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옥합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仁茶박세아
이달의 작가 고정욱 작가
* 아주 특별한 우리 형
- 고정욱 / 송진헌 / 대교출판
십 년이 넘도록 외동이로 귀염만 받고 자라던 어느 날 난데없이
낯선 형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모습으로.
먼 사촌 쯤으로 여기며 며칠 후면 안 볼 사이겠거니 했는데, 웬걸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어떻게 이런 일이?
바로 친형이란다!
믿고 싶지 않다. 모두가 밉다. 긴 세월 동안 속여온 엄마 아빠도,
무엇보다 웃을 때조차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리는 저 모습을 매일 보며
살아야 한다니...
게다가 오며가며 동네 사람이며 친구들이며 학교에까지 모두 소문이 날텐데
정말 꿈이었으면 싶다.
종민이는 뇌성마비 장애인인 종식이 형이 꼴도 보기 싫다.
형이 오고부터 집에서도 찬밥신세가 되고, 컴퓨터 황제가 된 것마냥 아이들이
형에게만 덤벼드는 것도 보기 싫어 가출을 결심한다.
그러나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멀리 가보지도 못하고 세상의 쓴 맛을 본 종민이는
다시 한 번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안전한지를 깨닫는다.
종식이는 뇌성마비를 앓고 있지만 다행히 뇌기능은 정상이어서 스스로 컴퓨터 키보드
자판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한 손만으로도 키보드를 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컴퓨터 통신을 통해 친구도 사귀고, 글도 써서 공모전에 응모하는가 하면,
검정고시 준비를 위해 열심히 공부도 하고, 책도 수없이 많이 읽는 장차
컴퓨터 프로그래머나 작가가 되는 꿈을 키워가는 재원이다.
그런 형의 듬직하고 성실한 모습에 깊이 감명을 받은 종민이는 드디어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진정으로 마음의 벽을 허물어 형을 가슴으로 껴안는다.
세상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과,
장애는 몸이 불편한 것일 뿐, 정작 정신과 마음이 병들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널렸다는 것, 그러나 장애인의 가족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일깨워주는 감동적인 책이다.
장애인, 비장애인 구별없이 아무런 편견없이 턱이 없는 사회가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저, 동화쓰려고 장애인 됐나봐요" 해맑은 작가
동화·소설 140권 출간 고정욱씨의 '유쾌·명랑 49년 삶'"내 책 읽은 아이들, 장애에 대한 생각 바꿀 것"왜 제가 항상 웃고 다닐까요? 장애인에 대한 편견 깨려고요작품 대부분은 저의 경험 앞으로 책 한 500권 낼겁니다"나같은 소아마비 장애인은 장수하는 사람이 드물어…목숨걸고 쓰니 다작(多作)할밖에"
소아마비 장애아 영택이 나타났다. 2학년 석우의 불운이 시작됐다. 석우는 그의 가방을 등·하교 때마다 들어줘야 했다. 집이 가깝다는 이유였다. 속 모르는 아이들은 좋아하는 축구도 못하게 된 석우의 부아를 돋웠다. "쟤는 왜 가방을 두 개나 들었냐?" "공부 못하는 앤가 봐" "바보 아냐?"'찔뚝이'와 함께 하면서 석우는 자신도 모르게 모범 어린이가 돼있었다. 3학년이 시작되면서 반(班)이 바뀐 날 아침, 석우는 영택의 집 앞에서 고민하다 그냥 지나치고 만다. 그날 전교생 앞에서 교장 선생님께 모범 어린이 상(賞)을 받은 석우는 죄책감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70만부가 팔린 동화 '가방 들어주는 아이'의 작가 고정욱(49·高廷旭)의 아파트 거실에는 온통 책이 깔려 있었다. 그는 컴컴한 방안에서 방바닥을 짚으며 나타났다. "30분간 이걸 까느라 땀 좀 흘렸어요." 140권의 책은 모두 그가 쓴 것으로 대개 동화였다. '원균' 같은 역사소설도 보였다.
▲ 서울 정릉의 컴컴한 아파트에서 고정욱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글을 생산해내고 있다. 거실 바닥을 가득 채운 동화와 소설 위에 누운 그는 앞으로 500권 이상의 책을 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머리맡에 놓인 휠체어가 그 말에 감응(感應)했는지 저절로 돌기 시작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그가 지금까지 쓴 140권의 동화와 소설은 300만부 이상 팔렸다. 세계적으로도 그만큼 다작(多作)을 내놓고 베스트셀러를 만든 동화작가는 없다. '가방 들어주는 아이'의 주인공 영택이 바로 자신이고 석우 역시 실존 인물인 것처럼 그의 작품은 대개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세상은 장애인과 쾌활(快活) 명랑(明朗)이 동떨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장애인 작가는 그런 선입견을 비웃듯 웃고 떠들며 "노벨 문학상을 받겠다"고 큰소리까지 쳤다. 성북구 정릉의 20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그와 3시간을 이야기했다. 그 활력의 뿌리를 캐는 시간이었다.◆비극(悲劇)고정욱은 고태잠(79)·박호생(74)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육군 대위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끔찍이 아꼈다. 남들이 한번 맞는 소아마비 백신을 두 번이나 맞혔다. 그들이 살던 서울 용산구 오산고(五山高) 인근 단독주택에는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1961년 가을, 돌을 앞둔 아이가 이상해졌다. 몇 달 동안 걸음마를 떼다 주저앉기를 반복했다.어느 날 아이의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열이 가라앉은 뒤 아이는 축 늘어졌다. 헐레벌떡 아이를 병원으로 업고 간 어머니에게 의사가 말했다. "소아마비…."부모는 믿을 수 없었다.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모두 뒤졌다. 몸에 좋다는 건 다 거둬 먹였지만 뱀과 자라가 운명을 바꿀 순 없었다. 이후 집안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4남매를 둔 이 가족에게는 기념사진이 두 장밖에 없다. 소아마비에 걸리기 전 큰아들 백일사진, 막내 돌 사진이다.장애가 인생의 끝을 뜻하는 시대였다. 속없는 이웃들은 어머니에게 "홀트 아동 복지회에 데려가 해외에 입양시키라"고 했다. 이웃을 탓할 것도 없었다. 할머니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아이 크면 시계수리나 도장 파는 걸 가르쳐라." 그 말은 모자(母子)의 가슴을 송곳처럼 후볐다.5살 무렵 불운(不運)으로 뒤덮인 가족에게 희망의 싹이 뿌려졌다. 아버지가 휘하의 사병(士兵)을 아들 가정교사로 데려온 것이다. 밖에 나갈 일 없는 아이는 그에게 한글과 구구단을 배웠다. 시중의 동화책도 거의 읽었다. 그 가정교사가 유명 플로리스트 방식(64)씨다.◆학업(學業)1968년 3월 창천초등학교 입학식은 슬펐다. 아이들이 율동을 할 때 오지랖 넓은 한 아주머니가 심장에 채찍질을 했다. "의자 가져 올게요." 어머니 눈 앞에서 의자에 앉은 아들은 몸을 비틀었다. 고정욱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그때 내 모습이었음을 알았다"고 했다.사흘간 '쇼'를 한 뒤 들어간 교실에서 아이는 바닥을 기었다. 어머니가 등·하교 때 업고 다녔지만 수업을 같이 들을 순 없었다. 그는 소변을 참기 위해 국과 물을 먹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지에 소변을 싸는 일을 면할 수는 없었다.그는 지금 팔십쯤 됐을 1학년 때 신영숙 담임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이를 업고 다니며 소변을 누였다. 고정욱은 "참으로 고마우면서도 괴로웠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의 고민은 두 살 아래 덩치 큰 동생이 한 살 앞당겨 같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해소됐다.초등학교 시절 그는 체육을 제외한 전 과목에서 수(秀)를 맞았다. 체육과목만 우(優)였다. 샘 많은 한 어머니가 시비를 걸어왔다. 운동장에 한번도 나가지 않은 아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대꾸했다. "정욱이가 몸이 성했으면 우만 맞았겠어요?"아들 때문에 고단해진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기 시작한 3학년 때부터 졸업 때까지 10L짜리 대형 양은 주전자를 들고 다녔다. 점심시간이면 80명의 찬밥에 일일이 뜨거운 보리차를 부어줬다. 내 아들 구박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라는 무언(無言)의 당부였다. 졸업식 날,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장한 어머니상(賞)'을 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때 처음으로 화를 냈다. "어미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왜 상을 받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런 당부도 했다. "정욱아, 장애는 부끄러운 일도 상 받을 일도 아니다…."◆전환(轉換)아버지는 아들에게 "나중에 의사가 돼라"고 했다. 미래가 보장되고 장애인을 치료해줄 수 있는 직업으로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정욱도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경성고 시절 이과(理科)를 택해 의사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고 말았다."장애인을 받아주는 의대는 없는데…." 3학년 막판에 문과로 전향한 그를 괴롭힌 과목은 국어였다. 사회는 외우면 되지만 국어의 고전(古典)과목을 몇 달 안에 정복할 수는 없었다. 그는 1차로 서강대에 응시했다 낙방했다. 2차로 지망한 성균관대 국문과는 아버지의 결정이었다."사실 아버지는 지원율이 가장 낮은 과에 지원한 거였는데 운명이 참 이상해요. 제가 경성고 1학년 시절 국어선생님이 소설가 김장동 선생이었는데 저를 딱 보는 순간 '정욱이, 소설가 될 것 같은데'라고 했어요. 나중에 성대에 합격하고 나니 '거봐, 소설가 될 거라고 했잖아'라고 했습니다."고정욱은 "나를 키운 것은 어머니의 희생과 아버지의 군인 정신이었다"고 했다. 의사에의 꿈은 좌절됐지만 어렵사리 마친 초·중·고 시절의 다음에 황금빛 청춘이 오고 있음을 그는 당시에는 몰랐다. 12년 개근상을 받은 그는 이제 명륜동 캠퍼스에서 20대를 시작했다.
▲ 고정욱이 15일 서울 강동도서관에서 어린이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며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사인을 할 때마다 '장애인의 친구 되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청춘(靑春)그에게 활자(活字)의 마력(魔力)을 느끼게 해 준 이가 본고사 때 바로 앞 자리에서 시험 보던 장발(長髮)의 재수생이었다. 나중에 국문과에서 만난 그는 김성구 샘터사 대표(49)였다. 김 대표는 1학년 때 대학신문 기자를 하며 정욱에게 "너, 그림 꽤 그리는데 만화기자를 해보라"고 권유했다.그래서 시작된 게 '꼬장군(君)'이라는 네 컷 만화였다. 그가 보여준 스크랩에는 졸업 때까지 그린 꼬장군 시리즈를 비롯해 '강협만평' '따이한' '통일만평' '한반도' '마름쇠' '전강쇠' '옹골찬' 같은 주인공들이 빼곡했다. 그는 "내 성격이 하드보일드했고 '꼬장'을 잘 부렸다"고 했다.네 컷 만화의 고료는 1만5000원이었다. 그가 돈을 받는 날이면 술이 고픈 친구들이 학교 신문사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의 20만원에 해당하는 그 돈으로 그는 친구들에게 술을 샀고 여학생들에게는 커피를 사며 대학로를 누볐다. 그는 만화를 그리는 한편 병적(病的)으로 학력에 집착했다. 대학원 석사, 박사과정에 진학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그가 갑자기 물었다. "문 부장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 뭐라고 보세요?" 기자가 답하기도 전에 그는 '교육'이라고 했다.―왜 교육이 중요합니까?"그 말에 답하기 전에 묻겠습니다. 문 부장은 안경을 썼는데, 안경 쓴 게 장애입니까, 아닙니까."―(잠시 생각하는 척 하다) 장애죠 남들은 잘 보이는데 잘 안 보이니까."장애인가 비(非)장애인가는 그 사회에서 익숙한가, 익숙하지 않은가의 문제입니다. TV '동물의 왕국'에서 케냐 세렝게티 초원의 가젤 가운데 유독 흰 가젤이 있었어요."―어떻게 됐나요?"동물은 보호색이 없는, 눈에 띄는 동물을 무리에서 몰아내지요. 조직의 안전을 위해서요. 인간도 동물이기에 그런 속성이 남아 있어요. 서로에게 불편한, 능력이 없는 장애인을 조직에서 몰아내지요."―그 흰 가젤은 어떻게 됐습니까?"그 녀석은 결국 사자 무리의 첫번째 표적이 됐고 얼마 뒤 잡아먹혔어요.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장애인과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수학교보다는 일반학교에서 비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려야 하지요."◆좌절(挫折)고정욱은 1992년 2월 '한국 근대역사소설 연구'라는 논문으로 국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런데 '교수가 돼볼까'하는 그의 희망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그보다 5년 전인 1987년 박사학위 5학기 때 원생(院生)들에게 학부생 강의를 배정하는데 정작 고정욱이 빠진 것이다. 교수는 군색한 변명을 했다. "칠판에 판서하는 것도 어렵고…." 아버지가 달려가 항의했다. 다음 학기에 강의를 배정 받긴 했지만 그의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해버렸다. "장애인에게도 기회는 줘야지요. 물어는 봐야지요. 나를 위한 결정이었다지만 왜 묻지도 않나요."그는 1988년부터 2008년까지 강사로 일했다. "장애인으로, 세계에서 가장 시간강사 생활을 오래 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강사 자리도 작년에 스스로 반납하고 말았다. 이 학교 저 학교, 교수가 돼보려 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좌절하고 만 것이다.―교수가 돼보려다 쓴맛만 봤다지요."A대학에서는 서류심사에서 1등을 했어요. 필기시험까지 1등을 했어요. 그런데 가보니 내정자가 있더군요."―두번째는요."지방에 있는 한 대학인데 이사장이 직접 면접에 들어왔어요. 무척 호의적으로 대하더군요. 나중에 들린 이야기는 이사장이 화를 내며 '왜 그런 놈까지 면접에 올려 내 손에 피를 묻히게 했느냐'고 했답니다."―그 다음부터 교수에 대한 동경(憧憬)이 싹 사라졌나요."한번은 제가 지망한 대학 출신과 둘이 최종 면접에 올랐어요. 그 학교는 자기 학교 출신 아니면 절대 뽑지 않는 학교였습니다. 다른 대학에 가니 이번에는 같이 소설 쓰는 동료들이 '몸도 불편한 놈이 들어와서 경쟁률만 높인다'는 표정을 짓더군요."◆등단(登壇)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였다. 그는 도서관에서 낯선 신문을 발견했다. 당시 창간한 문화일보였다. 창간한 지 얼마 안 된 문화일보에 '신춘문예 공모'광고가 나왔다. 그는 예전에 습작해놓았던 소설을 다듬어 재미 삼아 응모해놓고 그 일을 싹 잊고 있었다.1991년 12월 어느 날, 한 여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당시 문화일보 문화부차장이었던 신효정은 그에게 "신춘문예 응모한 것 맞느냐"고 확인하더니 "당선됐어요"라고 했다.의사에서 교수의 꿈까지 무산된 그는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소설가로 이름 날린 첫 작품이 '원균(元均), 그리고 원균'이다. 10만부 이상 팔린 이 소설은 이순신(李舜臣) 동화를 쓰다 구상한 것이다.―동화는 언제부터 썼습니까?"1999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첫 작품이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이라고 뇌성마비 장애인이 주인공입니다."―왜 동화로 전향했습니까?"아이가 생기니 자연스레 동화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런데 시중 서점에 나가보면 읽혀줄 책이 거의 없더라고요. 좋은 책이 있긴 하지만 극소수였어요. 대부분 서로 베낀 것에다 완성도도 낮았어요."―동화 속 주인공은 전부 장애인이지요."동화를 쓰기에 앞서 '내가 아니면 못 쓸게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바로 장애잖아요. 정상인들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지요. 능력 있고 착한 장애아 이야기를 쓴 '아주 특별한 우리 형'은 40만부 이상 팔렸습니다. 6개월간 베스트셀러 1위를 하기도 했지요."―장애아를 주인공으로 다루는 게 의도적이라는 비판은 없나요."동화의 주인공들은 다 영웅(英雄)입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그렇고 톰 소여도 그래요. 소공자, 소공녀는 또 어떻습니까. 장애인도 그런 영웅의 한 장르입니다."―2000년에 쓴 '안내견 탄실이'같은 책이 30만부 팔렸지요. '가방 들어주는 아이'는 70만부가 나갔고요. 우리 장애문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입니까?"제가 쓴 책의 판매부수가 300만권 정도됩니다. 10명이 한 권씩 돌려 읽었다면 3000만명이 읽은 셈이 됩니다. 먼 훗날 제 책을 읽은 아이들이 장애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겁니다. 전 세계에서 장애를 다룬 책이 가장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장애 문학은 앞설지 모르지만 우리의 장애인 보호수준은 엉망이지요."미국에 가보니 '아! 여기서는 장애문학이 나올 수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게 다 완비돼 있으니까요. 아프리카에 가보니 '여기서 살았다가는 문학을 할 엄두도 못 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육을 받을 여건이 안되니까요. 우리나라가 그 절묘한 중간선상에 있어요."―작년에만 27권을 냈지요. 원래 그렇게 속필(速筆)입니까?" '가방 들어주는 아이'같은 경우는 한 시간 만에 썼어요. 동화는 대개 200자 원고지 100~150매 분량인데 저는 녹음하는 방식으로 씁니다."―한꺼번에 책을 내다보면 망한 것도 있겠지요."대표적인 게 '자전거 태워주는 형' 같은 건데 5000권 정도 팔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을 많이 파는 게 아니라 제 책들이 도서관이나 학교, 가정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곁에 두고 읽으면 장애인들에 대한 친근감을 느끼지 않겠어요? 제가 왜 항상 웃는지 궁금하지요?"―예."동화를 쓰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이 일을 하려 장애인이 됐구나'하는…. 그때 삶의 의문이 풀렸어요. 10여년 전입니다. 그때부터 즐겁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1년에 80회 강연을 하는데 멋진 강의를 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래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깨질 것 아니겠어요."―그래도 너무 다작 같은데…."(이때 고정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아마비 장애인에게는 '포스트 폴리오 신드롬'이라는 게 있어요. 몸의 근육 가운데 3분의 2가 하체에 몰려있는데 쓰지 않으니 심폐, 내장, 심장기능이 60이 넘으면 급격히 저하됩니다. 소아마비 장애인 가운데 장수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저는 목숨을 걸고 씁니다. 언제 제 삶이 끝날지 모르니까요."◆연애(戀愛)그의 첫사랑은 실연(失戀)으로 끝났다. 같은 대학교에 다니던 그 여학생은 그의 창천초등학교 1학년 때의 짝이었다. 캠퍼스 커플로 지내며 세월이 흐르자 두 사람은 '결혼'을 고려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그러자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여자의 부모가 펄쩍 뛰고 나섰다.―헤어진 그 분은 어떤 성격이었나요."부모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여자, 참한 여자였지요. 사실 그 말이 모순되는 거예요. 부모 뜻을 거스르지 못하면서 장애인을 택할 순 없을 테니까요. 결국에는 저와 헤어져 수녀(修女)가 됐어요."―지금의 아내(이연숙·45)는 어떻게 만난 겁니까."저를 따르던 한 후배 여학생이 '여자친구 소개시켜주겠다'고 해서 신촌에서 만났습니다. 아내는 제가 장애인인줄 알고 나왔어요. 한양대를 나왔는데 처음 보는 순간 '저 여자를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어떻게 했습니까?"처음 만난 날 '너랑 결혼할 것 같다'고 했지요. '어머!'하고 깜짝 놀라더군요. 차 마시고 밥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잡았는데 따라 타는 거예요. 자기가 바래다 주겠다고."―장인 장모는 난리를 치지 않았나요?"장모는 끝까지 반대했어요. 결혼 2주 전에야 장인을 처음 만났고 장모님은 결혼식 당일 만났어요."―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한 걸 보면 부인의 성격도 보통이 아닌 모양입니다."하도 반대하니 호적을 파서 제 집으로 왔어요. '아버지가 내 다리몽둥이 부러뜨리고 머리 박박 깎아 버린다고 하니 혹시 결혼식 날 안 나타나면 이 서류로 혼인 신고하라'면서요."―왜 부모들은 장애인을 결혼상대로 맞는 걸 반대한다고 봅니까?"장인이 아버지를 만나서 이랬대요. '하체를 전혀 못 쓴다는데 부부관계는 되느냐'고요. 아버지는 '아들이 책임 없이 행동할 아이가 아닙니다'라고 답했답니다."―앞으로 목표가 뭡니까?"첫째가 작가로써 소설이나 동화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개발하고 죽는 날까지 책을 500권 정도 내는 겁니다. 두 번째는 100개국 이상에 제 작품을 번역해 알리는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