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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
사도행전 6장에 따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약간의 문제가 일어난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사도행전6장1절]
즉 신자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그들의 과부들이 교회가 매일 베푸는 구제에서 빠지게 된다면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다. 얼핏 보기에는 별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초대 기독교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초대 교회 내에 두 그룹 즉,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예루살렘의 원시기독교 공동체가 한 가지 색깔을 지닌 동질집단(a homogeneous community)이 아니라 적어도 그 안에 어떤 점에서든 서로 선명히 구별되는 두 계열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이질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헬라파 유대인이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을 말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성향을 보면 전체적으로는 율법의 세세하고 문자적인 규정들로 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디아스포라 유대인 출신인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복음을 이해할 때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 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시 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수를 대략 400-600만 명으로, 그리고 팔레스티나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를 대략 100-200 만 명으로 추정한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의 3명 중 2명은 외국에서 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는 크게 두 그룹, 즉 유대 본토 출신인 히브리 유대인과 헬라 출신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파간에 문제가 생긴다. 헬라 출신 유대인들 중 특별히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서 빠지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이 문제을 해결하기 위해 7 집사가 선출되었는데, 이들의 이름이 하나같이 헬라 이름이고 특별히 그들 중의 하나인 니골라는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출신이라고 하는 것을 봐서 7 집사는 단순히 헬라 출신 유대인들의 구제 문제를 해결하는 일만을 담당한 자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당시 초대교회의 실질적인 힘은 사도와 그들을 중심으로 한 본토 출신 히브리파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헬라 출신 과부들만이 구제에서 빠지게 되는 것도 그 중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일부가 구제에서 제외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7 집사를 세우고 나서 12 사도들은 더욱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했다고 하는 것을 봐도 히브리파들이 명실 상부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또한 헬라 출신 유대인들은 본토 출신 유대인들과는 달리 종래의 유대교적인 전통이나 율법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적이였고 자유로웠다. 즉 할례, 율법으로 부터 자유로운 신앙, 믿음을 통한 구원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자유사상 때문에 그들은 즉시 유대인들로 부터 배교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에 비해 본토 출신 유대인들은 유대교라는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출신 유대인들처럼 그런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초대교회의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비해 여성인권에 대해 다소 나은 편 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여성들이 자유롭게 수건을 벗고 지도력을 발휘하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서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벗는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무조건 써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이는 유대 사회의 전통에 어긋나지 않고,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를 벗어보려는 의도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유재인, 바울서신에 나타난 여성 이해, 서울신학대학원, 1994) 애찬식의 음식문제 역시 "서로 다투니 집에서 먹고 오라"고 원천봉쇄하고 나선다.
바울이 이토록 세세한 규정을 짓고 잇는 것은 당시의 고린도 교회는 예언하는 자나 방언하는 자들과, 부도덕, 이방인들에 의해 그만 퇴색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교회의 문제를 바르게 조절해 줄 것을 고린도 교회는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요청한 것인데, 고린도 전서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뉴톰슨 관주 주석성경-the new thompson annotated-chain reference bible. 1986. 성서교재 간행사]
초기에는 히브리파가 초대교회의 지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기독교가 유대교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헬라 전 지역으로 점차 퍼져 나가는 후기에는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선교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그의 동료인 빌립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전도를 하며, 특히 사도행전 21장 8절 이하에서 그를 "전도자" Evangelist 라고 칭하는 것들로 미루어 봐서, 그리고 11장 19절 이하에서 이들이 후일 이방인 전도의 주역이 되고 있다는 여러가지 점들을 비추어 볼 때 7 집사들은 거의 사도들과 동등한 역활을 했고 비중이 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즉 사도가 팔레스타인 본토 출신들의 지도자였다면 7 집사는 헬라 출신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지휘권은 차츰 바뀌어 간다. 사도행전 5-6장에 보면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 공동체(The Jewish-Christian Community in Jerusalem)초창기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한 히브리파 기독교인이 지도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5장을 보면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주의 형제"라고 불리는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 그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이후에는 바울서신이나 그 밖의 교회전승이 이 야고보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의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주후 30년부터 50년 사이의 어느 때엔가 예루살렘교회 안에 지도권의 변화가 있었고 그 결과로 베드로 같은 예수의 제자들은 시리아나 소아시아 등지로 흩어지고 예루살렘 기독교공동체는 주의 동생 야고보가 단일지도체제를 형성한 것으로추측된다.
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축이 된 초대교회는 스테판의 순교로 인해서 갈림길에 서게된다. 스테판은 유대적인 하나님을 벗어난 보편적인 헬라사상을 유대인들에게 설포하다,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죽음이후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예루살렘교회의 신자들은 뿔뿔히 흩어 졌으며,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해를 받고 흩어져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한 것은 헬라파 기독교인이었다. 히브리파 기독교인은 박해를 받지 않고 유대땅에 남아서, 이방인에 대해서는 유대교의 율법인 할례를 받아 그들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그 같은 일은 아래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 하니라" [사도행전 15장 1~2절]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사도들이 안티오키아로 와서 이방인들도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시비를 걸고 있고, 이 문제 때문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안디옥교회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의 주재 하에 회의를 갖게 된다. 이 회의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사도행전 15장 5절)
그러나 결국 이방인들에게 할례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헬라파 기독교공동체의 신학적인 승리였으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유대 특수주의와 세계 보편주의가 대립하다가 처음으로 세계 보편주의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수용문제는 이 회의에서 끝나지를 않았다. 할례의 문제대문에 베드로 분파와 바울분파가 분리되어 잇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2장이 증거해준다. 바울의 편지중 하나인 갈라디아서 2장에는 바울이 바나바와 그리스인 디도와 예루살렘으로 왔다. 거기서 바울은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7절에는 베드로는 할례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울자신은 할례받지 않은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도직을 임명받았음을 알게된다. 즉,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 다른 사도직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갈라디아서 2장 12~16절에서 또 다시 이방인들의 할례문제가 제기되면서, 바울은 베드로를 비난한다.
갈라디아서 2:12절에 의하면 베드로는 바울과 바나바와 더불어 다수의 이방인들을 포함한 안디옥교회의 교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예배습관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아마도 예배 중에 나누는 주의 만찬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이들(갈 2:12)"이 그 곳에 나타나자 베드로가 그 "할례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식탁교제로부터 물러나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이것을 안디옥 사건이라고도 일컫는데,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예루살렘 종교회의 이후로 추측된다.
James D. G. Dunn의 말을 인용하자면,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는 이방인의 할례문제가 현안으로 되어 있으나, 적어도 바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안디옥 사건에는 이 문제가 이미 타결된 것이 전제가 되어 있다. 따라서 안디옥 사건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James D. G. Dunn, "The Incident at Antioch (Gal. 2:11-18)," JSNT 18(1983), pp.3-57.) 어쨌든 베드로도 여기서 유대 특수주의에 굴복하여 식탁으로부터 물러났으며, 바나바도 여기 동조했다고 한다(갈라디아서 2장 13절) 13절에 바울은 바나바와 그들을 가르켜 위선적인 사람들(개역한글판에는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결국 바울은 이러한 바나바와 심한 다툼 끝에 갈라서게 된다.
James D. G. Dunn에 의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베드로와 그리고 오랜 동역자 바나바와 갈라서게 되며,그 이후로 바울은 더 이상 안디옥교회의 지원을 받는 파송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자기 먹을 것을 손수 벌어 가면서 일하는 독자적인 선교사가 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도행전에는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심하게 다툰 후 갈라섰다고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행전 15장 35~41절]
결국 바울은 이 사건 이후 그는 기존의 선교지였던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떠나서 유대 특수주의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중해의 서쪽, 즉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이다.
사도행전 16장에 의하면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때 시리아, 길리기아, 더르베, 루스드라, 프리지아, 갈라디아, 드로아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건너간다. 갈라디아교회는 아마도 이 때 바울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에서 바울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두 도시에 교회를 세운다. 그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내려간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1년 반 정도 머물면서 목회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중심을 이루는 바울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 바울공동체는 바울의 구원 보편주의적인 신학의 영향으로 처음부터 무할례의 복음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 후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반 정도 머무르면서 목회하게 되는데, 이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처음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신학적으로 바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여 바울공동체에 속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 바울공동체는 유대 특수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와 신학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AD 50년대 초반에 바울공동체가 겪은 갈라디아 사건과 고린도 사건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인 대립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외부로부터 교회 안에 침입한 유대주의자들(Judaisers)이 한편으로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 할례의 복음을 기초로 하고 있는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구원신학에 반대하여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준수를 강요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들 간의 분쟁은 보편적인 구원론과, 유대적인 구원론의 교리논쟁이었는가?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할례"라는 문제를 표면적으로 내세웠을 뿐이고, 실상은 두 세력 간에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분쟁에 지나지 않는다. 즉, 할례를 제외하고는 헬라화 된 유대인들에도 율법은 철폐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교파가 로마에 널리 전파된 후에도,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할례를 제외한 대부분이 유대적인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피에 대한 율법이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피가들어간 음식을 먹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위기 17장 10~11절]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찌니라 ...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레위기 17장 13~ 1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창세기 9장 4~5절]
이러한 율법이 그대로 신약에도 등장한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일이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15장 29절]
여기서 목매어 죽인 것은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말한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구약의 율법을 준수하려고 했다. 로마 시대에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와 2세기의 의사인 아레타이우스는 사람의 피가 간질 치료약이었다고 말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원형 경기장의 놀이판에서 사악한 범죄자들의 생피를 게걸스럽게 취하여 ... 자기들의 간질을 고치려고 가져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오" 그는 그런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대조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동물의 피조차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 ... 그리스도인들을 시험할 때에 그대들은 피가 가득 들어 있는 소시지를 그들에게 제공한다. 물론 그대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금지된 것임을 알고 있다." 먹지 않으면 기독교인임이 드러나 죽을 것 임에도 불구하고 초대 기독교인들은 피를 취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감수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상한 괴리감을 느끼실 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어째서 할례는 거부하면서, 나머지 구약의 율법은 준수하려고 했는가? 다른 율법은 모두 지키면서, 할례 때문에 사도들 간에 격렬한 다툼이 일어나 교회가 분열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교리논쟁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헬라파 기독교인들과,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의 주도권을 가지고 교권다툼을 한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할례는 거부하면서, 이방인들은 지키기 어려운 편협한 유대인의 다른 율법들을 지키는 모순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대교회를 이룬 두 세력 간의 주도권 다툼일 뿐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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