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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의 음식표준이 된 `코셔`
유태인들은 독특한 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핵심은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될 것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 이중 먹을 수 있는 것을 코셔(Kosher)라고 한다. 적절한, 옳은이라는 뜻의 히뷰류어 카슈르트가 어원이다.
코셔는 음식의 형태가 아니라 재료를 선택하고 다루는 법이다. 때문에 중국음식도 유태인법에 따라 만들면 코셔가 되고 베이글 같은 전형적인 유태인 식품도 유태인법을 따르지 않고 만들면 코셔가 아니다. 그럼 코셔는 어떻게 구분하는가. 유태인들이 얘기하는 코셔의 기준과 의미를 따지는 책만도 수백권이 나와 있을 정도이나 간단히 말하면 크게 7가지로 분류할수 있다.
1.채소나 과일등 식물성 음식은 무조건 코셔이나 동물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육류의 경우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만 먹는다. 소 양 염소 사슴등은 되개김위도 있고 발굽도 갈라져 있다.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코셔가 아니다. 어류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코셔다. 연어 도미 조기등은 지느러미와 비늘을 둘다 가지고 있으므로 먹을수 있다. 상어 고래 미꾸라지는 지느러미는 있으나 비늘이 없어 먹을수 없다. 오징어 낙지 꼴두기 문어등은 지느러미는 물론 비늘도 없으므로 코셔가 아니다.게 가재 새우 굴등도 마찬가지다. 조류의 경우 닭 칠면조 집오리등 대부분의 가금류는 코셔이다. 하지만 야생조류와 육식을 하는 조류는 코셔가 아니다. 독수리 매 타조 부엉이 갈매기 박쥐등은 먹지 못한다. 코셔인 조류의 알은 코셔이고 코셔가 아닌 조류의 알은 코셔가 아니다.
2. 먹을수 있는 동물이라도 육류와 조류는 반드시 유태인 법에 따라 도살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적으로` 고통없이 도살 하는 것. 날카로운 칼로 2초안에 목을 찔러 죽여야 가장 고통이 없다. 자연사한 동물이나 다른 동물과 싸움하다 죽은 동물은 먹지 못한다. 도살방법을 얼마나 중요시 했느냐는 유태인들이 많이 살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는 가축 도살을 주로 성직자인 라바이(랍비)가 담당했다는 점에서도 잘 알수 있다.
3.어떤 동물이던 피는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생명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레위기 17장 11절),따라서 피를 먹는 것은 생명을 먹는 행위로 여겨진다. 고기는 물론 새의 알에도 피가 묻어있으면 먹을수 없다.
4.허용되는 동물이라도 일정 부위는 먹을수 없다. 신경계와 혈관을 먹지 못하고 신체의 장기를 둘러싼 지방질도 먹지 않는다.
5.(부모와 자식간으로 생각될수 있는) 육류와 우유를 함께 먹을수 없다. 너무 잔인하기때문이다. 따라서 치즈와 고기를 함께 먹는 햄버거나 치즈버거는 금물이다. 고기를 먹은후 곧 바로 우유를 먹는것도 안된다.뱃속에서 섞이는 탓이다. 독일계 유태인들은 고기를 먹은뒤 3시간, 동유럽 유태인들은 여섯시간을 기다렸다가 우유를 먹는다.
6.육류를 먹을 때 사용했던 식기를 우유를 담는 그릇으로 사용할수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유태인 가정에서는 통상 두벌의 그릇과 두 벌의 포크와 나이프를 갖고 있다. 각각의 찬장에 보관하고 설거지도 따로 한다.
7.유태인이 만들지 않은 포도주는 먹을수 없다. 포도주는 고대부터 제사 의례때 사용한 성스런 음식이라는 생각에서다. 유태인들이 코셔 와인만 먹는 이유이다.
유태인들은 이러한 코셔전통을 3,300년동안 지켜왔다.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생각할수 있는게 건강이다. 실제로 코셔 식품이 건강에 좋은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가축도살도 워낙 위생적으로 해서 유태인 푸주간은 미국 보건당국의 조사도 면제 될 정도이다. 하지만 건강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코셔에는 건강과 관련없는 조항들도 많다. 일부에서는 환경적인 요인도 지적한다. 예를들어 낙타는 사막지대에서 음식보다는 짐을 나르는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먹지 못하게 만든 것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이것도 코셔법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유태학자들은 결국 토라(유태인 성전)에 그렇게 쓰여져 있어서라는 결론을 내린다. 성경에 나와있기때문이지 별다른 이유는 없다는 설명이다. 결국 코셔를 지키는 것은 신성함과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란 얘기이다. 유태종교에서는 성서에 나와있는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고 이를 실천하는 능력을 매우 중시 여기는 데 그런 구분을 음식문화에도 적용하고 있다.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먹는 행위에서부터 거룩함을 연습하는 셈이다.
현대 사회로 들어와 슈퍼마켓에 산더미 처럼 쌓여있는 식품중에서 어느것이 코셔이고 어느것이 코셔가 아닌지를 일반인들이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부 유태인 단체에서 인증을 만들어 사용한다. 과거 우리나라에 있어던 품질 보증 마크인 KS인증 처럼 코셔 식품에 코셔 인증을 붙이는 제도이다. 코셔인증을 하는 단체는 넉넉잡아 400개에 이른다. 미국에서 팩으로 나온 상품의 4분의 3은 이중 하나의 인증을 받았을 정도이다. 이중 OU, Star-K, KosherQuest등이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인증이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보수파교단(Orthodox Union)의 인증인 OU마크. 현재 60개 국가, 2천5백개이상의 기업에서 30만개 이상의 브랜드에 OU마크를 부착하고 있다. 코카콜라,콜게이트,다농,제너럴밀, 하겐다즈, 크래프트, 나비스코,네슬레, P&G, 사라 리,립튼 티등 거의 모든 식품업체들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부분 OU마크가 들어가 있다.
물론 유태인들이 모두 코셔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30% 가량의 유태인만이 아주 철저하게 코셔를 지키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하지만 코셔 식품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코셔가 건강식품이란 이미지가 퍼지면서 유태인이 아닌 사람들도 코셔를 찾는 경향이 커지고 있기때문이다. 실제 불황과 관계없이 코셔 식품 판매는 연평균 12-15% 늘어나 현재 시장규모가 미국에서만 1,500억달러에 달한다는게 업계의 추산이다.
뉴욕에서 식품 무역업을 하고 있는 푸토피아(Footopia)의 윤영호 사장은 약 20년전부터 코셔 인증이 급격히 확대되어와 최근에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이제 소비자들은 코셔인증을 받은 제품을 안전하고 우수한 제품으로 여기고 있고, 제조업체들도 코셔인증이 마케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고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예를들어 미국에서 MSG(조미료)판매를 위해서는 코셔인증이 필수적이며 중국 한국등 소수민족들이 소비하는 시장을 제외하고는 95%이상의 실 수요처들이 코셔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 세계 다국적 식품 기업들은 예외없이 자사 제품에 대해 100% 코셔인증을 받고 있고 있을 정도이다. 윤 사장은 일반 식품류에서 출발한 코셔가 이제는 미네랄 비타민 아미노산등 건강식품류에 까지 급속도로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으며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코셔의 영역이 의약품등 인간이 먹는 것과 관련된 모든 제품으로 확대되지 않으란 법이 없을 것 같다고 전망한다.
계산에 밝은 유태인들이 이 과정에서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매년 60여개국에서 30만개 이상의 품목이 코셔 심사를 받는데 업체들은 연간 인증 수수료를 품목당 3,000-5,000달러씩 지불해야 하고 인증검사를 위한 출장 비용을 별도로 부담해야 한다. 대부분의 업체들이 코셔가 자신들 제품의 품질 우수성과는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거래선들에게 납품을 하기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인증을 받아야 한다. 코셔 인증기관들은 업체들이 마음대로 코셔심벌을 사용했을 때는 FDA(식품의약청) 에 고발해 벌과금을 부여하고, 코셔 인증을 사용하던 업체가 인증을 포기할 경우 해당업체가 더 이상 코셔제품을 취급하지 않는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여 실질적으로 영업에 막대한 판매 차질을 주기도 한다.
유태인들의 음식문화인 코셔가 이제는 세계인들의 음식표준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셈이다.
소송에서 이기려면 유태인 변호사를 찾아라
미국에서 로스쿨(법과대학원)을 졸업한 신출내기 변호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어디일까. 돈을 많이 버는 뉴욕 맨해튼의 유명 로펌(법률회사)들일까. 대부분의 변호사들에게는 맞는 답이다. 하지만 각 로스쿨의 수석 졸업생들에게는 틀린 답이다. 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대법원이다.
재판장의 말석에서 일을 도우는 서기에 불과하지만 대법원을 통해 법조계에 입문하는 것이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엘리트 코스의 시작이다. 실제 대법원은 하버드 예일 스탠포드 시카고등 이른바 톱 5 또는 톱 10 로스쿨에서 3등안에 든 학생중에서만 신입 직원을 뽑는다. 11-20위권 로스쿨의 경우에는 1등 졸업자에 한해 겨우 원서를 낼수 있을 정도이다.
내용은 좀 다르지만 이처럼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대법원의 채용기준을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던 적이 있다. 지난 98년 12월 대법원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시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주로 흑인과 히스패닉(남미출신 이민자)들이 대부분 이었던 시위대의 주장은 대법원이 사람을 뽑을 때 인종차별을 한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의 실무를 맡는 법률 서기중 흑인은 1.7%이고 히스패닉(남미출신 이민자)이 1.2%에 불과한 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사회에서 흑인과 히스패닉의 인구비중이 각각 12-15% 선에 육박하고 있으니 인구비율로만 따지면 그런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 대법원 직원중에는 아시아계도 거의 없으며 대부분 백인들이다. 그러나 시위대들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못한 대목이 하나 있다. 직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들중 30%이상은 인구가 미국 전체 국민의 2%에 불과한 유태인이라는 점이다. 같은 백인이라도 유태인이 아니면 숫자상의 차별을 당하긴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 같은 비율은 미국 법조인들의 꿈인 대법관 숫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체 9명의 대법관중 현재 유태인은 스테판 브레이어와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여) 두명. 비율로 따지면 전체의 22.2% 이다. 나머지 7명중에는 개신교가 4명, 가톨릭이 3명. 인구비례로 따지면 유태인들의 비중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유태인 대법관은 루이스 브랜다이즈가 1916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유태인 대법관으로 임명된 이후 1969년까지 유태인이 물러나면 후임으로 유태인이 임명하는게 관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69년 그런 관례가 깨졌고 그후 첫 대법관은 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임명한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였다. 클린턴은 다음해 다시 스테판 브레이어를 임명해 사상 첫 2명의 유태인 대법관시대를 열었다.
이 같은 통계적인 접근은 시간이 지날수록 법조계에서 유태인들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 유명 대학 로스쿨을 가보면 최고 엘리트들만 유태인이 아니다는 점을 금세 알수 있다. 전체 학생들의 평균 30%는 유태인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각 대학 로스쿨마다 JLSA(Jewish Law Students Association-유태인 법대생 연합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데 하버드법대에만 회원이 3백명이 넘는등 전국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로스쿨때부터 미국 법조계의 주력부대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명문 로스쿨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UC버클리 법과대학의 유진 볼로크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전국 법과대학 교수의 26%가 유태인이라는 통계도 나와있다.
유태인 법학도들의 우상은 단연 사상 첫 유태인 대법관인 루이스 브랜다이스(Louis Brandeis). 1856년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태어난 브랜다이즈는 어린시절 독일에서 공부한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1877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보스턴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노동운동과 여성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특히 근로자들의 최저임금과 반독점운동 같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는 무료변론도 마다 않았다.
그는 대통령에 출마한 우드로 윌슨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윌슨은 당선후인 1916년 그를 대법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유태인 대법관을 보는 주위의 눈은 곱지 않았다.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어느정도였는가 하면 제임스 맥레이놀드라는 동료 대법관은 임기를 마칠때까지 브랜다이즈 옆에 앉기를 거부했을 정도이다. 브랜다이즈는 임기중 인권과 언론자유를 위해 크게 노력했다. 그는 경제를 통제하기위한 정부의 개입을 적극 옹호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대통령의 뉴딜정책도 적극 지원했다.
미국의 대법관이기에 앞서 유태인이었던 그는 1차대전이후 이스라엘의 독립을 추구하는 시오니즘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유태인으로서 좋은 미국인이 된다는 것은 적극적인 시오니스트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을 남기도한 그는 미국 시오니스트들을 이끌고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등 윌슨 대통령이 시오니즘을 지원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 39년 대법관직에서 은퇴했고 41년 사망했지만 그의 이름은 1948년 설립된 유태계 대학 브랜다이즈 대학의 이름으로 명명되면서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물론 유태인 법률가들이 브랜다이즈 처럼 모두 인권을 중시하고 핍박받는 소수를 옹호해주는 것은 아니다. 비 유태인들이 느끼기에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변호사들도 수두룩하다. 미국 사회 일각에서 유태인 변호사라는 말은 자기이해만 챙기는 아주 이기적이고 냉혈한 법률가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유태인들이 남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와는 관계없이 실제 법률과 관련된 업무가 돌아가는 월가 로펌의 영향력있는 변호사들은 거의 유태인들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회사들이 전체 변호사의 절반 이상이 유태인 변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속 변호사 거의 대부분 유태인인 회사들도 한둘이 아니다. 미국의 주요 기업들이 대부분 유태인들이 경영하거나 유태자본으로 운영되는 탓에 이들이 법률문제를 유태인 변호사와 상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실제 복잡한 송사에 말렸을 경우 반드시 이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수임료가 비싸도 유태인 변호사를 써야 한다는 것은 미국 사회의 하나의 불문율이다.
유태인들이 법조파워는 법조계의 문화도 바꿔놓고 있다. 대부분 유태인들은 아무리 일이 바빠도 유태인들이 지키는 명절에는 휴가를 내고 근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유태인들의 명절은 아예 회사차원에서 근무를 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로펌이 몰려있는 맨해튼 전체가 유태인 공휴일은 휴일로 여길 정도이다.
유태인들이 이처럼 법률에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틴 스미스라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유태인 변호사의 설명은 간단하다. 유태인들의 종교는 바로 법에 근원을 두고 있기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유태인의 생존은 종교와 법에 의존하고 있다며 영토가 없었던 유태인을 지켜준 힘은 바로 종교와 이를 구성해주는 율법이었다고 말한다. 유태민족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법은 이들에게 종교이자 생활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유태종교는 법에서 시작됐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꼭 지켜야 할 구체적인 법인 10계명을 주었고 이 하나님과의 계약인 10계명은 유태인들이 지키는 모든 율법의 근간이 되었다. 통상 율법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율법학자들은 이를 613개의 율법으로 나눠 생활의 기본을 삼고 있다. 이중 ---을 하라는 긍정적인 율법은 248개, ----을 하지 마라는 부정적인 율법이 365개로 유태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고 있다.
이처럼 종교와도 같은 개념인 율법을 중시한 유태인들은 아직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율법학자인 라바이(랍비)를 꼽고 있다. 법을 공부하는 라바이는 지금도 유태인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의 직업으로 가장 선호하는 직업중 하나이다. 법률을 중시여기는 유태인들 사이에서 법률가가 많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 셈이다.
누가 유태인 인가?
뉴욕 맨해튼을 오갈때면 위 아래 검은색의 특이한 양복을 입고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사람들이 검은색 모자와 검은 가방을 들고 삼삼오오 걷는 것을 쉽게 볼수 있다. 보통사람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지만 머리에 호떡 모양의 모자(야물카)를 착 달라붙게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맨해튼을 처음 찾은 관광객들에겐 생소한 모습이지만 뉴요커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광경이다. 바로 뉴욕의 유태인들이다.
그렇다면 유태인들은 모두 그런 복장을 하고 다닐까. 물론 아니다. 이보다 더 많은 수의 유태인들은 보통의 뉴오커들과 똑 같은 복장을 하고 다닌다. 본인이 유태인이라고 밝히기 전에는 전혀 눈치챌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럼 누가 유태인이고, 어떻게 구분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유태인들 조차도 자신있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얼마나 어려운 질문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가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그렇게 기다리던 독립을 했을 때 였다. 거주할 땅을 확보한 이스라엘에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태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신생 정부는 이른바 귀환법(The Law of Return)을 만들어 유태인들의 귀환을 법적으로 지원했다. 귀환법의 핵심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전세계 유태인들에게 자동으로 이스라엘 국적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문제는 누가 유태인인가였다. 수천년동안 흩어져 살았던 이들은 언어도 다르고 심지어 얼굴 색깔도 달랐다. 백인이 대부분이지만 에티오피아에는 유태교를 믿는 흑인들도 많이 있었다. 논란이 이어지자 1958년 7월 20일 이스라엘 정부는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다. 유태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스스로 유태인으로서의 믿음이 있다고 맹세하는 사람을 유태인이라고 규정했다. 한마디로 나는 유태인이다는 선언만으로 유태인임을 인정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정의도 논란을 낳았다. 이스라엘 국적을 얻고자 거짓으로 유태인임을 선언하는 경우도 많이 생겨난 탓이다. 때문에 1960년 이스라엘 대법원은 더욱 분명한 정의를 내려주었다. 귀환법에서 적용하는 유태인은 어머니가 유태인이거나, 또는 유태교로 개종한 사람이며 다른 종교를 믿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어머니가 유태인이라는 혈통과, 그렇지 않을 경우 유태교로 개종한 사람이라는 신앙심중, 적어도 하나는 분명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실제 유태인들은 혈통을 중시한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류가 모두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면 유태인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신에 의해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만을 일컫는다. 혈통을 따질 때 가장 분명한 것은 모계를 따르는 제도이다. 아버지가 누군지는 몰라도 어머니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는 없는 탓이다. 따라서 유태인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어머니가 유태인이면 무조건 유태인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 외부 침략자인 이교도들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한 유태인 여성이 낳은 아이도 분명한 유태인으로 여긴다. 최근들어서는 모계를 따르는 전통이 많이 희석됐지만 그래도 아직 정통 유태인을 따지는 기준이 되고 있다.
개종으로 인한 유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특히 유태인들이 자신들만의 거주지였던 게토를 떠나 일반 사회와 섞이면서 이교도와의 결혼이 많아진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유태인 남성과 결혼한 여성이나 유태인 여성과 결혼한 남성이 결혼후 유태교를 믿는 경우가 대부분의 개종이유이다.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유태인들끼리 결혼하는 비율이 5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다.
유태인과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뉴욕에서 유태인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이 유태교로 개종, 한국계 유태인(Korean Jew)가 된 것은 이제 흔치 않은 케이스이다. 맨해튼에서는 한국계 유태인 여성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만남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유태교가 마음에 들어 개종하는 종교적인 이유도 없지 않다. 뉴욕에서는 일본인이 유태교를 믿어 이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라바이(랍비)가 되어 활동하는 사례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유태인은 종교적 문화적 정신적인 측면으로 구분하지 인종이나 민족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유태인들은 종교적인 성향에 따라 여라가지 종파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정통주의(Orthodox Jew), 개혁주의(Reform Jew), 보수주의(Conservative) 3개로 나눌수 있다.
1)정통주의
변화에 반대하는 유태인 그룹으로 아직도 모세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이다.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은 안식일인 일요일에는 아직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문명의 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회당에 갈때도 꼭 걸어서 가고 심지어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를 탈 일이 있으면 같이 탄 사람보고 버튼을 눌러달라고 부탁한다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이다.
평일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치장한 정통 복장을 하고 다닌다. 율법대로 생활하는 보수적 성향의 이들 사회에서 여성들은 아직 가정에서 머물어야 하는 등 남녀차별이 당연시 된다. 회당에서도 남성과 여성이 자리를 구분해 예식을 올리고 여성은 지도자인 라바이(랍비)가 될수 없다. 회당에서의 예식도 아직 히브류어로만 진행한다. 가장 유태인다운 유태인인 정통주의자들은 지난 70년대까지 미국 유태인의 11%선이었으나 이제는 6백만 유태인중 5% 안팎으로 보면 될 정도로 수가 줄어들고 있다.
2) 개혁주의
유태주의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그룹. 유태 전통을 존중하고 고수하고 있지만 전통에 대한 해석을 현대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을 공부해야 하지만 개인적인 양심이나 선택등을 현대사회의 생활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예를들어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남녀평등을 처음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유태인이어야 유태인으로 여기는 정통주의와 달리 부모중 어느 한쪽이 유태인이면 자식도 유태인으로 인정한다.
복장도 이웃 사람들과 비슷하게 편하게 입고 다닌다. 회당에서의 의식도 히브류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다만 회당에 들어설때는 반드시 머리에 야물카를 써야 한다. 19세기 이후에 발전하기 시작한 개혁주의 급속도로 퍼지며 이제는 유태인의 최대계파가 되었고 아직도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미국인들의 42%가 개혁주의를 따르고 있다.
3) 보수주의
유태주의의 현대화를 희망하지만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현대화되고 개인주의적인 회당 생활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독일계 유태인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회당생활은 가족 같은 끈끈함과 편안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정통교단과 개혁교단의 중간단계에 있다. 현대성에 대한 의식은 강해 1972년 유태교 최초로 여성 라바이를 배출했을 정도로 남녀평등을 추구하고 있으나 회당에서는 아직도 히브류어가 주요 기도서로 사용되고 있다. 80년대 까지 미국 유태인의 40%선을 차지했으나 최근들어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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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같은 분류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하나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 탈무드에 나와있는 대로 모든 유태인은 서로를 책임진다(All Jews are responsible for one another)는 생각에는 다름이 없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차이날 지라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유태인을 돕기위해 막대한 돈을 모으는 것이 유태인이다.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학살할 때 어떤 종파의 유태인인지를 가리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유태인을 받아들일 때 어떤 종파의 유태인인지를 가리지 않았다는 역사가 유태인은 공동운명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제는 정치의 바다로....
지난해 11월 5일 실시된 미국 주지사 선거 결과가 발표됐을 때 모든 언론들의 관심은 하와이로 집중됐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 50번째 주 하와이 섬. 여기서 여성 후보인 린다 링글(50)이 주지사로 당선된 것이다. 언론들은 관심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와이에 59년 주 승격이후 처음으로 공화당 주지사가 탄생했다는 점과 첫 하와이의 첫 여성 주지사라는 점이다. 이 두가지 기록만으로도 그는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언론들이 드러내놓고 보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당선에는 몇가지 중요한 의미가
더 들어있다. 매들린 쿠닌(1985-1991년 버몬트)에 이어 두번째 유태인 여성 주지사, 하와이를 통치하는 최초의 유태인, 에드워드 렌델 펜실베니아 주지사와 함께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두명의 유태인중 한명이라는 유태인으로서의 기록들이다.
하와이는 유태인인 마이클 블룸버그가 시장으로 있는 뉴욕시나, 최근 소환투표 물러나 영화배우 출신 아놀드 슈워제너거에게 자리를 물려준 유태인 그레이 데이비스가 주지사로 있었던 캘리포니아주처럼 유태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 아니다. 전체 인구 1백20만명중 유태인은 불과 1만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유태인들이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이런 악조건을 아는 탓에 주변에선 링글의 승리를 기적이라고 까지 얘기한다. 그러나 링글은 자신의 주지사 당선을 결코 기적이 아닌 자연스런 결과라고 말한다. 유태인이기 때문에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하와이의 다양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할수 있었고, 여러가지 다른 종교를 가진 주민들과의 연계에 도움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유태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배운다며 나의 정치적 리러십도 이런 정상적인 가정환경에서 나왔다고 강조한다.
그는 여러 차례 선거기간중 종교는 아무런 장애요인이 되지 않았다, 유태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유태인으로서의 신념을 구현하기위해 노력하겠다고 언급했다. 매일 아침 각료나 참모들과의 미팅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링글 주지사는 월요일 아침에만 종교지도자인 라바이(랍비)와의 만남이 가장 첫 행사라는 점이 다른 주지사들과 다를 뿐이다.
미국에서 유태인 주지사의 탄생은 1801년 조지아주 데이비드 엠마누엘이 처음이었다. 그후 드문드문 17명의 주지사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링글이 뛰었던 지난해 가을 선거에서 유태인 입후보자는 무려 36명에 달했다. 유태인들이 정치참여가 예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태인 정치력 신장의 하일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지난 2000년 대통령선거 당시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조셉 리버만 커네티컷주 상원의원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한 일이다. 당시 미국 유태교의 정신적 지도자중 한명인 마빈 하이어 라바이는 이를 인간의 달나라 착륙과 같은 정도의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개인의 종교적이고 인종적인 배경이 미국 정부의 정치적인 최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됐다는 점에서 미국 사회의 정치적인 타부를 깨었다는 설명이다.
미국 최초의 유태인 부통령 후보에서 요즘은 미국 최초의 유태인 대통령 후보를 노리고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 뛰고 있는 리버만은 가장 신앙심이 투철한 정통교단(orthodox) 소속의 신앙심이 강한 유태인이다. 어린시절 신앙심이 깊은 할머니가 아직까지 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지금도 부인과 함께 유태교의 신앙생활과 가치를 구현하기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1백년이상 미국의 경제 언론 문화 예술 엔터테인먼트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쳐온 유태인들이지만 불과 10-20년전 까지만 해도 이들에게 정치는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정치인들에게 돈을 대주는 역할은 많이 했지만 직접 정치에 뛰어 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이들이 최근들어 정치적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을 무엇일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뿌리깊었던 반(反) 유태주의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앨 고어가 리버만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자 각종 여론조사에서 90% 이상의 유권자들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응답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40년대에는 이처럼 응답한 비율이 40%에도 미치지 못했다.
과거에는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사람이 비일비재했지만 지금은 거의 그렇지 않다는 점이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한다. 유태교의 규율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쓰는 보수적인 종교인임을 강조하는 리버만은 그런 점에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물론 유태인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개인적인 종교적인 신념이 유권자들의 눈에 결코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시대임에는 분명하다. 유태주의와 정치적인 삶이 균형을 이룰수 있게 됐다는 분석이다.
미국 사회에서 능력을 중시하는 엘리트주의, 이른바 메리터크라시(Meritocracy) 문화가 점점 확대되는 것도 유태인의 정치진출이 늘어나는 주요한 요인이다. 실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정치권 입문의 기회가 더 크게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현대 선거가 돈과 미디어의선거라는 점이 유태인들에게 더욱 유리하게 작용한다. 하버드등 명문대학 학생과 교수의 30-40%를 차지하는 유태인들의 고급 두뇌가 이미 쌓아 놓은 막대한 부와 결합되면서 생긴 힘이 유태인 네트워킹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유태인 미디어들을 통해 빛을 발하는 것이다.
또 70년대 베트남전 반대를 시작으로 민권운동의 확산, 환경보호주의등 좋은 명분이 강조되는 시대인 것도 이상주의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많은 유태인들을 정치영역으로 가게 만들고 있다. 리버만은 이 같은 현상을 티쿤 올람(Tikkun Olam)이라는 히브류어로 설명한다. 세상을 개선시킨다(to improve the world)는 뜻의 이 말은 신이 시작한 창조를 인간이 완성하는 것은 유태인의 신성한 의무라는 의미. 쉽게 말해 유태인들이 세상을 사는 이유는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고, 이는 정치부문에도 해당된다는 설명이다. 리버만은 유태인들은 어려서부터 완벽한 세상을 구현하는데 도움을 줘야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고 강조하고 정치가 꼭 유태인의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여기에 뛰어들어 세상을 발전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며 유태인의 정치참여가 자연스런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린다 링글 하와이 주지사의 출사표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수 있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유태인들이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세상은 이스라엘만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이 미국 정치에 뛰어드는 것도 이스라엘을 더욱 확실하게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꼬집는다. 실제 최근 10-20년간 유태인들이 대거 미국 현실정치에 뛰어들면서 미국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미국의 이해와 이스라엘의 이해는 점점 더 일치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유태인들이 지지해온 민주당은 물론 최근에는 공화당 정부에서 조차 이스라엘 지원 일변도의 정책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장관급인 로버트 조엘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제외하곤 유태인 장관이 한명도 없는 현 부시 행정부에서 최고위 직급 유태인인 그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물러날 경우 후임 1순위로 꼽힐 정도로 부시 대통령의 돈독한 신임을 받고 있다. 역대 국방부 부장관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부시 행정부의 중동정책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지난 2001년 9월 11일 WTC(세계무역센터) 테러직후 부시대통령에게 카불(아프가니스탄)을 건너뛰고 곧바로 바그다드(이라크)로 진격하자고 건의했을 정도의 강경론자이다. 여동생등 많은 가족들이 이스라엘국적을 갖고 아직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 정부에 많은 지인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헨리 키신저(닉슨대통령 당시 국무장관)와 매들린 알브레이트(클린턴 대통령 당시 국무장관)등 외교 국방을 다룬 역대 유태인 장관들의 뒤를 잇는 거물 관료로 통하지만 정책은 과거의 선배 관료들보다 훨씬 더 친 이스라엘 적이란 소릴 듣는다.
이제 유태인들이 정치의 바다로 대거 진출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처럼 보인다. 최근 유태인들 정치참여를 다룬 미국 정치의 유태인(Jews in American Politics)란 책의 작가인 샌디 마이젤은 리버만 같은 사람들의 출현으로 미국의 젊은 유태인들이 점점 더 공직에 나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이 책 마지막 장의 제목은 방문객이 아닌 주인(Hosts, Not Visitors)으로 유태인들이 미국 정치권에 더욱 진출 할 것이란 낙관론을 펴고 있다. 유력지인 보스톤 글로브신문의 데이비드 쉬리브맨 워싱턴 지국장은 앞으로 유태인들은 주체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모든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망하고 있다.
세상을 바꿔놓은 천재들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두가지가 있다. 세상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과 변화한다는 것. 고정론자들은 자기가 바꿀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하는 일 없이 불평만 한다. 하지만 변화론자들은 다르다. 자기가 직접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는 까닭에 늘 창조적이다. 과학자 예술가 작가 철학가등이 여기에 속하며 역사의 진보는 이들에 의해 이뤄진다.
성서에는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7일째는 쉬었다고 전해준다. 유태인들에게 이 대목은 신이 작업을 완전하게 끝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신이 세계를 불완전 한 상태로 남겨둔 것이다.전지전능한 신이 세계를 불완전하게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유태인들은 신이 자신의 창조활동에 인간들이 파트너가 될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창조작업은 신이 남겨놓은 인간의 의무인 셈이다.
오늘날의 세계를 만든 가장 위대한 인물을 4명 뽑으면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드, 물리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튼, 상대성 이론의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꼽는다. 이들은 모두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발상으로 세상을 바꿔놓은 천재들이다. 이중 뉴튼을 제외한 세명이 유태인. 창조를 중시하는 유태인들의 종교적 믿음이 세상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얘기다. 뉴튼도 유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식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1)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던 1933년 1월 독일 국적의 아인슈타인은 미국 캘리포니아를 여행중이었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를 반대해온 그는 귀국을 포기했고 나치는 즉각 그의 모든 신분과 프러시아학술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재산도 모두 압류됐다. 그해 10월 아인슈타인의 책은 독일 정신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독일판 분서갱유였다. 이때부터 아인슈타인이란 이름은 히틀러의 제3제국의 반역자와 동일시 됐다.
1919년 태양에 의해 빛이 휘어진다는 연구 발표로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인물이 된 아인슈타인은 유태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치의 표적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논리적으로 공박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반(反)아인슈타인 연맹까지 결성됐을 정도이다. 아인슈타인은 국가라는 개념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반 국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동포들을 도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바이올린 연주를 하기도 하고 시온주의를 지지하기도 한다. 열렬한 시온주의자 였지만 이스라엘 독립이후인 1952년 이스라엘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달라는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 것도 그런 사상적 배경에서다.
아인슈타인의 원자연구에 대해 유태인 역사학자들은 위대한 우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소수 민족인 유태인이 셀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업적으로 세계를 바꿔놓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찾아낸 가장 작은 물질인 원자가 가장 강력한 에너지(파워)를 내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원자에 대한 연구가 신앙심이 깊지는 않았지만 부모 모두 유태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의 손에 이뤄진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는 은근한 자부심이다.
아인슈타인은 조지 버어나스 쇼우가 몇 안되는 우주를 만든 사람들(universe builders)중 한명으로 꼽은 인물. 그의 유명한 상대성 이론은 E=MC2 란 간단한 공식으로 요약된다. E는 에너지, M은 질량(물질), C는 빛의 속도.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눈에 보이는 세상인 물질은 같은 개념이란 뜻으로 에너지는 물질로, 물질은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발견이다. 20세기 물리학의 최고의 발견으로 여겨지는 이론. 물질은 에너지이다는 그의 업적은 모든 현대적인 개념에 적용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고 좋건 나쁘건 원자시대를 열어주었다.
미국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보다는 과학정책이나 평화운동등 정치적인 차원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한다.1939년 8월 몇몇 동료들과 함께 나치가 원자탄을 만들지 모른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서한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미국 정부는 10월 곧바로 핵문제 자문기관인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는 결국 맨해튼 계획이라는 원자탄 개발계획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물론 원자탄은 아인슈타인 한사람의 손으로 개발된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은 다음해인 1922년 노벨상을 받은 닐스 헨릭 데이비드 보(Niels Henrik David Bohr)가 원자구조의 개념을 명확하게 했고, 1938년 노벨상 수상자인 앙리코 훼르미는 최초로 원자분열을 밝혔다. 1945년 7월 16일 일본 히로시마에 터진 원자탄을 최종 만들어낸 사람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지휘한 미국 물리학자 제이 로버트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에서 오펜하이머까지 원자탄개발라인에 있었던 사람은 물론 모두 유태인 학자라는 점은 우연의 일치일까?
원자탄이 개발된후 아인슈타인은 미소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핵무기 개발 경쟁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버틀런드 러셀과 함께 핵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할 세계 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보였다. 그는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이 수폭개발을 결정했을 때에도 이 계획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데 서명한 편지를 러셀에게 보낸 뒤 1주일 후인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 15분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에 핵에 대한 고마움과 두려움을 모두 남겨놓은채....
(2) 지그문트 프로이드(1856-1939)
아인슈타인이 현대 물질세계를 규정지었다면 정신세계에 대한 분석 틀을 마련한 사람은 단연 지그문트 프로이드를 꼽을수 있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성본능(리비도)등 무의식의 세계에서 결정된다는 것으로 간단히 요약된다. 하지만 그의 위대성은 누구나 쉬쉬하던 성(性)을 정신분석이론의 기초로 삼았다는 점보다도,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지던 인간의 내면을 처음으로 이성의 빛으로 비추며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훨씬 높게 평가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은 당시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인간의 행동은 주체적인 선택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성욕으로 대표되는 무의식에서 결정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여성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입에 꺼내기조차 어려운 외설적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리비도, 이드, 자아, 초자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구강기, 항문기등 프로이드의 이론을 설명해주는 단어들의 경우 요즘은 일상 생활용어처럼 사용되지만 당시 학술용어가 아니라 마치 사이비 마법의 주문처럼 여겨졌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론은 무신론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하지만 프로이드가 유태인으로서의 생활양식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좋건 싫건 어린시절부터 형성된 유태인으로서의 배경이 직 간접적으로 그의 이론의 토대가 되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금기시되었던 성(性)을 편견없이 적극적인 관점에서 보려는 태도등은 유태인의 내재적인 특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가 유태인이 아니었다면 정신분석학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지금은 체코)에 속하는 프라이버그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모직물 상인으로 가부장적인 권위를 중시했던 유태인이었다. 괴짜로 소문났던 아버지는 40살때 첫번째 부인과 이혼한뒤 20살도 안된 유태인 처녀와 재혼해 8명의 아이를 낳았다. 프로이드는 그중 첫 아들로 배다른 형들은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했다.
정상적이 아닌 가정구조 탓에 그는 어려서부터 권위와 강압적인 아버지를 무의식적인 질투와 미움으로 거부했다. 반면 젊은 어머니에 대하여는 연정(passion)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드의 최대 연구업적인 이른바 `오이디푸스 컴프렉스`(Oedipus complex)는 바로 그런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었다.
유태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스스로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자신도 유태인 처녀를 만나 유태의식으로 결혼하고 3남 2녀를 둔 전형적인 유태인 가장이 되었다. 하지만 유태인이기에 겪었던 어려움이 그로 하여금 무신론적인 입장을 갖게 했다. 어린시절 가톨릭신자인 유모의 영향으로 교회에 나가곤 했는데 여기서 교회의 의식(儀式)주의(ritualism)에 환멸을 느꼈고, 친구들이 유태인이라고 놀려대는 것도 싫었다. 주변에선 이런 추억들이 나중에 아예 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무신론자적인 입장을 띤 이유라고 설명한다.
프로이드는 대학생이던 17살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자서전에선 의사가 되려고 했던 이유를 "고통 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수수께끼를 좀 이해해 보려는 지식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1881년에 의사가 된 그는 처음엔 비엔나 일반신경증병리학(neuropathology) 의사로 일했고 1885년에 비엔나 대학교 신경병리학(neuropathology)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신경질과 최면에 대한 탁월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이란 이유와 시기로 더 이상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의사들 보다는 환자들을 통해 좋은 치료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말년에는 화려한 각광을 받았다. 젊은 시절 프로이드를 미친 사람 취급했던 비엔나 의학연구회는 프로이드가 75살이 됐을 때 명예회원으로 추천했다. 80회 생일인 36년 5월6일 한 생일 축하모임에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이제부터 프로이드 시대가 열렸다고 공식 선언하기도 했다.
37년 7월 유태인을 미워했던 나치를 피해 런던으로 간 그는 이듬해 지병인 인후암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영향은 가장 먼저 예술가들에 의해 민감하게 흡수되고 20세기의 모든 문화이론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그림(달리, 피카소등), 소설(캐서린 맨스필드, 버지니아 울프, 도로시 리처드슨, 제임스 조이스 등) , 연극(유진 오 닐등)등에서 얼마든지 프로이드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막내딸 안나 프로이드가 아동심리학의 대가로 성장했고 미국에서 하르트만, 에릭슨 등의 자아심리학으로 계승되거나, 프롬 같은 신프로이드 학파에 의해 마르크시즘과 결합이 모색되는등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지금까지 심대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3) 칼 마르크스(1818-1883)
역사의 한 사건을 설명하면서 만약 그때 이랬었더라면…?이란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될까. 백가쟁명식 각양 각색의 논리가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끝없는 논리대결만 이어질 뿐 해답없는 혼돈만 야기하게 된다. 시간의 흐름상 현재는 만약(if)이란 가정이 용납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인 과거 속에서 잉태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학도들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만남(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H. 카)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만, 만약이란 단어를 가장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우격다짐 격으로 한가지만 가정을 해보다. 만약 이 세상에 칼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대답들이 나올 것이다. 공산주의에 성공한 소련이 탄생하지 않았을 테니 이념 갈등의 산물인 지금 같은 남북대치상황도 없었을 것이다.,중국의 왕조시대가 아직도 이어졌을 것이다., 자본가(자본주의)의 횡포를 견제하지 못해 지구는 이미 황폐한 사회가 됐을 것이다.…등등.
어떤 사람은 마르크스 대신 다른 누군가가 그의 일을 대신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세상이 지금과 거의 비슷한 상태였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사람은 많지않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오늘날의 현실세계에 마르크스가 미친 영향이 그만큼 막중한 탓이다. 마르크스의 존재 자체가 역사상의 대사건이라고 설명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이다. 역사상 이론적인 문제와 실제적 문제를 하나의 체계로 구성한 사상가로서 인류에게 지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예술적으로 마르크스만큼 큰 영향을 준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독일 트리에르(Trier)시에서 태어난 칼 마르스크의 할아버지는 유태교의 종교 지도자인 라바이(랍비)였고 아버지는 성공한 유태인 변호사였다. 아버지는 칼 마르크스가 어렸을 때 기독교 세례를 받게하지만 마르크스는 종교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창시절에 베를린에 있는 가장 진보적인 청년 헤겔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지만 헤겔의 종교관에 반대하여 무신론자가 되었다. 23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버지의 친한 친구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가족들은 마르크스가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혼을 반대하였다. 그런 예상은 적중하여 그의 가족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생활하였으며 여섯명의 자녀 중에서 셋은 굶어 죽었다.
마르크스는 급진적 신문인 라인지의 편집자로 재직하였으나 정부의 언론탄압으로 신문은 폐간되었고, 당국에 의해 추방되어 파리와 벨기에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함께 작성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난 것은 프랑스 파리였으며, 그와 함께 작성한 이 소책자는 마르크스 생전에 성공을 거둔 유일한 저작이 되었다. 이 소책자는 1847년 런던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동맹의 이론과 강령으로 제시되었다. 마르크스는 1849년에 런던으로 도피하고 그곳에서 혁명세력의 결집을 도우면서 한편으로는 대영박물관에서 경제사상사를 공부해가면 유명한 자본론(Das Capital)을 집필하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상의 다른 위대한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사회 발전과정의 법칙, 개인과 사회의 관계, 인간의 본성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 완전하고, 통합된 지적체계를 구성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지적체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때문에 전체의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부분만 떼어서 본다면 큰 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
유태인들이 같은 유태인인 마르크스를 보는 눈은 여러가지다. 유태교의 핵심인 메시아적인 사상을 갖고 인류의 해방을 꿈꾼 위대한 사상가란 시각에서부터 인류는 물론 유태인도 해방시키기 못한 실패한 철학자까지 극단을 달린다. 그러나 대부분은 유태인을 어려운 처지로 이끈 배교한 유태인이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유태교 학자들은 마르크스가 성서에 나오는 천국을 이상향으로 믿었다고 생각한다. 유태인 선조들이 갖고 있었던 천국으로 인도하는 혁명 정신을 마르크스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모세의 이집트 탈출등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들은 정의와 공정한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사회질서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설파했었고, 마르크스도 이 같은 혁명 정신을 계승했다는 논리이다. 이 같은 논법을 적용하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공산주의의 성서가 된다. 하지만 유태교와 마르크스 이론이 크게 다른 것은 마르크스가 이상향인 천국의 경내에서 신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노동자들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유태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산주의는 상당기간동안 유태인들과 동일시 되었다. 한때 공산주의는 세계 지배를 위한 유태인의 음모라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특히 1917년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핵심 지도자중 한명인 레온 트로츠키(1880-1940)가 유태인이라는게 알려지면서 공산주의=유태인 커넥션은 다시한번 세상을 들끓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유태인들에게 더없이 큰 피해를 주었다. 먼저 마르크스 자체가 유태인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첫번째 주요 에세이인 유태인 문제에 관하여(On The Jewish Question)에서 유태인과 유대주의를 증오에 가득찬 눈으로 쳐다봤다. 유태인 대학살의 주인공인 히틀러는 나중에 자신의 반 유태인 감정의 일부가 바로 이 에세이를 읽고 생겨났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러시아의 볼세비키 공산 혁명세력도 사회불만을 유태인에게 돌리며 대학살을 자행했다. 모스크바의 라바이들이 공산혁명 주역중 하나인 트로츠키를 찾아가 유태인 학살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트로츠키는 나는 유태인이기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자라며 거절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유태인 학살에 앞장선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2인자가 되었지만 1인자인 레닌이 죽자 곧바로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이라는 이유에서다. 레닌의 뒤를 이은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추방했고 얼마 되지 않아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트로츠키의 죽음은 자식 세명을 굶겨죽여야 했던 마르크스의 운명과 함께 `마르크스=공산주의=유태인 사이의 묘한 상관 관계를 상징처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번성했던 공산주의가 유태인을 죽였지만, 지금 공산주의는 사라졌고 마르크스의 사상과 유태인은 계속 번성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정말이지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유태인들의 10가지 색다른 사고방식
유태인들의 사고방식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경전은 무엇이고 기독교와는 어떻게 다른가. 많은 비 유태인들이 궁금해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깔끔하게 설명해주는 유태인은 거의 없다. 대부분 구약성서와 탈무드를 읽으면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저명한 라바이(랍비)들이 쓴 유태종교에 관한 책자를 봐도 분명한 정의를 찾기 힘들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종파마다 생각이 적지않게 다르다.
유태인의 사고구조를 제 3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단순화 객관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유태사회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이들이 어떤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는지 약간은 알수 있다. 수박 겉핥기 식이지만 유태인들의 사고를 형성해주는 10가지 큰 틀을 찾아보았다. 물론 이 10가지 내용은 필자가 만난 사람이나 읽은 책들에서 나온 것을 개인적으로 중요도를 따져 추론한 것일 뿐 모든 유태인이 동의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1) 믿음(faith)보다는 행동(action)
한 종교에 대해 쉽고 분명하게 정의하기를 좋아하는 학자들은 유태교를 연구하면 쉽게 좌절한다는 얘기가 있다. 도대체 한마디로 정의를 내릴수 없는 탓이다. 대부분의 유태인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있으나 그것이 도그마 처럼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교리문답집이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많은 라바이들과 유태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신념을 공식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성공한 사람은 없다. 결국 유태교를 이해하려면 한가지 도그마를 찾아야 한다는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통상 유태인들의 믿음은 신, 이스라엘, 토라(Torah) 란 세가지 단어로 요약된다. 신비주의자들은 이 셋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비슷한 것으로 한가지를 잃어버리면 다른 것도 바로 없어진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신을 믿고, 그 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영원한 계약을 지키며, 토라에 나온 지혜와 생활방식대로 산다는게 가장 기본적인 종교적 믿음이다.
여기서 유명한 라바이들이 강조하는 대목은 실천적인 행동이다. 예수탄생이전인 기원전 1세기경 활약했던 역사상 가장 명망있는 라바이중 하나인 힘멜은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이웃에게 하지 않는 것이 유태교의 핵심이라며 그것은 모두 토라에 들어있다고 설파했다. 한세기 뒤에 활약한 라바이 요카난은 좋은 마음(Good Heart)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결국 라바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유태교의 강조점은 기독교와 달리 신을 믿는 것보다 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신은 자신을 믿는 것보다 토라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까지 설명하는 라바이들도 있다.
(2) 토라를 공부하고 선행을 행하라
유태교에선 세상을 사는 방법으로 세가지를 설명한다. 토라를 공부하고, 이를 새기는 예배에 충실하며, 토라에 나와있는대로 선행과 자선행위를 실천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토라를 공부하는 것이다. 때문에 공부라는 행위는 유태교의 핵심이 되고 있다. 기원전 1세기부터 유태사회는 의무 교육제도를 두고 있었다. 가난한 자와 고아에 대한 교육은 부모들은 물론 사회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었다. 중세시절부터 어린이들에게 꿀 과자로 만든 알파베트로 글자를 익히게 한 것은 바로 공부=달콤한 것이라는 생각을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토라는 일년 열두달 회당에서 읽힌다. 때문에 회당에서의 예배는 토라을 읽으며 신을 뜻을 새기는 중요한 행위이다. 이렇게 공부한 것은 자선행위라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고 짧은 생애 동안 인간의 손을 거쳐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진정한 자선은 인종이나 종교를 초월해야 하며,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찾아 도움을 주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선은 가능하면 익명으로 해야 좋고, 자기가 자선을 해주는 사람들이 스스로 독립적이 되어 더 이상 자선이 필요하지 않고 남을 도울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최고의 자선행위로 꼽는다. 고기를 주는 것 보다 고기낚는 법을 가르쳐주는게 최고의 자선인 셈이다.
(3) 유일신의 창조와 구원은 계속된다.
종교로서 유태교의 핵심은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다. 이 유일신 사상은 거의 세계 모든 종교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유태교에서는 이 유일신이 크게 세가지 일을 하고 있고, 또 계속 할 것으로 믿는다.
첫째, 신은 우주를 창조했다. 과학의 발달로 현대 유태인들은 우주가 과학적으로 어떻게 생성됐는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우주의 생성 뒤에 신의 손이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또 진화론은 제 2의 창조론으로 설명한다. 창조가 한번으로 끝난게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어이고 있고 바로 이것이 현대과학 용어인 진화라는 주장이다.
둘째, 신이 토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신이 시나이 동산에서 10계명을 주는등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을 주었고, 그들을 이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토라에서 지혜를 얻고 통찰력을 구한다.
셋째, 신은 구원을 해줄 것이다. 신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주었던 것처럼 실제 인간사에 개입하고 있고, 결국 지상의 끝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구원해줄 것이다.
(4)원죄는 없다.
유태교에서도 죄는 있고 이에 따라 속죄와 용서를 중요시 한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원죄 의식은 믿지않는다. 인간이 타고나면서부터 원래 죄인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태교에선 원죄의식 대신 인간 안에는 좋은 성향과 나쁜 성향이 함께 있는데 이 둘중 하나를 선택할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설명한다.
죄를 지었을 경우 기독교에서는 신에게 용서를 구할수 있으나 유태교에서는 먼저 자기가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서 직접 용서를 구해야 한다.용서의 방법도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들 사이의 행위가 우선되는 셈이다.
(5)사후 보다는 현세가 더 중요
유태교에서도 사후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유태교를 설명한 책자 어디에서도 단테의 신곡 같은 두려운 지옥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지 않다. 거의 천당의 모습만 그려놓고 있다. 종교관 자체가 신의 구원을 확실히 믿는 낙관론이 주조를 이루는 탓이다. 실제 유태인들의 욕에도 다른 종교에서 많이 쓰이는 저주(Damned)나 지옥(hell)이란 단어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현대의 자유주의적인 라바이들은 천당이나 지옥 개념대신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설명하곤 한다.
대부분의 유태학자들이 죽어서 가는 내세보다는 현실 세계에 더욱 관심을 둔다. 현실세계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구축하려는데 훨씬 더 많은 종교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유태 회당들이 헌금이나 기부금이 많이 들어오면 기도를 위한 성전신축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우선 돈을 쓰는 이유이다.
(6) 사람 우선이 도덕적 판단의 기준
유태인들에겐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몇 개의 가치가 있다. 그중 최상의 가치 기준은 사람의 삶과 생명이 가장 중시된다는 것. 유태인들은 건배할 때 포도주잔을 부딪치며 이카임(Ichayim)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To life라는 뜻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인간들의 삶은 너무 소중 해서 인간의 생명이 위협 받을때는 단 3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종교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한다.
예를들어 남자들의 의무사항인 할례도 아이가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아프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이다. 3개의 예외는 우상숭배, 살인, 근친상간이나 강간등 성적문제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신을 포기하거나 살인을 하거나 강간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가치판단의 두번째 중요한 기준은 자유의 강조이다. 유태 신학자들은 이집트 탈출인 엑소더스는 신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메시지로 해석한다. 이 메시지는 유태교회의 예배에서 아주 많이 얘기되는 것중 하나이다. 특히 유태인들이 일주일에 하루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안식일도 돈이나 일에서 해방된 완전한 자유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세번째는 구원으로 가는 방법으로 인간의 행동을 강조한다는 것. 모세의 이집트 탈출시 모세가 이집트 군사들에 쫓기는 위기때 기도하고 있을 때 신은 기도를 중단하고 뭔가를 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그래서 어려서부터 좋은 행동을 하도록 교육 받는다. 계속 되는 신의 창조(진화)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강조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7)성생활은 필요할뿐 아니라 바람직하다
유태종교가 기독교의 배경이 되는 그리스 로마 사상과 끝내 타협을 못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인간 육체에 대한 입장이다. 그리스 로마사상에선 인간의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이라는 사고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육체를 혹사시키는 금욕주의 독신주의가 중시되었다.
유태교는 육체는 악이라는 사고를 거부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남녀 서로간에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필요를 갖도록 했기 때문에 그 의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것은 신의 뜻이란 설명이다. 따라서 육체의 즐거움을 경시하지 않았고, 성생활을 죄의식과 결부시키지 않았다.
라바이들은 부부간의 성생활을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했다.정상적인 성생활을 하지 않으면 중대한 이혼사유가 되기도 했다. 직장일로 오랜 기간 집에서 떨어져 사는 남편들도 가능하면 자주 집에 들러 부부생활을 하도록 권고된다. 기독교에선 성스러운 주일에 성생활을 자제하는게 미덕이나, 유태교에서는 안식일에 성생활을 하는게 관습처럼 되어있다.
물론 간음하지 말하는 말이 10계명에 나와있고 근친상간 강간등은 율법을 깰수없은 3가지 예외에 들어있을 정도로 부부간의 순결한 성생활만을 강조하고 있다.
(8) 삶의 교과서는 토라, 바이블, 탈무드
토라 라는 단어는 유태인 전통에서 두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일상 생활방식이나 모든 전통을 망라하는 유태인 정신의 핵심이다. 따라서 토라란 단어는 지식 지혜 신의 사랑이라는 의미와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는 영어로 The Torah가 아니라 그냥 Torah라고 쓴다.
좁은 의미를 쓰이면 토라(The Torah)는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권인 이른바 모세 5경을 의미한다. 물론 최근들어 유태인들은 시대에 뒤쳐졌다는 의미를 주는 구약(Old Testament)이란 말 대신 히르뷰경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유태인들에게 바이블은 토라를 포함한 구약 전체를 말한다. 예수탄생이후를 기술한 신약은 바이블로 거부한다. 유태종교의 시각에서 보면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생각에서다. 유태 바이블은 구성에서 세가지 분명한 파트로 나뉘어진다. 1편은 가장 성스러운 것이 처음 5개 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으로 1년동안 예배때 읽힌다. 제2편은 역사서로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상하 역대기상하등이다. 3편은 논쟁적인 이슈를 문학적으로 설명한 문학작품으로 욥기 시편 잠언등이다.
탈무드는 5-7세기에 라바이들이 토론을 통해 법적 윤리적 정신적 신학적 예식적 역사적인 통찰을 기록한 63권의 책을 말한다. 이는 그후 수세기 동안 유태인 학교의 주요 교과서였고 오늘날에도 정통 보수 라바이 훈련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되고 있다. 저술 당시 탈무드는 모음이 없는 고대 아라마익 어로 쓰여져 일반인들은 읽기가 매우 힘들었다. 탈무드에 대한 해석판이 많은 것은 그만큼 일반인이 읽기 힘들었기때문이다.
(9) 교회보다 가정이 더 거룩한 성소
유태인들이 사는 집에 가면 출입문 오른쪽 지상에서 약 1.5m 지점에 약 10Cm 길이의 윷모양의 장식이 붙어있다. 나무나 금속 유리등으로 만들어진 이 장식의 이름은 메주자(mezuzah). 유태인이 사는 집이란 표식이다. 2천년이상된 풍습인 이 메주자를 어떤 유태인들은 집안에도 방마다 붙여놓고 있다.
유태인들은 집을 출입할 때 마다 메주자를 만지거나 입맞추면서 신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신의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메주자가 상징하듯 유태인들은 집을 성소로 여긴다. 많은 유태인들이 회당에는 특별한 때만 나가면서도 신앙심이 깊다고 생각하는 것도 집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하기때문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보기엔 이상한 대목이나 많은 유태인들이 회당보다 집에서 더 많은 종교생활을 한다.
가정에서의 신앙생활은 자녀들에게 자연스럽게 종교생활을 가르친다는 장점이 있다. 식탁에서 함께 기도하면 선조들이 이집트 노예시절에 겪었던 고통을 기억하고, 하누카명절때 선물을 서로 주고 받으며 신에 대해 얘기하곤 한다. 때문에 유태사회에서는 모든 회당이 없어지면 유태종교가 순수하게 지속적으로 살아남지만 종교생활을 가정에서 하지않고 오로지 회당에서만 한다면 유태 종교는 그 세대에서 명맥이 끊길 것이란 농담아닌 농담이 있기도 하다.
(10) 예루살렘(이스라엘)은 언제나 정신적인 고향
고향을 잃고 세상을 떠다닌 유태인들에게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은 3천년동안 꿈이었다. 회당에서의 예배나 결혼 예식등을 마치며 하는 기도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였다. 하지만 이런 시오니즘이 정치적인 운동으로 부각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나라찾기 운동이 벌어졌다.
정치적 시오니즘의 직접적인 원인 러시아 짜르 정부가 제공했다. 외무장관이 공개적으로 유태인 문제 해결을 위해 자국내 유태인의 3분의 1을 개종시키고, 3분의 1을 살해하며, 나머지 3분의1을 추방할 것이란 계획을 발표하고 무차별 살육을 벌였다. 당시 유럽 전역에 반 유태인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따라서 유태인들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어야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들의 안전을 확보해줄수 있다고 생각했다. 2차대전중 히틀러가 6백만명에 달하는 유태인을 학살한 것은 유태인들의 생존을 뿌리채 없애버릴수 있다는 공포로 작용하기도 했다.
우여곡절끝에 1948년 이스라엘이 국가로 독립하면서 시오니즘에 대한 입장이 여러가지로 변하고 있다. 극단론자들은 전세계의 모든 유태인들이 이스라엘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에 사는 유태인들은 이같은 극단론을 거부한다.
미국 유태인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시오니즘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 생각하는 시오니즘은 모든 유태인이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현재 살고있는 나라의 일원으로 발을 붙여 살며, 이스라엘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몸은 미국인으로 살되 이스라엘을 정신적인 수도(spiritual capital) 로 간주한다는 생각이다.
유태인관련 상식 50선(1-10)
1)유태인들의 특별한 복장=유태인들의 남다른 복장은 신에 대한 존경을 뜻하는 것으로 남성에게만 의무 규정이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착용하는 것은 모자로 키파(Kippah) 또는 야물카(yarmulke)라고 불린다.원래 검은색 천으로 된 것만 허용됐으나 요즘은 색상과 재료 모두 다양해졌다. 좀처럼 모자를 벗지 않는 것은 신은 어디에나 있다고 믿기때문이다. 정통파들은 모자와 함께 탈리트(Tallit)라는 기도용 쇼울을 걸친다. 종파에 따라 매일 입기도 아니기도 한다. 검은 외투와 검은 모피모자를 쓰는 것은 카시딕 종파 남자들의 복장으로 종교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폴란드에서 2세기전에 유행하던 관습을 따르는 것이다.
2)홀로코스트(Holocaust)=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죽이거나 대학살 하는 행위를 말하지만 고유명사로 쓸때는 제 2차대전중 나치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대학살을 뜻한다. 종교적으로는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2차대전중 무려 600만명에 이르는 유태인들이 학살됐든데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수 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3)유태인 어머니(Jewish Mother)=교육열이 대단한 유태인 어머니들을 일컫는 말이다. 자녀교육에 얼마나 극성스런지 아예 쥬이시 맘(Jewish Mom)이란 숙어 아닌 숙어까지 있다. 유태인 어머니들은 여성이야말로 최초의 교육자이므로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 의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자녀들을 남들과 똑같이 키우는게 아니라 각자의 장점을 찾아 개발해주는 것.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네살되도록 말도 제대로 못해 저능아라는 소릴 들었던 아인슈타인이 학교에 가서도 제대로 적응을 못해 "이 학생의 지적능력으로는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 이라는 성적표를 가져오자 어머니는 얼굴하나 찡그리지 않고 "걱정할 것 없다. 남과 같아지려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라고 격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4)라바이(Rabbis)=유태교의 전통과 문화를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선생님을 뜻하는 히브류어에서 나온말. 한국에서는 흔히 랍비라고 부른다. 다른 종교에서 처럼 신과 인간의 중간 가교역할을 하지 않고 특별한 권한도 없다. 학식이 많은 사람으로 존경받을 뿐이다. 일부 교단에서는 예배를 이끌지도 않는다. 유태교에는 종교적인 위계질서가 없는 만큼 라바이의 영향력은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요즘에는 4-5년 과정의 신학대학을 졸업한뒤 라바이를 모집하는 회당과 취업 계약을 맺는 식이다.고대 예언자들의 후예로 공동체 내에서 가장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져야만 라바이 생활을 지속할수 있다. 보통 사람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민다.
5)지붕위의 바이올린= 러시아 유태인 숄롬 알라이켐(1850-1916)이 동유럽 유태인들이 사용하던 이디시어로 쓴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1957년에 만든 브로드웨이 뮤지컬. 상업성만 추구하던 브로드웨이에 반유태사회에서의 신앙 수호등 무거운 주제로 도전한 뮤지컬로 당시 최장 공연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나중에 영화로도 소개되면서 혁명의 전운이 감돌던 제정 러시아말기 유태인 가정의 삶과 애환을 전 세계에 잘 알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란 제목은 세계 역사에서 항상 이방인이었던 유태인의 삶이 지붕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위태롭다는 은유이다.
6)예시바(Yeshiva)= 앉아있다는 뜻으로 유태 학자들을 위한 고등 교육기관이다. 모든 탈무드의 주제들을 앉아서 연구한다는 뜻에서 유래됐다. 유태인들은 의무교육을 처음으로 만든 민족으로 전세계 어디에서 살던 예시바를 세워 교육을 시켰다. 지금은 유태교의 대학 이름으로 가장 큰 곳이 뉴욕 맨해튼에 있다. 뉴욕 예시바 대학의 초대 총장인 라바이 버나드 레벨은 1980년대에 미국 우표에 야물카를 쓴 모습으로 나왔다. 이스라엘 밖에서 야물카를 쓴 인물이 우표에 나온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7)창조론과 진화론 차이=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면서 종교계는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다윈이 신의 이미지를 닮은 인간을 원숭이의 이미지를 닮은 것으로 대체시켜 놓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유태교에선 진화를 단계별로 이뤄지는 또 하나의 창조로 해석했다. 티쿤 올람(Tikun Olam)사상에 따라 세상은 있는 그대로(world as it is)가 아닌 개선시켜야할 대상(to play a role in improving it)이기 때문이다.
8)반유태주의(Anti-Semitism)=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적의를 가진 차별적 말을 사용하거나, 행동을 취하는 것을 긍정하는 입장 내지는 사상.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상인에 등장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대금업자 유태상인인 샤일록은 유태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에 유태인은 근거없는 소문으로 박해를 당하고 학살 추방의 고난을 반복했다. 2차대전중에는 나치에 의해 600만명의 유태인이 학살됐을 정도이다. 미국에서도 자동차왕 포드가 공개적으로 유태인을 비난하고 60년대까지만 해도 개와 유태인 출입금지란 팻말이 공공연히 붙어있을 정도였다. 요즘에는 많이 줄었지만 소수의 유태인 엘리트들이 국가를 너무 좌지 우지한다는 불만은 여전히 남아있는 실정이다.
9)데오도로 헤르p(Theodor Herzl)=시온동산이 있는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립자로 이스라엘 국가 형성의 아버지로 불린다. 1860년 부다페스트에서 중산계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비엔나대학을 다닐 때 반유태주의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아 유대인문제를 본격 연구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Diaspora)를 끝내고 유태국가를 건설하는 것 만이 반유태주의로부터 발생되는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는 것. 한때 영국이 제안한 우간다 유태국가 건설안을 받아들여 배신자 소리를 듣고 44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으나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된다.
10)흑인 유태인= 야곱의 12 아들이 각각 하나씩 부족을 이뤘는데 이중 1 0개 부족은 사라졌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역사속으로 사라진줄 알았던 한 부족이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로 갔고 흑인들과 피가 섞이면서 피부가 검은 팔라샤 유태인이 됐다는 설도 있다. 팔라샤는 에티오피아어로 이방인을 뜻한다. 이들은 고대 유태인 전통을 따랐고 토라의 규정을 지키며 살았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이후 5만명이 넘는 흑인 유태인들이 이스라엘로 갔다. 지난 1970년대에는 이스라엘 특공대가 에티오피아에서 핍박받던 흑인 유태인을 구출하는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유태인 관련 상식 50선(11-20)
11) 게토(Ghetto)=유태인들만 살도록 정해놓은 지역. 중세시절 유태인들을 기독교인들과 분리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고, 후에 나치도 이용했다. 1515년 이탈리아 베니스인근 게타(Gheta)라는 불리는 계곡에 처음으로 유태인들만의 거주 구역이 생겨난 것이 게토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연원이란 해석이 유력하다. 하지만 더러운 것을 뜻하는 이탈리어 기토(guitto)에서 왔다는 설과 히브류어에서 이혼을 의미하는 겟(get)이란 단어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12)아쉬케나짐(Ashkenazim)과 세파딤(Sephardim)=독일 프랑스와 동부유럽출신 유태인을 아쉬케나짐으로 부르고 스페인과 아랍권 출신 유태인을 세파딤으로 부른다. 아시아권 유태인도 세파딤으로 분류된다. 많은 유태인 구분법중 중에서 아직도 유태인들이 서로를 구분하는 가장 뿌리깊은 구분법중 하나이다.
13)로스차일드 가문= 1815년 6월20일 프랑스와의 워털루 전투 결과를 기다리던 런던 증권거래소는 긴장했다. 결과에 따라 시장은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초조하던 순간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영국 공채를 팔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영국이 패한 것으로 판단한 투자자들은 일제히 매도 주문을 냈다. 공채는 즉각 폭락했다. 하지만 이때 네이선은 갑자기 매수도 돌아섰고 바닥값에서 엄청난 양을 사들였다. 거의 동시에 `영국군 대승` 소식이 날라 들었다. 세계 최대 금융왕국을 건설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얘기를 쓴 『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이란 책에 나오는 대목이다. 네이선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에서 환전상으로 시작해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군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첫째 아들. 네어선등 다섯 아들들은 이후에도 나폴레옹 전쟁, 러시아.프랑스 혁명, 2차대전 등 세계적인 사건을 배후조종하거나 직접 개입하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고 지구촌의 정치.경제를 주름잡는 절대 강자로 성장했다. 로스차일드가 벌어들은 돈은 나중에 나중에 유태 민족의 꿈인 이스라엘 건국의 주축돌 역할을 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5가지 성공비결은 정보, 인맥, 기회활용, 단결, 아이디어로 집약된다.
14)세익스피어와 샤일록= 영국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했던 위대한 문호 세익스피어(1564-1616)는 일생중 어느때도 유태인을 직접 만났다는 기록이 없다. 영국은 1290년 모든 유태인을 추방했고 400년 뒤인 1656년 올리버 크롬웰이 정권을 잡고서야 유태인들의 입국을 허용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샤일록은 영국 문학은 물론 세계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유태인이 되었다.
15)유태인의 이자개념=유태교에서 돈은 일반적으로 효용적인 상품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것이므로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돈을 빌려주는 대출에는 두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돈은 가난한 사람에게 대출해야 한다는 것. 특히 자기 주변에 있는 가난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우선적으로 대출해 줘야 한다. 이들에게 원금에 이자를 붙일 것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들에 대한 대출은 당연히 이자를 받지 않는게 원칙이다. 둘째 사회가 발전하면서 상업적인 대출이 생겨났는데 이 경우에는 이자를 받는다. 이자를 받는 행위 자체가 금융시장의 팽창을 의미하는 사회적인 진보인 탓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수혜받은 ᄉ사람들은 그 결과물을 갖고 가난한 사람을 도울 의무가 있다. 유태교에서 돈은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의 소유물이 그 사람을 통해 거쳐가는 것으로 일시적인 보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의 뜻대로 좋은 일에 써야 한다.
16)시나고그(Synagogue)=그리스어인 Synagoge에서 나온 말로 모여서 함께한다(coming together)는 뜻의 (종교적인) 집회를 의미한다. 시나고그에서 유태교의 집회(예배)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명이 필요한데 이를 민얀(minyan)이라고 부른다. 유태교에선 개인 혼자보다 그룹을 이뤄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더욱 거룩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회당은 신에 대한 집단적인 책임감을 표현한다. 정통교단과 보수교단에서는 시나고그란 용어를 사용하고 개혁교단에서는 템플(Temple)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17)유태인 명절=미국은 주마다 공휴일이 다르다. 각 주의 특성에 맞게 정한다. 뉴욕 공휴일 특징중 하나는 학교나 상가가 쉬는 날중 유태인 명절이 많다는 점이다. 그만큼 유태인의 영향력이 크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명절로는 하누카, 욤키퍼, 푸림, 로쉬하샤나, 패스오버등이 있다. 성탄 시즌에 있는 하누카는 속박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기념하는 날로 집집마다 촛불을 키고 8일간 축제를 연다. 히브류어로 해의 머리를 뜻하는 로쉬 하샤나는 유태인 설날로 양력으로 9월이나 10월에 온다. 로쉬 하샤나 이후 10일째 되는 날인 욤키퍼(Yom Kippur) 는 속죄일이다. 회당을 거의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이날 만큼은 회당에 나가 죄를 고백하는 1년 중 가장 거룩한 날이다. 매년 4월 하순에 오는 패스오버는(Passover)는 유월절이라고 하며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기념하는 명절이다. 푸림(Purim)은 유태민족의 애국자인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생각하며 조국애를 다짐하는 날이다.
18)그린스펀 효과(Greenspan Effect)= 1996년 12월 5일 그린스펀 의장은 한 만찬연설에서 미국 중앙은행의 역사에 대한 평범한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 연설에서 거품과 과열이란 단어가 사용되자 전세계 금융시장은 폭락양상을 보였다. 그가 기침하면 세계는 독감에 걸린다는 그린스펀 효과를 가장 잘 보여준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린스펀의 연설이 있는 날에는 세계 모든 금융권이 그의 입을 주시한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민반응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거꾸로 그린스펀이 전세계 투자자들의 심리 속에 최고의 금융지도자로 각인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베테랑 컨설턴트인 데이비드 시실리아와 제프리 크!센크는 그의 화법을 연구한 그린스펀 효과라는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다. 워터게이트사건을 특종보도했던 워싱턴포스트지의 밥 우드워스는 그린스펀에 대한 8년간의 취재끝에 펴낸 책의 제목을 마에스트로(거장)라고 썼다.
19)조지 소로스=헝가리출신 유태인으로 세계 헤지펀드 업계의 대부.그가 움직이면 멀리서도 그 진동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 국제 금융계에서의 그의 영향력을이 어느정도인지 말해준다. 96년 1월 일본 도쿄의 한 국제 투자세미나에서 일본 주가가 비싼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마디 하자 폐장을 앞둔 닛케이주가가 막판 10분 동안 270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92년 영국 정부를 상대로 파운드화를 놓고 맞대결을 벌여 일주일만에 10억달러가 넘는 돈을 챙긴 것은 국제 금융계의 전설로 통한다. 퀀텀펀드등 1백억달러가 넘는 자금을 굴리며 연평균 30%가 넘는 수익을 내는 20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로 명성이 높다. 이익이 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는 그에겐 20세기의 금융의 연금술사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세기의 투기꾼이라는 비난이 늘 함께 붙어다닌다. 하지만 그는 돈만 아는 천박한 투기꾼은 분명 아니다.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지만 지금도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 정도로 검소하다. 대신 조국 헝가리등 가난한 나라에 엄청난 규모의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 부자나라에서 돈을 벌어 가난한 나라에 쓴다는 생각이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직후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자시절인 98년 1월 3일 새해 첫 공식행사로 조지 소로스를 만나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을 정도로 한국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20)컬럼버스의 신대륙발견=1492년 크리스토퍼 컬럼버스의 신대륙 항해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이를 적극 후원한 사람은 아브라람 시니어라는 유태인.허버트 박스터 아담스라를 작가는 `컬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책에서 "컬럼버스의 첫번째 탐험을 유태인들이 지워해준 것은 더 이상 유럽에서 핍박받지 않고 신천지에서 자유로운 종교생활을 하고 싶었기때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컬럼버스 자신도 유태인이었다는 학설을 제기하고 있다.
유태인관련 상식 50선 (21-30)
21) 뉴욕은 제 2의 가나안 땅(The land of Canaan)=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 주겠다고 약속한 땅. 성서에 지리적 한계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에선 이집트강 하구에서 시리아 이라크를 흐르는 유프라테스강 까지로 해석하고 있다.지금까지 아랍권과의 영토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기도 하다. 성서에서 가나안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다. 과학자들은 수천전년 이 지역은 매우 비옥했으나 로마, 페르시아, 이슬람, 터키, 영국의 손을 거치는 동안 황폐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1870년 미국의 소설과 마크 트웨인이 가나안을 방문해서 던진 첫 마디가 무서운 황폐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1948년 이스라엘 설립이후 대대적인 관개작업으로 지금은 상당한 비옥한 땅으로 변했다. 요즘에는 뉴욕이 유태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점에서 제 2의 가나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22) 샬롬(shalom)=유태인들이 만나거나 헤어질 때 인사말. 평화(peace)란 의미를 갖고 있다. 안녕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국가간 가족간 개인간의 평화를 기원하는 절대적인 용어.
23)메리크리스마스가 아닌 해피 헐러데이= 아랍이나 불교국가가 아닌 대부분의 나라에서 12월을 맞으면 당연히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인사말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어느덧 세계인의 축일이 됐기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뉴욕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헐러데이(Happy Holiday)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된다. 이유는 예수 탄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유태인들의 명절인 하누카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있기 때문이다. 매출을 의식해야하는 백화점등 유통업체들은 물론 시청률이나 판매부수를 고려해야 하는 언론매체들도 눈치를 봐야 만큼 유태인들의 힘이 커졌다는 반증이다.
24) 타이타닉호와 유태인=1912년 영국에서 뉴욕으로 오던중 침몰한 초호화 해상호텔 타이타닉호 침몰로 인한 희생자중엔 유난히 유태인들이 많았다. 이유는 유태인들이 유난히 호화여행을 즐겼기때문이 아니라 이 배가 뉴욕 손님들을 모을 때 유태인 주방장을 두고 유태인들의 음식(코셔)을 제공한다고 선전한 것. 정통 유태인들에겐 유태인 음식이 없는 오랜 선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탓이다. 구겐하임 박물관 설립을 주도한 페기 구겐하임의 아버지인 벤자민 구겐하임, 메이시 백화점의 소유주인 이시도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등이 비극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배가 침몰할 때 구명 보트를 어린이와 여자들에게 양보하고 품위있게 최후를 맞이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잘 구현한 것으도 유명하다.
25) 공동책임개념=유태 신앙이 강조하는 생활 철학으로 유태인들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가난한 유태인들이 미국에 처음 이민와서 다른 민족의 이민자들보다 쉽게 일자를 찾고 돈을 번 것은 이 같은 종교적 생활 철학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도 러시아등지에서 이민자가 오면 히브류 이민지원협회의 자원봉사자들이 아파트를 구해주고 일거리를 찾아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수 있도록 하는 조언과 자금을 대준다. 밀튼 허쉬가 필라델피아 공장을 중심으로 막대한 돈을 들여 공동체 마을을 만든 것도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수 있다.
26) 록펠러가 침례교회에 나간 까닭은=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에게 어렸을 적부터 회당에 내보내며 정통적인 유태인 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새로 이사간 마을에 유태인 회당인 시나고그가 없을 경우 주로 침례 교회를 보냈다. 유태인들 사이에선 침례교회가 유태인의 성서인 구약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져있었기때문이다. 록펠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7)120살까지 사세요=록펠러는 98세까지 살았다. 평균 수명을 훨씬 웃도는 장수를 누린 셈이다. 하지만 유태인에게 장수를 기원하는 말을 할때는 120살까지 사시길 기원드립니다라고 해야 한다. 왜냐면 가장 위대한 유태인으로 평가받는 모세가 120살까지 살았기때문이다. 그러나 더 많은 나이를 얘기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모세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유태인들에게는 대단한 실례이다.
28) 이슬람, 친구인가 적인가=요즘 유태인들은 기독교세계와는 친구처럼 어울리고 아랍의 이슬람세계와는 적대적이다. 하지만 이슬람이 처음 태동했을 때는 정반대 였다.기독교인들은 유태인들이 예수의 신성(神性)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반감이 극심했다. 그러나 아랍세계는 달랐다. 당시 아랍인들은 세계를 지성과 야만의 두가지 척도로 구분했는데 유태인들은 이 기준에 적합한 친구였고 기독교는 그렇지 못했다. 시대상황에 따라 친구가 적은 갈리는 게 역사인 모양이다.
29) 유태인 자선문화= 히브류말에는 남에게 베풀다는 의미인 자선(charity)이란 뜻을 가진 단어가 없다. 가장 비슷한 말로 체다카(Tzedakah)란 단어가 있는데 이는 해야 할 당연한 행위란 뜻이다. 자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인 셈이다. 유태인은 어릴 때부터 저금통을 갖게 하는데 이 저금통이 모이면 자선에 쓴다. 자선의 구체적인 방법도 정해놓고 있다. 토라는 형제들중에 분명 필요한 사람(needy person)이 있다면, 그가 필요한 만큼(enough for his lack) 주어야 할 것이라고 규정해놓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닌 필요한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나 있다. 그러나 통상적인 자선은 소득의 5분의 1이나 10분의 1까지로 제한해놓고 있어 자신의 주제를 망각한 채 많은 돈을 자선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30) 티쿤 올람(Tikun Olam)= 유태 신앙의 기본 원리중 하나로 세계를 고친다는 뜻의 히브류어. 신의 파트너로서 세상을 개선시키고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의식을 강조한 말이다. 신은 세상을 창조했지만 미완성의 상태로 두었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완성된 세상을 위해 계속된 창조행위를 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자 인간의 의무라는 설명이다.유태인들의 창조성이 강한것으로 평가되는 것은 바로 이 사상 때문이다.
유태인 관련 상식 50선 (31-40)
31) Mr. Forgotten?=1892년에서 1947년사이에 2천만명의 이민자가 뉴욕의 엘리스 아일랜드를 통해 들어왔다. 너무나 혼란해 어리둥절 했던 영어를 못했던 일부 유태인들은 이민당국 직원이 이름을 물었을 때 잊었다(forgotten)는 뜻의 이디시말인 fergessan이라고 답했다. 조사자들은 이를 퍼거슨(Ferguson)이라고 적었다. 미국에서 퍼거슨이 유태인의 대표적인 이름중 하나로 탄생한 순간이었다.
32) 스티븐 스필버그와 홀로코스트=유태인 6백만명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인 쉰들러리스트를 폴란드에서 촬영할 때 스필버그는 폴란드 언론으로부터 너무 많은 배우를 외국에서 데려왔다는 비난을 받았다. 스필버그는 그때 나는 영화에서 유태인 역할을 할 유태인을 폴란드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왜냐면 히틀러가 그들을 모두 죽였기때문이다고 답했다.
33) 우피 골드버그(Whoopie Goldberg)=유태인의 활약이 두드러진 헐리우드에서 출세하려면 유태인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가장 단적인 예가 흑인 여배우인 우피 골드버그. 유태인이 아닌 그녀는 원래 캐린 존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으나 배우활동을 하면서 유태인식의 이름인 우피 골드버그로 바꿨다. 그리고 스타가 되었다.
34) 바브라 스트라이샌스=가수 영화배우 작곡가 제작자등 뮤지컬 음악 영화등의 영역에서 모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미국 최고의 수퍼 스타 연예인. 유태인을 상징한다는 매부리코를 갖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민주당 전당대회에 직접 참여해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맹렬한 민주당원이다. 헐리우드가 민주당을 지지하도록 유도하는등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어 민주당의 헐리우드대변인이란 얘기까지 들을 정도. 1942년 4월 24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래에 재능을 보인 스트라이샌드는 18세 때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벌어진 탤런트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한다. 68년 영화데뷰작 화니 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73년 직접 출연한 영화 The Way We Were의 주제곡을 맡아 아카데미 음악상 을 받기도 했다. 76년 대히트를 친 스타 탄생으로 영화계의 정상에 섰고 86년엔 앨범 브로드웨이로 그래미상까지 받았다.
35) 할례(Circumcision)=남성 성기의 끝 껍질을 벗기는 행위로 이른바 포경수술을 말한다. 유태교의 모든 남성들이 이런 행위를 한다. 평생 유태인으로 살겠다는 신과의 약속이다. 태어난지 8일째 되는 날이나 유태교로 개종을 할 때 할례를 한다.신과 유태민족의 계약의 상징으로 최초의 유태인인 아브라함이 나이 백살이 되어 얻은 적자 장자인 이삭이 처음으로 할례를 받았다.
36) 산아제한과 낙태=유태신앙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이유로 행해지는 산아제한이나 낙태에 반대한다.자녀들이 없는 가정은 축복이 없는 가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선행은 자녀들이고 가정이다. 유태인 법에 따르면 모든 남녀는 최소한 두 명의 자녀를 키울 의무를 가지고 있다. 아이를 낳을수 없다면 입양을 하는 이유이다. 물론 산모나 태아의 건강에 문제가 있을 경우는 예외이다.
37) 노동운동의 아버지들=현상유지를 거부하는 유태인은 19세기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그대로 두고 볼수 없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했다. 미국 노동운동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노동운동연합(AFL)을 만든 사무엘 곰퍼스가 유태인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노동조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주 54시간 근무와 잔업수당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중 한명은 나중에 최초의 유태인 대법관이 됐던 루이스 브랜다이즈(1856-1941)였다. 그는 미국 노동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협상, 불만처리, 중재등의 절차를 만드는등 노동운동에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을 구사했다.
38) 모세 10계와 613계명= 모세는 유태인들에게 기독인들이 생각하는 예수 같은 존재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유태인들을 탈출 시킨 지도자였다. 유태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그는 시나이산 정상에서 신에게 10계명을 받았다. 계명은 10개인 이유는 매일 보는 10개의 손가락처럼 어디서 무엇을 하던 쉽게 기억을 할수 있게 했다는 설명도 있다. 10계명을 구체화시킨 것으로 유태인들이 지키는 율법이 613개 있는데 6+1+3=10이라는 점도 10이라는 숫자에 부여하는 의미중 하나이다. 회당에서 예배를 볼때도 10명 이상이 모여야만 예배가 성립된다.
39) 음력을 사용하는 유태인= 유태인은 대부분의 서양세계에서 사용하는 그레고리안 력(태양력)과는 다른 달의 주기를 이용한 월력을 쓴다.물론 1년은 12달로 나누고 태양의 움직임과의 차이는 윤달을 사용한다. 유태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탄생을 계기로 서기 연대(AD)를 셈하기 시작하자 자신들도 세상의 창조에서부터 연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유태인 학자들은 세상의 창조시기를 기원전 3760년으로 계산했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양력을 유태인력으로 바꾸려면 3760년을 더해야 한다. 서기 2004년은 유태인력으로 5764년인 셈이다.
40) 유태인은 하루는 저녁때 시작된다=유태인의 하루는 해가 질 때 시작해서 다음날 해가 질때까지(from sunset to sunset)이다. 창세기에 첫날에 저녁이 있었고 아침이 있었다라고 적혀있기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해가지면 하루가 시작된다. 유태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토요일)이 금요일 해가 지면 시작되는 이유이다. 만일 유월절(패스오버)이 4월9일 시작된다면 실제 의식은 8일 저녁때 시작한다
유태인 관련 상식 50선(41-50)
41) 옐로우페이퍼와 풀리처 상=17세인 1864년 헝가리에서 보스턴으로 이민온 유태인 조셉 풀리처는 하원의원과 변호사를 지냈지만 염증을 느끼고 1878년 세인트루이스에서 포스트 디스패치를 인수 수익성 높은 신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10년뒤 뉴욕월드지를 인수하면 뉴욕으로 진출,시사만화 컬러사진등 새로운 시도로 독자를 확보한다. 이때 샌프란시스코출신의 윌리엄 허스트가 풀리처에게 도전장을 냈고 두 사람은 치열한 발행부수 전쟁을 벌인다. 풀리처가 옐로우키드(Yellow Kid)란 만화를 도입, 도시 전체를 노란 홍보물로 도배질하는등 도에 지나친 경쟁을 한 까닭에 옐로우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1911년 세상을 떠난 풀리처의 유지에 따라 뉴욕 컬럼비아대학에 저널리즘학과가 생겼고 문학 언론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인 풀리처상이 제정됐다.
42) 유태인 영국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1804-1881)=귀족 소설가인 아버지가 아들의 성공을 위해 12살때 영국 국교인 성공회로 개종시켰다. 하지만 영국 보수당을 세운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톨릭 지도자에게 유태인의 선조들을 비방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 디즈레일리는 그래요 나는 유태인 입니다. 영예로운 영국 신사들의 선조들이 이름없는 섬에서 야만적인 생활을 할 때, 우리 선조들은 솔로몬의 신전에서 성직자로 있었습니다라고 꼬집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43)헨리 키신저=15살때인 1938년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와 뉴욕의 조지 워싱턴고등학교에 입학한 헨리 키신저가 받은 첫 작문 숙제 제목은 미국인이 된 소감이었다. 키신저는 이때 미국은 누구나 머리를 똑바로 들고 다닐 수 있는 나라라고 썼다. 나치 독일에 익숙해진 고등학생의 눈으로 볼 때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미국의 풍경이 너무나 신기했던 것이다. 43년 미국 국적을 취득한 그는 하버드대학 정치학교수로 미국 전략정책의 최고 권위자가 된뒤 69-76년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는등 미국의 외교정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과의 데탕트, 중국과의 관계개선등 수많은 굵직한 외교적 성공을 이뤘고 베트남분쟁을 해결한 공로로 7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통해 배웠던 성경 지식이 언제나 나의 삶을 지배한다. 성경에 정치적인 원리가 전부다 들어 있다"고 말하는 독실한 유태인이다.
44)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독립=유태교는 한 국가의 탄생에서 시작되지 않고 아브라함 가족이란 한 가정의 탄생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요즘들어서도 유태인들에게 가정이 가장 중요한 단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태어난 시점은 유태력으로 1948년이다. 이스라엘이 서기 1948년에 독립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45) 다윗의 별=두개의 삼각형을 반대방향으로 놓은 다윗의 별(Star of David)은 유태인과 유태교를 상징하는 유일한 상징물이다. 이방인들은 이를 유태인 별(Jewish star)라고 부르고 유태인들은 마겐 데이비드(Margen David)라고 부른다. 다윗의 방패란 뜻이다. 그러나 놀랄만하게도 이 별은 유태교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특별한 종교적 의미도 내포하고 않았었다. 한때 이슬람권과 기독교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유태 신비주의자들은 깊은 의미를 새겨넣었고 점차 유태인의 상징으로 쓰였다. 당시에 시나고그의 친숙한 건축학적인 디자인이 되었는데 6개의 직선이 돌을 새기기에 매우 편리했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지금은 유태인 빌딩의 상징이 됐고 이스라엘의 국기에도 사용된다.
46) 히브류(Hebrew), 유태인(Jew), 이스라엘사람(Israelite)=히브류는 3800년전에 이브리(Ivri)라는 강을 건넌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나중에 이름을 신을 위해 싸우는 전사라는 뜻인 이스라엘로 바꿈)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12명 아들들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후손이다. 유태인은 바로 야곱(이스라엘)의 아들중 한명인 유다의 자손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람(Israeli)는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야곱의 12명의 아들은 각각 부족을 이뤘는데 그중 10개 부족은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두개만 남았다. 남은 두 부족중 대부족이 유다이고 작은 부족은 벤자민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후손들은 대부분 유다의 후손들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갖는다.
47) 이디시(Yiddish)어와 히브류어=만약 국제 유태인 모임이 있더라도 하나의 공통 언어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의 언어를 사용하는 탓이다. 히브류는 유태민족어 이지만 세계 각국에 사는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개념이다. 히브류는 바이블의 언어이고, 유태인 정신의 언어이다. 유태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디시는 히브류어가 아니다. 유럽의 게토에서 사용되던 언어로 정확히 말하면 히브류 액센트를 가미한 독일어이다. 독일이나 폴란드출신 유태인들은 아직 생활용어나 회당 미사에서 이디시를 사용한다.
48) 아담(Adam)과 이브(Eve)=아담이란 이름은 히브류어로 먼지, 지구란 뜻인 아다마(Adamah)에서 나왔다.이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기원이 어디인지를 상기시키고 겸손을 가르친다. 이브는 히브류어로 삶이란 뜻인 챠바(Chavah)에서 나왔다. 이브는 생명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이름을 과거를 돌아보고, 여성의 이름은 미래를 향한 것이다.따라서 이 둘이 합해야 역사와 운명 모두에 책임을 진다.
49) 맨해튼 프로젝트=루즈벨트 대통령이 아인슈타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1939년 만든 우라늄위원회가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암호명속에 최고의 비밀기구로 변하면서 원자탄 연구가 본격 시작된다. 유럽출신 유태인 학자들이 많이 참여했다.3년에 걸친 맨해튼 프로젝트는 20억달러(현재 가치로는 약 200억달러)와 연인원 15만명이 투입됐다.사업의 총괄조정은 군장성이 맡았으나 연구과 실험은 유태인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지휘로 이뤄졌다. 동기를 제공한 아인슈타인은 개발사업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50) 히틀러와 오이디푸스컴플렉스= 히틀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히틀러는 아이러니하게 자신이 싫어했던 유태인 학자인 프로이드의 학설을 통해 가장 잘 설명된다고 말한다. 히틀러의 반유태주의는 프로이드가 찾아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어린 소년이 어머니에게 집착하여 어머니에 대한 성적 독점을 소망하게 되는데, 이런 욕망을 방해하는 아버지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질투를 느끼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갖으며 이런 충동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런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히틀러는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성장과정에서 계속 잠재되어 있었는데,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감정이 어머니를 치료한 유태인 의사에게로 전위되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무의식적으로는 유태인 의사를 그가 가장 증오했던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연적이라고 간주하고 미워했다는 이론이다.
유대인이 뛰어난 이유
우연히 육동인 기자의칼럼을 보게 되었습니다.
셰계인구의 약 0.25% 정도를 차지하는 유대인이 노벨상 수상자의 약 25%를 차지 한다는 통계를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 글을 올립니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은 성경을 빼고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중에 가장 적으니라"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너희는 이스라엘 민족(유대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3절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
성경을 보면 유대인이 어떻게 형성 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끝을 맞을것인지가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유심히 관찰하면 세계의 흐름도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같이 연구하실까요...
칼럼을 쓰고 있는 육동인 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배우와 동명이인(혹 그분?)인 톰 크루즈 님은 유태인에 대해 저보다 훨씬 관심이 많으시고 아시는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저야 그때그때 조금씩 공부하는 수준에 불구한데....정말 존경 드립니다. 도움되는 말 주실때 이 난을 많이 활용해 주셔도 고맙고, 제게 직접 말씀 주셔도 감사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칼럼의 취지가 한국 사회에 유태인을 정확하게 소개하자는 뜻이니까요.
저는 뉴욕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최근 본사로 돌아왔습니다. 7,8월 칼럼이 거의 게재가 되지 않은 것은 뉴욕 생활 정리하고 한국으로 이사하는등 개인 사정에 바빠서 였지요. 현재 국제부에 근무중입니다. 한국경제신문 국제부(02-360-4221)로 하면 곧장 연락이 됩니다. 여건이 허락하는한 계속 유태인 공부를 해서 칼럼을 이어가고 싶습니다.많은 도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육동인 드림
구겐하임뮤지엄에서의 화려한 컨서트
최근 한국경제신문 특파원 코너에 `KAJA 파이팅`이란 제목으로 실은 기사를 전제합니다. 얼마전 얘기했던 한국인과 유태인 모임인 KAJA가 드디어 공식활동을 시작했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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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저녁 맨해튼 센트럴파크옆 구겐하임박물관 지하 음악강당에서 좀 특이한 컨서트가 하나 열렸다. 한국 교포들과 뉴욕 거주 유태인들이 모여 만든 모임의 발대식 성격의 음악회였다. 조원일 뉴욕총영사와 이스라엘의 알론 핀카스 뉴욕 총영사도 부부동반으로 참석해 모임의 격을 높여주었다.
모임이 공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지난 4월. 미국내에선 둘다 소수 민족인 만큼 서로 잘 돕고 살자는 취지에서였다. 모임의 이름은 KAJA(Korean-American, Jewish American Forum)로 정해졌다. 우리말로 읽으면 `가자`가 되며 영어로는 "Let`s Go"란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날 모임에선 "한국인과 유태인이 함께 가자(Let`s go together)"란 얘기가 많이 나누어 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70년대초 이스라엘의 월드컵축구 본선 진출을 막았던 차범근 선수를 아직 잊지 못한다"고 얘기를 꺼낸 핀카스 이스라엘 총영사는 "미국 명문대학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은 대부분 한국인이거나 유태인"이라며 "두나라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면 많은 일을 해낼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두나라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에서 유태인은 더 이상 우리와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소수민족이 아니다. 인구로는 아직 소수이나 실질적인 파워는 `거의 미국을 움직일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세계 인구의 0.25%에 불과면서도 노벨상 수상자의 25%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유태인의 저력이 한껏 발휘되는 곳이 미국이다. 월가의 금융계를 포함해 유통 패션 에너지 IT산업등 거의 대부분의 기간 산업들을 `장악`하고 있다. 워싱턴 정치권도 막강한 자금력과 언론의 힘을 동원하는 이들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뉴욕에선 유태인 명절에 모든 학교가 쉴 정도로 이들은 실질적인 미국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유태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미국 사회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은 미국에선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유태인의 본거지인 뉴욕에서 어렵사리 만들어진 `KAJA`를 잘 살려 국익에 보탬이 되는 모임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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