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싸우시는 부모님,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돈을 아껴서 남부럽지 않게 살기를 원하시며 부자가 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여기셨던 것 같은 엄마.
형제들이 많아서 일이 많기도 했지만 늘 마음이 편치 않다는 이유로 집안을 잘 보살피시지 않아서 우리 집은 늘 불안하기도 하고 또 지저분했다.
사춘기 시절을 회상해 보아도 아빠는 엄마를 의심하는 증세가 있어 술을 먹는 날이면 엄마를 가둬놓고 때리곤 하였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며 생각하기도 싫은 지옥으로 느껴진다.
난 그대로 현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정말 이상한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나는 죽으면 멋진 배우가 될 수 있어!',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런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죽어야 해!' 누구에게도 맘을 털어놓지 못하고 그런 상상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혼미하고 어둡고 침울했다.
어느 날 상상으로만 하던 그 모습이 되기 위하여 수면제를 먹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나 그 후로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멍하여 성적이 계속 떨어졌다. 자연히 자신감이 없어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며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나의 성적과 가정형편으로는 대학을 갈 수 없겠다는 생각에 미리 마음속에서 부터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나는 그때 서울을 매우 동경했다. 보통 지방 사람이 갖는 것보다 훨씬 더 서울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 그렇기에 서울 상경을 원했다.
하지만 아빠는 완강히 반대하며 타자나 배워 작은 회사 경리로 취직해서 결혼비용을 준비하여 시집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난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나는 계속 내 뜻을 밝혔고 어렵게 아빠의 허락을 받아 얼마 후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봉제공장에 미싱보조로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해서 꼭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으로 일하며 지냈지만 현실은 너무나 힘들고 만족할 수 없었으며 이러다간 꿈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당시 고향의 부모님들은 동생들 몰래 빚쟁이들을 피하여 전세 돈을 빼서 친척집에 피신 중이어서 더욱 암담했고 의지할 사람도 편히 쉴 공간도 없었다.
이 즈음 내 병은 서서히 시작되었다. 가장 첫 증상은 아무리 심하게 일해도 피곤하지 않고 기분이 좋았으며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어느 날 부터 인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 회사에서는 어느 직원이 걸레를 들고 가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성실하니 내가 회장님께 말해서 식당 물품을 담당시켜 주라고 해야지'라고 생각하였으며 귀에 '속옷을 벗어! 속옷을 벗어!'하는 소리가 들려 들리는 대로 행동했다.
이런 이상한 행동을 본 회사 직원들이 집으로 연락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내가 정신병에 걸린 것을 인정하지 않고 좀 쉬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를 집에서 쉬게 하셨다.
쉬고 있어도 증상은 계속되었고 망상으로 집 밖에 나와 돌아다녔으며 이상한 행동을 계속하였다. 나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부모님과 친척들의 상의 끝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의 병원 생활에 대한 기억은 기사 아저씨들이 강제로 약을 먹였다는 것, 내가 사람을 때려 보호병실에 갇혔던 것, 항상 갇혀있다는 답답함 뿐이었다.
병을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당장 내 목을 축여줄 시원한 음료수, 먹고 싶은 것, 오직 퇴원만이 최고의 관심사였다.
그때 내가 입원한 병동에는 여러 번 입원하여 병원 생활을 해 본 언니들이 '약을 안 먹으면 재발하게 된다'는 말을 하여 '나도 약을 꼭 먹고 다시는 입원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였다. 그후 시간이 흘러 한 달 여 만에 퇴원을 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퇴원을 하였어도 특별히 할 일도 갈 곳도 없어 그냥 새 언니 집을 왔다 갔다하면서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나 하는 원망과 서러움으로 울기만 했다. 그러던 중 엄마는 다른 사업을 하신다고 대구로 가셨고 아빠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그래서 식사 준비와 집안 살림을 자연히 내가 맡게 되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어렵게 음식을 만들어 놓으면 맛이 없다고 아빠는 구박하였고 움직이기를 싫어하며 잠만 자려는 나를 아빠는 게으르며 아무 쓸모도 없다고 더욱 구박하셨다. 죽고 싶었다.
그냥 죽어버리려는 생각에 음독을 하였다. 약을 먹은 그 순간 난 정말 무서웠다. 내가 정말 죽는 것인가! 내가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몹시 두려웠다.
시간이 흘렀지만 나에게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좀 시간이 지나니 이제는 음독한 것이 내 몸에 해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어서 약국에 가서 상의도 하고 혼자 생각에 귤을 먹으면 될 것 같아 귤을 많이 사먹기도 하였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그저 시간에 질질 끌려가는 그런 삶이었다.
어느 날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아빠 허락을 얻어 취직을 하였다. 병을 숨긴 채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낮에는 빵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정말 에너지가 충만한 것으로 느껴졌다. 점점 기분이 좋아지면서 어느 유명한 여행가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에 신문사에 전화를 하기도 하였으며 유명 아나운서를 만나려고 방송국에 가서 한밤중에 비를 맞으며 기다리기도 했다. 망상 속에 빠졌으며 환청이 들릴 때 환청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그러다 두 번째 병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보다는 답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늘 퇴원하고 싶었다. 나는 주치의사의 격려를 받으며 자신감 있게 보냈다. 이젠 퇴원을 해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퇴원하여 생활하였으나 여전히 힘이 들었고 몇 차례의 재발로 인해 아빠의 냉대를 받았다. 거기에다 엄마의 가출은 나를 더욱 좌절하게 했다. 재발과 퇴원을 여러차례 반복하면서 나는 더욱 고민과 우울함으로 빠져들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병원에 계속 다니며 치료하려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어느 날 나에게도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병원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지금 다니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 안내서를 내게 건네 주었다.
그 안내서에는 얼마 후에 생활훈련센터인 사랑의 집이 곧 개설될 것이며 그 곳은 우리와 같은 환우들이 모여서 예배 드리고 교제하는 교회라는 것이었다.
정말 귀가 솔깃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안내지에 적힌 전화번호의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를 받으시는 분은 부드러운 목소리의 목사님이셧다, 알고 보니 목사님의 아들도 이 병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서 복음가수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직장생활도 하고 있다고 하셨다. 아주 작지만 새로운 희망의 불길! 그래서 개설 날자와 회비에 대하여 문의한 후 꼭 찾아 뵙겠다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무료가 아니고 유료이며 또 일을 하지 않고 사랑의 집에 나가면서 드는 적잖은 돈이 약간 걱정이 되었다. 엄마에게 솔직히 상의하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정말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어서 일요일이 되기를 기다려 한달음에 교회를 찾았다. 생각했던 큰 건물이 아닌 가정집을 이용한 조그마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 곳이 초라하다는 생각보다는 아늑한 나의 집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목사님 뿐 아니라 김교수님도 겸손하고 친절하셨으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풍겨 나는 그런 분들이셨다.
작은 칭찬에도 정말 신이 났다. 열심히 출석하며 잘 지냈으며, 프로그램이 없는 날에도 사랑의 집에 나와서 시도 쓰고 글도 읽고 정신보건간호사 선생님과 상담도 하고 무슨 문제든지 어려움만 있으면 속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했다.
그렇게 지내면서도 죽고 싶은 유혹을 떨혀 버릴 수 없어서 나를 해칠 약을 샀다가 버리기도 하였다.
그런던 어느 날 군 생활을 하는 동생 면회를 갔다. 그런데 상사에게 맞고 반 우울증 환자가 되어 잇는 동생을 보고는 몹시 괴로웠다.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랑의 집에 나가면 뭣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가기가 싫었다. 안 나가면 좀 편하려니 생각을 하였는데 더욱 힘들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TV에서 육체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한밤중에 병원에 와서 진통제를 호소하는 사람을 보며 '나보다도 더 힘든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의 외침이 들렸다. '살자! 일어서자! 힘들지만 해보자!'
우선 작은 움직임을 갖기로 결심하고 컴퓨터 워드 자판 연습과 함께 엄마 몰래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이렇게 신앙을 키우며 열심히 살자 나에게 또 다른 감사의 제목이 생겼다, 새 학기부터는 사랑의 집 봉사회원으로 임명하시고 회비도 면제해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생활자세를 바꾸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목표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과 식사 절제하는 것, 감사노트 기록하는 것, 성경 공부하는 것을 계획하였다. 그렇게 산 것이 하루, 일주일, 한 달이 지나자 체중이 5kg이나 빠졌다.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때로는 며칠에 한 번씩 작은 실패에도 힘이 빠졌다. 그럴때마다 선생님의 말씀, 5분마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씀을 상기하며 힘을 얻었다. 또 다른 삶의 태동을 느끼면서 힘겹지만 작은 움직임!
뼈아픈 작은 움직임이 나를 살린다! 움직이기 싫더라도 작은 움직임부터 하자! 뼈아픈 작은 움직임이 내 인생을 바꿀 것이다! 눕지 말고 뼈아픈 작은 움직임을 계속 하자! 5분마다 다시 시작하자! 또 다시 넘어질 수도 있지만 난 다시 일어서리라! 욕심내지 말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힘차게 내딛자!
그렇게 힘을 내며 하루하루를 살았으며 체중도 9kg이나 줄였다. 지금 내게는 작은 빛이 보인다.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면 마치 어두운 긴 터널을 빠져 나온 것 같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가 눈에 들어온다.
나의 미래와 생에 대한 문제에 대해 이 성경 구절로 대신하려 한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것이라(이사야 49장 19절).'
나와 같이 나태함과 죽고 싶은 생각에서 헤매는 장애인 친구들! 삶은 소중한 선물이랍니다. 선물을 소중히 여기고 고개를 돌려 지금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세요. 고개 들어보세요! 힘을 내세요! 그리고 열심히 살아 봅시다! 내게 주어진 생명 한 번 멋지게 가꾸어 봅시다!
장애인 친구 여러분 희망을 버리지 말아요! 그리고 노력 없이 무엇을 바라지 말고 힘들지만 우리 함께 시작해요. 그리고 드높이 날아요. 저 아름다운 창공을 멋지게 날아 봅시다. 뼈저린 작은 움직임! 넘어지나 다시 일어서는 것! 우리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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