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가 오오야마 마스타츠
오오야마 마스타츠 총재님이 공수도계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그러한 시대였다.
그의 삶은 극화나 영화 등을 통해 알려졌지만, 그것들은 다분히 과장되어 있으며 그의 실상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상이 아무리 극화나 소설과는 다르다고 해도 오오야마 총재님만큼 완강하게 강함을 추구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총재님이 무도가로서 순수하게 강함을 추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강하다거나 약하다고 하는 것은 입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실은 상관없으니 먼저 싸워보자는 생각으로 나는 많은 무도가에게 도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람은 나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공수도는 싸우기 위한 무술이지만 싸우는 것을 올바르지 못한 길이라고 하며 부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대결을 통해 겨루어보지 않겠느냐며 잡지를 통해 호소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응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극진 공수도라는 것은 애당초 유파가 아니다.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강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만들어 절차탁마해 가자는, 공수도계의 대동단결을 계기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극진 공수도이다.’
오오야마 총재님의 생전, 이미 70세가 되어감에도 싸움에 있어서는 언제나 진지했다. 규칙이 존재하는 경기로서의 공수도보다, 생사를 건 싸움에서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를 더욱 고민했다.
그것을 반증하듯 70세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육체는 마치 강철과도 같았다. 오오야마 총재님과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달인이라던가 초인이라는 말이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위압감은 대단했다.
‘이 나이에 이 정도로 사람을 압도하는 기가 온몸에서 흐르고 있다면, 20년 아니 40년 전의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단 말인가’
나는 40년 전을 살아보지 못한 것이 애석해졌다.
그런 오오야마 총재님에게 전공련은 끊임없이 연맹에 가입할 것은 요청하였다. 그러나 총재님은 계속해서 요청을 거절했다. 이때부터 공수도계에서 독립하여, ‘잘못된 가르침’,’이단’이라는 딱지가 붙게 되었다.
오오야마 마스터츠의 공수도 혁명
1969년 9월 20일, 오오야마 총재님은 만반의 준비를 다해 오픈토너먼트 제1회 전일본공수도 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그야말로 오오야마 총재님의 공수도관(観)을 함축시킨 대회였다. 그리고 격투기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
공수도 본연의 격투기로서의 명맥이 끊어지고, 공수도가들이 공수도를 신비와 전통의 장막으로 감싸려고 했을 때, 오오야마 총재님이 이끄는 극진회관은 더더욱 공수도의 신비성을 타파하며, ‘진실의 싸움이란 무엇인가’, ‘무도란 어떤 것인가’를 구실이 아닌 실천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타격제 녹다운 룰’이라는 획기적인 시합 방식을 채용한 것이다.
<계속>
첫댓글 와 정말 매끄러운 번역 감사합니다! 오쓰!
오쓰! 뒷부분 오늘 업로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