었다.
강인은 그 옆에서 치수표를 확인했다.
순자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가 재단해요?"
미송이 대답했다.
"제가 합니다."
강인이 미송을 바라봤다.
미송은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패턴과 재단은 강인이 가장 잘하는 분야였다.
「바람과 나무」를 만들 때도 복잡한 구조는 강인이 맡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학생으로 만드는 미송의 마지막 옷.
자신이 직접 선택하고 잘라야 했다.
강인이 조용히 물었다.
"제가 할까요?"
미송은 원단 위의 선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겠습니까?"
미송은 재단가위를 들었다.
"무서워."
강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미송은 솔직하게 말했다.
"잘못 자르면 다시 붙일 수 없잖아."
강인은 잠시 침묵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재단가위는 천을 자르는 게 무섭지 않은 사람이 잡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의 진짜 뜻을 알고 있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워도 자신이 그은 선을 책임지는 사람.
강인이 미송에게 말했다.
"무서워도 됩니다."
미송이 바라봤다.
"정말?"
"네."
"너는 안 무서워?"
"무섭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잘라?"
강인은 원단 위에 그어진 선을 가리켰다.
"왜 그 선을 그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미송은 순자를 바라봤다.
순자가 기다려 온 아침 바다.
한 번도 입지 못했던 하늘색.
몸을 숨기지 않아도 편안한 옷.
미송은 가위를 원단 위에 올렸다.
강인이 조용히 말했다.
"선배가 선택한 선입니다."
미송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싹둑.
첫 번째 가위질을 했다.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싹둑.
싹둑.
하늘색 원단이 미송의 선을 따라 잘려 나갔다.
강인은 대신 손을 대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원단이 밀리지 않도록 조용히 잡아 주었다.
순자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송이 마지막 선까지 자른 뒤 숨을 내쉬었다.
"됐다."
강인이 재단된 원단을 살폈다.
"잘하셨습니다."
미송이 웃었다.
"정말?"
"네."
"그냥 칭찬하는 거 아니야?"
강인은 미송을 바라봤다.
"저 거짓말 못 합니다."
미송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알아."
순자도 따라 웃었다.
창밖으로 늦가을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작업대 위에는 하늘색 원단이 놓여 있었다.
아직은 옷이 아니었다.
앞판.
뒤판.
소매가 될 몇 장의 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이 오래 기다려 온 바다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옷을 만들기 위해—
한 디자이너가 처음으로 자신의 선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바라보기 시작했다.
반대편 작업대에서는 소희가 분홍색 바이어스로 서로 다른 천들을 다시 이어 가고 있었다.
도윤은 옆에서 실을 정리했다.
이번에는 빨강과 주황을 제대로 나누고 있었다.
현우는 무대 구조를 그리다 두 사람의 옷을 바라보았다.
세나는 투명한 소재를 들고 순자의 하늘색과 비교해 보았다.
혜린은 무대 경험이 없는 순자가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낮은 굽의 구두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이영숙 교수는 학생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김태석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실습실을 나서기 전 하늘색 원단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각자의 작품.
각자의 꿈.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혼자 옷을 만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자신의 힘으로 설 수 있도록 곁을 지켜 주는 것.
졸업작품은 그렇게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한 땀.
또 한 땀.
그리고 미송의 하늘색 원피스에는—
순자 씨가 평생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아침 바다의 빛이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 제35회 끝 ―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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