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고향은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와 동향인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면 왕상리 56번지에서 1등 호세를 바치며 살던 커다란 입구자집이었다. 영흥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요덕수용소와 북한에서 관광특구로 소문난 원산이 가까이 있고 산과바다 강과들녘이 모두 함께 잘 어우러진 풍광이 아주 수려한 곳이기도 하다. 강에서는 금방 낚은 연어로 국을 끓여 천렵을 하고 산과 바다에서는 온갖 먹거리가 풍요로워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들이 넓은 이곳서 자기 땅만 밟고 사는 입구자집에 어머니는 맏며느리로 시집을 오셨다.
아버지 나이 열셋, 어머니 나이 열여섯에 어머니로서는 이크나큰 집안 살림이 얼마나 무겁고 벅찬던지 한번은 큰 시누이가 친정에 와서 밭을 팔아 가는걸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너무나 고맙고 기뻤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 밭은 하루 종일 일해야 두이랑 밖에 못매는 아주 큰 밭이었기 때문이었단다. 이 사실을 알고 아랫동서인 나의 작은어머니는 어느 날 어머니를 찾아와 "형님은 맏며느리가 되어 시누이가 땅을 팔아 가져가도 어찌 말 한마디도 안하시냐"며 어머니를 원망 하셨단다.
어머니는 영흥과 멀지않은 고원 중사박리란 곳에서 엄하신 진사할아버지와 인자하시기로 동네 소문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맏이로 태어나셨다. 중사박 외갓집 주변에는 과일나무로 둘려 싸여있어 과수원 같았던 모양이다. 진사 할아버지는 해마다 봄이 되면 동네 아이들을 불러놓고 첫 번째 과일인 슁튕이(자두일종)를 따서 싫컷 먹이셨다. 이 행사가 있고나면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놓고 가을이 다가도록 과일들을 따먹을 수 있는 이집만의 독특한 가풍? 내력?이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어느 봄날 진사 할아버지의 슁튕이 시식행사가 늦어지자 동네 아이들은 이 시식행사를 기다리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출타를 틈타 몰래 따 먹다가 귀가 하시는 할아버지께 들키고 만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날 다른 모든 과일나무들 까지 몽땅 다 베어 버린 것이다. ‘버릇없는 나무를 집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진사할아버지의 철학은 너무나 확고하셔서 이 상황에 어느 누구도 불만이나 불평은 감히 말 할 수도 없는 할아버지만의 가르침이었다. 그날 다 베어진 과일나무를 본 나이어린 엄마는 얼마나 아깝고 안타까웠는지 그때의 심정을 이곳 청주에 와서도 두고두고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어머니는 시집을 와선 땅부자 일부자 때문에 넌더리를 내셨다. 동네 이웃들의 애경사를 우리 집에서 다시 작은잔치로 베풀어 줘야하는 고된 삶이 한 예이다. 어떤때는 가마솥이 하도 커서 아예 솥안에 들어가 닦기도 하셨다니 … 이렇게 사셨던 어머니는 자기의 삶이 전부인양 자기 삶의 방식대로 딸을 시집보내는데 사윗감 고르는 그 기준이 부잣집과 맏며느리만은 절대 사절 배제시키는 모순을 저질렀다.
남편 찾아 천리길
8.15 해방이 되자 북쪽은 공산화로 변했다. 이때 지주들과 지식인 기득권자들은 숙청의 대상이었다. 대다수의 지주들은 집과 토지를 국가에 모두 빼앗기고 남으로 남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혼자 맨몸으로 남쪽 상황을 살피러 내려 오셨다 가 1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자 어머니는 나를 업고 모든 가족을 남겨둔 채 아버지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때의 탈북 과정은 요즈음 텔레비젼 탈북민들의 탈북과정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집은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하는 이산가족 실향민의 신세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늘 수심에 찬 얼굴로 온갖 병을 평생 달고 사시며 어머니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 종일 종종 걸음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다시피 했다. 생활은 엄청난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시나브로 정착하기에는 달랑 입고 있는 옷이 전 재산인 생활력이 젼혀 없는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명절이면 평소 한잔도 못하시는 술과 담배를 앞에 놓고 가슴에 맺힌 회한을 소리 없이 눈물 흘리시며 괴로워 하셨다. (부모님 두 분은 감리교회 권사이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이 모든 것들 다 버리고 갈 것.” 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시며 살림도 출세도 미련 없으시고 친척들이 찾아오면 베풀기나 좋아하시며 사셨다. 나는 우리도 남들처럼 예쁜 가구도 갖고 꾸미며 살고 싶고 사치도 부려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나로서는 보모님 하시는 일이 영 마음에 안들고 싫었다. 그러나 한 가지, 어렵던 그 시대에 우리들에게 피아노와 스케이트를 가르쳐주신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이사 온 청주
서울서 4년을 버티며 살던 아버지는 고향사람들을 피해 아무도 모르는 청주를 선택한 것이다. 청주에 도착해 어둑어둑해지자 잠잘 곳을 찾았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사직동 395번지 동네 하나뿐인 기와집으로 들어가셨다. 마침 이집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단 2식구 뿐 다른 가족은 없었다. 사대부 양반으로 보이는 두 분은 모두 연세가 많아 보였고 두 분 모두 머리카락이 호호 백발이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곳서 하룻밤만의 신세가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세월이가면서 할아버지는 아예 마당 한구석에 손수 조그마한 집을 지어주시고는 함께 살도록 해 주셨다. 할아버지와 우리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마루 끝에 서 계시다가 안방 벽장 속에서 밤 대추 곶감을 매일 조금씩 내 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나에게는 평생 잊어서는 인될 친 할아버지, 친 할머니, 친 부모님 같은 분들이시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모두 세상을 뜨시고 나서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할아버지의 집을 나왔다. 우리는 그곳서 살고있던 집 앞의 논과 밭을 사서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지키며 새로이 제2의 고향을 만든 것이다.
한번은 이곳서 영원히 잊지 못할 드라마틱한 사건도 있었다. 바야흐로 1963년 박정희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일 이있던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저녁식사를 일찍 마치신 동네 아저씨 몇 분이 우리 집 평상에서 라디오로 개표방송을 듣고 계시는데 뒷동네 고샅에 사는 최 씨가 석교동 시장에서 신발 수선일 을 마치고 귀가 하던 중 우리 집을 들르셨다. 그런데 최 씨는 무언가 작심한 듯 안절부절못하시며 자기 집을 오락가락 하시더니 드디어 아버지께 한마디 던지셨다.
“한 주사 , 날 모르오?”
잠시 집으로 가다가 다시 와서는
“한 주사, 날 그렇게 모르시오?”
또다시 돌아와서
“어찌 그렇게 모른단 말이오.” 에 아버지는 한마디 대답을 못 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최씨께 자신이 대접을 소홀히 해드려서 시비를 거는 것으로 착각했다 공손히 응대해 주시며 자리에 앉히자 최 씨는 자기의 지나온 삶을 막힘없이 꺼내놓으셨다. 참 별일이다. 청주에서 영흥까지 보따리 장사를 다니셨다고 우리모두를 깜짝 놀랬키셨다. 아버지는 아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청주에 숨어 사셨건만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시던 분이 이웃서 함께 살면서 10년이 넘도록 어찌 말 한마디 안하고 침묵으로 계셨단 말인가 ? 최씨는 영흥의 입구자집 내력 뿐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묘까지도 자기 손금보듯 잘 아시는 것이었다. 최선생이 시치미를 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한주사가 이곳에 와서 이렇게 살줄을 누가 알았겠느냐.’ 한마디였다. 이제는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 아는 체해도 되겠다고 이유를 말씀하셨다. 그 당시엔 한편의 영화 같은 사건이었으나 이제는 먼 추억의 옛날이야기로만 남아있다.
6.25를 치른 1960년대 우리들의 삶이란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한 형편이었다. 그때는 거리에 거지들도 즐비하게 많았다. 우리집에 단골로 오는 아줌마는 허리춤에 양쪽으로 깡통 2개를 끈으로 질끈 매달고는 어른인데도 항상 코와 침을 질질 흘리고 외모가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 아줌마가 우리집을 참 자주 드나들며 아침이면 부엌에서 가끔 불도 때주며 밥을 지어 얻어갔다. 찬밥이 충분히 있어도 엄마는 꼭 새 밥만을 항상 고집하며 새로 지어서 주시는 것이 난 영 마땅치 않았다. 아무리 갖 지은 밥도 집에 가면 찬밥이 되는건 상식이거늘 엄마는 꼭 새 밥만을 고집해 주었다. 나는 아줌마보다 우리엄마가 더 밉고 남들 보기에도 창피했다. 한번은 부엌에서 밥솥에 불을 때고 있는 아줌마를 발견했다. 이날 아침 나는 더 이상 참을수 없어 화를 있는 대로 다 내고는 아침밥이고 도시락이고 다 필요 없다며 기차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고는 그냥 학교를 가 버렸다. 심산이 보통 꼬였던게 아니고 한마디로 철이 없었던 것이다. 먼 후일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북의 고향 가족들 때문 이었다는걸 늦게서야 깨달았다.
나는 왜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위로 한번 제대로 못해 드렸을까 , 어
처구니 없고 한스럽기만 할뿐 가슴 아픈일이다. 돌아가신지 10년 20년이 지났건만 이 황량한 심정을 어찌 말로, 글로 다 풀어낼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살이 찢기어오는 느낌이다. 오늘 밤이라도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맛있는 음식과 예쁜옷 한 벌 곱게 입혀 드리고 정답게 손잡고 걸어보고 싶다.
아∼ 아∼ 얼마나 내가 불효막심했으면 꿈속에서도 한번 안 나타나주실까…
가제 : 나의 인생
잊혀지지않는 나머지 공부
우리 어린 시절에는 공부보다는 노는게 우선이고 무엇보다도 첫째이며 전부였다. 늘 밖에서 놀다가 늦게 들어와도 엄마는 걱정을 하거나 찾지도 않으셨다. 항상 공부가 끝나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우리들은 모여서 운동장 한구석에 책가방을 수북이 쌓아 놓고는 편을 갈라 게임을 시작했다. 고무줄놀이, 말타기 놀이, 떨어진기차놀이등 다양한 것을 무승부가 날 때까지 싫컷놀아야 끝이 나고 어두워져야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놀기만 좋아하던 우리는 4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 담임 서숙자 선생님은 우리들 보기에도 말씀이 적고 근엄한 표정이어서 마음 놓고 놀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의 분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공부만이 희망이고 공부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초라하고 가난한가를 그때에 가르치며 보여주셨다. 분홍색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멋쟁이 선생님을 우리 엄마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나는 한때 한적 있었다. 우리 반은 공부는 물론 무엇이든 제일 잘해야만 했다. 우리 선생님은 욕심도 많고 공부도 잘 가르치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훌륭한 분이셨다.
하루는 커다란 칠판에 하늘의 별자리를 가득 써놓으시고는
“다 외우는 사람은 집에 가도 된다” 하시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친구들은 열심히 외워서 하나씩 둘씩 집엘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 줄도 못 외우고 끙끙대고 있었다. 별자리 이름은 우리말이 아니어서인지 더 어려웠다. 그런데다 이 어려운 이름을 다 외워야 하다니 이일은 나에게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나 다름없었다. 외우기를 해본 적 없는 나는 오늘 저녁 집에 가기는 다 틀린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외우기가 문제 아니고 집에 가는 일이 나에게는 지상 최대 과제가 된 것이다. 혼자 고민 고민 별별 생각을 다 해 봤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 혼자 이 넓은 교실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무서움과 외로움으로 눈물까지 범벅이 되었다. 한참을 숨소리 조차 못내고 있던 중 선생님이 어디선가 나타나셨다. 깜짝 놀란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시고는 공책에 한 번만 써 놓고 얼른 가라고 하셨다. 그날 집에 무사히 오긴 했지만 엄마한테는 창피해서 오늘일을 말하지 않았다. 이튿날 교실에 들어서자 선생님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어저께 집을 보내준 선생님의 얼굴이 의외로 엄마의 얼굴처럼 반갑고 편안하게 여겨졌다. 어제의 힘들고 괴롭던 나머지공부 사건은 나를 더욱 공부에 매진하게 하며 토실토실 살찌우기 시작 한 것 같다. 예전 같으면 공부가 끝나면 곧장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놀기에 바빴는데 이 사건 이후로는 운동장이 아닌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학교서 집에 오면 방에도 들어가지 않고 즉시 문지방에 걸터앉아 숙제부터 챙겼다. 엄마는 이 사실도 영문도 모른 채 칭찬을 해 주셨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는 별로 친하지가 않았다. 뒷집 쌍둥이 친구는 무슨 일이 생기면 둘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싸우는 걸 보면 같이 놀기가 더더욱 두렵고 또 다른 친구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어 함께 어울리기가 싫었다. 전보다 노는 시간이 줄어들어 심심해지긴 했지만 이때부터 5살 ~10살 아래인 내 동생들을 돌보며 함께 놀아 주었다. 이때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동화책이나 위인전 같은 책을 사줄 생각을 왜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야 말로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하긴 현재 나 자신도 돌이켜보면 우리 부모님과 별반 다르지 않게 우리 애들을 동화책 한권 없이 기르고 가르쳤으니 부끄럽고 한심 하기로는 내가 더한 것이다.
하지만 이 나머지공부 사건은 나에게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공부를 못하면 집에 갈 수 없다’ 는 서숙자 선생님의 매서운 가르침은 지금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6학년 때는 어려운 우등상도 탔다. 가정 통신문에는 늘 ‘책임감이 강한 어린이’라고 선생님은 써 주셨다. 생각해보면 공부를 어찌해야 잘 하는 지 또한 재미있게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도 인생을 방치하며 막연히 살고 있는 나 자신이 후회스럽고 부끄럽다. 그 때의 일은 다행히 나를 교육대학까지 갈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소중한 추억거리로 남겨주었다. 처절한 좌절이나 절망을 모르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 온 나에게는 ‘나머지 공부’ 사건이 나를 여물게 영글어 이 자리까지 이끌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초임발령
잊지못하는 연풍
초조하게 기다리던 발령이 생각보다 일찍 났다. 부임일이 일주일 정도 남아 있었다. 우리는 졸업과 동시에 남자 168명, 여자 72명 총 240명 전원이 발령을 받았다. 공부만 했던 학창시절을 뒤로하고 사회인으로 힘차게 새 출발을 내딛는 1968년 2월 이었다.
그런데 발령을 받고 부끄러운 일이 일어났다. 발령 받은 학교가 예상치 못한 학교였기에 당황스러웠다. 거리가 가까운 증평을 마음에 두고 괴산군을 지원했는데 전혀 뜻밖의 괴산도 아닌 두메산골 연풍이라는 곳이었다. 속이 상하고 난감하여 한숨만 나왔다. 평소 소극적인 나는 어디서 용기가 나왔는지 지도를 보며 혼자서 괴산군 교육청을 찾아갔다. 인사 담당 장학사를 만나 한바탕 볼멘 목소리로 따졌다. 장학사는 어이없다는 태도였다. 장학사는 어쩔 수 없었는지 이 햇병아리를 어르며 달래고 위로해 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땐 교육청이 우리의 감독기관인 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교육청을 찾아가 항의하고 따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다. 어쨌거나 부임학교에 첫 출근을 하였다. 그런데 출근 첫날 수군수군 분위기가 이상했다 나의 교육청 사건이 벌써 이 학교에 쫙 퍼진 것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내게 딱 어울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부임첫날 교무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곳 교무실은 일반학교 교무실과 달리 교사 본체건물과 교무실건물이 따로 떨어져 있었고, 교무실은 옛날 고을 원님이 사용하던 동헌 옛 모습 그대로 이었다. 현대식 건축물과 옛날동헌이 나란히 함께 있는 것이었다. 교무실은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는 역사가 깊은 단원김홍도의 집무실이었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영조21) 화가인 단원 김홍도는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그렸다고한다. 그 정표로 정조(19)는 단원을 특별히 배려해서 연풍 현감이라는 벼슬자리를 제수한 것이다. 단원은 특별히 풍광이 수려한 이곳서 수많은 걸작품을 남겼다고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인 단원김홍도가 단 한 번 3년동안 직장생활을 했던 이 동헌에서 나도 단 한 번 3년동안 교사생활을 한 영광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단원의 체취와 함께 보람을 느낀다. 계절이 옮겨가듯 우리도 어딘가 옮겨가게 마련이다. 단원선생이 이 동헌에서 정사를 마치고 평생 전국을 돌며 훌륭한 업적을 이루신데 비해 나는 이 동헌을 끝으로 현모양처의 꿈을 안고 평생 살림만 한 것이다.
현재 동헌은 그 자리에 잘 보존되어있어 볼 때마다 감개무량 하고 감격스럽다.
부임 발령은 받았지만 아직도 나는 학생티를 벗지 못했다. 그때 3-2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순박한 눈빛은 나를 호기심과 희망으로 벅차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 예상과는 달리 두메산골에도 치맛바람의 시련은 거셌다. 그동안 줄곧 우리반 반장이었던 양조장집 아들은 초짜 새내기선생이 온다는 소식에 이미 옆반으로 빼 돌려버린 상태였다. 이 사실이 나의 귀에 들려오는 순간, 아! 나는 오기가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옆반에 지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음지가 양지되도록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공부는 물론 청소까지… 목소리가 미성인 남학생을 불러 노래(독창)연습을 시켜 시 군 도대회 까지 입상하는 개가를 올렸다.이 일로 인해 3년의 교사생활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꿈속에서도 그리운 교직 생활 ??
(부임을 하고 난 당시의 느낀 연풍 초등학교의 배경 설명 삽입)
사진 첨가
3학년 2반 담임 : (위의 밑선친 부분을 옮겨옴) - 3년간의 학교생활 이야기 삽입
부임 발령은 받았지만 아직도 나는 학생티를 벗지 못했다. 그때 3-2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순박한 눈빛은 나를 호기심과 희망으로 벅차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 예상과는 달리 두메산골에도 치맛바람의 시련은 거셌다. 그동안 줄곧 우리반 반장이었던 양조장집 아들은 초짜 새내기선생이 온다는 소식에 이미 옆반으로 빼 돌려버린 상태였다. 이 사실이 나의 귀에 들려오는 순간, 아! 나는 오기가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옆반에 지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음지가 양지되도록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공부는 물론 청소까지… 목소리가 미성인 남학생을 불러 노래(독창)연습을 시켜 시 군 도대회 까지 입상하는 개가를 올렸다.이 일로 인해 3년의 교사생활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때 그시절
어느덧 1학기도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동료인 이 선생과 함께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의 사택을 배정받았다. 우리는 복권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좋아했다. 집세와 전기세가 공짜였기 때문에 더욱 좋았다. 그 당시 월급이 6,700원 쌀 한가마가 3,000원 하던 시대였다. 사택은 달랑 방 한 칸에 드나드는 문도 없는 개방된 부엌이 전부였다. 물은 뒷집에서 길어다 사용하고 풍로에 나뭇가지를 꺾어 불을 피워 밥을 해 먹던 시절이었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후진국수준의 생활형편 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즐겁기만 했다. 문을 열면 곧바로 논이 펼쳐져 있고 깨끗한 개울물이 항상 졸졸졸 흐르고 있어 언제나 행복했다. 이 개울물은 두메산골 조령 계곡서 내려오는 청정수라서 푸성귀도 씻을 수 있고 머리를 감거나 빨래를 하면 미끄러워 한참을 휑궈야만 했다. 그 뿐인가 개구리· 여치· 귀뚜라미 등 각종 풀벌레의 끊임없는 노랫소리와 눈 비속에서 뽀시락 뽀시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계절의 냄새를 맡았다. 주말에 우리는 모여서 신선처럼 자연과 벗하며 근처에 있는 수안보 온천 이나 문경세재· 관문· 수옥정 폭포등 이곳저곳을 누비며 자연과 함께 젊음을 만끽했다,
지금 내가 살던 이 사택은 물론 그 이웃 근처 모두 천주교 성지로 바뀌어 대지 13,000평에 이르는 대단지가 이루어져 있었다. 순교당시의 장면들이 세세히 곳곳에 놓여있고 유물과 성당이 놓여 있는 가운데 예수상이 두 팔을 벌리고 장엄하게 서 있다. 비록 카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한번쯤은 꼭 와 봐야할 역사의 현장이다.
3년동안 가르치고 깊은정을 나누며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내가 살고 싶어 했던 분지리 산속 마을에는 전원주택들이 띄엄띄엄 들어섰고 이화령도 활기가 넘쳐 보였다. 처음 발령 받았을 때 교장선생님과 동네 유지 분들이 “울며 왔다 울며 가는 곳”이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3년 되던 마지막 해에 첫눈이 오던 날 청주 교육회관에서 걸혼식을 올린 후 정든 연풍을 뒤로 하며 주부로 변신했다. 그 시절 10살의 아이들은 40살이 되어 서울 서교동에서 반창회를 한다며 30년 지난 담임이었던 나를 도 교육청을 통해 어떻게 알아 내어 초대했다.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란 가슴으로 식당을 한 걸음에 달려갔다. 자녀는 몇 명을 두었을까, 모습은 알아 볼 수 있을까, 무슨 일들을 하며 살까, 온갖 생각을 하며 만나니 뜻밖의 이야기들이 봇물 쏟아지듯 쏟아졌다.
아! 그때는 1.000여명 이었던 학생들이 지금은 50명 정도라니, 올해는 입학생이 달랑 2명이란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래도 자연환경이 멋진 아름다운 연풍은 아직도 사람냄새가 풍기고 오염이 안 된 곳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