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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8-25> 베들레헴, 떡집 (생명의 말씀)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여인의 해산의 고통,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 오늘날 마리아가 누구인가?
1.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으로 이 땅에 오신 에수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성육신 사건은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해산하는 고통이 있음같이 고통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기 까지 산고의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통하여 메시야가 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이스라엘은 겪었습니다.
나라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상황에 오래동안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바벨론에 잡혀가 다시 귀환했지만 그들은 독립된 나라가 아닌 페르시야의 한 지방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한 때에는 하스몬왕가를 세워 독립국가로 있었지만 다시 로마에 지배를 당합니다.
모두 해산하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도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탄생할 때에 해산하는 고통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날 여인이요 신부된 우리도 우리를 통해서 예수가 드러나기까지, 탄생하기가지 반드시 해산하는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왜, 이런 어려움을 겪었을까요?
사탄이 메시야 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산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해산 후에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4]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이 모든 것이 해산하는 고통인 것입니다.
2. <죄로 인한 필연적인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최초로 해산하는 고통이 주어진 것은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이 죄 때문에 다가온 고통입니다.
마리아의 해산의 고통도, 인간이 받는 고통도,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야가 받는 고통도 결국 죄의 결과이며,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인간들은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결과로 죽음이 다가 왔고, 여자는 해산하는 수고와 고통을 겪어야 하고, 남자는 땅을 파고 피. 땀 흘리며 평생 수고하여야 살 수 있습니다.
▶ 우리들은 모두 해산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여자”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로 나온 말씀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를 뜻하며 그 일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신부인 여자들인 것입니다.
모두들 죄로 인하여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하와인 것입니다. 그 고통은 크고 큰 것 (라바 라바)입니다. 수고(에체브)는 원어적으로 아픔이요, 고통이요, 상처요, 슬픔인 것입니다.
[창세기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지금 모든 인생들이 겪는 고통과 수고, 아픔 그대로입니다.
▶ 여자인 교회,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들은 해산하는 고통과 수고를 해야하는 반면에 아담은 땅을 기경하며 평생에 수고하여야 하는데 (창 3:16-17) 아담은 예수님을 예표하므로, 오늘날 신부를 위하여 예수님도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겪으셨고, 그 이후에도 우리들의 마음의 땅을 기경하기 위하여 수고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요 5:17).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쉴 틈도 없이 일하셨습니다(막 6:31). 신부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승천 하신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 <여인들의 해산하는 고통 가운데서 메시야를 탄생시켜야 하는 신부들>
▶ 오늘 말씀의 핵심은 “해산하는 여인”과 “메시야”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고통 가운데서 육신의 귀한 자녀들이 출산되지만 무엇보다도 여자인 우리들이 출산해야 하는 분은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해산하는 여인이라면, 어떻게 우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메시야가 잉태되고 탄생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핵심 말씀입니다.
▶ 오늘날 개인적으로 메시야를 출산한다는 것은 실제 육적인 예수님을 낳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를 통해서 예수님이 탄생하는 걸까요?
영적으로 내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생명. 씨앗이 심겨져 잉태 되어지고, 영적인 기간인 열 달 동안 품고 있으면 때가 차면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 예수님의 인격이, 능력이, 성품이, 사랑이, 영광이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가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내 모습인 여자의 모습도 보입니다. 마치 아들과 함께 어머니도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출산도 열 달을 채워야 하듯이 내 안의 예수님도 예수님을 영접한 후 때가 차야지 출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토록 오랜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 때가 차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다시 말씀드리면, 나를 통한 예수님의 출산은 예수님의 모습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산입니다. 예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또 다른 출산인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 있지만 동시에 밖으로 드러나는 탄생을 하는 것입니다. 신비입니다.
이것이 내 안에서의 예수님 탄생입니다.
진정한 성탄은 내 안에서의 예수님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 출생일을 기념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실상은 12.25일은 예수님 실제 탄생일도 아닙니다.
▶ 마리아를 통한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마 1:18,눅 1:35)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녀의 안에 예수의 생명이, 씨앗이 심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달 동안 잘 품고 계시다가 때가 되어 해산의 고통을 겪으시면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출산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영적으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주로 고백하면 누구나 그 마음에 예수의 생명, 예수의 씨가 뿌려져 심겨집니다. 예수님은 씨입니다 (창 22:18, 딤후 2:8)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 부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썩어지지 않을 씨가 어떻게 뿌려지는가 하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말씀은 곧 예수님입니다(요 1:1). 그러므로 씨는 예수님인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리 안에 생명의 씨, 예수의 씨가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령의 역사로 뿌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요 6: 35,48) 그래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떡 집(바이트 레헴)이란 뜻입니다. 말씀의 집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말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메시야가 탄생하는 떡집이 되는것입니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것은 “아나겐나오” (아나+겐나오)로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의 출생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성령으로, 말씀으로 예수님의 씨가 뿌려져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배속에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잉태된 것처럼, 동일하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임하여 썩지 아니하는 예수님의 씨가 심겨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입니다 (행 16:7).
그러면 예수님이 탄생하는 것처럼 우리가 거듭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지만, 우리들은 우리들 안에서 예수가 잉태되고 때가되면 예수의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도 “거듭났다” (겐나오 아노덴)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난 것이 아닙니다.
육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난 것입니다 (요 3:6). 성령으로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난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탄생도 위로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땅의 차원이 아닙니다. 육신의 차원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난자와 요셉의 정자로 탄생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정자도 결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위로부터의 탄생입니다.
마리아의 배 속에서 예수님께서 10달 동안 잘 자라나신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믿음의 씨, 생명의 씨, 예수의 생명, 말씀이 떨어지면 믿음이 점점 자라서 때가 차면 마침내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되는데, 새로운 육신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 사람이 새 사람이 되어 육신의 사람의 모습에서 속에서 예수님의 인격이 능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또 다른 마리아인 것입니다.
▶ 마리아가 죄로 인하여 고통받아야 하는 죄인된 인간으로서 예수님을 탄생시켜야 하는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마침내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런 출산해야 하는 마리아인 것입니다.
→ 거듭 말씀드리지만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역사상 단 한번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재림시에도 부활하신 몸과 같이 신령한 몸을 입으시고 하늘로부터 백마타고 오시지 사람의 태를 빌려 오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해산하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채워지는 때가 차면 예수님의 형상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장성한 분량이 채워지는 만큼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잉태하고 태어나게 하실 예수님입니다.
▶ 그동안 성모 마리에에 대해서 제가 가진 영적인 위치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그 배속에서 10달 동안 품고 계신분으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죄인인 인간이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탄생시킨 가장 완벽한 본보기입니다.
이것 이상 넘어가 그를 신의 위치에 올려 놓는 가톨릭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편합니다.
그가 신이라면,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이라면 동박박사들도 아기 예수 뿐만 아니라 마리아에게도 경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 2:11) 또 헤롯도 비록 거짓이지만 마리아에게도 경배하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라고 하는 눅 1:46-55절 말씀 중에 48절을 보면 마리아가 신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의 비천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약하고 연약하고 낮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의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는 경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탄생시킨 가장 완벽한 우리들의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이것은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이 잉태되고 탄생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탄생하는 신비한 사건의 또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심겨진 것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므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또한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의 모습입니다. 내 모습은 있지만 나를 통해서 예수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산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 만 드러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신비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삼위일체도 이런 모습으로도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이루어집니까? 요 14:20절에서 “그날”입니다.
바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요 14:17)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계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잉태되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과 영적 원리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에수님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잉태되었다면, 영적인 입덧이 있습니다.
육적인 원리와 똑 같습니다.
여인이 잉태를 하면 반드시 입덧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몸 가짐도 행동도 조심합니다. 영적으로도 똑 같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잉태되면 영적인 입덧을 하게 되고 몸 가짐이 행동이 달라집니다.
잉태가 되면 이것 저것 먹지를 못합니다. 어떤 냄내는 맡으면 구역질이 납니다. 그리고 잉태를 하면 몸 가짐도 조심합니다. 잉태를 하고 누가 술 담배를 하며, 격한 운동을 하겠습니까? 조심 조심 걷습니다. 유산할까봐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고 예수의 생명이 잉태되면 반드시 그의 삶이 조정되어지고 단순해지고 먹을 것 입을 것을 가리게 됩니다. 실제 술. 담배와 같은 육적인 음식도 가리게 됩니다. 거룩하지 못한 것을 보면 구역질과 같은 입덧을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험한 것을 보지도 않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아무거나 듣지도 않습니다. 찬송을 듣고 좋은 말씀을 듣게 됩니다. 아무나 안 만나지도 않습니다. 세상 친구를 멀리합니다. 저도 세상 친구 거의 다 끊어졌습니다. 만나면 술 먹고 세상 이야기로 가득찬데 도저히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옛 날과 다른 모습입니다. 그헐게 좋아하든 것을 싫어 하고 평소와 다르게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영의 좋은 양식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를 듣습니다. TV 시청도 자제를 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골라 봅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자신을 더럽히는 영적인 오몀물들과도 거리를 둡니다. 즉, 무당집에 가지 않습니다. 절에도 안갑니다. 죽은 자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조상신도 안섬깁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제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영적인 입덧인 것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절제된 모습, 영적인 입덧의 모습이 없습니까?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심겨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의 생명이 심겨졌지만 무절제한 행동으로 유산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영적 입덧 상태로 오래 가다가 때가 차면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형상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직전에는 대체로 심한 고통을 경험합니다. 여인의 해산의 고통인 것입니다. 쉽게 출산하면 좋겠지만 오래 갑니다.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맺는 말>
역사적인 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2000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각 사람 마음에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자라고 때가 차매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을 해산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때가 차야 합니다 (갈 4:4). 고통의 양이 차야 합니다. 인간들처럼 예수님은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의 필연입니다.
해산의 고통과 같은 아픔을 감내하셔서 마침내 내 안에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느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