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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둥지는 어디 있을까? ②] 소현경
S#1. 현관 (밤)
질려서 듣고 있는 혜정의 얼굴, 그 위로
동희(off) : 그래서 어떡할 건데?
시모(off) : 어쩌긴, 살살 구슬러야지. 그러니까 너두 영은에미한테 잘해. 맘 약한 애니까 딴 생각 못하게.
혜정, 더 못 듣고 휙 돌아 나온다.
S#2. 동 마당 (밤)
도로 나오는 혜정, 기막혀서 집을 돌아본다. 야외 탁자에 털썩 앉는 혜정.
S#3. 아버지 집 안방 (밤)
아버지, 라디오에서 나오는 옛날 노래를 웅얼거리듯 따라 부르면서
혜정이 여고시절에 만들어서 어설프고 낡은 셔츠를 들여다보고 있다.
옆에 놓인 대바구니에 딸들이 만들었던 수예품들 들어있다.
아버지, 잘 안 보이는 듯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내려놓고 일어선다. 일어서서 나가려다가 휘청하는 아버지.
얼른 추스르는 아버지의 시선으로 보이는 방문이 흐릿하다. 새삼스런 충격으로 털썩 주저앉는 아버지.
S#4. 동 마당 (밤)
현관에서 나오던 동규, 혜정 보고 놀라서 다가온다.
동규 : ...언제 왔어?
혜정 : 좀 전에...
동규 : 안 그래도 걱정돼서 나가보려던 참이야. 장인 어른이 벌써 갔다 그러셔서.
혜정 : ...
동규 : 왔으면 들어오지 왜 이러구 있어?
혜정 : 은정이 낼 모레 떠나.
동규 : ...형님은 뭐래?
혜정 : ...
동규 : ...장인어른이... 인천으로 이살하시면 어떨까?
혜정 : 20년 동안 사신 집이야.
동규 :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두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
혜정 : (돌아보는) 상황? 누구 상황? 내 상황이야, 당신 상황이야?
동규 : 우리 어머니... 고집 센거 모르니?
혜정 : (남 보듯 보고)
동규 : ...왜?
혜정 : (담담히) 당신 그러지 마. 부모... 나한테두 있어. 나두 부모 있어.
S#5. 아버지 집, 마루 (저녁)
과일 접시 앞에 둘러앉은 혜정의 친정 식구들. 아버지, 혜정 부부, 오빠 부부, 은정. 은정, 당장에 울음 터트릴 얼굴이다.
아버지 : 준비는 다 끝났구?
은정 : 네...
아버지 : 그저 고서방 마음 편하게, 니가 조금 힘들더라두, 어려운 시길수록 옆에 있는 사람이 편한 얼굴을 해야한다.
은정 : 아부지...
아버지 : 애비 걱정은 말어. 니 엄마한테도 안 듣던 니 잔소리, 다만 얼마간이라도 안 들으면 애비 기운이 펄펄 나겠다.
은정 : (울음 섞인 웃음) 아부진? 내가 무슨 잔소릴했다구...
오빠 : 그래 은정아. 여기 걱정말구 가서 잘 지내다 와.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 아버지한텐 앞으론 오빠가 더 신경쓸테니까...
아버지 : (말 자르는) 성민애비하구 혜정이.
오빠, 혜정 : (동시에 아버지 보면)
아버지 : (호기부리는) 니들도 그럴 거 없다. 은정이 없다구 괜히 애비 성가시게 하지 마. 은정이야 근처 살았으니까
지 심심할 때 들락거리게 냅둔거야. 니들 불쑥불쑥 찾아오고 그러는 거, 아주 신경 쓰여. 특히 혜정이.
혜정 : ...
동규 : (무거운 마음으로 혜정 눈치 보고)
혜정 : (울음 덩어리 꿀꺽 삼키며 일어난다)
S#6. 아버지 방
혜정, 가족사진 옆에 걸린 어머니 사진 앞에 서 있다. 새언니 들어오며
새언니 : 뭐하세요?
혜정 : ...그냥요...
새언니 : 어머니 참 고우셨어요. 울 엄마하구 동갑이신데 전 처음에 한 대여섯살은 더 젊게 뵜어요.
혜정 : 돈 호강은 못하셨어도 마음 호강은 하셨으니까. (앉고)
새언니 : (따라 앉으며) 그러게요. 어머니한테 정말 잘하셨는데...
혜정 : 아버진요?
새언니 : 술상 봐오라세요.
혜정 : 아들 사위한테 술잔 받고 싶으시구나.
새언니 : ...아가씨. 미안해요.
혜정 : (무심히) 뭐가요?
새언니 : 작은아가씨한테 아버님 얘기 들었어요.
혜정 : (혹시나) 그랬어요?...
새언니 : 오빠래도 어디 취직만 되면 아버님 모시는 거 생각해 보겠는데... 지금 이 상태론 도저히 어쩔 수가 없네요.
혜정 : ...
은정 : (들어온다) 언니, 잠깐 좀 나올래?
S#7. 아버지 집, 마당 (밤)
혜정, 불켜진 마루에서 아버지, 동규, 오빠 둘러앉아 술마시는 모습 뒤로 하고 평상에 앉아있는 은정 옆에 앉는다.
혜정 : 왜.
은정 : (불쑥 통장 건넨다)
혜정 : (무심히 받으며) 뭐야?
은정 : 그냥 내 비상금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모은건데... 혹시 나 없는 동안 아버지 입원이래두 하시게되면...
혜정 : (통장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걸... 받으라구?
은정 : 언니두 가진거 없을거 아냐. 갖구 있다가 아버지 때문에 쓸일 있을 때 써.
혜정 : (비참하고) ...너 이렇게 맘 무겁게 떠나게 해서 어떡하니.
은정 : 형부나 사둔어른들한텐 좀 섭섭하지만 어쩌겠어? 안된다는데.
혜정 : (자기 처지가 기막히고)
은정 : 이거 사실 언니거나 마찬가지야.
혜정 : 어?
은정 : 나 결혼할 때, 고서방 막내라서 부모님 다 돌아가시구 변변한 전세비 해줄 사람두 없었잖아.
그때 아부지가 언니 유학비용으로 모아둔 통장 주셨잖아.
혜정 : 유학 안갔음 아버지 돈이지 그게 왜 내거야?
은정 : 그때 보니까 아부지 용돈에서 틈틈이 넣으셨는지 이만원, 삼만원... (웃는) 어쩔땐 오천원도 들어가 있더라.
혜정 : !
은정 : 그거 보고 배웠어. 푼돈도 넣을수 있는 정기예금이라는게 있다는 거.
혜정 : (가슴이 콱 막히고)
은정 : 언니 결혼하구두 나 결혼할때까지 4년을 더 모으셨더라. 혹시나 형부 유학가게 되면
언니두 계속 공부하고 싶어할지 모른다구. 형부네선 며느리까지 공부시킬 능력없다 그러셨잖아.
혜정 : (전혀 몰랐다. 눈물 차오르고)
은정 : 평생 언니한텐 비밀로 하라 그랬는데... 언니 부담 느낄거라구.
S#8. 아버지 집 앞 (밤)
은정 배웅하는 아버지, 오빠 내외, 혜정, 동규. 은정, 아버지 목을 꼭 끌어안고 있다.
아버지 : (떼어내며) 어여 가. 낼 떠나려면 오늘 푹 자야지.
은정 : 아부지.
아버지 : 그래.
은정 : 잠은 일찍 자, 한 열시나 열시 반쯤. 요새 너무 늦게 주무시잖아요.
아버지 : (허! 웃는)
은정 : 병원 빼먹지 말구 언니 따라 꼬박꼬박 다니구요. (떨리는) 혹시 입원하라 그러면 괜히 고집 피우지 말구, 응? 알았죠?
아버지 : 그래, 알았다. 그리하마.
혜정 : (짠하고)
은정 : (눈 깜박이는) 그리구요, 아무리 혼자 먹기 귀찮아두 세끼 꼭 챙겨드셔야 돼요? 운동도 빼먹지 말구요.
아버지 : (둘러보며) 얘, 왜 이러냐?
은정 : (목 매이는) 아부지...
아버지 : (감정 누르는) 이놈아, 나 너말구두 아들 딸 두루있는 애비 아니냐.
걱정 말어. 걱정말구 물 선데서 탈나지 않게 너나 조심해.
눈물 젖은 눈으로 아버지 보다가 이윽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는 은정. 아버지, 끄덕이고 얼른 대문으로 들어간다.
S#9. 아버지 집, 마당 (밤)
비칠거리며 들어오는 아버지, 마루로 들어가려다 마당 가운데 놓인 평상에 걸려 푹 고꾸라진다.
아버지, 얼른 몸을 추스리고 더듬거리는 걸음으로 마루에 걸터앉는다. 허벅지에 양손 힘주어 집고 나오는 눈물 참는 아버지.
S#10. 혜정집 2층 거실 (밤-새벽)
캄캄한 어둠 속에 앉아있는 혜정. 희붐한 새벽빛 속에 앉아있는 혜정, 밤을 꼬박 새웠다.
S#11. 동규 학교 교정
한 건물에서 놀란 얼굴로 나오는 동규. 혜정, 교정 둘러보고 있다.
동규 : (다가오며) 웬일이야?
S#12. 운동장 스탠드
캠퍼스가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스탠드. 동규, 놀라서 혜정 돌아다본다.
혜정 : 부모님이 허락만 하시면, 처가살이 하겠냐구.
동규 : 혜정아.
혜정 : 왜, 다 끝난 얘긴줄 알았는데 왜 또 꺼내나 싶어?
동규 : 그게 아니구...
혜정 : ...아까 보니까 요즘 애들도 족구는 하대.
동규 : (뜬금없어) ?
혜정 : 비 오면 비 온다구 술마시구, 중간, 기말고사 끝나면 그 기념으로 또 술 마시구... 당신한테 몇번 엎혀서도 집에 갔는데.
동규 : ...
혜정 : 그렇게 열심히 놀고 술마시고 공부하고... 내가 여기서 그랬나 싶다...
동규 : 혜정아.
혜정 : 나 그때, 당신한테 미쳐있었지, 거의.
동규 : ...
혜정 : 대단한 효녀라서 이러는 거 아냐. 그냥, 이러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러면 나, 평생 후회할 거 같아서 그래.
후회하기 싫어, 싫어서 그래.
동규 : (한숨 푹 내쉬고)
혜정 : 당신이 부모님 설득해 줄수 있어?
동규 : ...
혜정 : (자조적인) 못할 거 알아. 당신, 고혈압으로 쓰러진 아버님 때문에 유학도 포기한 사람인데, 장남이라구... 내가 할게.
동규 : 영은 엄마.
혜정 : 결혼해서 13년, 13년 동안 나, 당신 부모님이 원하는 얼굴로 살았어. 부모님이 원하는 게 당신이 원하는 거였구,
그래서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았어.
동규 : 안다.
혜정 : 솔직히 나만 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 당신한테 내가 어떻게 살아주길 바라느냐고,
한번도 물어본 적 없는데... 그냥 알아지더라.
동규 : ....
혜정 : 근데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고 싶어하는지 나한테 한번도 물은적 없지. 어떻게 해줄 자신이 없으니까...
동규 : (나직한 한숨)
혜정 : 알아, 당신은 빠져.
S#13. 병원 진찰실
의사, 난감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 : 수술이 된다고 들었는데요, 선생님.
의사 : 단순한 당뇨병성 망막증이면 레이저 치료로 진행을 막을 수는 있지만
선생님 경우는... 백내장까지 같이 진행되고 있거든요... 혈당 조절이 되야 수술을 할수 있습니다.
아버지 : (난감한)
의사 : ...게다가... 신장 기능도 계속 안 좋아지고 있어요. 혈압두 높으시고. 식사 조절은 제대로 하고 계신겁니까?
아버지 : (허! 웃으며) 성한 데가 없군요...
의사 : 당뇨병이 왜 어렵고 힘든진 아시죠? 마음 단단히 잡수셔야 합니다.
아버지 : 예...
의사 : 일단 입원부터 하시는 게 좋겠어요.
S#14. 아버지 집, 마당
지친 기색으로 들어오는 아버지, 평상에 가서 털썩 앉는다. 어떡하나... 한숨 휘 내쉬며 하늘 보는 아버지.
S#15. 안방 (저녁)
찻상 사이에 두고 시부모 앞에 앉아있는 혜정, 간절하게 시부모 설득하고 있다.
시모 : (언짢은) 다 끝난 얘길 왜 또 들고 나오냐?
혜정 : 어머니.
시부 : (헛기침만) 흠, 흠! (시모 눈치보고)
시모 : 지난번에 알아들을 만큼 얘길했는데 우리말이 말 같지 않았니, 너? 어른이 좋게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혜정 : 길어야 3년이예요. 어머님 아버님 아직 건강하시구 서방님네도 있으니까, 저희 3년만 친정에서 살게 해 주세요.
시모 : 3년, 3년하는데 그게 3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그걸 어떻게 단정해?
혜정 : 동생이, 길어도 3년이면 돌아와요. 돌아온대요. 길어야 그때까지만이예요.
저희 나가 있는 동안 적적하시면 서방님하구 사셔도 되잖아요.
시모 : 뭐? 얘, 둘째가 부자집 딸로 자라서, 어디 손에 물이나 묻혀 본 애냐? 걔가 이 살림을 어떻게 해! (아차! 하고)
혜정 : (기막혀 시모 쳐다보는)
시모 : (수습하려) 긴 말 필요 없다! 안돼!
혜정 : (간절히) 아버님.
시부 : (난처한 듯 시모 쳐다보는)
시모 : (버럭) 나, 내 아들 처가살이 못 시킨다! 어서 나가 봐!
혜정 : ...
시모 : 어서 나가보래두!
혜정 : ...이대룬 못 나갑니다.
시모 : 뭐어? (벽력같은) 너 이게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S#16. 거실 (저녁)
막 현관으로 들어서던 동희, 안에서 들리는 큰소리에 깜짝 놀라고 영은과 진수, 거실에 서서 울먹울먹하고 있다.
명희, 2층에서 내려와 아이들 데리고 올라간다.
S#17. 안방 (저녁)
시부모, 울그락푸르락 노기 띤 얼굴. 혜정, 안간힘 쓰듯 얘기 계속한다.
혜정 : 저두 자식이예요. 제 아버지...
시모 : 파출부 갖고 안된다면 가정부 붙여주마, 그럼 되겠냐?
혜정 : (기막힌) 그게 아닌거 잘 아시잖아요. 저, 자식이예요. 저희 부모님 자식이잖아요. 부모한테, 더구나 한분 남은 아버지한테
자식노릇 좀 해야겠다는데, 저 이제껏 이 집에서 13년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 아버지 곁에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제 아버지 곁에서 몇 년을 못 사나요?
시모 : 너 지금 위세하는 거냐?
혜정 : 안 되는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세요.
시모 : 당장 오늘 내일 하시는 것두 아니라면서!
혜정 : 예?
시모 : 내 다 알아봤다.
혜정 : 아버지 병세가 당장 위급해서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냥 제가 못 견딜거 같애서 그래요. 이대론 제가 못 견디겠어요.
시모 : 아니, 니네두 정말 답답하다. 너, 오래비 있잖아! 그 아들은 아들 노릇 안하구 뭐하고 있길래 출가외인 니가 이래?
혜정 : 아들만 부모님 자식인건 아니잖아요, 어머니...
시모 : (내친김에) 정 그렇게 니 고집대로 할려거든 하거라.
혜정 : 네?
시모 : 난 죽어도 내 아들 처가살이 못 시키니까 갈려거든 너 혼자 가!
혜정 : 어머니...
시모 : 우리 김씨 자손들 다 두고 너 혼자 가거라!
혜정 : (서서히 굳어지고)
S#18. 거실 (저녁)
창백한 안색으로 안방에서 나오는 혜정. 동희, 움찔 물러선다. 비칠비칠 주방으로 가는 혜정.
S#19. 주방 (저녁)
들어오는 혜정. 식탁 위에 놓인 물주전자에서 물 따르는 손이 덜덜 떨린다. 혜정, 물 마시다 말고 쿡- 웃는다. 웃다가 운다.
그런 혜정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명희와 동희. 동희, 슬며시 현관으로 나간다.
S#20. 안방 (저녁)
시아버지, 담배 피우고 있고 시모, 괘씸함이 가시지 않아 씨근덕거리고 있다.
시모 : 아유, 아유 가슴이야. (옷자락 부여잡고)
시부 : ...우리가 좀 심한거 아니오?
시모 : 심하긴 뭐가 심해요? 쟤 대드는 거 봐요. 지가 감히 어디서 대들어, 대들길.
시부 : 영은 에미 저러는 거... 허참, 쟤두 성질이 있긴 있었구만.
시모 : 그러게 앙큼하게 그동안 우리 속이구 산거 아녜요? 겉으론 순하디 순한 얼굴로다...
시부 : 저대로 수그러들거 같지가 않구만...
시모 : 뭐요?
시부 : 저든 당신이든 누가 하나 져야되는데... 당신이 못 이기는척 해요.
시모 : 난 안돼요.
시부 : (보는)
시모 : 이제 와선 더더욱 못 굽혀요, 내가! 며느리 초장에 잡으라는 말 무시하고, 지가 눈치껏 알아서 살길래 마냥 오냐, 오냐
해줬더니, 쟤 아까 하는거 봐요. 아주 우리 머리 꼭대기가 아니라 비행기 타고 날겠습디다.
S#21. 혜정집 뒤뜰 (밤)
혜정, 집 벽에 기대 앉아있다. 위를 올려다본다. 혜정의 공허한 눈동자에 눈물 가득 담겨있는데 동규, 돌아 나온다.
혜정, 무표정한 눈으로 남편을 쳐다본다.
동규 : (다가와) 괜찮아?
혜정 : ...안 괜찮아.
동규 : 그렇게 직선적으로 얘길하면 어떡하니? 울 어머니 성격 몰라?
혜정 : 본 거처럼 얘기하네.
동규 : ...
혜정 : 들어가.
동규 : 어쩔 셈이야?
혜정 : (동규 올려다보는) 남 얘기하듯 하네? 어쩔 셈이면, 어쩌게 해 줄래?
동규 :(벙해서 쳐다보는)
혜정 : 혼자 있고 싶어.
동규 : ...나 좀 편하게 해주면 안되니?
혜정, 그 소리에 움찔하다가 천천히, 무겁게 몸을 일으킨다. 쓸쓸하고 허무한 눈으로 남편을 본다.
혜정 : (웃는) 김동규. 넌 나한테 뭐 해줬니?
의외의 혜정 반응에 놀라는 동규.
S#22. 안방 (다음날)
혜정, 해쓱한 얼굴로 들어온다. 개지도 않고 널브러진 이부자리 개려던 혜정, 그냥 나간다.
S#23. 거실
파출부 청소중이다. 안방에서 나오는 혜정.
혜정 : 아줌마. 안방 이불 좀 개 주세요. (2층으로 올라간다)
아줌마 : (갸웃하는) 웬일이래? 안방 청솔 다 미루고.
S#24. 원단 가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다.
시모 : 글세 한 삼년 내보내는 게 다가 아니라구요.
시부 : ?
시모 : 남들이 알아봐요. 그걸 그냥 그대로 듣겠수? 나하구 영은에미가 불화가 있어서 나간거라구들 생각할거 아녜요?
시부 : 거야 그렇겠지만,
시모 : 다들 자식 농사 잘졌다구 부러워하는데 나요, 남들한테 그런 눈치 받곤 못 삽니다.
시부 : 그럼 어쩔 거요?
시모 : (결의에 찬) 이왕지사 지하고 우리하고 맞붙게된 거, 끝까지 밀고 나가야죠.
S#25. 아버지 집 앞
과일 바구니 든 시어머니, 다가와서 문패 확인한다.
S#26. 동 안방
인슐린 주사기 든 아버지, 팔에 주사 놓을 자리 찾는데
(E) 요란한 벨소리.
아버지, 엉겹결에 문 쪽 돌아보다가 주사기 푹 찌른다. 아버지, ‘아이쿠!’ 하며 얼른 주사기 뺀다.
아버지 팔에서 새빨간 피 솟아나온다. 아버지, 휴지 뽑아 닦으며 나간다.
S#27. 아버지 집, 마루
마루 탁자 옆에 과일 바구니 놓여있다. 어색하게 마주 앉아있는 아버지와 시모.
시모 : (옹색한 집안 휘 둘러보고는) 영은 에미가 아주 부지런합니다. 안사둔이 아주 잘 가르치셨어요.
아버지 : 별 말씀을... (불안한 얼굴)
시모 : 생각보단 안색이 왠만하셔서 다행이네요.
아버지 : 예?
시모 : 아유, 영은에미 걱정이 얼마나 큰지... 요즘 아주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아버지 : ...
시모 : 왜 안 그렇겠어요? 친정아버님 편찮으신데 일손 안 잡히는거 당연하죠.
아버지 : (당황하는) 죄송합니다.
시모 : 아이구, 아닙니다. 전 또 영은에미가 친정살이 얘기까지 하길래,
아버지 : (흠칫 놀라는)
시모 : 얼마나 위중하시면 그럴까, 안사돈 안 계신 집에 찾아뵙기가 그래서 미뤘었는데,
그 얘기 듣고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도리도 아니구요.
아버지 : (무슨 뜻인지 안다) ...
시모 : 저두 딸이 둘이나 있지만 부모노릇하기도 쉬운게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가르켜야 장차 시댁에서 귀염받구 살지...
여태까지 한걸루 보면 어디 영은에미만한 며느리가 보기가 쉬운가요? 제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합니다.
아버지 : 예...
시모 : 청렴하게 공무원 생활하신 분이라 역시 자식 교육도 제대로 시키셨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요,
잘 키워서 즈희집 큰며느리로 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 : (애써) 친정살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 걱정 마십시오.
S#28. 아버지 집, 마루
(시간 경과)
아버지, 지난 앨범 들여다보며 울고 있다. 자식들의 어린 시절 사진들. 그 사진 위로 눈물 몇방울 후두둑 떨어진다.
(E) 드르륵 유리문 열리는 소리.
아버지, 문소리에 얼른 일어나 더듬더듬 욕실 쪽으로 간다.
혜정,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보면 쓱 욕실로 들어가는 아버지 뒷모습.
혜정, 갸웃하며 탁자로 간다. 펼쳐진 앨범 들여다보던 혜정, 앨범 위에 떨어진 눈물 자국 본다. 유심히 보다가 욕실 돌아본다.
상 옆에 놓인 커다란 과일바구니. 혜정, 이상한데. 아버지, 욕실에서 나온다.
혜정 : 누구 왔었어요? 누구요?
아버지 : 난 좀 쉴란다. 어서 가거라. (방으로 들어가고)
혜정 : (뭔가 이상한 듯 일어나서 방으로 간다)
S#29. 안방
장에서 요 꺼내는 아버지. 혜정, 얼른 다가가
혜정 : 주세요, 제가 할께요.
아버지 : 됐어. (혜정 시선 피하며 요 깐다)
혜정 : (살피며) 은정이 보고 싶으셔서 우셨어요?
아버지 : (깔기만)
혜정 : (일부러 밝게) 아유, 차별 좀 그만하세요. 아버지 이러심 은정이 없는 삼년 동안 어디 대타노릇 제대로 하겠어요?
아버지 : (앉고)
혜정 : 낼모레 병원가는 거 아시죠? 같이 가서 눈 수술날짜부터 받아요, 아버지.
아버지 : (망설이다가) 영은 에미야.
혜정 : 네?
아버지 : ...
혜정 : (왜 저러시지?)
아버지 : ...자식 팔아 행복한 부모는 없다.
혜정 : 무슨...
아버지 : 너, 니 뜻대로 김서방하고 결혼했으면 그 집 자식이야.
이렇게 친정에 신경쓰고 그러다 니가 행동 잘못해서 부모 욕먹이면, 그게 더 불효다.
혜정 : (이상한) 왜 그러세요?
아버지 : 자꾸 날 짐으로 만들지 마라.
혜정 : 아버지...
아버지 : 니 본분을 잊지 마. 넌 출가외인이야.
혜정 : (뭔가 느낀 듯 아버지 뚫어지게 본다)
아버지 : (시선 피하고) 얼른 가.
혜정 : (설마) ...혹시... 저희 어머니 다녀가셨어요?
아버지 : 난 누구 도움도 필요 없다. 병원도 혼자 다닐수 있고, 내 몸, 내 자리 다 내 알아서 건사할 수 있어.
혜정 : (맞구나) 뭐라 그러세요? (기막힌) 아버지 찾아와서 뭐라 그러셨어요?
아버지 : (감정 떨리는) ...뭘 뭐라 그래? 문병차 오신 거든데. 너 착하구 참하다구... 그러시더라.
혜정 : (파랗게 질려서 말도 못하고 아버지 본다)
아버지 : (피하듯) 빨래가... (일어나 나가고)
S#30. 마당
빨래 걷는 아버지. 혜정, 운 듯한 얼굴로 다가온다.
혜정 : 제가 할께요.
아버지 : 됐다.
아버지, 평상에 앉아 빨래 개고 혜정, 따라 앉는다.
아버지 : 니 엄마가 생전에 이거 하나 부탁하드라. 며느리고 딸이고 간에 속옷 빨랜 시키지 말라구.
혜정 : ...
아버지 : 그 말 한마디 부탁하더구나. 니 엄마... 참 욕심 없는 사람이었다, 나한테...
혜정 : 잘해 주셨잖아요.
아버지 : 홀시어머니에 외아들인 나한테 시집 와서 고생하는게 미안해서...
그래, 그러면서 나 정도 남편도 없을 거다... 생각하고 살았지.
아버지, 갠 빨래 옆에 놓고 주위 둘러본다. 봄빛 완연한 뜰.
아버지 : 그런데... 애비 입장이 되니까 생각이 달라지더구나. 그저 평범한 공무원 월급으로 알뜰살뜰 살아준 니 엄마한테
항상 고마워하기는 했었는데... 빠듯한 용돈 쥐고도 좋다고 나가는 널 보면 맘이 짠하고
니 엄마한테 괜히 화두 나구 그러더라...
혜정 : (놀라고)
아버지 : 아들 보다 더 영특했던 너... 너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지면서, 넌 니 에미처럼 안 살기를 바라게 되고.. (쿨룩 기침하고)
혜정 : (몰랐던 일) ...
아버지 : 김서방, 좋은 사람인 건 알겠는데, 니가 공부고 유학이고 다 포기하고 김서방하고 결혼한다 그러는데...
내 딸이라 그렇겠지. 넌 좀 답답하게 살지 말았으면... 싶더라.
혜정 : (눈물 어린다)
아버지 : 니 엄마도 나같이 빡빡한 사람 안 만났으면 제대로 한번 살아봤을 사람인데.
혜정 : 아버지.
아버지 : (허무하게 웃는) 말단 공무원 주제에... 니 엄마 중학교 선생자리 났을 때, 내가 그랬다, 이혼도장 찍고 나가라고.
혜정 : (놀라고) ...
아버지 : (허허 웃으며) 마누란 그렇게 붙잡아 놓고는, 딸은, 자식은 그런 것인가...
혜정 : ...
아버지 : 니가 머리는 니 엄마 닮고 성질은 꼭 나 닮았어. 고집 세구, 자존심 강하고.
혜정 : (눈물 떨어지고)
아버지 : 내 성질 닮은 너, 못 꺾을거 알면서, 다 알면서 왜 그렇게 아깝던지. 결혼, 그것도 식구 많은 집 맏이로 들어가는
시집살이가 어떨지... 니 엄마가 나한테 와서 살았던 것처럼, 에미 니가 그렇게 살아야할게 너무 아까워서...
(떨린다) 그래서 그렇게 모질게 굴었다, 너한테.
혜정 : (울음 섞인) 그때 그렇게 얘기하시지 그랬어요. 그렇게 말해 주시죠.
아버지 : 다 지난 일이다. 다 지난 일이야...
혜정 : 아부지가 그런 마음으로 제 결혼 반대하는 줄 몰랐어요.
아버지 : 그땐 내 말 안 듣는 니가 미워서, 결혼해선 말 안하고 힘들어하는 너 보면 속상하면서도...
혹시 너 마음 풀어져 시집에 소홀할까봐 너한테 못되게 굴었다, 영은에미야.
혜정 : (눈물만 줄줄)
아버지 : ...미안하다.
혜정 : 아부지. (울고)
아버지 : 그래두 지금 니 자리... 잘 지켜라. 그게 애비 위하는 거야.
혜정 : (입술 깨물고 울음 참는)
아버지 : 너 그렇게 애쓰면서 살아온 니 13년... 애비 때문에 그럴 순 없다. 그래선 안돼... (일어서고)
혜정 : ...
아버지 : 내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애들 방학하면 한번 데리고 오거라.
아버지, 집안으로 들어간다. 혜정, 눈물 젖은 눈으로 아버지 뒷모습 바라본다.
S#31. 거리 (석양)
생각에 잠겨 걷는 혜정, 복잡한 표정이다.
S#32. 혜정집 주방 (저녁)
시부, 동규, 영은, 진수, 둘러앉아 있고 혜정, 밥 푸고 있다. 시어머니와 명희,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진수 앞에 밥그릇 놓아준 혜정, 조용히 나간다.
시모 : (앉다가) 에미 어디 가냐?
혜정 : 밥 생각이 없어서요. (나가고)
시모 : (발끈) 쟤가 지금?
동규 : (말리는) 어머니!
S#33. 뒤뜰 (저녁)
빨래줄 가득한 빨래들. 혜정, 빨래 걷고 있다. 시모, 노기에 차서 돌아 나온다.
시모 : 에미 나 좀 보자.
혜정 : (걷다가 돌아보는)
시모 : 너 보자 보자하니까 아주 끝이 없구나?
혜정 : ...
시모 : 없는 집이래두 공무원 집안이래서 별 말없이 들였더니, 어디서 본데없이 행동을 해!
혜정 : ...어머니, 정말 너무 하시네요.
시모 : (벙) 뭐?
혜정 : 저 지금 밥 못 먹어요. 밥 먹을 수가 없어요.
시모 : (무슨 뜻인가?)
혜정 : (담담히) 제 아버지까지 찾아가실 만큼, 그렇게 냉정한 분이셨어요?
시모 : (예상했다는 듯) 아니, 사돈 편찮다길래 병문안 좀 갔는데 뭐?
혜정 : 저희 어머니 6개월 입원해 계시는 동안에도 한번 안 와보신 분이세요.
시모 : 너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냐?
혜정 : 아뇨. 여쭤보는 거예요, 저희 아버지 왜 찾아가셨는지, 그거 여쭤보는 겁니다.
시모 : (발끈해서) 그래 나, 니 아버지 찾아가서 시에미로서 해야할 말 좀 하고 왔다!
혜정 : ...그러...셨어요.
저만치 모퉁이에 굳어서 서있는 동규. 혜정, 다시 차분히 빨래를 걷는다.
시모, 너무나 담담한 혜정의 태도에 도리어 어쩔줄 모르고 서 있는데 혜정, 빨래 걷어 들어간다.
시모, 홀린 듯이 혜정 따라 돌아서다가 동규 보고 움찔 한다. 혜정, 동규 힐끗 보고 스쳐지나간다.
시모, 은근히 아들 눈치 보는데
동규 : (다가온다) 어머니... 정말 장인어른 찾아가셨어요?
시모 : 아니 난, 병문안 겸...
동규 : (화도 나고 안타까운) 왜 그렇게 잔인하세요!
시모 : (충격) 뭐?
동규 : 어머니, 이건 집사람 앞에서 어머니 자존심 세우실 문제가 아니예요. ..절더러 어쩌라구 이렇게까지 하세요! (휙 돌아가고)
시모 : (처음 당하는 반격에 말도 안나오는) 쟤가, 쟤가...
S#34. 2층 거실 (밤)
혜정, 동규와 아이들 셔츠, 바지 등 옆에 쌓아놓고 다림질하고 있다. 동규, 소파에 앉아 심란하게 혜정 보고 있다.
명희, 2층 입구에서 그런 혜정과 동규 보다가 내려간다.
동규 : 우리 집... 여태 이렇게 살아왔어. 당신 알잖아? 특히 어머니, 당신 뜻하고 다른 건 용납 못하는 분이라는 거.
맘 좀 풀어, 내가 다시 말씀드릴께.
혜정 : (다림질만)
동규 : 영은 엄마, 혜정아.
혜정 : (보고)
동규 : 무슨 말 좀 해봐. 죽겠다, 나.
혜정 : 영은이, 친구들한테 당신 자랑이 대단해.
동규 : (뜬금없어) ?
혜정 : 영은이가 읽을 책 골라주고 영은이 잠든 사이에 당신도 그 책 읽고 아이하고 얘기 나누고... 내 아버지가 그랬어, 나한테.
동규 : ...
혜정 : (쏘는) 내가 당신하구 결혼했단 이유 하나로, 왜 내 아버지가 당신 어머니한테 그런 수몰 당해야해?
동규 : ...미안하다. 워낙 평생을 그렇게 사셔서... 시간을 좀 두고 어머니 설득해 볼게.
혜정 : (믿지 않는) ...
S#35. 안방 (밤)
시아버지, 담배 피우고 있고 시어머니, 머리끈 매고 누워있다. 명희, 슬며시 들어와 앉는다.
시모 : ...뭐하고 있디?
명희 : 다림질.
시부와 시모, 서로 얼굴 쳐다보고
명희 : 저 유학가기로 했어요.
시부 : 응?
시모 : 시집부터 갈까 생각중이라드니, 왜?
명희 : (담담히) 시집 안가고 유학만 갈래요.
시모 : 헤졌구나.
명희 : 이제 헤어져야죠.
시모 : ? (일어나 앉고)
명희 : 대신 결혼 늦어져도 저 재촉하지 마세요.
시부 : 뭔 소리냐, 이게?
명희 : 그 사람 장남이라구 엄마두 싫어했잖아.
시모 : 그래두 결혼해서 바로 같이 유학가자고 했다며.
명희 : 그렇다고 그 부모, 그 형제들이 다 없어지나?
벙! 한 시부모 얼굴.
명희 : 전 새언니처럼 살 자신 없어요. 그래서 관두기로 했어요. 꼭 앞으로 내 모습 보는거 같애서 죽어도 결혼 못하겠어요.
(일어나고)
시모 : 아니...
명희 : 엄마, 그거 한번만 생각해 봐요.
시모 : (보는)
명희 : 지금 새언니가 꼭 나라면, 엄마 딸이 새언니처럼 산다면, 그런 생각 한번만 해봐요. (나간다)
시모 : (놀라서 명희 뒷모습 보는)
S#36. 아버지 집 앞 (다른 날)
아버지, 지팡이 집고 집에서 나온다. 불분명한 시야가 두려운 듯 천천히 걸음을 뗀다.
S#37. 유료 노인 복지시설 앞
택시에서 내리는 아버지, 주춤주춤 다가가 문패를 바싹 들여다본다. ‘○ ○ 마을’
서글픈 얼굴로 들여다보던 아버지, 들어간다.
-시간 경과-
어깨가 축 늘어져서 나오는 아버지. 그 위로
직원(E) : 보증금 육천만원 하구요, 평생 생활비를 일시불로 내셔야합니다.
S#38. 초등학교 앞
하교하는 아이들 살피고 서 있는 혜정. 영은, 저만치서 오다가 혜정 발견한다.
영은 : 엄마-
달려오던 영은, 뚝 멈춰 선다. 뭔가 이상한 듯 혜정 얼굴 본다.
S#39. 양로원 건물 전경
초라한 건물 철대문 안으로 마당 보인다. 카메라 다가가면 따사로운 봄볕 속에 앉아있는 서너명의 노인들.
S#40. 양로원 사무실
옹색한 사무실. 아버지, 초라한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아있다.
직원 : (한숨 푹 쉬고) 어쩝니까? 원칙이 그런데요. 자식이 있으시면 여기 들어오실 수가 없어요.
아버지 : (고개 푹 숙이고)
직원 : 왜 웬만하면 같이 사시지 그러세요... (하다가 오죽하면 왔겠냐는 동정어린 시선으로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 : (기운 없이 일어난다)
S#41. 피자집
혜정과 영은, 열심히 피자먹고 있다. 서로 내기라도 하듯 열심히 먹다가 둘이서 눈 마주치자 풋-하고 웃는 두 사람.
영은 : 뭐야, 엄마, 진수한테 안 미안해? 무슨 엄마가 더 잘 먹냐?
혜정 : (콜라 마시고) 엄마가 피잘 얼마나 좋아하는데!
영은 : 맞어. 할머니 할아버지 싫어하신다구 이게 몇 달 만에 먹어보는 피잔지 모르겠다. 근데 진수한테 좀 미안한데?
혜정 : 오늘은 우리 여자들끼리만 살짝 먹고 가자.
영은 : 남은 거라두 싸다주자 엄마.
혜정 : (물끄러미 보고)
영은 : 왜?
혜정 : 너무 착해서.
영은 : 착한데 왜 그렇게 봐?
혜정 : 너무 착하지 마.
영은 : 엄만? (콜라 마시고)
혜정 : 여자 너무 착하면 힘들어... 너무 착하지 마, 영은아. (목 메이는)
영은 : 엄마... 나한테 할말 있지?
혜정 : (눈물 감추는) 응?
영은 : (약간 긴장하는) 얘기 해, 엄마. 뭐든지.
S#42.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은 혜정과 영은. 영은, 고개 푹 숙이고 있다.
혜정 : ...영은아.
영은 : 알았어, 엄마.
혜정 : 미안해.
영은 : 나... 엄마 이해해. (혜정 보고)
혜정 : (놀라서 영은 본다)
영은 : 엄마 너무 불쌍했어. 내 친구들 엄마는 맨날 낮에 수영장 다니고 엄마들끼리 영화구경도 다니고 그러는데,
엄만 내 학원비 타면서도 할머니 눈치보고, 맨날 똑같은 옷만 입구...
혜정 : 영은아.
영은 : 엄마 맨날 일등만 했다며, 대학교 때까지. (울먹이는) 근데 뭐하러 아빠랑 결혼했어?
일등이면 선생님두 되구 기자두 되구 뭐든 될 수 있었을 텐데.
혜정 : 언제 이렇게 컸니, 우리 영은이.
영은 : 내가 울 엄마 이렇게 불쌍한데 엄만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하겠어.
혜정 : (영은 꼭 끌어안는다)
영은 : 그래서 엄마 이해해... 진수 걱정은 하지마.
S#43. 택시 정류장
지팡이 집고 걸어오는 아버지, 기운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 대기하고 서있는 택시보고 다가가다가 멈춰 서서 지갑 꺼내 열어본다.
다시 얼만큼 떨어져있는 버스정류장으로 힘겹게 걸어간다.
S#44. 아버지 집, 마당
혜정, 마당 서성이고 있다. 시계 들여다보는데 삐걱 대문 열리고 들어오는 아버지.
아버지, 힘든 외출로 기진맥진한 얼굴이다.
혜정 : (반가운) 아부지! (달려간다)
아버지 : 어, 왔냐... (하다가 비틀하고)
혜정 : (얼른 부축하는) 아부지!
S#45. 아버지 집, 안방
아버지, 이부자리도 못깔고 기운 없이 눈감고 누워있다. 쟁반에 설탕물 대접 받혀서 서둘러 들어오는 혜정.
혜정 : (내려놓으며) 아부지.
아버지 : (힘없이 눈뜬다)
혜정 : 일어나세요. 설탕물 타왔어요. (일으키고)
아버지 : (끄응- 일어나 혜정이 주는 설탕물을 마신다)
혜정 : 이걸루 될까? 병원에 가는게 좋겠어요.
아버지 : (대접 내려놓으며) 오랜만에 좀 움직였더니 당이 내려가서 그래. 이거면 됐어, 쉬면 돼. (눕고)
혜정 : 그러게 대체 어딜 가셨었어요? 눈도 어두우시면서.
아버지 더 어두워지기 전에 볼일 좀 봤다. (눈감는)
혜정 : (무심히 아버지 손잡으며) 어디요? 저더러 데려다달라지, 왜 혼자 가셨어요? 어딘데?
아버지 : (잠깐 움찔하다 눈감은 채 허허! 웃는다)
혜정 : (어? 하는 표정)
아버지 : 너 예전에 애비랑 그 영화 볼 때 생각나냐? 그 배우가... 그래 나탈리 우드...
혜정 : ‘초원의 빛’ 이요? 저 대학 합격한 그 해 겨울에 아부지가 보여주셨죠...
아버지 : 그 날... 눈이 많이 내렸지. 그 눈길을... 종로에서부터 집까지 걸어왔다.
혜정 : (머쓱) 제가 우겼잖아요. 종로서적에서 아부지가 골라주신 책들 잔뜩 들었는데두...
아버지 : 너하구 손 꼭잡고 걸어왔지...
혜정 : (그제야 아버지 손잡고 있는 자기 손 본다. 아버지 손 쓰다듬고)
아버지 : 그날, 니가 그 영화에서 젊은애들 사랑이 감동적이었다고 해서 애비가 걱정을 했드니, 니가 그러더라,
‘아부지 구세대예요’... 구세대라서 그런다구. (눈뜬다)
혜정 : (웃으며) 그랬더니 아부지 그러셨죠, 혜정이 니 딸이 꼭 너만한 나이가 됐을 때
그 딸아이한테 무슨 말하는지 두고 보시겠다구.
아버지 : 자신 있다... 그랬지...
혜정 : 두고 보시겠다는 거예요?
아버지 : 내가 너만할 땐... 애비도 그 사랑에 감동했었다. (미소 띠고)
혜정 : (가만히 아버지의 머리칼을 쓸어올린다)
아버지 : (혜정을 물끄러미 보며) ...보고 싶었다. 우리 혜정이 딸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클지... 넌 또 어떤 엄마가 될지...
혜정 : (뭉클하다) ...
아버지 : 영은이가 대학생 되는걸 보고싶다...
혜정 : 아부진? 몇 년 안 남았어요, 영은이가 벌써 몇살인데.
아버지 : 그래, 영은이, 진수... 잘키우는게 이제 니 일이야. 그게 첫째다.
혜정 : (아버지 마음 느끼고) ...
아버지 : 니가 그 애들 엄마라는 걸... 잊지마. (눈감고)
혜정 : (아버지 머리를 자꾸 자꾸 쓸어주며) 죄송해요, 이렇게 살아서 죄송해요...
S#46. 혜정집 주방 (밤)
혜정, 식탁에 앉아 콩나물 다듬고 있다. 딴 생각에 잠겨 계속 콩나물 머리를 따내는 혜정.
시어머니, 들어오다가 멈칫 서서 떨어져 쌓인 노란 콩나물 머리와 혜정을 번갈아 본다. 심상치 않은 혜정의 기색.
시어머니, 불안한 얼굴로 도로 나간다.
S#47. 안방 (밤)
이부자리 펴진 안방. 시모, 들어온다. TV 보던 시부, 돌아보며
시부 : 물 가질러 나가더니 왜 그냥 와?
시모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주 지가 시에미 시집을 살려요.
시부 : (눈치채는) 당신은 그 고집, 그 성질 때문에 크게 한번 당할거요.
시모 : (자리에 털썩 앉는) 복장 터지는 소리 마세요. 어제부터 입두 뻥끗 안하는 쟤 때문에 속에서 천불나 죽겠어요.
(하면서도 불안한 얼굴이고)
S#48. 거실 (밤)
어두운 거실. 혜정, 주방 불 끄고 나와서 2층으로 간다.
S#49. 서재 (밤)
책상 위에 놓여진 이혼 서류. 그 위로
동규 : (기막힌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이런 강수까지 써야겠어?
혜정 : 왜 이걸 강수라고 생각해?
동규 : (일어서며) 강수 아님 이게 뭐야? 이걸로 나, 부모님 협박하는 거 아냐!
혜정 : ...
동규 : 꼭 이런 방법 동원해서까지 허락 받아야겠어? 내가 천천히 설득하겠다 그랬잖아!
혜정 : 며느린 시부모 허락이 있어야 자식 노릇도 할수 있는 거야?
동규 : 뭐?
혜정 : 당신 부모님 뜻대로 김씨 성 가진 사람들은 다 두고 나갈게.
동규 : (기막힌) 이게 말이 되니? 아버지 때문에 이혼하다니, 그게 말이 돼?
혜정 : 그렇게 말하지 마.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잖아.
동규 : 무슨 말이야?
혜정 : 나, 며느리만이 아냐. 나, 당신 아내고 아이들 엄마고, 우리 아버지 딸이고 그리고 그냥 나 자신이야. 며느리만이 아냐...
동규 : (다급한) 이제껏 살아온 세월은 어쩌구 이러니?
혜정 : 그러게. 이 집... 쭉 둘러보니까 어느 한 구석 내 손이 안간 데가 없드라.
집 안, 집 밖... 하다못해 베갯잇 하나에도 다 내 손이 가 있는데... 근데 이 집이 내 집이 아니야.
동규 : 여보!
혜정 : 내 집이 아니야.
S#50. 원단가게 (다른 날, 낮)
좁은 통로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골목.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서로 다른 곳 보고 심각하게 앉아있다.
동규(E) : 어머니, 아버지.
시부모, 쳐다보면 동규, 굳은 얼굴로 서있다.
S#51. 다방
손님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다방. 세사람, 식어가는 커피잔 놓고 앉아있다.
동규 : 저희 결혼하고 얼마 안 있다 아버지 고혈압으로 쓰러지셨어요.
시모 : (미리) 영은 에미가 꽤 오래 고생했지.
동규 : 물론 그 사람한테 고맙고 미안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거 말구요, 저 그때 유학 못 갔습니다. 갈 수가 없었어요.
저 가있는 동안 아버지 잘못 되시면 어쩌나, 불안하고 걱정돼서... 안 갔죠.
시부 : (끄덕이고)
동규 : 어머니.
시모 : (찔리는) 그래...
동규 : 그동안... 집사람한테 늘 미안했어요. 애들 엄마 마음이 어떨지 누구보다 제가 잘 알면서도...
어머니 마음 상하실까봐, 어머니가 먼저 허락하시기만 기다렸어요.
시모 : 그래서?
동규 : 이젠 더 못 기다리겠어요, 어머니.
S#52. 병원 진찰실
의사 앞에 앉아있는 혜정.
의사 : 인슐린을 지속적으로 맞고 계시던 분이 저혈당 증세를 일으켰다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셨거나
심한 운동을 하신 경우 그럴 수가 있습니다. 또... 신장합병증이 더 악화되고 있거나...
아무튼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으니까 절대 무리하시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혜정 : 차라리 입원을 하시면 어떨까요? 어차피 눈 수술을 받으셔야 한다면 그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의사 : (의아) 아버님이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입원하시라고 말씀드렸는데.
혜정 : 네?
S#53. 시외버스
우울한 얼굴로 앉아있는 아버지. 흐릿한 아버지의 시선으로 보이는 봄 풍경.
S#54. 혜정집 거실
시모, 거실에서 이불홑청 꿰매고 있다. 반쯤 꿰매진 이불.
시모 : (혼잣말) 으이그 그래, 지정신이 온통 지 아부지한테 쏠려있는데 시에미 이불호청 꼬멜 정신이 있겄냐... 지두 사람인데...
기운 없이 들어오는 혜정. 시모 보고 놀라서 멈칫 선다.
시모 : 좀 일찍 들어왔다. (어설프게 꿰매고)
혜정 : (보다가 가방 내려놓고 다가간다) 이리 주세요, 제가 할께요.
시모 : 됐다, (너 친정으로 나가 살면) 어차피 앞으론 내가 해야될텐데.
혜정 : (이혼하면, 으로 받아들이고 굳어진다. 말없이 바늘 뺏는) 돋보기도 안 쓰시고 꼬메다가 찔리면 어쩔려구요.
시모 : (못 알아들었나?) ...
혜정 : (마지막이라는 기분으로 꿰매고)
시모 : (말 꺼내기가 쉽지 않다) ...
S#55. 공원묘지, 어머니 산소
힘겹게 걸어 올라오는 아버지. 오다가 뭔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일어난다. 산소 앞에 와서 숨 몰아쉬며 서는 아버지.
S#56. 혜정집
혜정, 무표정하게 이불 꿰매고 있고 시모, 이만큼 떨어져 앉아서 손에 든 실튱 만지작거리며 보고 있다.
혜정, 바늘에 새실 끼우려고 실통 찾는데
시모 : (건네주며) 진작 씌우는 걸루 바꿀걸 그랬어, 얘.
혜정 : (무심히 실 푸는)
시모 : 너 없는 동안 불편할거 같아서 이러는 게 아냐.
혜정 : (멈칫하는)
시모 : 장사하느라구 집안 일, 다 남의 손에 맡겼지 언제 내가 해봤냐? (괜히 이불 탁탁 펴며) 진작 얘기 좀 하지 그랬냐?
일일이 뜯고 꼬매고 불편해서 못하겠다고.
혜정 : (놀라서 시모 보는)
시모 : 자고로 짖는 개를 돌아본다 그랬다. (일어서며) 니가 너무 며느리 얼굴만 하고 살았어.
혜정 : (여전히 바라보는)
시모 : (서서) 우선 간단한 옷가지만 싸갖구 들어가거라. 애비 책이랑은 천천히 가져가고. (미안한 듯 얼른 안방으로 들어가고)
혜정 : (믿기지 않아서 본다. 눈물 후두둑 떨어지고)
S#57. 산소
아버지, 산소 마주 보고 앉아서 술 마시고 있다. 지는 햇살에 드러나는 아버지의 창백해진 안색.
아버지, 산소 물끄러미 보다가 힘겹게 일어나 산소에 자란 잡풀 뜯는다.
아버지 : (혼잣말) 봄바람이 좋구만. 당신 이젠 안 춥겠어...
자네.... 먼저 갔으면 자네 따라 갈 때까지 몸이나 성하게 봐주지 좀 그랬나...
아버지 훅- 울음 삼킨다. 그리고 애써 미소 짓는 아버지.
S#58. 서재
문 열어놓고 급한 책 골라 박스에 담고있는 동규. 혜정, 들어와서 물끄러미 동규 본다.
동규 : 내일 아침 일찍 돈암동 방 좀 치워야겠어.
혜정 : (그저 보고)
동규 : (일손 멈추며) 이제 와서 이러는 거... 당신한테 민망하고 챙피하니까 그냥 넘어가 주라, 혜정아.
혜정 : (갑자기 변한 상황에 기운 빠진 듯 소파에 털썩 앉고)
동규 : ...아버님한테 전화부터 드려. 아버님 허락두 받아야지.
S#59. 산 길
지팡이로 더듬으며 내려오는 아버지, 창백한 안색에 식은땀이 맺혔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몇발자국 내딛던 아버지,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한다.
아버지의 시선으로 보이는 저무는 오후의 하늘, 산, 무덤들... 이 비틀거린다.
푹 꺽이는 아버지의 무릎. 아버지,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몇바퀴 구른다. 아버지, 일어나지 않는다. 몇번 실룩이는 안면.
아버지,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덤으로 가득한 넓은 공원묘지에 그대로 누워있는 아버지.
S#60. 산소
어머니 산소 옆자리에 파여진 묘자리. 아버지의 관을 하관하고 있다.
미친 듯 오열하는 은정. 새 언니, 그런 은정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고 있고 입 꾹 다문채 눈물 뚝뚝 흘리는 오빠.
혜정, 혼자 떨어져 앉아서 아버지의 관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울지 않는 혜정.
저만치 서있는 혜정의 시부모와 동규.
시어머니, 뚫어질 듯 하관 모습을 지켜보는 혜정을 쳐다본다. 마음이 짠한 듯 보다가 고개 돌리며 눈물 훔치는 시모.
S#61. 아버지 집 마루
오빠 내외, 은정, 혜정, 동규 둘러앉아 있다.
은정 : (꺽꺽대는) 입원 한번 못해보구...으으... 혼자서 울 아부지... 혼자서 헉...
새언니 : (은정 안고) 미안해요, 아가씨. 이렇게 될줄 정말 몰랐어요. 미안해... 미안해...
오빠 : (자책하는) 아버지, 그정도로 심각하신 줄도 모르고... 난 내 살길 찾아 다니느라... 아버진 생각도 안 했다, 혜정아.
혜정 ...
오빠 : 근데 나한테 아무 말도 말라셨다구... 우리 아버지가... (허탈한 웃음) 내가 뭐라구, 내가 뭐라구...
(천정 쳐다보며 눈물 말리는)
혜정 : (고개 숙인채)
동규 : (그런 혜정을 걱정스런 시선으로)
혜정, 스르르 일어선다. 계속되는 은정의 울음소리. 혜정, 찬찬히 마루 둘러보고 주방 쪽으로 간다.
S#62. 주방
주방 찬찬히 둘러보던 혜정, 주방 서랍 열어본다. 하얗게 삶은 행주들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혜정, 냉장고 열어보고 부엌 뒷문도 열어본다. 깨끗한 집안.
혜정, 뭔가를 찾는 듯 집안을 계속 둘러본다.
S#63. 동 마당 (석양)
혜정, 텃밭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갖가지 채소들이 한참 자라고 있다.
아버지(E) : 혜정아.
혜정, 얼른 뒤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혜정, 일어나서 대추나무 가까이 간다. 대문 앞 전구불 빛에 흐릿하게 비추는 대추나무.
아버지를 보듯 대추나무를 훑어 내리던 혜정의 시선이 문득 멈춘다.
혜정, 천천히 대추나무 뒤쪽으로 돌아간다. 무언가를 태운 듯 수북한 검은 재들.
순식간에 혜정의 눈에 눈물이 차 오른다. 스르르 쪼그리고 앉는 혜정, 시커먼 재를 한줌 집는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
혜정,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고야 울기 시작한다. 꺼이꺼이 피울음을 토해내는 혜정.
S#64. 동 안방 (밤)
혜정과 은정, 아버지 영정 앞에 앉아있다.
은정 : 언니. 아까 거기서 왜 그러구 있었어?
혜정 : ...
은정 : 대추나무 뒤에서 왜 그러구 있었냐구?
혜정 : ...
은정 : 그거, 이 집으로 이사온 해, 언니 생일선물로 심어준 건데, 아부지가.
혜정 : (또 눈물 어리고)
은정 : 삼일 내내 화난 사람처럼 울음 참구 앉았더니, 그거 보니까 못 참겠디?
혜정 : ...
은정 : ...미치겠다. 아부지 보고 싶어서.
혜정 : 나두...
새언니 : (들어오며) 아가씨. 이제 가야죠.
혜정 : (기운 없이 돌아본다)
오빠 : (들어오며) 벌써 12시 다 됐어. 김서방 기다린다.
혜정 : 기다려? 왜?
오빠 : 왜는, 임마. 너 데려갈려구 그러지.
은정 : 가, 언니.
혜정 : 넌.
새언니 : 작은아가씨 걱정은 말구 가요. 오늘 우리랑 여기서 자면 되니까.
혜정 : (그대로 있다)
은정 : 가, 언니.
혜정 : 여기서 자고 싶은데.
오빠 : 시어른들 걱정하실라. 어서 가.
혜정 : 다들 아부지하구 똑같은 말들만 하네.
은정 : (혜정 심정 아는 듯) ...가라, 언니. 애들 기다리잖아.
혜정 : ...애들...
은정 : 하루도 엄마 떨어져 본적 없는 애들인데... 어서 가.
아버지(E) : 영은이, 진수... 잘키우는게 이제 니 일이야. 그게 첫째다.
혜정 : (아버지 영정 본다)
아버지(E) : 니가 그 애들 엄마라는 걸... 잊지 말거라.
S#65. 아버지 동네, 노인정 앞 (밤)
느릿느릿 걸어오는 혜정, 동규, 몇걸음 뒤에서 혜정을 따라오고 있다.
혜정, 노인정 앞 나무 앞 지나가다 다시 돌아온다. 나무 올려다보는 혜정. 밝은 달빛 아래 커다란 까치집 보인다.
동규(off) : 미안하다.
혜정 :(돌아보지 않는다)
동규(off) : 당신 마음 몰라줘서 미안한게 아니구...
혜정 : (돌아본다)
동규 : 알면서 모른척 해서... 모른척 해서 미안하다...
S#66. 혜정집 앞 (밤)
저만치서 걸어오는 혜정과 동규 보인다. 느릿느릿, 조금이라도 천천히 도착하려는 듯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혜정, 멈춰 서서 아래 위층 모두 환하게 불 밝혀진 집을 바라보는데
영은(E) : 엄마!-
혜정, 자기에게 달려오는 영은과 진수를 본다. 달려와 혜정의 양손을 잡는 아이들.
혜정, 아이들을 내려다본다. 엄마를 기다리는 두 아이의 눈빛이 간절하다.
혜정, 문득 쳐다보면 대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시어머니.
혜정, 아이들 손에 끌려 대문으로 다가가면
시모 : (반가움 감춘) 고생 많았다...
혜정 : ...
시모 : ...미안하다, 에미야...
혜정 : (대답까진 못하고 고개 푹 숙이고)
시모, 혜정 등 도닥인다. 아이들, 다시 혜정 끈다. 아이들 손에 끌려서 집으로 들어가는 혜정.
첫댓글 생활극은 쓰는 것도 자신 없고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아... 마구마구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저도 폭풍 눈물 흘렸네요. ㅠㅠ
고맙습니다.