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에서 보내는 문학편지Ⅱ-유혹들 12
언어의 바늘
강은교
1)
시는 경계적 공간탐사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내면에의 탐사에서부터 외면에의 탐사, 이 둘이 합치는 지점에서 평행우주로 있던, ‘나’라는 우주와 ‘너’라는 우주가 껴안는 ‘초공간’으로 의 이동. 그러니까 시 쓰기는 경계적 공간탐사의 행위인 셈이며 시인은 늘 탐사선을 타고 시대, 또는 당대 현실을 떠도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탐사선 위에서 시인이 늘 만지작거리는 것은 이 경계를 떠도는 이미지의 천들일 것이며, 언어의 바늘일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바늘은 이미지의 천에 새겨지는 것이기도 하면서 사상을 박음질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대는 늘 사상의 박음질로 이미지의 천을 시로 만든다고나 할는지.
그러니까 시대, 또는 당대, 현실은 사상과 함께 언어의 소리 속에 놓여야 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 통로가 마련되는 공간이야말로 초공간이며 그 공간은 두 개의 우주 사이에 경계적 통로를 만들어 시가 그 통로 역할을 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통로를 지나며 시는 언어 사상 운율을 너와 나에게 입힐 것이다. 우리는 두 우주의 경계를 지나 ‘얼씨구나,’ 껴안을 것이다.
외면에의 탐사란 당대의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 역사와 시간 같은 것이리라. 내면에의 탐사란 일인칭 적인 자아의 탐사, 존재를 일인칭 적으로 보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일인칭의 내면적 탐사와 일인칭이며 동시에 이인칭인 신화적 탐사가 이어질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시대, 또는 당대와 사상을 견고한 탐사선인 원고지 위에서 그 이미지에 언어를 꿰매는 것이다.
“길거리 일”이라는 네루다의 통찰은 이런 외면적인 탐사가 내면적인 탐사와 어울릴 때 시가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는 또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라고 하면서 시는 그 어느 하나만으로, 즉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언어만으로도, 사상만으로도, 내면만으로도 외면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2)
지난여름에 나는 어떤 후배 시인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Q: <<소리집>> 발문은 함께 동인을 하셨던 김형영 선생님께서 쓰셨는데, 최근에도 한동안 제기된 문제가 눈에 띄어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만나면 당시 젊은 시인들의 대표적인 집합체였던 <<현대시>>와 <<신춘시>>를 매도하고, 그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시인들인가를 우리의 새로운 목소리로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시, 틀에 박힌 듯한 시를 침이 마르도록 과찬하는 시단의 풍조와, 이러다간 단 한 사람의 시 독자도 남아나지 않겠다는 우려 또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돌이켜보면 어리숙하기도 하고 생각이 앞선 소리였지만 그러나 그때 그 분위기는 우리를 감동 속에 몰아넣었고, 밤잠을 설치며 시를 쓰게 했고, 생활 자체를 시 쓰듯 살았고, 마침내는 빈 호주머니의 먼지까지 털어 동인지 <<칠십 년대>>를 펴냈고...” 이즈음에는 조금 지나가는 감도 없지 않습니다만, 이른바 “독자를 도외시한 시 쓰기” 논란에 대하여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A: 시의 모든 언어 행위도 다른 언어 행위처럼 ‘설득’의 맥락 속에 있는 것이라면 결국 이 문제는 시적 설득이 일인칭에서 시작되어 일인칭으로 끝나버리고 마는지, 이인칭에서 시작되거나 끝나버리고 마는지 하는 문제와도 통하는 것이겠지요?
오래전부터 쓰고 있는 한 시 산문에서 저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시적 설득’의 문제를 생각한다. 시적 단어는 지시적 단어와는 다른 곳에서 출발한다. 출발선부터 다른 셈이다. 지시적 단어가 출발하는 곳은 화자의 외부이다. 그리고 그것이 닿는 곳도 화자의 외부이다. 그에 비해서 시적 단어는 화자의 내부에서 출발한다. 시적 단어가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면, 그리하여 시적 단어를 던지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선 ‘관계’가 성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지시적 단어는 타자의 외부에 닿을 뿐이다. 뿐아니라 시적 단어가 수정될 수 없다면 그러면서 끊임없이 변용•확대되는 것이라면 지시적 단어는 끊임없이 수정, 재생될 수 있으나 변용•확대될 순 없다. (강은교, <<범어에서 보내는 문학편지 Ⅱ(문학계간지 싸이펀>> 참조)
3)
시대와 또는 당대가 사상 또는 사유와 함께 어떻게 시에 녹아있을 수-녹아들어올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새삼 나에게 누군가에게 던지는 것은 내가 독자와 시대, 또는 당대는 함께 있다고 믿는 데 있으리라. 그것이 위에서 말한 경계적 공간탐사, 혹은 초공간으로의 이동과 껴안기라는 말의 진의일 것이다.
아, 진정 네루다가 말하는 ‘길거리 일’과 내면은 서로 따로따로 있는 것이어야 할까. 따로국밥처럼 말이다. 산문이 아닌 시에서 그것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우리의 시가 시대를 껴안으면서 현재를 뛰어넘는 초공간에서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가 시의 해결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기서 독자와 시는 서로 만나 껴안을 것이고 시와 독자와 그가 거느리는 시대, 또는 당대는 이미지와 언어에 꿰어져 껴안는 시가 되리라는 것이다.
4)
어느 날의 일기에서:
아파트 뒷산길로 내려오면서 풀섶에 앉아 있는 호랑나비를 여러 번 찍는다. 어느 핸가 비 온 뒤 능소화에 앉은 호랑나비를 찍지 못한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가지러 간 새에 날아가 버렸었지. 그런데 이번의 호랑나비는 사진을 찍어도 달아나지 않는다. 이상하기 그지없다. 살며시 다가가 손으로 건드려 본다. 그것은 있는 힘을 다해 잎새 뒤로 뒤뚱뒤뚱 걸어간다. 몇 번 나는 그것을 건드려 사진을 찍어보다 너무 잔인한 것 같아 그만둔다. 아마 지금쯤 죽었으리라.
그것은 터널 같은 통로를 지나 다른 우주로 갔을까. 그래, 초공간으로 갔을까. 거기서 날개에 묻은 풀잎의 내음과 껴안고 있는 것일까. 성공한 시가 몇 개의 우주라도 껴안아 통합할 수 있는 것처럼.
5)
절망감에 빠져서 보르헤스를 펼쳐든다.
「내 삶은 실수의 백 사전이었지요. 실수의 박물관이었지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 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겐 실수가 주어지고 억몽이 주어지죠. 거의 밤마다 말예요. 우리의 과제는 그것들을 시로 녹여내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나는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시적이라고 느낄 것이며 주무르고 빚어서 형상을 만들어내어야 하는 일종의 점토라고 느낄 거얘요..... 끝이 없는 결과와 원인의 사슬에 의해서 그런 실수들이 주어졌어요. 내가 그것들을 시로 바꿀 수 있도록 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