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청안(淸安) 하신지요? 저는 힘들게 시드니의 겨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밤은 긴데, 폭주하는 원고청탁 때문에 늘 수면부족에 시달립니다. 체력도 현저하게 저하되는 느낌인데, 새벽에 집주변 공원을 걷기 때문에 그나마 버티는 것 같습니다.
21세기는 열심히 일하는 것(working hard)보다 스마트하게 일하는(working smart) 시대라고 하는데, 저는 아무래도 구시대적인 인물인가 봅니다.^^ 혹시 앙시래 짐?
해거름이라는 정겨운 우리말이 있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를 이르는 말인데, 해름으로 줄여서 말하기도 합니다. 7월 14일(수) 해거름에, 87세의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해거름만 되면 현관 앞에 앉아서 60년 전에 죽은 남편을 기다립니다. 그분의 얘기를 아래에 써놓았습니다. 1990년에 그분을 처음 만났으니까 20년 동안 만났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승리! 그 자체입니다.
이어서 1995년에 <주간동아>에 쓴 그분의 인터뷰 기사와 1997년에 <신동아>에 쓴 호주육군3대대(가평대대) 르포기사도 첨부했습니다. 올해가 한국전쟁 60주년이니 참고삼아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이 얼마나 많은 개인적인 삶을 파괴시키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또한 한국과 호주가 전쟁으로 맺어진 혈맹관계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호주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이런 내용을 모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꼭 건강하세요. 건강해야 전쟁 없는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총총
Epping '安分薺'에서, 尹筆立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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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칼럼> 2010년 7월 15일
그린 여사의 눈물...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스물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전쟁미망인이 된 호주 여인이 있다. 여인은 60년 동안 혼자 살면서 끝없는 망부가(亡夫歌)를 불렀다. 그 처연한 노래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동안, 여인은 호호백발의 할머니가 됐다. 한국 같으면 홍살문을 세워주어야 할 분이다.
올윈 그린(Olwyn Green. 87) 여사. 한국전쟁이 그녀의 남편 찰리 그린(Charlie Green) 중령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래서 그녀의 미망인 연륜은 한국전쟁의 역사 60년과 똑같다. 혹시 한국을 원망하며 60년 동안 살아왔을까?
그 답변은 그린 여사가 1993년에 펴낸 책 <내 이름은 여전히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에 오롯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책의 들머리에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그린 중령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그린 중령 : "사병은 나를 상관으로 부를 것이다(You will call me Sir)"
사병 : "제대한 후에는 어떻게 부르지요?(What about when we are on leave?)"
그린 중령 : "내 이름은 여전히 찰리다(The name is still Charlie)"
20년 동안 만난 그린 여사
나는 꼭 20년 전인 1990년에 그린 여사를 처음 만났다. 그녀의 스토리를 한국 <동아일보>에 보도하기 위해서 집으로 찾아가서 인터뷰를 한 것. 그후 20년 동안 저널니스트로서, 시인 친구로서(같은 호주저작가협회 회원), 끊임없이 만났다.
첫 인터뷰 도중에, 그러니까 1990년 6월에 책 얘기를 들었다. 남편 그린 중령의 짧은 생애(30살에 전사)를 자서전으로 쓰는 중인데, 다음과 같은 동기 때문이라는 것.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1인칭 화법으로 정리했다.
"1980년 6월, 나는 한국전쟁 30주년을 맞아 남편의 고향 그라프톤(Grafton)에서 거행된 그린 중령 동판 제막식에 참석했어. 그 자리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로부터 남편의 얘기를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지.
그냥 잘 생기고 감성이 풍부한 남자로만 알았던 남편이 '군인 중의 군인'으로 불릴 정도로 리더십이 강한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뿐만 아니라 호주 보병부대 최연소 전투 지휘관으로서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됐지.
문득 찰리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전쟁미망인으로 사는 게 아무리 힘들었다고 하지만, 남편의 생애조차 정리해두지 않았다니. 그래서 찰리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했어. 그 당시 시작한 대학원 과정에서 요구하는 과제물로 찰리의 자서전을 선택한 셈이지.
그런데 영어 선생만 21년 동안 한 내가 군대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 그래서 죽고살기로 공부했지. 30년 전에 끝난 한국전쟁이 나한테는 다시 시작된 셈이었지. 찰리의 동료들을 만나고, 육군3대대(가평대대)도 찾아가고, 캔버라 전쟁기념관도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다보니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였어.
그런데 찰리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두려움이 생기는 거야. 그렇게 위대한 군인이 내 남편이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어. 늘 '나의 천사, 사랑하는 올윈'이라고 편지에 쓰면서 살갑게 굴었던 사람인데 말이야.
찰리가 한국 전선에서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내용도 있어. "적군과의 전투도 힘들지만 추위를 이기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다"면서, "올위만 곁에 있으면 추위와 외로움을 한 방에 날릴 수 있는데..."라고 써 보냈어."
1980년에 참석한 남편의 동판 제막식. 스물일곱 살의 신부를 남겨두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원망스런 남편이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트라우마(Trauma. 외상후 정신적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군대행사를 애써 외면하면서 살았다.
"30년 동안 슬퍼할 겨를이 없었어"
"필립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는 슬픔과 분노만 가득한 신부였고,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앤시아(Anthea)는 세 살이었어. 당장 먹고 사는 일도 막막했지. 난 그냥 과거를 지우고 새 삶(separate life)을 살기 위해서 애써야 했어."
1995년 <주간동아> 인터뷰에서 그린 여사가 나에게 해준 얘기다. 그녀는 눈물을 훔쳐내면서 다음과 같은 처연한 스토리를 덧붙였다.
"나는 열세 살까지만 학교를 다녔어. 그리고 아빠의 가게를 돕고 있는 도중에 찰리를 만나서 열아홉 살에 결혼 한 거지. 찰리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어서 유럽과 남태평양에 머물러서 실제로 함께 산 기간은 2년 정도였지. 우린 그냥 편지나 주고받는 펜팔부부였다가 사별한 거야.
나는 슬퍼할 겨를 도 없었어. 앤시아를 잘 키우기 위해서 우선 공부부터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 1953년부터 원호처의 도움을 받아 시드니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어. 1958년에 학위(Bachelor of Art)를 받아서, 고등학교와 초급대학교에서 1979년까지 21년 동안 가르쳤어.
1979년의 퇴직 직후인 1980년부터 시작된 찰리의 자서전 쓰기는 물리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인 어려움이 더 컸어. 더욱이 박사학위까지 받은 딸 앤시아가 싫어하는 눈치였고. 아버지 없이 자란 상처가 컸었나봐. 물론 나중엔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만 말이야."
다음은 어제(2010년 7월 15일)에 그린 여사한테 받은 이메일이다. 7월 14일에 그녀를 방문하면서 사다준 케이크에 대한 감사편지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딸 앤시아가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이 메일에 담겨있다.
"필립과 제임스가 사다준 케이크를 시드니대학교 의대에 있는 청각장애 어린이 구호센터(The Shepherd Centre)의 어린이들과 함께 먹겠다. 내 딸 앤시아(박사)가 그 기구의 CEO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Dear Phillip
First of all than you and James for the beautiful cake Today, I am sharing this with children who are patients at the Shepherd Centre clinic at Sydney University where deaf children are aided. My daughter is the CEO of this organization. It will be a treat for them and will be much appreciated.
1993년, 딸 앤시아의 도움과 13년 동안 이어진 각고의 노력 끝에 찰리 그린 중령의 자서전이 <퀸즐랜드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그린 중령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한지 53년만이었고, 그 당시 저자(올윈 그린)의 나이는 꼭 70세였다.
77세에 시작한 한국전쟁 석사논문
2000년 어느 날, 그린 여사가 맥쿼리대학교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당시 시드니올림픽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터라 나중을 기약했다. 그렇게 3년쯤 지난 다음, 이번에는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그린 여사가 암수술을 받았다는 것.
"필립, 내가 맥쿼리대학교에서 만나자고 했던 날, 내가 3년 동안 연구한 자료를 학교에 제출했어.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건데.... 아무튼 이제 암에 걸렸으니까 내 연구는 여기서 끝난 것 같아. 지금은 캔버라 호주전쟁기념관에 있으니까 시간 날 때 한번 열람해줘."
그린 여사의 연구 자료는 2003년 7월 15일에 호주전쟁기념관에 증정됐다. 나는 나중에 그 자료들을 열람하면서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양적인 방대함에 한 번 놀라고, 그 내용의 정밀함에 더 크게 놀랐다.
102개의 파일과 63개의 브리핑 자료.... 캐비닛 두 개를 가득 채우는 분량이다. 남편이 대대장으로 재직했던 호주육군3대대(가평대대)의 한국전쟁 참전기록이다. 부대일지 편람은 물론이고 수백 명을 구두와 서면으로 인터뷰한 내용들이 생생하게 기록됐다.
그린 여사가 두 번째 암수술을 받은 다음 아내와 함께 병문안을 갔다. 마치 전쟁포로수용소의 포로처럼 뼈만 남아있는 처연한 상태였다. 그래서 "올윈은 이제 8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야.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Enough is enough!"라고 말했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아냐, 필립이 몰라서 그래.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뭐든지 일을 하지 않으면 금방 쓰러질 수밖에 없어. 이건 전쟁미망인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내가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해. 무엇보다 찰리와 내가 영적으로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를 만드는 거야.
찰리는 나의 수호천사야. 내가 지금도 운전을 하고 다는 것은 찰리가 보호해주기 때문이야. 실제로 운전을 할 때 찰리가 도와주는 걸 느껴. 가끔 찰리가 게으름을 피워서 접촉사고도 나고, 주차위반 스티커도 받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
내가 그녀를 만난 1990년까지 10년 동안, 그녀는 수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남편의 자서전을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 그래서였는지 나에게 "책의 제목을 정한 다음, 각 챕터의 들머리에 시 한 대목씩 넣는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시인이라서 그냥 하는 얘기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후에 나온 책을 받아보니 정말 각 챕터마다 바이런, 셰익스피어, 딜런 토마스, 예이츠 등의 유명한 시구를 인용해 놓았다.
책의 맨 앞에 딜런 토마스의 '고사리나무 언덕(Fern Hill)'을 옮겨놓았고, 맨 끝에 예이츠의 시 '굳은 맹세(A deep sown vow)' 중의 일부를 인용했다. 다음과 같은 시구(詩句)다.
그러나 죽음과 마주쳤을 때마다 / 혹은 잠의 언덕을 기어오를 때나 / 술기운이 거나해졌을 때 / 갑작스럽게 그대 얼굴이 보인다.
(Yet always when I look death in the face, / When I clamber to the heights of sleep, / Or when I grow excited with wine, / Suddenly I meet your face)
인간의 무의식 세계는 신비하면서도 두려운 세계다. 평소 이성으로 자신을 꽁꽁 묶어두어 속을 내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죽음을 음미할 때나 잠이나 술로 인해서 이성의 빗장이 풀리는 순간, 우리는 나의 생생한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그렇다. 인류의 정신세계를 통째로 바꾸어놓은 인문학적 대변혁 3개가 모두 1800년대에 일어났다. 나 또한 아래 세 가지 사건에 목을 매고 한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다 헤겔의 철학을 더하면 그게 내 인생과 정신세계 그 자체다.
K. 마르크스와 F.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1848),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1896).
프로이드는 인간의 정신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했고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의해 인간의 심리가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생각이나 행동 등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가려져 있는 무의식에 의해서 결정되고 표출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위에 인용한 예이츠의 시 '굳은 맹세'도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를 그린 은유다. 곤한 잠에 빠졌을 때, 혹은 거나하게 취했을 때 나타나는 나의 본성(本性)이 진짜 나인 것이다. 그린 여사가 찰리의 자서전 맨 끝에 예이츠의 시를 옮겨놓은 것은 어쩌면 그녀의 간접적인 고백일 수도 있다.
그린 여사와의 첫 만남 이후, 나는 20년 동안 호주 육군3대대(가평대대)와 올윈 그린 여사의 이야기를 르포기사와 인터뷰기사로 써서 <동아일보> <신동아> <주간동아> <샘터> <오마이뉴스> 등의 매체에 10여 차례 보도했다.
특히 전쟁후유증에 시달리는 한국전 참전용사 론 캐시맨의 스토리를 <신동아>에 써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슬픈 생애를 SBS-TV에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제작해서 방영했다.
시인이 된 그린 여사
그러던 1996년 6월, KBS-TV의 김현 PD한테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KBS스페셜' 프로그램에 올윈 그린 여사의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 예정이니 대본을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프로는 1년간의 제작을 통해서 1997년에 방영됐다.
그 영향으로 그린 여사는 한국에서 유명세를 탔다.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 각종 행사에 참가했고, 대한민국 정부와 호주 정부로부터 훈장도 서훈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내가 "이제는 올윈이 직접 시를 쓸 때가 됐다"고 말했다.
7월 14일, <소피아스포렌> 서인수 회장과 함께 그린 여사 댁을 방문했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내 이름은 여전히 찰리(The Name's Still Charlie)> 개정판을 낸 것을 축하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린 여사는 새 책이 되다시피 한 개정판에 직접 서명을 해주면서 후기(Epilogue) 맨 끝부분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그린 여사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이 담겨있었다. 순간 가슴이 울컥해졌다.
우리는 수백만 명의 비극 앞에서 울 수가 없습니다. / 그러나 한 사람을 위해서는 울 수 있습니다. / 영혼 안에서, / 영적인 생애에서 / 그 한 사람은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We cannot weep / At tragedy for millions / But for one. / In the mind / For the mind's life / The one lives on.)
그린 여사를 꼭 껴안아주면서 "마침내 올윈이 시인이 된 걸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서인수 회장이 기타를 치면서 이은하의 노래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대 찰리는 내 사랑,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린 여사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깊은 회상에 잠겼다. 오랫동안 잠들었던 무의식의 세계가 마침내 의식세계로 옮겨진 것처럼. 그렇다. 무의식의 세계는 신비하면서 조금은 두렵기까지 하다. 이성으로 억눌러 왔던 원초적 자아 이드(id)가 지배하는 나의 실존이라니.
오늘 7월 31일, 시드니타운홀에서 가수 이은하는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을 올윈 그린 여사에게 직접 헌정할 예정이다. 그런 광경을 호주 텔레비전에서 녹화하여 아침 프로그램으로 방영할 계획이고.
그 얘기를 들은 그린 여사는 "호주에서는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 됐는데, 시드니에 사는 한국 친구들이 나를 알뜰하게 챙겨주어 행복하다. 찰리도 하늘에서 고맙다고 할 것"이라면서 다시 한 번 눈물을 글썽거렸다.
87세의 그린 여사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처음으로 집을 방문한 서인수 회장에게 서재와 거실, 집필실 등을 보여주면서 그린 여사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이 집은 아직도 전쟁 중입니다"라고. 모든 벽에 그린 중령의 사진이 걸려있는가 하면 1,000여권의 장서들 대부분이 전쟁 관련 책들이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자신이 운전하고 다니는 작은 승용차에 손을 올려놓더니 "필립, 두 달 후에 이 차와 이별할 것 같아. 면허시험을 보라는 연락이 왔는데 합격할 자신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꿈 얘기를 했다.
"며칠 전에 찰리가 꿈속으로 찾아왔어. 그런데 그 장소가 우리가 처음 만난 가게인거야. 찰리가 그날 펜을 사러왔거든. 정말 잘생긴 청년이었지. 꿈속에서 만난 찰리가 꼭 그때의 모습이었어. 나도 17살 소녀였고 말이야.
그런데 내 손을 잡고 자꾸 어딜 가자는 거야. 둘이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서 말이야. 아주 심각한 표정이었어. 나는 아직 안 된다고 했지. 조금 더 있다가 거기에 가면 안 되냐고.
그랬더니 찰리가 웃으면서 돌아갔어. 춤추는 듯한 스텝을 밟으면서 말이야. 나중에 손을 흔들면서 떠나가는데 구름을 타고 가는 거야. 애고, 여전히 고스트 스토리네. 오늘 가져온 장미꽃이 참 예뻐. 필립이 샀지만 아마 찰리가 골랐을 거야.
장미꽃을 침실에다 놓을 생각이야. 그러면 오늘도 꿈을 꿀 수 있을 테니까. 찰리한테 오늘 들은 노래 얘기를 전해주고 싶어. 세상에 그런 노래가 있었다니. 아직도 그대 찰리는 내 사랑,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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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사람과 삶> 1995년 6월 25일
한국전쟁 미망인의 망부가 “찰리,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현관 쪽에서 ‘쨍그랑 쨍그랑’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3시간 남짓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하던 그린여사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날 듯하다가 도로 앉았다. 갑자기어두운 그림자가 고희를 넘긴 호주 할머니의 얼굴을 스쳤고, 그녀는 야윈 두 손을 모아 한동안 턱밑에 두었다.
수십 년을 휘돌아온 죽은 남편의 속삭임이었을까. 바다 쪽에서 바람 한 줄기 불어와 현관에 걸려있는 중국산 풍경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 풍경소리가 시그널이 되어 45년째 계속되고 있다는 올윈 그린(Olwyn Green) 여사의 유령 이야기(ghost story)가 시작됐다.
“찰리는 늘 조용하게 돌아와 문밖에서 풍경을 짤랑짤랑 울리곤 했었지. 마치 전설 속에 살다가 잠시 외출 나온 사람처럼 머뭇머뭇 빨간 장미를 등뒤에 숨긴 채… 그가 감자와 생선요리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저녁은 늘 똑같은 메뉴였어.
비록 그의 육신은 한국전쟁에 스러지고 말았지만, 그의 영혼은 아직도 풍경소리랑 빨간 장미, 감자튀김과 생선요리, 뭐 그런 것들과 함께 내 곁을 맴돌고 있어.”
그린 여사는 풍경소리만 들으면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다. 저녁준비가 늦어진 새댁처럼 허둥대다가 에이프런을 두른 채로 현관 쪽으로 달려가면 바람 한 줄기 스쳐지나갈 뿐…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린여사의 친구들은 이 전쟁미망인의 가슴 절절한 이야기를 눈물 찔끔거리며 듣다가 종국에는 고스트 스토리라며 헛헛하게 웃어버린다.
1950년 11월 1일, 찰리 그린 중령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중공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4개월만의 희생이었다. 당시 찰리 그린의 나이 30세였고 그의 아내 올윈 그린은27세의 신부였다. 세 살배기 외동딸 앤시아가 막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그린여사의 유령 이야기가 시작되어, 죽은 남편과의 영적인 교류를 통해 반세기 동안 순애보를 이어오고 있다. 지금은 동양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진 45년간의 수절, 그러한 일이 정숙한 여인의 덕목으로 취급되지도 않는 호주 땅에서 그린여사는 지금도 죽은 남편의 저녁식사를 위해 생선요리를 준비하고 차이니스 티를 끓여놓는다.
“찰리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그가 보냈던 편지를 불태우기도 했고, 다른 일에 몰두해보기도 했어. 그러나 모든 게 허사였지. 그럴 때마다 찰리가 꿈속으로 찾아왔고 슬픈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리곤 했어.”
그런 일이 있고 나면 그린여사는 죄의식에 시달렸다. 이슬만큼이나 맑았던 두 사람의 사랑에 한줄기 얼룩이라도 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몹시 속이 상했다. 주변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모든 게 쉽지 않았다.
“나는 세월의 흐름을 따라 속절없이 늙어 가는데 꿈속으로 찾아오는 찰리는 언제나 젊은 군인의 모습이었어.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찰리하고 만나고 있는 나 또한 그때 그 시절의 신부야.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신혼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지.”
그러던 어느 날, 그린여사는 찰리와의 끝없는 사랑이야기를 책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10여 년의 노력 끝에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 (The Name's Still Charlie)라는 사부곡(思夫曲)을 출간했다.
1980년, 찰리 그린의 고향인 그라프톤에 그의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시작된 찰리의 스토리 집필은 장장 13년의 산고 끝에 1993년, 퀸즈랜드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됐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호주 독서계와 언론으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고, 한국전참전용사들과 수많은 여성독자들을 눈이 퉁퉁 붓도록 울게 만들었다. 그린 여사의 책이 남편의 짧은 생애를 쓴 한 전쟁미망인의 덧없는 회고록이기도 하지만 책에 그려진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독자들에게 큰 감명을 준 것이다.
“특히 한국전에 참전했던 베테랑들이 찰리의 얘기를 읽으면서 잊어버렸던 젊은 날의 한때를 다시 기억하는 것 같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나라, 한국. 난생 처음 보는 눈밭에서 피 흘리며 죽어갔던 전우들이 생각나서 많이들 울었다고 해.
특히 한국의 추위가 대단했었나봐. 편지에다 1.4후퇴 때의 혹독했던 추위를 써보내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많아. 찰리도 그런 편지를 몇 차례 보내왔었는데...”
그린여사는 편지함 속의 수많은 편지들 중에서 누렇게 빛이 바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찰리 그린 중령이 죽기 불과 5일 전에 아내에게 보낸 것으로, 1950년 10월27일자 소인이 찍혀 있는 그의 마지막 편지였다.
당시 찰리 그린 중령이 지휘하던 호주육군 제3대대(일명 가평대대)는 청천강을 건너 평안북도 박천 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는데, 적과 대치하고있던 최전선에서 보낸 그의 편지는 ‘내 사랑 올윈’으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적어 놓았다.
“이곳은 온천지가 꽁꽁 얼어붙었소. 추위 때문에 대대병력 모두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소. 그러나병사들의 사기가 아주 높고 전투에 임하는 자세도 나무랄 데가 없어 한 달 가까이 계속된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고 있소.
이제 마지막 고지가 20마일밖에 남지 않았소.(압록강까지 20마일 남았다는 뜻으로 보임) 전쟁은 곧 끝날 것이고 우리들은 머지않아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오. 그 때쯤이면 앤시아도 막 뛰어다니겠지.”
찰리 그린의 편지는 한국의 추위와 전투상황, 병사들의 활약상 등을 기록한 후, 다음과 같은 운명적인 맺음말을 적어놓고 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당신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사랑하오. 부디 머지 않은 날에 다시 만나기를 바라면서. -한국에서 당신의 사랑, 찰리.”
그러나 그 머지 않은 날은 50년이 지난 여태껏 오지 않았다. 단지 그의 영혼만이 훨훨 날아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간의 고스트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유해는 평북 안주지방에 가매장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9월 6일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어 부산의 UN군 묘지에 지금까지 안장되어 있다.
그린 여사는 그후 34년 동안이나 남편의 묘지를 찾지 않았다. 호주의 전통상 해외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현지에 매장하고 전몰장병들의 출신지에 위령탑을 세워 추모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묘지를 찾아가는 것이 남편의 죽음을 확인하는 행위처럼 생각됐고, 그로 인해 남편과의 영적 관계가 단절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1984년, 남편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한국行을 결심하게 됐다.
그린여사는 최근 한국정부에서 수여한 ‘평화의 사도’증서를 받은 소감을 정리하면서 ‘한국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짧은 글을 썼다. 글 속에 한국방문 당시의 소감이 피력되어 있어 글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한국여성들에게
남편 찰리가 한국에서 전사해 그곳에 묻힌 이후, 한국은 내삶의 일부분이 됐습니다. 1984년, 아름답게 단장해 놓은 찰리의 묘지와 UN군 공동묘지에 꽃을 헌화하는 한국 어린이들을 보고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이곳 호주에는 한국출신 친구들이 참 많습니다. 일부는 내가 영어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고, 일부는 내 책을 통해서 만난 독자들입니다. 또한 한국전에 참전했던 한국출신 베테랑들도 많이 만나고 있습니다.
찰리를 존경하고 있는 시드니 ROTC장교회 회원들은 나를 ‘대모’(Godmother)로 삼아, 내 72회 생일잔치를 한국식으로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찰리의 성이 Green이라는 데 착안해 玉으로 만든 나무를 생일선물로 준비해 내 여생의 행운을 빌어 주었습니다.
나는 언젠가 한국이 통일될 것을 믿고있으며, 내 딸이 한국을 방문해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을 떨쳐버렸으면 합니다.
나는 내 남편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에 대해 조금도 유감이 없습니다. 그건 찰리의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중공군의 포탄이 그를 겨냥했을 리도 없고, 그가 바로 그 시간에 혼자 밖에 나와 있었던 것도 운명이 아니었을까요.
농부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으나 뜻밖에도 한국전쟁의 지휘관이 되어(챨리 그린 제3대대장은 호주 역사상 최초로 영국군의 지침 없이 단독작전을 펼쳤던 호주군 지휘관이었음) 끝내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찰리 그린의 영웅적인 삶을, 당시27살의 신부였던 내가 책으로 쓸 수 있었던 것도 한국인들의 끊임없는 애정과 부산에서 받은 깊은 감명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하나밖에 없는 딸, 조국 호주를 잃어버린 채 지금까지 한국 땅에 묻혀 있지만, 그가 이곳 호주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존경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실이 한국과 나, 한국인과 나를 이어주는 끈이 아닐까요.
한국여성들의 행복을 빌면서,
호주에서 올윈 그린 드림.
찰리 그린 중령은(사후에 대령으로 추서 됐음) 호주 육군에서 전설적인 존재다. 특히 그의 고향인 NSW 주 내륙 그라프톤(Grafton)에서는 매년 현충일을 전후해서 그의 추모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할 정도로 영웅시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보병으로 참전해 북아프리카, 그리스, 시리아, 실론, 파퓨아 뉴기니 등지에서 싸운 역전의 용사였다.
특히 그린 중령은 호주 역사상 최연소 지휘관이었음에도, 타고난 리더쉽을 발휘해 급조되어 한국전선에 파견됐던 제3대대 병력을 이끌고 사리원전투, 박천전투 등에서 승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정부로부터 외국군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추서 받았다.
한편 남편이 전선을 떠도는 통에 7년 간의 결혼기간 중 3년 정도밖에 함께 살 수 없었던 올윈 그린 여사도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항공감시원으로 활약했고, 한국전쟁 후에는 전쟁미망인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한국전쟁과 관련된 호주군의 자료들을 모아 책으로 펼쳐내는 작업을 했다.
그녀는 뒤늦게 시드니대학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했고 1979년 정년퇴임하기 까지 피터쉠 칼리지에서 영어교사를 역임했다. 특별히 이민자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그린 여사는 그 당시 많은 한국인 제자들을 두어 지금까지 끈끈한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북부시드니에 위치한 메도우뱅크 칼리지(초급대학)의 교장직을 끝으로 오랜 공직생활을 마친 그린 여사는 그후 작가로 데뷔 해 지금도 호주 저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전쟁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는 시드니 근교 홀스워디의 가평대대(호주육군 3대대)를 함께 방문한 그린여사는 남편의 부상과 사망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1950년 10월-11월의 전쟁일지(War Diary)를 보면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너무 아까운 나이였어. 찰리는 참 자상하고 지성미 넘치는 젊은이였지. 그동안 많은 한국 사람들을 사귀다보니 찰리가 한국인의 인정미를 닮은 것 같아. 지난 4월 23일, 찰리의 고향에서 그의 추모행사가 펼쳐졌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한국인 베테랑들이 10여명이나 왔어. 시드니에서 10시간도 넘게 기차를 타고 온 그들을 보면서, 남편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어.”
한국인 친구들은 그린여사를 방문할 때마다 빨간 장미를 한 다발씩 들고 온다. 어떻게 알았는지 마치 찰리가 생전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빨간 장미와 프랑스 詩人 랭보를 유난히 좋아하는 올윈 그린여사는 75세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써머힐 커뮤니티 센터에서 불어를 배우고 있다.
“랭보의 시들을 찰리에게 원어로 읽어주고 싶어서 배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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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1997년 6월호
‘잊혀진 전쟁 6.25’ 호주 참전 용사들
윤필립 / 시인 , <신동아> 객원편집위원
노병은 죽지 않는다
“자네 빌리 아닌가? 통신병.”
“오, 마크. 자네 유령은 아니겠지?”
백발성성한 노인들이 부둥켜안은 채 한동안 말을 잊었다. 40여 년만의 해후. 그들은 서로에게 왜 이렇게 쫄딱 늙었느냐며 힐난하다가 한참동안 웃었다. 계절 탓이었을까. 노인들의 웃음소리가 땅 끝에서 울려오는 바람소리처럼 들렸다.
호주의 수도 캔버라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가을이었다. 지난 4월 24일. 호주의 심장부인 연방국회의사당과 마주하고 있는 전쟁기념관 앞 광장에서는 <호주 한국전 참전기념탑 부지 헌납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빛바랜 훈장을 달고 호주 전역에서 모여든 노병들. 45년 전 死線을 같이 넘었던 전우들이다. 앞으로 갈 뿐 뒷걸음질이 불가능한 호주의 상징동물들(Australian Emblems)인 캥거루와 이뮤를 닮아, 앞으로 전진 할 뿐 후퇴를 모르던 호주군인들도 세월의 흐름만은 역류할 수 없었던 것일까. 만나자마자 보이지 않는 얼굴부터 확인했다. 마치 병영의 점호시간처럼…
“그 친구 금방 일어날 것 같더니 끝내 가고 말았군.”
“ .... ....”
“어이, 토니 상병. 상급자를 만나면 경례부터 해야지. 군기가 형편없군.”
행사가 시작되기前, 삼삼오오 모여선 그들은 이미 노병이 아니었다. 그들이 서있는 곳 또한 호주의 수도가 아니었다. 가평전선을 필두로 평북 박천, 중부전선, 마령산 등을 마구 넘나들고 있었다. 한국지명을 줄줄이 꿰고 있는 레이 맥킨지씨에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냐고 물었다.
“아마 저승에 가서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난생 처음 경험했던 의정부기지(1950년)에서의 화이트크리스마스와 마령산 골짜기(51년)의 혹독한 추위. 기껏 구식소총이나 들고 덤벼드는 중공군보다 살점을 싹둑 싹둑 도려낼 것 같은 박천계곡(50년 11-12월)의 칼바람이 더 위협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호주병사들은 대부분 동상에 걸린 채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멕킨지씨는 브리스베인에서 온 어윈씨에게 그렇지 않느냐고 동의를 구했다. 어윈씨는 멕킨지씨와 한조를 이루었던 순환식 기관총 부사수였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형제의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전쟁이 맺어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난 아직도 부사수입니다. 레이가 죽기 전까지는. 레이는 1년 이상 전선을 떠돌았지만 나는 박천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기 때문에 끝내 사수가 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요. 덕분에 맥주 살 일은 없지만.”
고적대의 나팔소리에 맞춰 <한국전 참전 기념탑 부지 헌납식>이 시작됐다. 한국과 호주 양국국기가 조기로 계양되고 1분간의 묵념에 이어 양국 대표의 연설이 시작됐다.
브르스 스코트 호주연방 보훈부 장관은 “한호 양국 정상의 합의로 추진되어온 건립계획에 따라 부지 헌납식을 갖게 되어 기쁘다. 어렵게 첫발을 내딛었으니 양국의 긴밀한 협조 하에 잘 완공될 수 있도록 하자”라고 말했다.
그때 참전용사 한 분이 꽃 몇 송이를 헌화하더니 쭈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바위를 끌어안고 있었다. 꽃같이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죽어간 전우가 생각났던 것일까. 그는 끝내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그날 행사장에는 경기도 가평에서 운송해온 한국의 흙과 나무, 바위 등이 임시로 배치되어 있었다. 한국 국방부의 배려로 이곳으로 옮겨온 바위 등은 기념탑을 건립할 때 조형물로 사용될 예정이다. 행사가 끝난 다음 그에게 다가가서 몇 마디 건네 보았다.
“나는 가평전투 중에 부상당하여 후방으로 후송된 후 병상에서 제대했습니다. 죽전리 전투 때 같은 참호에 있었던 전우들은 모두 죽었지요. 저 바위들이 바로 그곳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갑자기 그날의 포탄소리가 들리는 듯 했어요. 모두들 용감했는데…. 난 그 후로 한국 땅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서부호주의 퍼스에서 왔다는 아서씨는 참전 50주년인 서기2000년이 될 때까지 살아 있으면 한 번 쯤 가평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그때 당한 부상으로 지금까지 지팡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자기 평생에 오늘처럼 기쁜 날은 없다며 비행기를 4시간씩이나 타고 캔버라로 날아온 게 조금도 후회되지 않는다고 했다.
한편 지난해 7월 27일 미국의 워싱턴에 건립된 한국전 참전 기념탑에 이어 두 번째로 해외에 서게 될 호주의 한국전 참전 기념탑 건립은 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호주를 방문했을 때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호주의 한국전 참전용사들로부터 기념탑 건립이 숙원사업이라는 얘기를 듣고 당시 폴 키팅 호주총리에게 건의해 동의를 얻어냄으로써 가능하게 됐다.
총180만호주불(10억8천만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기념탑 건립은 한국과 호주 양국의 정부와 국민들이 참여해 기금을 마련할 예정인데 호주정부에서는 이미 95년 예산 분으로 20만 호주달러를 배정한 바 있다. 호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국립전쟁기념관 광장의 호주 육군 기념탑 옆에 건립될 한국전 참전 기념탑은 오는 98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영국군에서 호주군으로
영원한 평화주의자들로 보이는 호주사람들은 평화를 소극적인 안주에서 얻지 않고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획득하려 한다. 이는 자기나라 땅에서 단 한 차례도 전쟁을 치른 바 없는 호주가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보아 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이래 1,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세계각지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에 거의 빠진 일이 없다는 데서 증명되고 있다.
또한 <전쟁 미망인회>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전사자가 많다는 데서 적극적인 평화주의자의 단계를 넘어 호전적이라는 의구심까지 갖게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호주가 대륙에서 멀리 떨어졌고 국토에 비해 인구가 적어 자체방위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국제적으로 공을 쌓아두지 않으면 유사시에 우방국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어느 정도 타당한 분석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다른데 있다. 1788년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국가로 출범한 이래 늘 영국을 모국처럼 여겨왔기 때문이다. 즉 모국인 영국이 전시체제에 들어가면 호주는 자동적으로 군대를 파견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영국의 적국은 호주의 적국이고 영국이 지원을 요청하면 땅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도와야한다는 게 호주의 일반적인 국민정서였다.
지금이야 국제판도가 많이 바뀌었지만, 몇 세게 동안 세계의 패권을 노려왔던 영국이 직, 간접으로 관여하지 않았던 전쟁은 거의 없었다. 이 말은 그동안 호주왕실군대(Australian Imperial Forces)가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는 뜻이 된다. 이에 따른 희생도 피할 수 없어 자국에서 전쟁이 없었던 나라답지 않게 호주의 산간오지에 가도 전몰자위령탑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호주의 한국전쟁 참전은 명실 공히 그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위상을 갖고 참여하게 된다. 마침내 영국의 치마폭에서 벗어나 호주의 ‘홀로 서기’가 시작된 것이다. 호주군이 부분적으로나마 단독작전을 펼친 것도 한국전이 처음이었고 파병을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도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기도하자 호주는 불과 4일 뒤인 6월 29일에 파병을 결정한다. 미국 참전과 동시에 해군소속 구축함인 바탄호와 프리기트함인 솔헤이븐호를 UN군 휘하에 배속 시켰다.
또한 다음날인 6월 30일 공군 77비행중대소속 무스탕전투기를 한국전쟁에 투입했다. 이름하여 ‘호주끼’가 한국 상공에 뜬 것이다. 한국에서는 戰後에도 오랫동안 전투비행기를 호주기(濠洲機)라고 불렀다.이어 호주육군 제3대대가 9월 28일 부산항에 당도한다. 마침내 육해공군이 모두 한국전쟁에 참가하는 순간이었다.
호주군은 그 후에도 한 대의 항공모함(HMAS, 시드니호)과 5대의 구축함, 4대의 프리키트함등의 해병력을 추가로 배치시켰고, 공군도 프로펠러 추진 시퓨리기 2개중대와 파이어 플라이기 1개중대를 증파해 19,000의 출격을 기록하는 동안 총36명의 전투기조종사들이 전사했다. 또한 호주육군의 경우에도 제3대대에 이어 1대대와 2대대가 한국전선에 파병되어 호주의 3개대대 전부가 한국에서 싸웠다.
이같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 호주군은 3년 간 전쟁을 치르면서 전사 361명, 실종 37명, 부상 1,216명등 약1,600명의 희생자를 냈고 29명의 병사들이 포로로 잡혀 사망하거나 송환됐다.
한편 한국전쟁에서 부상당한 상이용사 중 상당수가 종전 43년째인 지금까지 병상에서 고생하고 있다. 그들은 기동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언어장애, 신경쇠약 등으로 처참한 말년을 보내고 있어 한국전쟁의 참상과 이념의 허구를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가평으로 가는 먼 길
호주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승전국의 일원으로 일본의 전범처리와 전쟁복구를 돕기 위해 일본군점령사령부가 있는 일본 히로에 1개 대대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1950년 6월, 호주군들이 일본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귀환하려던 바로 그 순간 북한의 남침이 개시됐다.
호주군의 귀국이 취소되고, 부대를 전시체제로 재편성해 공산 침략세력과 싸울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당시 호주국내에는 20여만 명의 공산당원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국제사회가 동서냉전체제에 돌입하면서 국민정서가 반공 쪽으로 돌아서는 중이었다.
1949년 10월, 연방총선에서 비교적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노동당정권이 무너지고 반공보수주의자며 친미주의자인 자유당소속 로버트 고든 멘지스가 총리직에 올라 장장 16년 간의 장기집권에 들어간다.
반면에 총선 하루 전날, 호주공산당 의장인 로렌스 샤키가 3년형을 언도받아 공산당의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된다. 그는 “소련의 군대가 쳐들어오면 호주노동자들은 그들을 환영해야 한다”라는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한편 호주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호주의 문턱까지 들어왔던 일본군을 막아준 미국에 보답하기 위해 미국, 뉴질랜드와 함께 태평양 안전보장기구(ANZUS) 조약을 체결한다. 호주가 보다 독립적인 상태에서 영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미국의 우산 속으로 옮겨간 것이다.
국제사회는 호혜의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법. 미국과 가장 가까운 유대관계를 서약한 호주로서는 미국의 한국전 참전이 남의 일이 될 수 없었다. 호주정부는 부랴부랴 지원병을 모집했고, 불과 5년 전까지 적국이었던 일본의 ‘황군정글훈련장’ 하라무라 캠프에서 10주간의 속성훈련을 받게 한다.
이부대가 바로 호주육군 제3대대로 새롭게 탄생됐으며 호주군 사상 처음으로 독립 지휘권을 부여받아 단독작전을 펼치는 부대가 된다. 3대대는 주로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로 편성되어 별다른 훈련 없이도 전선에 투입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한국전쟁을 계기로 새롭게 창설된 제3대대의 초대 대대장으로 부임한 찰리 그린 중령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큰공을 세운 유능한 지휘관으로 박천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후 50년 11월 1일, 평북 정주전선에서 중공군의 포탄공격을 받아 30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고 만다.
특히 제3대대는 1951년 4월 23-24 양일 간 경기도 가평에서 중공군 춘계대공세를 죽음으로 막아내어 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정신없이 후퇴하던 UN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한국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제3대대는 가평전투를 통해 피아간에 중요한 보급로였던 경춘가도를 차단하려는 중공군의 기도를 좌절시킴으로서 불리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공로로 미국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고 그후 부대명칭을 아예 <가평대대>로 바꾸었다. 현재 가평대대에 보관중인 가평대대의 한국전 참전 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50.6. 25. 한국전쟁 발발
7. 26. 호주정부 호주육군 제3대대 한국전 파병 결정
그후 10주간 일본에서 훈련 받음
9. 28. 부산에 도착하여 대구로 이동
10.1. 왜관 지역에서 첫 번째 전투 벌임
10.5. 김포로 공수되어 연합군의 북진에 가담
10.9. 개성 점령
10. 17. 사리원 점령(최초로 2명의 부상자 발생)
10. 21. 대동강을 건너면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 벌임
10. 23. 안주 근방의 청천강을 건너 박천으로 진격
10. 30. 박천전투 승리후 정주로 진격하던 중 중공군의 거센 공격 받음(중공 군 한국전쟁 최초로 개입)
11.1. 제3대대장 찰스 그린 중령 전사
11.5. 박천 전선에서 중공군에 맞서 대대적인 전투 벌임(최초로 호주공군 의 지원 받음)
12.3. 신계로 후퇴
1951.1.3. 서울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후퇴
2. 15. 경기도 여주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접전
4.7. 두 번째로 38선을 통과함
4. 23.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맞서 가평전투 벌임
6.2. 가평에서 임진강 지역으로 진격
10월까지 임진강 지역에서 정찰, 매복업무 수행
10.2. 마령산전투(코만도작전)를 10월8일까지 치러 크게 승리함
1952.1. 18. 355고지에서 장기간 적과 대치
12. 10. 호주육군 1대대와 함께 ‘파우나작전’ 전개
그후 53년 7월 27일 휴전이 조인될 때까지 중부전선에서 적과 대치하며 정찰 및 매복업무 실시
1953.7. 27. 휴전 조인
1954. 10. 12. 부산항을 떠나 귀국길에 오름
10. 20. 가평대대 호주의 브리스베인에 도착
한편 제3대대는 가장 치열했던 가평전투에서만 31명이 사망하고 59명이 부상당했으며 3명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 중 한 명은 51년 11월에 질병으로 사망했고 두 명은 53년 8월 포로교환 때 풀려났다.
반면에 중공군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 춘계대공세 자체가 수포로 돌아가는 치명타를 입었다. 가평 대대는 3년 동안 평북 박천전투, 가평전투, 마령산전투 등에서 크게 승리했고, 50년 10월 15일 사리원에서 1,982명의 적군을 생포해 연합군 전사에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호주로 귀환한 가평대대는 한동안 남부호주의 아델레이드 근교에 주둔하다가 지금은 시드니 근교인 홀스워디에 위치하고 있다. 가평대대는 매년 4월 24일 가평전투를 기념하는 ‘가평 퍼레이드’를 갖고 있는데 이 행사에는 호주에 살고는 있는 한국교민 출신 참전용사들도 참가한다.
가평대대는 종전 후 지금까지, 가평 출신 학생 3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가평대대는 가평에서 직접 바위 등을 가져와 38線 모형, 전몰장병 추모비, 가평전투 기념관등을 건립해놓아 가평전투를 부대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에 관한 책자발간에도 열성을 보여 대대소속 장병들이 한국전쟁을 숙지하고 선배들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을 기리도록 만든다. 퀸즈랜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가평으로 가는 길, The Long Road to Kapyong> 과 <마령산 전투, The Battle of Maryang San> <가평대대, The Kapyong Battalion>등이 바로 그 책들이다.
지난 5월 3일, 가평대대에서 만난 크리스 배론 대대장은 “우리 대대가 매년 가평 퍼레이드를 갖고, 가평전투 기념주간을 갖는 것은 한국전쟁에 참전해 큰공을 세운 선배들의 희생과 영광을 기리면서 부대의 전통으로 이어가고 싶어서입니다.”라고 밝히면서 “가평대대가 호주육군 최고의 정예부대가 된 것도 부대원 모두가 가평전투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배론 대대장은 “오는 서기2000년은 시드니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이면서 가평전투 5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가평대대는 가평전투를 축제로 승화시키기 위해 100여명의 병사들을 가평으로 공수해 그날의 영광을 다시 한 번 기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가평대대와 최영길 소년
1950년 10월, 북으로 진격해 올라가던 호주병사들은 평북 정주에서 맨발인 채로 북한군의 시체에서 쌀을 꺼내고 있던 최영길소년(당시16세)을 발견했다. 소년은 평북 박천 출신으로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내려와 경기상업고등학교에 재학 중 , 전쟁이 터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북한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밀려가면서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중공군(동네 노인들은 팔로군이라고 불렀음)이 내려오면 소년들까지 징집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소년의 할아버지는 집에 막 도착한 손자를 다시 남쪽으로 내려보낸다.
박천은 산악지대였다. 전시였으니 먹을 것 또한 있을 턱이 없었다. 소년은 몇 날 몇 밤을 산 속에서 헤매다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으면 조심스럽게 도로 쪽으로 내려가 먹을 것을 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오히려 패주 하는 북한군들과 맞닥뜨리게 되어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맞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북한군의 시체들을 발견했고 그들의 호주머니에 생쌀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극도로 허기져 있던 소년에게 시체는 단지 먹을 것을 제공하는 보급 창고에 불과했다.
제법 쌀이 모아져 산 속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인기척이 들렸고 소년의 코앞으로 총부리가 들이닥쳤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손을 번쩍 들고 몇 마디 영어를 지껄였다. 군인들이 깜짝 놀랐다. 한국에 상륙한 이래 처음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민간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난 그들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늘어진 중절모를 쓴 그들 모습은 서울에서 보았던 미군들과 전혀 달랐거든요”
호주에서 온 군인들이었다. 압록강 쪽으로 전진하기 위해 전방정찰을 나왔던 정찰대원들은 허기 때문에 거의 쓰러지기 직전상태인 소년을 야전사령부로 데려가 먹을 것을 주며 돌봐주었다. 그들은 소년이 건강을 회복하면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생각은 달랐다.
“우선 그들과 함께 있으면 굶주리지 않겠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부대의 간이천막 안에 먹을 것이 가득했거든요. 또한 군인들이 아주 친절했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참 따뜻하게 보살펴줬습니다.”
소년은 부대에 계속 남겠다고 했고 호주군인들도 그를 자신들의 아들로 받아들였다. 소년은 부대의 마스코트가 되어 장장 3년 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어도 서툴렀고 그들이 숨 막히는 전투를 벌이면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해 그냥 따라다니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밥값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잔심부름도 하고 간단한 통역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영길 소년은 제3대대의 식구로 자리 잡게 됐고 나중에는 정식 군속으로 발령되어 통역병, 위생병, 보급병 등으로 일하게 된다. 또한 6개월 내지 1년 단위로 교대되는 3대대 요원들보다 3배 또는 6배 가까이 장기근속 하게 되어 제3대대 한국참전의 산증인이 된다.
그는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50년 11월 중순경, 연합군이 중공군과 맞서 진퇴를 거듭하던 때였다. 안주의 강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호주군은 미군의 부교설치가 끝남과 동시에 강 건너 쪽에 있는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의무중대에 소속이었던 최씨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여있던 부상병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부대원 두 명과 함께 날계란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다.
조심스럽게 마을 입구에 당도해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토방 위에 놓여있는 북한군의 방한화를 발견했다. 깜짝 놀란 세 사람은 엉금엉금 기어서 마을 빠져나와 언덕 쪽에서 뒤돌아보니 마을에는 북한군이 득실거렸다.
부대로 돌아온 최씨 일행은 대대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대대장은 사실확인을 위해 정찰병을 내려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씨는 지휘부로부터 완전한 신임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보고내용이 사실이라는 게 판명되자 부대의 철수명령이 떨어졌고 부교를 설치하던 미군들까지 부랴부랴 철수했다. 나중에 그때 상황을 분석해보니 연합군의 진격이 너무 빨랐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합군은 군용트럭을 이용해 빠르게 전진했고 북한군은 도보로 느리게 후퇴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부지불식간에 적들의 중간 위치에 놓였던 것이다.
죽기 전에 꼭 날계란을 먹고 싶다고 했던 부상병의 소원을 들어주려 했던 최씨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는 못했지만 대대장의 확고한 신임을 얻게 됐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천여 명의 대부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게 되어, 후퇴 중에 사망한 부상병의 난데없는 소원이 부대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그후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영국대대가 전멸하다시피 했던 것을 감안할 때 당시의 상황이 일촉즉발의 위기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씨는 주로 위생중대에 근무했는데 말이 위생중대였지 부대여건이 너무 열악해 야전병원의 기능을 거의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심한 경우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대가 이동하는 상황이었고 1.4후퇴 당시의 추위는 전쟁보다 더 견디기 힘들 정도로 혹독했다. 땅이 꽁꽁 얼어붙어 천막조차 제대로 칠 수 없었고 부상병들은 치료조차 변변하게 받아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 가는 상황이었다.
그때 최씨는 참 많이 울었다고 했다. 본인도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었지만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부상병들을 보면서 전쟁의 참혹함에 치를 떨었다고 했다. 그는 부상병들을 조금이라도 덜 춥게 하기 위해서 마을로 내려가서 지푸라기를 얻어와 맨땅의 모포 위에 누워있는 부상병들의 등 밑에다 깔아주었고 화로를 얻어다가 밤새 화롯불을 지피면서 그들을 간호했다.
“그때 나의 간호를 받은 부상병들이 참 고마워했습니다. 특히 내가 화롯불 지피는 것을 보며 신기해했고, 불 위에다 소금을 뿌려 가스를 방지하는 기지를 보이자 어린 나이에 너무 슬기롭다며 감탄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나를 만나면 부둥켜안습니다. 정말 지독한 겨울이었습니다.”
1.4후퇴 당시, 경기도 이천으로 후퇴했던 제3대대는 추위 때문에 전투를 제대로 펼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일본으로 철수해 일단 겨울을 난 다음 다시 복귀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사시사철 온난한 기후 속에서 살아온 호주병사들에게 한국의 겨울은 전쟁 이상으로 혹독한 것이었다.
한편 최영길씨는 아버지가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최씨가 막사 안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본 병사들이 그를 위로하며 여비를 마련해 부산에 다녀오도록 해주었다. 당시 최씨는 호주군대의 정식 군속으로 발령 받아 보급병으로 근무하며 일정액의 봉급을 받고 있었다.
정신 없이 3년이 흘러갔고, 최씨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며 특별한 소년시절을 강요했던 한국전쟁은 휴전이라는 어정쩡한 결과로 매듭지어졌다. 그는 휴전직전 정들었던 호주군 병영을 떠났다. 전쟁으로 중단됐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그후 최영길씨는 호주군으로부터 소정의 장학금을 받아 연세대 상대에 진학했고, 3년 간의 비공식적인 군대생활을 했음에도 병역이수를 인정받지 못해 다시 한 번 군대생활을 했다.
최씨는 대학을 마치고 나서 가평대대의 초청으로 1968년 호주로 이민하여 한국인의 호주이민 제1호가 됐고, 이민과 동시에 호주국영인 콴타스 항공의 시장계획부 사원으로 입사해 23년 간 근무한 후 지난 91년 정년퇴직 했다.
그는1969년 가평대대의 전무후무한 명예부대원이 됐고, 한국 및 동남아 참전협회(Korea & South Asia Forces Association of Australia) 한국지부를 창설해 3회에 걸쳐 지부장을 맡았다. 그는 또한 한인사회와 가평대대에 끼친 공로로 호주정부로부터 <호주훈장>을 받기도 했다.
지난 4월 24일 가평의 날 행사장에서 만난 레이 에드워드씨(한국전 당시 중위로 근무)는 당시의 최영길 소년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안전핀, 붕대, 뺀찌, 가위, 솜 등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 마디로 걸어 다니는 공구함이었으며 뭐든지 다 수리했다. 그는 통역관, 위생병, 병참요원으로 3대대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가평대대 취재에 동행하여 가평전투 기념관을 둘러보던 최영길씨는 “이젠 먼 나라의 얘기처럼 아득하다”며 전쟁 당시를 다음과 같은 몇 마디로 회상했다.
“호주군인들은 정말 용감하고 성실했습니다. 아무리 전선의 상황이 어려워도 서로 격려하면서 불굴의 정신으로 싸웠습니다. 위계질서가 분명하면서도 마치 형제들처럼 지냈습니다. 미군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호주군인들이 훨씬 도덕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중부전선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 미군들이 바로 옆에 있었거든요.”
“가평대대의 별명이 ‘충직한 군인들(Old Faithful)’인데 그냥 생긴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포연이 가득한 전선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용맹스럽게 전투를 벌이던 그들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That's Life
어니 케너드씨는 가평대대 출신의 상이용사다. 그는 한국전 이전에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베테랑이었다. 지금은 완전하게 건강을 회복했지만 그는 53년 귀국 당시, 야전침대에 누워서 돌아와야 했다.
케너드씨는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적과 장기적인 대치국면에 놓여있던 중부전선에 배치됐다. 317,355고지 등의 주인이 밤낮으로 바뀌던 시기에 그는 참호를 구축하기 위해 쉴새 없이 참호를 파야했다. 문자 그대로 디거(Digger)였다.
‘디거’라는 말은 호주병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호주군의 별명이 ‘디거’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의 갈리폴리전투에서 호주군이 전멸 당하면서도 그 형편없는 진흙구덩이에 참호를 구축해놓은 것을 보고 영연방 연합군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이 별명은 언뜻 호주군을 얕잡아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사실은 호주군의 성실성을 높이 사면서 붙여준 별명이다. 그런 연유로 호주의 신문, 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아이들까지도 훈장을 달고 다니는 참전용사들을 만나면 ‘디거’라고 부른다. 그러나 케너드씨는 이 호칭이 싫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참전했던 나는 전선에서 참호만 파다가 제대했습니다. 그게 싫어서 한국전쟁에 지원했는데, 그곳에 가보니 또 똑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실망스러웠지만 별 도리가 없었지요. 사실 나는 금광의 광부출신이기 때문에 땅파는 일에는 이골이 나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 한바탕 붙을 기회가 왔습니다.”
휴전 바로 직전, 휴전을 좀더 유리한 국면에서 맞기 위해 마지막 총력전을 펼치던 때였다. 그는 마침내 전쟁다운 전쟁을 치르게 됐고 최선을 다해서 전투에 임했다. 치열한 전투가 며칠째 계속되던 어느 날 새벽, 그는 전방정찰 도중 적의 공격을 받고 허벅지 부상을 당하고 만다.
“그때 조금 더 신중했더라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는데… 동료들이 늘 마지막을 조심해야한다고 당부했지만 결국은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다 인생 아니겠어요”
그 후로 그는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뒤에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부상후유증 때문에 땅파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었지만 직장에서는 그를 사무원으로 배려해 주었다.
“나는 광산에서 동료들과 함께 땅 파는 일을 무척 즐겼는데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닌 듯 했습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 아닙니까”
그와 대화를 하다보니 그가 말끝마다 "That's Life"라는 말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호주 개척기의 소설에 운명적인 삶을 그려낸 <Such is Life>라는 소설이 있었는데 그것을 빗대어 쓰는 말인듯 싶었다.
“내 전우 중에 피터 채프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친구도 상이용사인데 지난 92년에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그는 가평 퍼레이드가 있는 전날 밤에는 꼭 부대에 와서 묵는데 밤새도록 부대를 걸어 다니며 울부짖는다고 합니다. 아마 죽은 전우들이 생각나서겠지요.”
채프린씨가 분명히 행사에 참석했으리라는 생각에 수백 명의 베테랑들 속에 뭍혀 있는 그를 찾아냈다. 막상 만나고 보니 행사장에서 유난히 장난 끼가 많았던 바로 그분이었다.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굉장히 어리둥절했습니다. 너무 철저하게 변해서 혹시 다른 도시에 잘못 내린 게 아닌가 의심했지요. 가평에도 가보았는데 너무 변해서 전투당시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부산에도 갔다. 현재 부산에는 호주군 전사자 281구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고, 불에 타거나 시체를 늦게 발견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던 46명의 호주출신무명용사들의 유해도 호주군 묘역에 묻혀있다.
호주의 4월은 ‘현충의 달’이다. 4월 25일은 호주의 현충일인 ANZAC DAY(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다. 이날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의 갈리폴리 전투에서 터키군에게 전멸하다시피 한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을 추모하기 위해서 정해진 현충일이다.
국가공휴일인 이날 호주 전역에서는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참여하는 참전용사들의 시가행진이 있고, 각종 추모행사들이 거행된다. 물론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퍼레이드도 행사의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퍼레이드 중에 해군 대위로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에드워드 플레밍씨를 만났다. 그는 해군 출신답게 호주의 대표적인 전함 시드니호 얘기를 했다.
“80년대 초, 시드니에서 거행된 시드니호 퇴역식에 참가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퇴역한 시드니호를 한국의 동국제강에서 고철용으로 사갔다는 겁니다. 시드니호는 인천상륙작전 등 중요한 작전에서 큰공을 세웠고 2차 세계대전 때는 호주해군의 심벌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역사의 수레바퀴가 참 엄숙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장시간의 퍼레이드를 끝낸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캔터베리 재향군인클럽에 모여 국기 하강식 및 뒤풀이를 가졌다. 한국전에 간호장교로 참전했다는 어느 할머니는 한국교민들과 팔짱을 끼고 맥주 잔을 기울이며 머나먼 나라의 전설 같은 얘기를 했다. 더러는 웃으며, 더러는 울면서…
시드니의 밤이 깊어가고 술 취한 노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들은 또다시 양로원으로, 혼자 사는 집으로, 더러는 병상의 침대로 돌아갈 것이다. 어니 케너드씨가 어깨를 툭 치며 또다시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했다.
“That's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