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속 대표시
새 외 4편
-노을
허리 수술을 한 후
다리가 느려졌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풍선 인형처럼 팔 흔들며
서 있는 날이 많아졌다
조그만 바람에도
몸뚱이가 흔들리고
뒤뚱뒤뚱 내 삶의
질곡桎梏을 견디기도 했다
다리가 느려지니
생각이 느려졌다
작은 슬픔에도
노을이 물들곤 했다
생각나지 않는 숲에
생각나지 않는 나무 하나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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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밀밭식당
엄마는 자유시장 지하에 밀밭식당을 열고 만둣국을 팔았다 직업이 없었던 아버지는 엄마 옆에서 조그맣게 지냈다 우리 가족은 국물 위를 떠돌며 서러운 날에는 만두를 먹었다 태극기를 걸어둔 날에도 만두를 비장하게 먹었다 가끔 안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날이 생겨났고 그런 밤이면 나는 가만히 엎드려 눈물로 싱거워진 만둣국을 먹었다 나는 대학 시험을 보고 충혈된 눈으로 가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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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벌판 이야기
1
겨울 벌판에는 바람이 살았다
2
통근버스에서 잠이 든 채
겨울은 가고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김씨는 라면을 먹으며
가끔 벌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전라도에 사는 누이가
보고싶다고 했다
간격이 넓은 이빨 사이로
어눌하게 라면이 들락거렸다
부두노동자 김씨는
합죽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향에 바람이 사는 벌판이 있고
벌판 한 가운데 새 같은
누이가 있다고 했다
3
한동안 철야작업을 하며
우리는 공장을 떠나지 못하였다
추운 복도에 기대앉아
얼어붙은 빵을 씹으며
따뜻한 나라가 그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가 실종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사람에 의하면
김씨는 만취상태였고
울고 있었다고 했다
벌판에는 웅웅거리는 바람이 살았다
김씨가 벌판 어딘가
어둠 속 나뭇가지에 앉아
긴 울음을 토해내는 소리가
겨울 내내 들려왔다
4
벌판에는 바람이 살았다
바람 속에 흰옷의 여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시리고 아픈 겨울을 등지고
깊은 어둠으로 걸어 들어가는
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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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발병기發病期
나의 병명은
후골인대골화증이다
무척 마음에 드는 발병이다
몸속에 여덟 개의 쇠막대가 박히고
나는 처음으로 닥친 상황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영원히 슬픈 새는 없다
고통이 자유를 잠식하지 않는다
수술이 잘됐다고 빙그레 웃는
의사도 한 마리 새일 뿐이다
발병 이후로 울음을 알았고
생각의 가지가 내 몸을 뚫고
공중으로 뻗어가는 것을 알았다
신비롭게 새들은 다시 날아올랐다
후골인대골화증을 앓는
석양 아래 새들
그대가 숨 막히게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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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아버지. 1
그는 멀리서 날아온 바람일지도 모른다 은은하게 내 곁을 지켜준 달빛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는 요즘 말이 없다 그를 말하게 했던 그 무엇이 그가 말해야 했던 그 무엇이 육신의 지갑에 없는 것이다 그는 텅 빈 사람이다 부질없이 채워온 것들의 무게에서 드디어 벗어난 것이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 꽃병에 꽂힌 늦가을 꽃처럼 그는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