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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3월 24일, 고난주일 낮예배 설교 +
+ 제 목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본 문 : 갈라디아서 2장 20절 - 21절 (신약성경 303쪽)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아멘!
서로 인사 / “잘 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축복한대로 됩니다.”
“당신은 역사의 주역입니다. 오늘도 좋은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3월 24일, 오늘 주일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고난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 신앙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미국 워싱턴의 놀런 클리크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키가 큰 측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정부의 허가로 벌목꾼들이 숲의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할 때, 이 측백나무도 베어낼 대상이었지만,
베기에는 너무 아까워 차마 베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변 나무들을 다 베어내고 나니,
이 나무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큰 나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허허벌판의 거센 바람을 맞으며 살아갈 수는 없었던가 봅니다.
나무들이 잘려나가면서 이끼도 함께 사라지자, 수분을 얻지 못한 큰 측백나무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죽어야 하고, 죽을 수 있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셨으니까 우리도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고, 다시 사는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자 죽고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에는, 엄청 난 축복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양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들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 옆에 세워진, 또 다른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뿐입니다.
하나의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달려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혀 다른 십자가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하나의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과 내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예수님께서 잘 알고 지내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유대로 다시 가려고 할 때에 도마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도마의 고백을 잘 묵상해보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영광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못 오를 산이 없고, 주님과 함께라면 못 건널 강이 없네.
주님과 함께라면 날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네. 십자가 지고 가는 길 험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행복하겠네. 폭풍이 몰아치는 거친 광야도 주님과 함께 가면 못 갈 것이 없네.”
주님과 함께 라면 무엇이든지 기쁨이며, 영광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주님과 함께라면 지옥에라도,
가겠다.” 고 했습니다. 지옥에 가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라면 지옥도 두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성령행전이요. 전도행전입니다. 이 사도행전은 크게 둘로 나눕니다.
‘그의’ 라는 부분과 ‘우리’ 라는 부분입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은 ‘그의’ 라고 호칭을 하다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왔을 때부터 ‘우리’ 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왔을 때에, 의사 누가가 바울의 전도팀에 합류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를 떠날 때 “그가 떠났다.” 누가만 빌립보에 남아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0장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다시 빌립보에 왔을 때 ‘우리’ 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빌립보를 떠나” 라고 말합니다. 그 후 28장 끝까지 ‘우리’ 라는 말이 계속 이어집니다.
누가는 의사요, 역사가요, 문장가였습니다. 이런 누가는 사도 바울이 전도를 하다가 고소를 당하여,
왕과 총독 앞에 서고, 유대인들에게 죽을 뻔 하고, 로마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을 당하고,
로마에 가서 마지막 순교할 때까지, 사도 바울과 항상 함께 하며 복음전도 사역을 힘을 쏟았습니다.
병도 많고 몸이 약했던 바울 곁에 의사인 누가가 함께 있었다는 것은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어려울 때 함께 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요. 가장 친밀한 사람이요. 가장 고마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의 십자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가장 고통스런 그 순간을, 예수님과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이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므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가르침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이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에 가능합니다.
바로 이 믿음이 있어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이 복음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바울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도행전 8장 1잘 말씀에 보면 “사울은 스데반집사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핍박자 바울은 스데반 집사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스데반이 돌에 맞을 때에 옷을 지키던 핍박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그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가두고,
자신이 박해하던 그 십자가에 이제는 자신이 못 박혔다고 고백한 것은, 완전히 돌아섰음을 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 이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가로의 길이가 60 미터이고, 세로의 길이가 14 미터나 되는 초대형 십자가 성화입니다.
오래 전 러시아의 화가 얀 스티카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인데, 그림이 너무 커서 둘 곳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휴버트 이튼이란 분이 포레스트 론이라는 묘지를 만들면서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의 포레스트 론에,
가로 60미터, 세로 14미터의 이 그림이 들어갈 수 있도록, 큰 집을 지어놓고 전시를 하였다고 합니다.
화가 얀 스티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그리는데, 어떤 장면을 그릴까 구상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큰 그림의 왼쪽 구석에 바울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그렇게 그려 넣은 것입니다.
이전에 사울이라는 청년은 십자가를 조롱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장사 지내신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예배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고 고백할 만큼 십자가는 그에게 위대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러 땅끝까지 찾아가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믿지 않았던 때의 사울이라는 바울이 이제까지 메고 있던 것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가 메고 있었던 율법은 사실 그에게 어리석음이었고,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후부터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율법의 짐을 내려놓고, 어리석음을 멀리하고, 모든 죄의 무거움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구속이나 고통이 아닌 놀라운 자유와 해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사랑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다는 것은 참 평안이며, 기쁨이며, 안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죄인이, 감히 예수님과 함께 같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 중 영광입니다.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임마누엘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예수 십자가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누구나 평화롭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너무 평화롭습니다.
이 평화를 맛 본 사도 바울이기에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어느 제자가 자기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스승은 제자에게 공동묘지에 가서 죽은 자들을 향해, 10분간 욕설을 크게 퍼붓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온 제자에게 스승은 물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화를 내더냐?” “아닙니다.”
이번에는 다시 묘지에 가서 10분간 묘지의 죽은 자들을 향해 칭찬하며, 박수를 치고 오라 하였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온 제자에게 스승이 물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좋아하더냐?”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란? 누군가 나를 향해 화를 내도 맞대응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칭찬을 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도 우쭐대지 않는 것이, 예수와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란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은, 반드시 다시 삽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는 말씀은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심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믿음 안에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바울은 세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나 대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내 삶의 중심이 됩니다. 둘째는 율법 대신 믿음으로 삽니다. 셋째는 옛 사람 대신 새 사람으로 삽니다.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변화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십자가가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이전이나, 예수님을 믿은 이후나,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육체 가운데 살았지만, 결코 육체로만 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에는 육체 가운데서 육체로 사는 사람이 있고, 육체 가운데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더 이상 육체로 살지 않습니다. 왜 육체로 살지 않습니까?
육체를 죽였으니 육체로 살지 못하고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로만 사는 사람들은,
육체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육체를 자기 정욕대로 버려둡니다. 육체를 죄의 움막으로 사용합니다.
창세기 6장 3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혼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사람을 멸망시키기로 하신 것은 육신입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육신으로 변질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영의 일입니다.
우리 사람의 육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몸은 죄인의 관습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육체로 내버려두면 멸망합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죄 속에 삽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 죽을 몸은 육의 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죄의 몸을 신령한 몸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 영의 몸이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영으로,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최근에는 ‘친환경’ 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 환경 친화적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자신의 육체를 건강하게 하려고, 친환경 유기농 식품이나 음식물들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친 영혼’ 입니다. 그래서 영혼 친화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영혼을 강건하게 합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우리 영혼의 힘이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영성가 윌리엄 로우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몸은 병약하고, 썩어가며, 곧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영혼을 온전하게 하는 것보다,
몸을 꾸미는데 더 집착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다.” - 그래서 몸을 꾸미는 것 보다는,
영혼을 잘 꾸며야 영원히 삽니다. 이것을 ‘믿음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십자가에서 함께 못 박히신 예수님,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어느 유수한 대학의 총장이 계시는데, 아주 예의가 바른 신사였고, 존경받는 리더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알츠하이머라는 치매를 앓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아내의 병이 깊어져 갔습니다.
몇 년 후에는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서 병든 아내를 보살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총장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가 사임한 이유는 아내를 돌보는데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재단이사회에서는 “우리 학교에서는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 사직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서 한 이사가 덧붙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총장님이 아무리 애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모님이 이미 총장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시는데요. 그러니 사직은 말아주십시오.”
그러자 총장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50년 동안 제 아내와 평생을 함께 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제 아내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저는 제 아내를 똑똑히 알아봅니다. 저는 제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그 어떤 환경에서든 항상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고통도 함께 당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죽음까지도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도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까? 내 모든 정과 욕심,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십시오.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에 나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영원히 삽니다. 영원히 삽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주님이 예비하신 천국에서 영원히 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므로 예수님과 하나 된 삶을 살고, 아직 육체 가운데 살아가지만,
육체로 살지 않고 믿음 안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잠시 침묵하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