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은 무자년 제주 4. 3의 60주년을 맞는 해였다.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제주작가회의에서 기념 시선집 ‘곶자왈 바람 속에 묻다’를 낸 일이다. 제주 작가회의 소속 31명의 시인이 70여 편의 4. 3을 제재로 한 시를 묶어냈다. ‘진실 너머의 것을 향해’라는 서문에 밝힌 내용의 일부를 옮겨본다. --꼭 10년만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4. 3의 진실에 대한 해석은 얼핏 진일보 한 듯 보이나,/ 무자년 세밑에 벌어지고 있는/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아예 뒷걸을 치는 듯하다.// 섬사람들의 아물지 못한 상처를 다시 헤집어내고,/ 색깔 덧씌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세력들의/ 천박한 역사 인식 앞에서 가끔 할 말을 잃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침묵하진 않았다. 4. 3의 역사를 문학으로 증언하고 고발하며/ 그 진실 너머의 것을 향한 통찰과 모색을/ 고통스럽게, 그러나 기꺼이 감내해왔다./ 그것은 이 섬의 작가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 앞으로도 오래 짊어지고 가야 할 등짐 같은 것이다./ 4. 3은 피돌기가 멈춰 죽은 역사가 아니라./ 섬의 곳곳 실핏줄까지 이어져 뜨겁게 맥동하는/ 살아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여기 묶인 시편들은 기나긴 여정의 한 궤적일 따름이다./ 우리들의 작가적 고민과 성찰은 계속 될 것이다./ 4. 3의 역사, 그 진실 너머의 것을 향해/ 무겁고 진중한 마음으로 작은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다.-- 으아리는 쌍떡잎식물 미나리아재비목 미나리아재비과의 덩굴성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며 다 익은 씨는 바람에 날려 번식한다. 그 동안 갇혀 있던 4. 3의 영혼이 으아리 씨앗처럼 비상(飛翔)하기 바라며 우선 5편을 뽑아 싣는다.
♧ 찔레꽃 - 강금중 한라산 바람 망월동 푸른 벌판에 찔레꽃 두고 왔다 수의를 찢긴 가슴 섧은 꽃 무덤을 감싼 찔레꽃 산(山) 사안(生) 사람이 우리의 말 전할 수 없음 안다 아직 한라 혼백은 시들은 찔레꽃 바당 속 누이들 앙가슴 섧다
♧ 잃어버린 마을 - 강덕환 수목원 나무 그늘 평상에 누웠다가, 하, 글쎄 시끄러운 매미 탓에 자리를 옮기는데, 나무 밑둥에 살그랑이 남아 있는 매미의 둥지를 보았지요 떠나버린 집터만 옹송그리 고 있었던 거지요 멀리 떠난 매미는 기억하고 있을까, 돌 아올 수 있을까 적꼬치로 쓰던 뒤란의 대나무 숲은 서걱이는데, 풋감즙 을 내어 갈옷에 물들이던 감나무의 노동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어쩌자고 무자년의 흔적 지우지 못하고 버팅겨선 팽나무 너는 떠난 게 아니라 밀려난 거지요 잊은 게 아니라 꽁꽁 저며 두고 있던 거지요 잃어버린 게 아니라 빼앗긴 거지요 쉽게 으스러지는 탈피의 잔해를 엉거주춤 밟고 선 나는 다만,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빌 뿐
♧ 유채꽃 피는 이유 - 강창범 아비는 피뿌리풀 핏빛으로 피어나고 어미는 엉겅퀴 붉은 꽃으로 피어나고 아들은 천남성으로 피어 비탈을 떠돌고 딸은 새우난초로 피어 몸을 숨기는 일가족이 모여 사는 봄, 제주 오름 그 들녘에선 해마다 살아남은 씨앗들이 모여들어 노란 만장(輓章)을 그린다
♧ 금악오름 바람까마귀 - 고정국 구릉에 잔솔을 깨우는 빛이다가 바람이다가, 쓰레기 매 립장의 비닐 조각 날리다가 돌아와 마른 풀잎에 피 묻은 부리를 닦는, 먹이를 앞에 두고 사생결단을 내야 하리, 황사 자욱한 떼까마귀 싸우는 골엔 파르르 아사 직전의 새끼가축이 놓 이고…… 무자년 까마귀 울 때 화염이라도 삼킨 것일까, 금악리 상 동 입구 백발성성 팽나무가 돌에다 뿌리를 막고 빈 마을을 지킨다. 막판엔 날짐승조차 스크럼을 짠다더라, 일백 아흔 세 마 리 검정부리의 난신적자여, 비양도 바다 불빛이 탄핵처럼 아리다. 발 끊긴 지점에서야 하늘길이 열린단다. 까맣게 회오리치 는 바람 바람까마귀, 다 뜯긴 억새밭 위로 거친 획을 긋는다.
♧ 아픔을 잇고 기억을 나누는 바느질집 - 김경훈 - 진아영 할머니 삶터 개관에 부쳐 단 한 번 남 앞에서 밥 아니 드시던 누가 볼세라 할머닌 홀로 먼 마실 가셨지만 말 못한 유언처럼 휑하니 남은 집 한 칸, 헐고 낡고 터져 아픈 기억을 고운 마음이 매웠나니 한 땀 한 땀 바느질이 고운 옷 짓듯 한 땀 한 땀 아픔을 잇고 기억을 나누듯 아들 되고 딸 되고 조카 되고 손주 되어 울담답고 도배하고 장판 깔고 지붕 칠해 새 보금자리 틀었으니 선인장 핏빛 상처 속에 샛노란 꽃이 돋듯 화안히 마실 다녀오신 할머니 참빗 정결히 머리 빗고 갓 지은 따순 새 옷 곱게 입어 아이들 맑은 노래 고운 웃음 받으리
♬ Snow In The Morning - And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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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