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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법] ”일체 보살의 수승한 여러 바라밀을 부지런히 행함에 지치거나 싫증 내는 마음이 없도록 하겠나이다(勤行一切 菩薩殊勝 諸波羅蜜 心無疲厭).“
이 원에 대해 청량淸凉대사께서는 주석에서 「수행이리원修行二利願」이라 하셨다. 이리二利는 곧 자리이타自利利他이다. 수승함이 일반 보살행과 다르다면 어디가 다른가? 보통 일반 보살이 육바라밀을 닦음에 상을 여의지 못한다. 설사 상을 여읜다 말할지라도 깔끔하게 여의지 못한다. 화엄회상의 이러한 법신대사法身大士, 그들은 상을 여의되 깔끔하게 여읜다. 그래서 「수승한 여러 바라밀」이라 부른다.
바깥 경계에 대해 말하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함(利他)이다. 보시는 다른 사람을 도와 그가 결핍되지 않도록 한다. 재보시財布施를 하여 다른 사람이 많은 재물을 얻도록 하고, 법보시法布施를 하여 다른 사람이 총명 · 지혜를 얻도록 하며,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여 다른 사람이 일체 공포를 여의고 안전감을 얻도록 한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명심견성明心見性이다. 그것은 다르다! 자성 안에 담긴 보장寶藏이 전부 다 열려 드러난다.
지계 持戒바라밀은 곧 무외보시이고, 인욕 忍辱바라밀도 무외보시이다. 어떻게 이렇게 말하는가? 불제자가 계율을 지키는 모습을 중생이 보면 그의 마음속에 안전감이 생겨 두려워하지 않고, 일체 두려움을 여읜다. 예컨대 현대 사회에서는 중국이든 외국이든 모두 혼란하여 특히 재물을 약탈 당할까 두려워 감히 꺼내 보이지 못한다. 만약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면 당신은 재물을 꺼내 보여도 두렵지 않다. 그는 계율을 지켜 도둑질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그냥 두고 지키지 않아도 그는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둑질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면 마음을 놓아도 되고, 안전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래서 지계는 일체 중생에게 두려움이 없도록 하니, 무외보시에 속한다.
인욕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말이나 행동에 있어 의도가 있든 없든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 서로 원망하고 보복한다. 이러한 일로 매우 괴로워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누차 우리에게 권고 하시길, ”원한은 맺지 말고 마땅히 풀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든 원한을 맺어서는 안 된다.“ 하셨다. 가령 그가 인욕바라밀을 닦았다면 우리도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 상관하지 않을 것이고, 그도 심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인욕을 닦았다면 그는 나를 양해하고 용서할 것이며, 이런 일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욕 또한 무외보시에 속한다.
정진精進 · 선정禪定 · 반야般若 바라밀은 법보시에 속한다. 그래서 이를 귀납하면 모두 보시바라밀이다. 보살이 닦는 것은 초발심에서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줄곧 무엇을 닦는가? 보시를 닦을 뿐이다. 보시에는 이렇게 세 부류가 있다. 세 부류를 펼치면 곧 육바라밀이고, 더 펼치면 십바라밀이며, 더 확대하면 곧 보살의 무량법문이다. 무량법문을 귀납하면 곧 보시바라밀 하나이다. 보시의 진정한 정신은 곧 당신에게 내려놓으라고 가르친다. 반야는 당신에게 간파看破하라고 가르치고, 보시는 당신에게 내려놓으라(放下) 가르치니, 이것이 보살행의 양대 강령이다. 우리는 또한 「근행(勤行 ; 부지런히 불도를 닦음)」을 배워야 한다. 착실히 학습하여 지치거나 싫증 내는 마음이 없으면 이것이 진실한 자리이타이다.
[제5법] ”일체보살의 깊고 깊은 삼매를 두루 수습함에 지치거나 싫증 내는 마음이 없도록 하겠나이다(普遍修習 一切菩薩 甚深三昧 心無疲厭).“
이 법에서는 「심정深定」을 말한다. 삼매는 범어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정수正受이다. 수受는 곧 향수享受이고, 정正은 정상이니, 삼매는 곧 정상적인 향수이다. 삼매는 또한 선정으로 번역한다. 이로써 정상적인 향수가 곧 선정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범부의 향수는 다섯 가지 범주가 있다. 이는 대소승 경전에서 늘 말하는 고苦 · 락樂 · 우憂 · 희喜 · 사舍의 다섯 가지 느낌(受)이다. 몸에는 괴로움의 느낌과 즐거움의 느낌이 있다. 마음에는 근심의 느낌과 기쁨의 느낌이 있다. 버림(舍)의 느낌은 몸에 괴롭고 즐거운 감각도 없고 근심하고 기뻐하는 감각도 없다. 이러한 느낌을 사舍라고 한다.
버림은 매우 좋다! 실제로 버림은 곧 정수正受인데, 왜 정수라고 부르지 않는가? 당신이 버리는 시간이 너무 짧고 오래 누리지 못해 괴로움과 즐거움, 근심과 기쁨이 또 찾아온다. 당신은 영원히 버릴 수 없다. 만약 영원히 버리면 선정으로 바뀌고 정수로 바뀐다. 그래서 범부는 이러한 버림 · 정수의 시간이 대단히 짧고, 괴로움과 즐거움, 근심과 기쁨의 시간이 대단히 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다섯 가지 느낌은 보살이 깊고 깊은 삼매 속에서 괴로움과 즐거움, 근심과 기쁨을 완전히 여의게(舍離)된다. 그래서 그것은 정수正受이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학습하여야 하는 것이다.
청량대사께서는 이 조목을 「불리원不離願」, 일체보살과 떨어지지 않음이라 해석하셨다. 왜냐하면 보리도 菩提道 상에서는 반드시 우리가 수행함에 있어 조연이 되는 일체 선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참학하는 일(五十三參)은 곧 이러한 일을 설명한다. 선재동자는 군중과 떨어지지 않고 대중과 함께 닦는 것(同修)이다. ”원컨대 일체보살과 뜻과 행을 함께 하길 바라나이다(願與一切菩薩 同一志行).“ 보살과 뜻을 함께 하고 원을 함에 지치지 않고 싫증 내는 마음이 없어야 수학 상에 성취가 있고, 진정으로 큰 이익(受用)을 얻을 수 있다.
이 한마디는 일체 시간에서, 일체 장소에서 행해야 한다. 또한 사람에 대해 · 물건에 대해 즉 일체 경계와 인연(境煙)에서 청정심을 유지하여야 한다. 경境은 사물환경이고, 연緣은 인사환경이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참학하는 일은 전부 이 두 범주의 환경과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경문 곳곳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아마도 일반적으로는 이런 선지식이 머무는 환경, 그의 생활환경을 먼저 살펴보고, 그런 다음 그 자신의 몸가짐, 그의 언행을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정보正報의 환경이다. 여기에서 선지식은 자신의 청정 · 평등각淸淨平等覺을 성취한다. 육근이 바깥 경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접촉하여 갖가지로 또렷하고 갖가지로 명료하면 그것이 지혜이다! 비록 명료할지라도 여여부동如如不動하면 그것은 곧 깊고 깊은 삼매(甚深三昧)이다.
그래서 우익蕅益대사께서는 ”경계와 인연에는 호추好醜가 없다“라고 잘 말씀하셨다. 호추好醜의 뜻은 매우 넓다. 바꾸어 말하면 경계와 인연(즉 인사환경과 물질환경)에는 좋고 나쁨이 없고, 선과 악이 없으며, 옳고 그름이 없고, 또한 그릇됨과 올바름이 없거늘 일체 선과 악, 옳고 그름, 그릇됨과 올바름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말은 참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실 · 진상事實眞想이다.
예를 들면 우리 몇 사람이 똑같이 이 그림을 보는데 어떤 사람은 매우 좋아서 아름답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치가 없다고 느끼니, 표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바깥 경계에 어찌 표준이 있겠는가? 표준은 어디에 있는가? 표준은 당신 자신의 망념에서 생긴다. 이것이 사실 · 진상이다. 사실 · 진상을 또렷이 이해한 후 당신은 비로소 수행했다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마음은 경계를 따라 굴러 범부가 되니, 부처님이 당신에게 가르치신 것으로부터 전혀 이익(受用)을 얻을 수 엇다. 반드시 사실 · 진상을 또렷이 이해하여야 한다. 일체 법은 모두 자신의 심념心念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지 바깥 인연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경계와 인연에서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일 때 즉시 틀렸다고 깨달아야 한다! 경계 인연 속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 자신이 틀렸다. 과실은 자신의 이 한쪽에 있거늘 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가? 왜 미혹 · 전도 되는가? 그 근본 업인은 여전히 번뇌와 습기이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법문을 강설하셨다. ‘법’은 방법이고, ‘문’은 문이자 길(門道)이다. 이러한 방법과 문도는 모두 우리에게 번뇌 · 습기를 항복시키라고 가르친다. 항복은 곧 그것을 누르고 조복시켜 그것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게 함을 말한다. 우리는 할 줄 모르는가? 실제로 말하면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지 않아 번뇌가 또 현행한다. 날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 왜 잊어버리는가? 경각심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원인이다. 두 번째 요소는 실제로 여전히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저히 알아야 경각심이 충분하고, 경계속에서 당신의 마음이 평등 · 청정하다. 평등 · 청정이 곧 깊고 깊은 삼매이다. 이러한 마음이 작용을 일으키면 지혜가 생긴다. 지혜는 곧 깨달음이다. 이것이 참 공부이자 참 수행이라 한다. 그래서 참 수행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곳, 육근이 육진경계에 접촉하는 곳에 있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온 우주 법계에 회향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첫댓글 원한은 맺지 말고 마땅히 풀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든 원한을 맺어서는 안 된다.“ㅡㅡㅡㅡ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