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야비하기 짝이 없는 애야. 날 괴롭히고 싶어서 그런 말을 지어내다니ㅡ.” 나래는 화연이 충분히 그럴만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2학기 때는 반장 출마를 끝까지 못한다고 했어야 되는 것을ㅡ.’ 생각할수록 화연의 말이 귀에 거슬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하지만 모를 일이야. 권 선생님이 올 봄에 외국어 고등 학교로 전근 가기 전까지는 정 선생님과 우리 학교에 함께 계셨으니까 거짓말이라고만 볼 수는 없지. 더욱이 여학생들한테 그토록 인기가 높던 선생님이셨는데 처녀 선생님들인들 한두 번쯤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더 이상 생각하면 안될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언니와의 갈등, 아니 나래 스스로 비약해서 생각하고 고민했떤 부질없는 공상들이 정리된 지 몇 개월도 안 지났는데 그까짓 헛소리로 마음 산란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따르릉!” “나래야, 전화 받아라.” 저녁 식사 후에 침대에 누워서 이것 저것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래는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접니다. 아까 책방에서 만났던ㅡ. 참 제 이름을 소개하지 않았군요. 민수의 친구 형석이라고 합니다. 성은 고씨입니다.” 나래는 수화기를 잠깐 귀에서 멀리 떼었다가 아무 대답도 안한 채 듣고만 있었다. “실은 전 체육 특기자로 1학기말에 전학을 왔거든요. 나래 양은 먼발치서 보아왔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도 보았지만 제일 교회에서도 뵈었어요. 저도 교회에 다니거든요. 이 동네로 이사온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얼굴을 안 내밀었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만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 전화 번호를 알아냈지요?” 나래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 그야, 친구들 좋다는 게 뭡니까? 제가 알려달라고 졸랐지요. 하하하!” 통쾌하게 웃는 소리에 귀가 따가워 나래는 수화기를 내려놓아 버렸다. “누구니? 우람이라는 학생이야?” 어머니는 궁금한지 나래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네 남자친구야?” “엄마는ㅡ. 남자친구가 어디 있어요? 장난 전화를 걸어온 거에요.” 나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 방으로 건너왔다. ‘오늘은 왜 이렇게 머리가 복잡할까? 마치 헌 책방의 땅바닥에서 어지럽게 뒹구는 달 지난 잡지들처럼ㅡ.’ 책을 읽을 마음조차 내키지 않아 나래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다시 침대로 가 누웠다. 신인 가수가 부르는 ‘고추 잠자리’란 노래가 동요처럼 밝고 명랑하게 들려와 우울한 마음을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고추잠자리②
점심 시간에 정숙이와 나래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잔씩 뽑아 들고 등나무 밑으로 갔다. 벤치 위에도 땅바닥에도 낙엽들이 떨어져 사방으로 구르고 있었다. “왜 기분 나쁜일이라도 있니?” “아아니ㅡ.” “어딘지 좀 울적해 보이는데?” 언제나처럼 정숙이는 속일수가 없다. 어느 새 나래의 기분을 읽고 물어오는 정숙이가 고맙다기보다는 오히려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가을은 서글픈 꼐절이라 하더니만 공연히 쓸쓸해지는 게 가을 바람 떄문일까?” “글세다. 난 너처럼 문학 소녀가 아니라서 네 기분을 이해 못하겠다!” 정숙이는 또 나래의 사춘기 병이 재발하나 싶어 걱정이 되는지 살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테니스장쪽으로 발을 떼어놓았다. 나래는 별생각없이 정숙의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휘익! 고추잠자리야, 도망쳐 임마!” 굵직한 남학생의 목소리에 나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넌 뭐야?” 이어서 정숙의 화난 목소리에 나래는 어리둥절하여 눈을 한 번 꼭 감았다 떴다. 정숙이 안타까워하며 바라보는 허공으로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뱅그르 맴을 돌며 날아가고 있었다. “하하하하, 그게 그렇게 쉽게 잡힐 것 같은가베?” 장난기 어린 눈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테니스장 쪽에서 나타난 아이는 체육 특기자로 전학을 왔다는 고형석이었다. “남이 잡으려는 잠자리는 왜 날려 보내는 거야?” “어디 그 잠자리가 내 소리를 듣고 날아간 거니? 네 행동이 둔하니까 놓친 거지. 자 봐라! 저쪽 풀숲에서 잡은 거다.” 그러고 보니 형석이는 왼쪽 손가락 사이사이에 고추잠자리의 날갯죽지를 끼워들고 자랑스럽게 손을 들어보는 것이었다. “얘, 그 잠자리 우리한테 넘겨라!” “글세올시다. 어딧에 쓰시려고?” “그냥 가지고 노는 거지. 예쁘잖아.” “그런 소리 마세요. 이렇게 날려보내는 거랍니다.” 형석이가 왼손을 쫙 펴자 잠자리들은 또 다시 잡힐세라 제각기 멀리멀리 줄행랑을 치며 날아가버렸다. “그렇게 날려 보낼 걸 뭐하러 잡았니?” “잡는 재미지. 살금살금 다가가서 고놈의 꼬리를 이 두손가락으로 꼭 틀어잡는 순간의 스릴이라니, 너희들은 죽었다 꺠어나도 못 느낄 걸? 놈들이 얼마나 빠른데ㅡ.” “흥, 잠자리채로 잡으면 왜 못잡니?” 정숙은 형석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고추잠자리 ③
“”넌 무슨 특기가 있니? 정구? 아니면 태권도?“ ”아니야, 이 덩치를 보면 모르겠냐? “아, 역도를 하나 보구나?“ ”틀렸어, 씨름이야.“ ”우리 학교에도 씨름부가 있었나?“ 정숙이 나래를 쳐다보며 묻자 나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모른다고 했다. ”우리 학교에는 없어도 이옆 D고교에 씨름부가 있거든. 그래서 미리 이쪽 가까운 학교로 전학을 온 거야.“ ”그렇다면 고등 학교는 시험보지 않고서도 들어가겠구나?“ ”물론이지. 그러니까 천리타향까지 전학을 오지 않았겠냐.“ ”그럼 서울 시내에서 온 게 아니었니?“ ”먼 데 시골에서 왔습니다. 강원도 두메 산골 감자 바윗골에서ㅡ.“ ”으하하? 촌닭!“ 정숙이는 사내처럼 깔깔대며 형석이의 허점이라도 찾아낸 양 호탕하게 웃었다. ”참, 너 그 책 다 읽었냐?“ 형석이 나래를 보며 물었다. ”무얼?“ ”지난번에 헌 책방에서 골라간 책 말이야.“ ”응, 아직 다 읽지 못했어.“ ”여학생들이 책 한 권 읽는데 며칠씩이나 걸리냐? 잘 것 다 자면서 어떻게 책을 읽어?“ ”우훗, 얘가 뭘 모르시는구먼. 넌 먹고 자고 운동이나하면서 세월을 보내니까 편하게 책을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숙제하랴, 예습. 복습하랴, 시험 공부하랴 정신이 없다구ㅡ.“ ”뭐가 그리 복잡하냐“ 공부한다는 말 한 마디면 될 걸 가지고. 어쨌든 학생은 모름지기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형석은 큰오빠가 여동생들을 타이르듯이 점잖게 이야기를 하면서 테니스장 쪽으로 다시 걸어가는 것이었다. “좀 무식하게는 보여도 제법 믿음직스럽게 구는데?” 정숙이 형석의 딱 벌어진 어깨를 가리키며 말할 때 5교시를 알리는 예비종이 울렸다. “저 아이 시골에서 온 것 같지는 않는데? 말도 표준말을 쓰고 태도도 당당한 걸 보면ㅡ.” “운동을 하니까 겁이 없어서 그러겠지 물.” 교실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화제는 형석이 이야기였다. “아, 너희들 점심 시간에 등나무 밑에서 청춘 사업하고오는 거니?”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화연이가 뚱딴지 같은 소리로 걸음을 멈추게 했다. “무슨 소리야?” 정숙이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창가에서 다 보았다고. 9반에 새로 전학해 온 남학생하고 내내 이야기하다가 들어오는 것 아니냐?” “그게 어째서?” “야, 너희들 ‘얌전한 개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그러니까 정 선생님이 우리 모두를 그렇게 볼 수 밖에ㅡ.”
고추잠자리 ④
“저 말하는 입 좀 봐!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 다 말이라 할 수 있는 줄 아니?” “얘들아, 그만 둬. 이러다가 큰 싸움이라도 벌어지겠다. 네가 참아.” 나래는 정숙의 팔을 끌고 자리로 들어갔다. “전화연이 말이다. 왜 그렇게 비뚤어지는 지 정말 모르겠어.” 학교길에서 나래는 진심으로 화연이를 걱정하며 말했다. “그 아이 처음부터 그런 성격이었잖니? 변덕스럽기가 칠면조는 저리 가라야. 여옥이 동생 개안 수술도 그렇지. 저의 아버지가 의학박사니까 선행을 할 만도 하지. 제가 그토록 생색을 내야만 되겠니? 치사하게시리.” “그런데 정숙아, 우리 물상 선생님이 지금 몇 살이나 됐을까?” “그건 왜?” “아니, 그저ㅡ.” “노처녀라 부르긴 그렇고 아직 서른은 넘지 않았을 거야.”“그렇다면 권 선생님하고도 잘 어울리는 나이니?” “얘가 또 별안간 왜 이래? 권 선생님은 너의 언니와 약혼할 사이가 아니니?” “헌데, 화연이의 말이 자꾸만 걸려서 그래.” “화연이가 뭐랬는데?” “정 선생님이 권 선생님을 아주 좋아했다는 거야. 그것도 저 혼자만 아는 비밀을 특별히 나에게만 알려주는 것이니 참고하라는 듯 단 둘이 있을 때 말을 했거든!” “얘, 그런 소리 신경쓸 거 하나도 없다. 아까 교실에서 못 봤니? 공연히 시비를 거는 거 봐라. 그 아이 어떤 때는 도량이 넓은 듯 보이다가도 금세 알 수 없어진단 말이야.” “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지만ㅡ. 아무래도 화연이 정서가 좀 불안한 거 같지 않니?” “그래, 맞아. 정서가 불안한 거야. 어쩌면 오히려 그 아이한테 남 모를 비밀이 있을 지도 몰라. 곁보기엔 부유한 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난 것처럼 보이지만.” “글세, 어쨌든 우리가 그아이를 이해해 주는 수밖에 없어.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지만 따스한 인정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ㅡ.” “그래, 오늘도 우리 둘이서만 등나무 밑으로 찾아간 게 잘못이었다구. 교실에 박혀서 단어 한 자라도 더 외웠어야 하는 건데ㅡ.” 항상 화연이와 맞서서 입씨름을 하던 정숙이가 오늘은 잘도 참아준데다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다. “얘, 저기 코스모스 가지위에 잠자리가 앉아 있다.” 학교 담 길에 즐비하게 피어났던 코스모스 꽃들이 벌써 하나 둘씩 꽃잎이 떨어져나가 이빨 빠진 개구쟁이들의 잇속처럼 엉성하게 보였다. “아서라, 잠자리가 너를 잡겠다!” 어느 새 뒤따라왔는 지 민수와 형석이 짓궂게도 큰 소리를 내어 나래가 잡으려던 잠라리도 멀리 날아가 버렸다.
고추잠자리 ⑤
“잠자리가 맴을 돈다, 머리 위에서. 어지럽다, 어지럽다. 세상이 돈다.” 민수는 마치 시라도 지어 외우는 것처럼 날아가는 잠자리를 바라보며 흥얼대었다. “네가 뭐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이라도 되니? 어지럽긴 뭐가 어지러워?” “야, 넌 여자애가 왜 그렇게 무뚝뚝하니? 그러지 말고 우리 오늘 볼링장에 함게 가면 어떨까?” “뭐? 볼링장?” “그래, 여기서 고형석이가 에버러지 200을 보여주겠단다. 자 어때?” “정말이니? 네가 그렇게 잘 해?” 정숙이는 금방 호기심이 생기는 양 현석이 옆으로 바짝 다가가며 묻는 것이었다. “난 그냥 집에 갈래.” “나도 마찬가지야. 저희들이 우리와 언제부터 친했다고 예고도 없이 볼링장을 가자하는 거야?” 정숙이도 태도를 바꾸며 충계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나래의 뒤를 쫓아왔다. “그래, 그럼 우리 중간 고사 끝나고 한 번 만나자. 볼링장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좋다구, 나도 볼링은 좋아하는 편이니까ㅡ.” 정숙이는 뒤를 돌아보며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너도 볼링을 잘 치는 편이니?” “응, 주말 같은 때 우리 오빠들을 따라가서 좀 쳐보았지 뭐. 어쩌다가 스트라이크가 한 번이라도 나오면 얼마나 통쾌한지 스트레스 해소에는 제일이야.” “난 구경만 했지, 쳐보질 않아서 그런 데는 안 갈 거야.” “누가 지금 가쟀니? 중간 고사 끝나고란 말이다. 그 애들도 네가 전교 일등을 한다는 것쯤이야 모르고 있을 리 없으니까ㅡ.” “또 그 소리ㅡ.” “맞다. 우리 되도록 공부이야긴 하지 말자고 했지? 학교 밖에서는ㅡ.” “이젠 완연히 가을이로구나.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지고 저기 하늘 좀 봐. 아무리 대기 오염 운운해도 계절은 못 속여.” “그래, 모처럼 파아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구나. 얘야, 우리 선생님이 계시는 시골 하늘은 더더욱 푸르겠지?” “물론이고 말고. 지난 여름에 보았던 밤하늘의 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 나래와 정숙이는 또 여름 방학 때 시골에 가서 지냈던 즐거ㄷ운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너희들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는 거야? 어디 임금님 뵙기보다 더 어려워서야. 나 여기서 한 시간 동안 너희들을 기다렸다면 믿어주겠남?” 돌계단 맨 아래층에 쪼그리고 앉아서 읽던 책을 덮으며 말하는 아이는 뜻밖에도 시골뜨기 여옥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