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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산꾼의 산중산담 山中山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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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리고 태마산행기 스크랩 초보산꾼 발길 닫는 곳 : 삼각산 중흥사 - 김시습 흔적을 찾아서 2
초보산꾼 추천 0 조회 135 16.11.06 20: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초보산꾼 발길 닫는 곳 : 삼각산 중흥사(김시습 흔적) .. 성안답사 

 

일시병신년(16년) 미틈달 11월 닷새 흙날   

인원혼자서

어딜 : 북한산성 입구 ~  중흥사 ~ 행궁지 ~ 대남문 ~ 부왕동암문 ~ 노적사 ~ 북한산성입구

            (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3371 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가을을 얘기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찾아온 겨울손님에 전국이 잠시 숨죽이고 있고

덩달아 터진 사회 분위기까지 뒤숭숭하기만 한데...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배우면서 그런 역사는 되풀이 하지 말자고 외치고 또 외쳤건만...

일찍 찾아온 한파만큼이나 힘든 현실... 모든 것을 버린 매월당 김시습의 채취는 어느 때보다 따뜻할 것 같다

 

북한산성 성안 답사 진행도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은 땅의 기운이 가장 승한 곳으로 나라 안에서 네 곳을 꼽았다고 한다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북한산), 진잠(대전)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을 정기가 빼어난 명산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삼국시대 이래 한국사의 중심이 되어 온 수도 서울의 주산이요 진산인 삼각산을 으뜸으로 꼽았다.

그 삼각산에 축성한 북한산성에 자리 잡은 중흥사를 중심으로 성안의 답사를 떠나본다

자료 : http://cafe.daum.net/jungmanroom

 

아침 일찍 출발하여 북한산성입구에서 하차하여 매월당의 흔적을 찾아가는 두번째 답사를 시작한다

 

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서 도로따라 직진

 

의상봉 갈림길을 지나면 대서문이 나온다

대서문(大西門)  홍예(虹?) 형태의 문

북한산성의 성문 중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고  대동문 다음으로 규모가 큰 대서문은  북한산의 주통로이며 정문이다

도성의 궁궐에서 왕이 북한산성으로 들어오는 문이 바로 이 대서문인데 조선 숙종 38년에 이 문을 통해 행차했다고 한다

이 곳 북한동 마을은 이승만과도 관계가 깊은데 현판글씨도 이승만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홍예 양쪽에 있는 문루의 배수시설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누혈이 인상적이다

 

우측 산성으로 올라가면 등운각을 볼 수 있는데... 다음 성곽종주할 때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북한산성

길이가 12.7㎞인 북한산성은 백제 때 축조해 고려시대 때 증축했다. 조선 숙종조에 대대적으로 축성했다.

북한산성에는 북문, 대동문,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대서문 등 6개의 성문과 6개의 암문(暗門), 1개의 수문(水門),

군사 지휘 장소인 3개의 장대(將臺,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다.

 

무량사도 지나고,,, 하산 때 다시 들러 보기로 하고...가운데가 노적봉인데... 구름인지 미세먼지인지...

 

 

북한산성의 여러 창고 중 가장 아래에 있어 하창(下倉)이 있던 자리로 지금은 북한동역사관이 있는 만남의 광장

 

 

대남문 이정표를 계속 따라 올라 오면 법용사가 있는 국냉사 갈림길도 지나고

 

 

계속 올라오면 중성문이 보인다

중성문 (中城門)

이 성문은 북한산성의 북문, 동문, 남문, 서문의 경로에 있지 않고 대서문에서 행궁으로 연결되는 길 위에 있다.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을 쌓은 이듬해(1712년) 숙종은 몸소 산성에 행행(行幸)하였는데

이 때 대서문 쪽이 낮으므로 든든한 방어를 위해 안쪽에 중성(重城)을 쌓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2년 뒤(1714년) 성이 완성되었으니 그 때 만든 문이 중성문(中城門)과 암문(暗門)이었다

 

오늘은 시구문으로 통과해 본다. 어느분은 시체가 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옆에도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옛날에는 이 성안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고... 죽어서 육신은 대문으로 나갈 수가 없었으니...  시구문(屍口門, 屍柩門)

 

중성문을 나오면 바로 노적사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온다. 오늘의 목표인 적석사지를 찾기 위해 노적사로...

 

노적사 직전 좌측으로 가서 출입금지를 넘으면 갈림길에서 적석사지는 좌측으로 가야 한다. 우측은 노적봉으로...

 

출입제한 구역으로 일찍 이 곳에 온 이유이다. 좌측으로 해서 들어간다

 

지금은 사람이 잘 찾지 않아 길이 희미하지만 계속 오르다 보면 석축이 나오면서 이곳이 절터였음을 실감한다

이 길따라 계속 올라가면 적석고개로 해서 대동사로 올라갈 수 있다. 북장대지도 담에 답사 해보기로 하고...

근데 이런 소중한 문화재가 있는데도 비법정탐방로로 지정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듯...

 

의미를 알 수 없는 각자가 새겨져 있는 훈련도감 유영지 안내판이 있는데 관리가 안돼 읽을 수가 없다

 

 

이 곳에서 우측으로 보면 방위표시와 함께 각자가 새겨져 있다.

 

字는 사전을 찾아 보면 다섯번째 천간이라 하고 창과 방패 중의 창이고 창 모(矛)의 옛 글자 형태이다고 한다

북한산성을 쌓으면서 적석사는 훈련도감의 창고가 되었다(今爲訓局倉舍-北漢誌)는 기록으로 보아

훈련도감이 들어서면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바위 아래 이런 연못도 있다

북한지에 기록된 연못을 보면 모두 26곳인데 11개소가 훈련도감 관할구역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 연못도 그 중 하나로 추정된다

어느 성이나 성안에는 연못이 있는데 이 곳 연못도  비상시에 사용할 수원(水源)의 역할을 했을 것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적석사의 터로 보이는 넓은 뜰에 주축돌이 많이 보이는데 관리가 안돼 맘먹고 찾아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슬이 쌓여간다는 노적봉(露積峰)을 품고 있는 노적사에 잠시 들려 본다.

'북한지'를 쓰신 성능스님이 폐사된 사찰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절로 이 사찰도 적멸보궁으로 알려져 있다

노적사 (露積寺)

진국사(鎭國寺)란 절이있던 자리로 숙종때 성능스님이 폐사된 사찰을 창건했던(八十五間 僧聖能所?) 절이었다. 

성능 스님은 조선 숙종(1712년) 당시 북한산성 축조할 때 팔도도총섭(전국 승려 통솔 직책)을 맡았으며

북한산의 형세와 지세, 그리고 산성의 윤곽과 절, 문루, 장대(將臺), 창고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북한지(北漢誌)’를 남긴 인물이다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112  }}

 

하늘에서 내려와 쌓인 이슬을 담은 이 감로수의 맛은 어떨까?

 

노적사에서 담아 본 의상봉 능선 -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로 국냉사도 조망된다

 

다시 원위치하여 대남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진국로와 정자를 지나 잠시 좌틀한다

 

해서체로 백운동 입구라는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 쓴 암각문을 새긴 바위가 보인다. 도봉산의 도봉동문과 같은 의미이다

 

옛 문헌에도 나와 있는 여기담... 네이버 지도상 정자와 용학사 갈림길 중간 쯤 계곡에 있는데...

 

갈림길에서 대남문으로...

 

 

여기부터 김시습의 흔적이 남아 있는 중흥사권역으로 들어간다

 

총용사들의 선정비석군이 산영루와 함께 보인다

 

 

 

비석군 옆에 있는 산영루

고양 북한산 산영루지(高陽 北漢山 山映樓址)

산영루는 북한산성 내에 위치했던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인 총융청에서 관리를 담당했던 중요한 건물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 당대 많은 지식인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2015년 고양시의 역사문화복원사업을 통해 산영루를 복원하였다.

다음 위키백과

 

누각 위로 떠오른 보름달이 산과 함께 계곡물에 비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북한산 8경 중 하나로 꼽힌다는데...

 

중흥사지 갈림길

 

현재 한창 복원 공사중이며 대웅전과 요사체만 남아 있다

중흥사(重興寺)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이 절이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춘 것은 1713년(숙종 39)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이다.

성내에는 성문과 수문(水門), 장대(將臺)와 창고 등을 지키기 위한 승군(僧軍)이 주둔하였다.

승군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僧營)을 설치하고 승대장(僧大將) 1인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하게 하였다.

승병들의 주둔에 필요한 물품과 군기물(軍器物)을 저장하기 위한 승창(僧倉)을 이 절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두었다.

1915년에 홍수로 무너진 뒤 중건되지 못하였고, 현재에는 주춧돌과 축대만 남아 있다

자료 : 다음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3977

 

 

 

대찰로의 위용을 빨리 보고 싶다...

 

매월당이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며 읽던 책을 불사르고 방랑의 길에 나선 중흥사

되돌아 나오는데 자꾸 나의 시선을 잡는다

 

그런데 북한동역사관의 자료와 북한산성 자료를 보면 이 곳에까지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중흥동은 고려 현종 때 거란 침략시에 피난처였다고 한다

 

다시 갈림길에서 조금 올라오면 중창지.  북한동역사관이 하창이였다면 여기는 중간에 있어 중창

 

바로 갈림길에서 잠시 태고사를 들러본다

 

태고사는 막돌로 지은 산신각이 특이한데... 산신각을 지나 끝까지 올라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조계종의 중시조이며 태고종의 중조인 태고 원증국사 보우의 사리를 안치한 승탑(부도탑)이 있다.

 

태고사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데 태고보우 국사의 내력이 새겨져 있는 원증국사탑비가 있는데

목은 이색이 글을 짓고, 당대 명필가였던 권주가 썼다는 안내판이 있어 꼭 한 번 보기를 권하고 싶다

 

 

날씨만 좋았다면... 의상봉 능선이 조망된다

 

대남문으로 오르다 보면 호조창지도 지나고

 

청수동암문 갈림길을 지나면서 이제 행궁권역으로 들어 간다. 행궁을 보기 위해서는 창수동암문 방향으로 우틀

 

지금 초보산꾼이 걷고 있는 길이 옛날에는 대로였을 것이고... 왕의 임시 거처이니...

그래서 행궁은 대로변에 있지 않고 숲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행궁도 지금 한창 공사중...

 

이렇게 복원이 다 끝나면... 가슴이 뛴다. 빨리 보고 싶다. 중흥사와 함께... 그런데 적석사지는 왜 막는겨?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 와 안내판도 지나고

 

위에서는 터 같지 않던데... 축대를 보니 건물이 있었음을 실감한다. 근데 가운데 홈은 무슨 역할?

 

대동문 갈림길과 보국문갈림길을 차례로 지나 대남문 갈림길로 우틀하여 올라오면 보국사지와 금위영 유영지가 나온다

 

한양 도성을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세 군영(軍營)에서 나누어 지켰듯이 북한산성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지켰다.

 

북한산성 금위영 이건기비

 

그런데 2014년에 추정으로만 알려졌던 북한산성 내 금위영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각자가 발견 됐다.

바로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 조금 계곡따라 내려오면 맞은편 바위에 각자되어 있는 바위가 보인다

 

조선 후기 오군영(五軍營)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설치된 금위영은 국왕 수호와 수도 방어의 핵심 군영의 위용을 담은 듯하다

 

대남문까지 가는 길에도 계속 안내판이 나온다

 

 

대남문에서 우틀... 여기까지 답사는 끝나고... 의상봉 능선 의상봉에서 증취봉까지 걸었으므로 나머지를 이어가기 위해...

 

원래 청수동 암문으로 올라와야 하는데 중간에 공사중이라 출입금지...지나고

 

나한봉도 복원 공사중... 근데 왜 적석사지는...방치하는 겨?

 

미세먼지속에서도 나월봉 증취봉으로 이어지는 의상봉 능선의 위용은 살아 있네...

 

오늘은 나월봉은 우회한다. 출입금지 이기도 하고...

 

부왕동 암문에서 우측으로 하산 시작

 

예전에 증취봉에서 하산할 때 갈림길을 만나 다시 우측으로... 직진은 증취봉

 

우측으로 부왕사지(부황사지) 갈림길을 만나는데 부왕사는 이미 산행기를 남겼으니... 좌측으로...

 

청하동문 각자 바위군... 아까본 백운동문과 같은 의미일 듯...푸른 노을.. 저녘에 한번 올라와 봐야지...

옆 바위에는 1973년에 새겼다는 기도처 각자도 있다. 이 각자는 몰상식한 자의 소행. 

 

조금 더 내려오면 시를 짓고 육영사업을 하셨다는 여자분의 각자도 보이고... 최송설당

 

이제는 계곡에서 담아본 산영루

 

북한동 역사관에 있는 100년전 산영루

 

만남의 광장으로 내려와 북한동 역사관에 들려보면... 초보산꾼과 함꼐 답사 했던 탕춘대성 흥지문의 옛모습도 보인다

 

여기까지 사람들이 살았기에 마을 이름이 북한동 이였다. 그 길을 따라 오다 못들린  경기도 전통사찰 제1호로 지정된 무량사

 

고종의 후궁인 순빈(淳嬪) 엄(嚴)씨의  원당(願堂)으로 알려진 창건설화가 전해지는 무량사에서 본 노적봉

 

자연관찰로로 내려와 이렇게 답사를 마친다

 

 

스물한 살의 매월당(1435~1493년)이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며 읽던 책을 불사르고 방랑의 길에 나선 곳이 바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하면서 대찰로 변모한 중흥사(重興寺)이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전후 복구를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로 대규모 사찰로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지금은 김시습의 채취와 승병들의 채취만 살아 있는 중흥사를 찾아서 떠났던 두번째 길

임금의 임시 거처인 행궁이 있는 만큼 성안에 너무도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었다

중흥사나 행궁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적지를 복원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금위영의 각자 처럼 아직도 북한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유적들을 더 찾아야 하는 노력도 필요할 듯하다

훈련도감으로 사용했다는 적석사지도 지금처럼 잡초속에 방치를 할 것이 아니라

노고사 사찰에서 10분도 안되는 거리인데 적석사지까지만이라도 다시 개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행궁과 중흥사지가 다 복원되면 다시 한번 답사하고 싶다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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